오늘의 말씀: 영생이란?
요한복음 6:60-71
60.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1.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한복음 6장 앞부분에는 갈릴리 호수 동쪽에서 보리떡 5개와 생선 2마리로 남자만 5천명(약 2만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읽고 들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5병2어처럼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세상의 떡과 밥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병2어의 기적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배까지 타고 따라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 호수 동쪽으로, 그리고 다시 서쪽으로, 그리고 가버나움으로 열심히 예수님이 가신 곳을 쉬지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서 배까지 타고 온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칭찬해주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리고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앞으로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배불리 먹고 편히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속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시는 예수님은 그렇게 썩어 없어질 양식 즉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영생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생활을 할 때에 먹은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신 ‘참된 양식’이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자 사람들은 “그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그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너희에게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신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를 언급하시면서 “너희들이 생선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5천명 이상이 먹었던 것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은 모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밥을 왜 먹습니까? 우리는 살기 위해 먹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셨고, 또한 벳세다 들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을 먹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생명을 주는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로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살리기 위한 양식으로 주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라며 웅성거렸습니다. 우리는 이미 교회생활에 익숙해서 성찬식을 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먹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 내용을 읽을 수 있지만, 그 당시에 있던 사람들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훌륭한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만약 그 분이 자기의 살을 먹어야 영원히 산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그 사람을 제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당연히 이 사람들처럼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 말도 안돼”. 뭐~ 대충 이런 대화가 오고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의 모든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이것 역시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듯이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람 고기를 먹는 야만인”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로마시대에 초대교회 교인들에 대해 “그들이 모이면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는다더라”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매우 혐오하게 되었고 따라서 박해가 더욱 심했던 것입니다.
독일 속담에 “먹는 것이 그 사람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리가 먹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체질과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6:17에 기록된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레 11장, 신 14장)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며 사람들은 쥐를 먹는 것에 대해 매우 끔찍한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쥐와 돼지고기가 다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을 먹는 사람을 우리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먹는 것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법률가이며 저술가인 브리야 샤바랭은 그의 저서 <미식예찬>(1825)에서 “당신이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말하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Tell me what you eat and I’ll tell you what you are!)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찬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피 대신 포도주를, 그리고 예수님의 살 대신에 빵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고기를 먹으라는 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늘의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아침식사를 하면 점심때까지는 아침을 먹은 것 때문에 힘있게 살 수 있고, 점심식사를 하면 저녁때까지 든든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적인 힘이 빠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먹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생각날 때 며칠(몇달)에 한 번씩 가끔 읽는 것이 아니라 매일 식사를 거르지 않듯이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5병2어의 기적은 유월절 가까운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할 때에도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신 뒤에,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말씀하시면서 ‘참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구원할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4장에 기록된 내용과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마지막 만찬의 장면을 한 번 볼까요?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대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벳세다 들녘에서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음식에 축복하신 뒤에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장면과 만찬에서 떡을 축복하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장면이 정말 거의 흡사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네~ 바로 그겁니다. 5병2어의 기적의 들판에서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나 만찬 자리에서 떡을 떼어서 주신 것은 예수님의 몸이 그렇게 찢어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을 우리를 위해 그렇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먹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목적이나 뜻이 없이 사람들을 먹이고 안식일에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다 거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씀은 요한복음 3장16절에서 “저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처럼 제한적인 것을 말합니다. 즉 아무나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택하지 않은 백성은 그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라며 수군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렵다"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불쾌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말을 하자마자 예수님은 정곡을 찌릅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Does this offend you?)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즉 걸려서 또는 기분나빠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렵다”라는 뜻으로 말을 했다면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느냐? 이해가 되지 않느냐?”라고 하시면서 항상 그래왔듯이 다시 가르쳐주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다 이해하고 알아들었지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을 아시고 “걸림이 되느냐”라고 정곡을 찌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못 알아듣는 이유는 그것을 이해할만한 지식이나 지적 능력이 없기 때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러한 부정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아” 또는 “아~ 정말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만 말해. 