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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襄陽郄將軍書
崔致遠
中和二年七月四日에 具銜高某는 謹復書于將軍閤下라
중화(中和) 2년(882) 7월 4일에 모관(某官) 고모(高某)는 장군(將軍) 합하(閤下)께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
某는 側窺前史하고 嘗慕古賢이라 贈人以至言은 則老聃垂誡요 成我者良友는 則管仲知恩이라 但恨季俗寖訛하여 芳規僅喪한데 豈期今日에 得睹餘風가
나는 과거의 역사를 곁에서 살펴보고 옛날의 현인(賢人)을 사모해 왔습니다. 남에게 좋은 말을 선물하라고 한 것은 노담(老聃)이 드리운 훈계요, 나의 성공은 좋은 벗 덕분이라고 한 것은 관중(管仲)이 그 은혜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말세(末世)의 풍속이 점점 잘못되어 아름다운 법도가 거의 없어지고 있는데, 오늘날 그 여풍(餘風)을 접하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 노담(老聃):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담은 노자의 자(字)이다. 노자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耳)인데,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로 전해진다.
* 成我者良友 則管仲知恩: 춘추 시대 포숙아(鮑叔牙)가 관중(管仲)의 처지를 이해하여 적극 도와주었고, 관중을 제 환공(齊桓公)에게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게까지 하였으므로, 관중이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아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2 管仲列傳》
將軍은 唯恐掩瑜하여 欲令磨玷하여 特勞彩翰하여 遠辱長牋이라 初尋歸美之奬詞에 汗驚浹背하고 後覽扶危之箴諭에 淚逬沾頤라
장군은 오직 미옥(美玉)의 빛이 가리어질까 염려하여 옥의 티를 갈게 해 주려고 특별히 글을 지어서 멀리 나에게 보내셨습니다. 처음에 아름답게 칭찬하는 말씀을 보고서는 부끄러움에 땀이 등을 적셨고, 뒤에 위태로움을 경계하는 잠언(箴言)을 봄에 감격의 눈물이 턱을 적셨습니다.
旣乃粲然可觀에 焉敢率爾而對아 輒憑毫素하고 仰疏血誠하며 終冀恩私니 略垂採覽이면 幸甚幸甚이라
찬연히 빛나 볼 만한 점이 있는 장군의 글에 어찌 감히 경솔하게 답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붓과 종이에 의지해 우러러 혈성(血誠)을 토로하며 사은(私恩)을 기대하는 바이니, 대략 채납(採納)해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某自去年春으로 知寇侵秦甸하여 帝幸蜀川하고 欲會兵於大梁하며 遂傳檄於外鎭이라 練成軍伍하고 選定行期한데 便被武寧忽興戎役하여 先侵泗境이러니 後犯淮壖이라
나는 지난해 봄에 도적이 진전(秦甸)을 침범하여 황제께서 촉천(蜀川)으로 거둥하셨음을 알고는, 대량(大梁)에 군사를 모으려 하여 마침내 외진(外鎭)에 격문을 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오(軍伍)를 정비하고 출발할 기일을 정하였는데, 갑자기 무령(武寧)에서 군대를 일으켜 사주(泗州) 경내를 먼저 침입하더니 그 뒤에 회주(淮州) 지경까지 침범하였습니다.
* 진전(秦甸): 중국(中國) 진나라(秦--) 왕도(王都) 부근(附近)의 넓은 땅.
聲言則狼顧舊封이나 實意則鯨呑弊鎭이라 長驅猛陣하여 直犯近疆이라 是以로 分遣偏裨하여 果殲兇醜라
말로는 옛 봉강(封疆)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래처럼 나의 번진(藩鎭)을 집어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나운 군사를 휘몰아 곧장 이웃 강역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내가 편비(偏裨)를 나누어 보내 흉악한 무리들을 섬멸한 것입니다.
及當中夏하여 乃出大軍에 旣知其北路阻艱하고 遂決於西征利涉한데 尋奉詔旨云 卿은 手下甲兵數少하고 眼前防慮處多하니 但保淮南之封疆하고 協和浙右之師旅하라 爲朕全吳越之地하여 遣朕無東南之憂니 言其垂功이면 固亦不朽라하니이다
그러다가 중하(中夏)에 대군을 출동시킬 즈음에, 이미 북쪽 길이 막혔음을 알고는 마침내 서쪽 길로 가는 것이 이롭겠다고 판단하였는데, 그 때 마침 조서(詔書)를 받들어 보니 “경(卿)은 수하(手下)의 군대 병력이 적고 눈앞에 방위할 곳이 많으니, 다만 회남(淮南)의 봉강을 보전하고 절우(浙右)의 군대와 협력하도록 하라. 짐(朕)을 위해 오월(吳越)의 지역을 보전하여 짐이 동남(東南)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할지니, 그 공을 이루면 이 또한 불후(不朽)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某는 以兵機固難自滯로 君命有所不從하여 已事征行하고 必期進發하며 占風選日하여 只欲奮飛한데
그러나 내 생각에 병기(兵機)를 참으로 지체할 수 없다고 한다면 군명(君命)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겨지기에, 일단 출정(出征)을 결정하고 기필코 발진(發進)하려고 하면서, 바람을 점치고 날을 가려 길을 떠나려 하였습니다.