아직 때가 아닌가봐”라고 못 알아들은 척 하는 겁니다. 또는 “알고싶지 않아! I don’t car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알면서도 자기 스스로 모른다라고 체면을 걸어버립니다. 그러면 정말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그 말이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불쾌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듣고 마음이 걸리는 상태 즉 기분이 나빠서 듣고싶지 않은 상태를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상태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을 듣기 싫은 것이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믿고 싶고 비록 거짓말이라도 믿고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분이 어떻거나 상관없이 내 기분이 나쁘면 듣고 싶지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예수님께 주시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66절을 보면,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제자들은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들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12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70명을 두명씩 짝을 지어서 보내는 장면이 나오듯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해주지 않으면 그렇게 열심히 제자로서 따르다가도 뒤돌아서서 떠나 버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생을 얻지 못하면 얼마나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을 공급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따라다녔기 때문에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퍅해서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열심을 보이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12을 보면,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렇다면 도대체'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신학에서는 '다가올 성도의 신적 생명'이라고 정의합니다. 태초에 인간은 신적 생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신적 생명인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우리의 자아에게 순종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된 상태가 바로 영생과 멀어진 죄의 상태 즉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었다"라는 말이 '영생을 잃어버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죄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는 그분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 분의 몸에 전가시켜서 죽으시고, 그분에게 있는 영생을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시기 위해 이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잃어버렸던 영생을 다시 찾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은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여전히 죄악을 행하면서 불순종을 하며 교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 즉 순종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생을 소유했다고 하면서도 현실 속에서 순종보다는 불순종의 삶을 더 많이 살고 있습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나 자신은 피조물임을 겸손히 깨달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목적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소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원칙인데도, 우리는 우리의 뜻에 하나님께서 맞춰주시도록 때로는 하나님을 우리의 종으로 부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내가 원하는 것만 다 말한 뒤에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 다 들으셨죠? 그러니까, 제가 원하는 때는 언제까지이고, 제가 원하는 방식은 이런 방식이니까 제가 원하는 때에 제가 원하는대로 이렇게 해주세요.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며 자기 멋대로 때와 방법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가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종으로 부려먹기 위해 우리는 내가 정해놓은 시간에 내가 정한 방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얼마동안 기도할 것인지도 정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대로 결정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하나님께 여쭙지도 않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정말로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높여 드리고, 여러분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십니까? 요한복음 17장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또 본문 앞에 있는 요한복음 6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시대였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장10절에서도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듯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완전히 지키실 수 있는 신이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친히 율법을 지키시고 완성하심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할 때에 우리는 비록 율법을 범하며 살지만,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때문에 우리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을 취하라”라는 말은 율법적으로 완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계시하러 내려오신 예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주신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데 지키지 않고 지식으로만 아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분에 대해 속속들이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 즉 부부만이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있는 그러한 상태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지식과 체험이 함께 어우러진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지식으로만 알고 그 지식을 지키며 살지 않는 체험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또한 그 안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바로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주위 환경과 상황이 변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영생이 아니며,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은 불순종의 삶을 살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애통하며 회개할 때에 회개를 기뻐하시는 예수님과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 현재의 삶 속에서는 실망스럽고 고통스럽고 문제를 안고 살지라도 그래서 이땅에서 행복과 안식을 얻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갈지라도 천국에서 완전히안식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땅은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겪으며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며 매일 매일 하나님만 의지하고 고난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생'을 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러한 삶을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생활만 하셨습니다. 영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없이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왜 내 인생은 이럴까?"라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또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는데, 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라는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즉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이 필요하구나"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한 고난의 삶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고백을 하게 하기 위하여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께로 나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다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 겸손하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는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에 그 속에서 예수님의 필요를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요.
요한복음 5장39에서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오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성경은 예수님을 알려주고 또한 그분의 필요를 알려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고 성경을 멀리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멀리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너희가 내게 오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 위해 즉 영생을 소유하기 위하여 성경을 가까이 하며 열심히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직접 예수님을 체험하고 듣고 보고 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얻기 원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주려는 것이 다른 것을 알자,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즉 아무리 성경을 가까이 하며 열심히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모두 영생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기질상 또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충성할 수 있는 것이지, 택한 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어보십니다. 이 말은 “너희는 가지 않을거지, 그렇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운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소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16에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란 말을 듣자마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조금 전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입니까? 언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신다고 하고, 조금 뒤에는 베드로에게 사단이라고 하시니까 말입니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베드로의 의지가 아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고백한 것이라는 것이며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역을 막으려고 한 것도 베드로가 아닌 사단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가 열심히 믿음생활을 할 때에는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므로 가능한 것이지만, 때로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자아가 주인이 되려고 할 때에는 마귀의 조종을 받아 마귀의 종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을 주시겠다고 하시니까 다 떠났는데, 가룟유다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끝까지 예수님 옆에 붙어있었습니다. 분명히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제자로 가르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즉 최후의 만찬까지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떠나지 않고 옆에서 항상 충성되게 있다고 해서 그가 택한 자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70절을 보면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택하셨는데, 마귀인 줄 알고 택하셨습니다. 11명은 사도로, 1명은 마귀인 줄알고 택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선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가복음 24장44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하신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사람도 사도로 택하신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9).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는데, 여기에는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마 10:1-4). 따라서 택한 백성이 아니더라도 병을 고치며 귀신을 내쫓기도 하며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거짓 선생이 범람하는 이 때에 치유의 은사가 있다며 병을 고치고 큰 교회를 담임하는 종교적인 외모를 보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마 7:21-23). 교회에 보면 알곡인 택하신 자녀가 있고, 부르심(초청)을 받긴 했으나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떠나는) 겨와 같은 이들도 있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용만 당하다가 버려지는 가룟유다와 같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있지 않으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여 껍질뿐인 겨나 가룟유다와 같은 가라지를 일꾼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알곡인 택한 자를 고난 속에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믿을만하지 못합니다. 오직 믿을만한 분은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자들도 마귀였던 유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약 2:1).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은 영적인 장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 40-41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만 보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그들 앞에서 말씀하셔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감지 않는 한, 영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의 눈이 떠졌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인 영생의 삶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이 떠지지 않은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들이 백날 이야기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입만 아플 뿐, 오히려 관계만 나빠집니다. 들을 귀가 없는데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4-16)
그러나 영의 눈이 떠지면 예수님의 좌우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꼭 이루어달라고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삽니다. 자기가 추구하던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것 심지어 비전까지도 내려놓게 됩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예수님 옆에서 자신의 꿈을 내려놓지 못한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은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신도 자살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없는 비전은 영생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만 함께 하신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비전이며 우리의 모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의 영생이기 때문에 우리의 꿈과 소원을 배설물 버리듯이 모두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며 비겁한 베드로를 멋진 사도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가는 곳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데 우리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주님 품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5장29절을 보면, "선한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일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기 떄문입니다(막 10:18, 눅 18:19). 그리고 요한복음 6장28절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선한 일이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는 아무리 착한 일을 하며 살지라도 그의 행하는 모든 일은 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 즉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염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영원히 사느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젊은 청년이 일도 없고 몸도 건강치 않아서 별로 오래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산신령이 나타나서 “네가 원하는 소원 3가지만 들어줄테니 말해보아라”라고 하자 그는 “건강과 일자리와 영원히 청년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는 젊고 건강해서 평생을 배를 타며 파도와 싸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정말 그런 삶을 원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젊음과 건강을 갖고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평생을 배만 타고 떠돌아 다니면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누구와 어디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부활로 영원히 지옥에 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
첫댓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릴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