又奉七月十一日詔旨云 諸道師徒ㅣ 四面攻討하니 計度收剋이 朝夕可期라 卿은 宜式遏寇戎하며 饋輦粟帛하라 何必離任則 是勤王가 或恐餘孼遁逃하니 最要先事布置라하니이다 以此再承綸旨하여 遂駐舟師하고 唯廣利權하며 宜供戎費라
그런데 또 7월 11일에 조서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을 보니 “제도(諸道)의 군대가 사면으로 공격하고 있으니 조만간 수복(收復)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경은 도적이 발호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군수(軍需) 물자를 실어 나르도록 하라. 어찌 꼭 임소(任所)를 떠나야만 근왕(勤王)을 하는 것이겠는가? 혹시라도 다른 반역의 무리가 도망칠까 염려되니, 무엇보다도 사전에 군사를 배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두 번이나 황상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주사(舟師)를 그냥 주둔시키고는, 오직 어염(魚鹽)의 이익을 널리 확보하며 전비(戰費)를 조달하게 되었습니다.
殊不知는 進退唯命하며 始終無虧한데 却被近鎭讒誣하여 聖朝猜慮하니 食駃騠之良肉을 何敢望焉가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오직 명에 따라 진퇴(進退)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나게 한 것이 없는데도, 가까운 번진(藩鎭)의 참소와 무고를 받아 성조(聖朝)의 염려를 끼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결제(駃騠)의 맛 좋은 고기를 먹는 것을 어떻게 감히 바라겠습니까?
* 食駃騠之良肉 何敢望焉: 임금의 신임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연(燕)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왕에게 소진을 무함하였으나, 왕은 오히려 소진을 더욱 신임하면서 진미(珍味)로 일컬어지는 “결제 요리를 대접했다.〔食以駃騠〕”라는 고사가 전한다. 결제(駃騠)는 준마(駿馬)의 이름이다. 《史記 卷83 鄒陽列傳》
絆騏驥之駿蹄하니 無能爲也라 遂使忠誠未展하고 睿奬難期라 非敢自辜海內之人心하여 但養淮邊之兵力이니 詢之於理면 良有所因이라
기기(騏驥 준마)의 날랜 발굽을 묶어 놓았으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충성을 펴 보지 못한 채, 임금의 장려(奬勵)를 받는 일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내가 감히 해내(海內)의 인심을 저버리고 회변(淮邊)의 병력만 기르려 한 것이 아니니, 이 일을 사리로 따져 보면 참으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 기기(騏驥): ①하루에 천 리(里)를 달린다는 명마(名馬). 또는 몹시 빠르고 잘 달리는 말. ②‘현인(賢人)’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
將軍은 以泗州舊屬彭門이온 謂某妄爲占護必慮라한데 未詳狡計하고 或採浮詞라 且徐州는 昨自侜張하고 更無戢斂한데 威權旣盛에 暴虐轉深이라
장군은 사주가 예전에 팽문(彭門)에 속했다고 하면서 내가 함부로 점령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교활한 꾀를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서 뜬소문만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서주(徐州)로 말하면 예전부터 허풍을 치기만 할 뿐, 자신을 단속하는 일이 전혀 없었는데, 위세와 권한이 막강해지면서부터는 더욱 포학하게 굴기만 하였습니다.
見某自五月初에 再謀征討하고 已排勁卒하고 欲援令公하여 兼差都押衙韓汶하여 先齎一百萬貫하고 救濟都統軍前하여 盡載舟船하고 將臨道路에 又興兵甲하여 來擾疆陲하고 把斷淮河하며 蔟成寨柵이라 是以로 行計猶阻하니 群情莫安이라
내가 5월 초에 재차 정토(征討)하려는 것을 보고서 그때 벌써 억센 군대를 배치하여 저지했는가 하면, 영공(令公)을 구원할 겸해서 도압아(都押衙) 한문(韓汶)을 차견(差遣)하여 먼저 100만 관(貫)을 가지고 도통(都統) 군전(軍前)에 가서 구제하려고 모두 주선(舟船)에 실어 출발하려 할 때에도,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강역(疆域)을 소란스럽게 하고 회하(淮河)를 차단하며 목책(木柵)을 빽빽이 세웠습니다. 그래서 시행할 계획이 또 저지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온당치 않게 여겼습니다.
細察徐州所爲면 是作黃巢外應이라 不然則 何以每見當軍臨發에 却將兇黨奔衝하고 又乃執稱泗濱하며 阻絶汴路아
서주(徐州)가 하는 짓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바로 황소(黃巢)를 밖에서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우리 군대가 출발하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매번 흉당(兇黨)을 동원하여 방해하는 것이며, 또 사주(泗州)의 물가를 돌본다는 핑계를 대면서 변하(汴河)의 길을 막아 끊는단 말입니까?
且臨淮則 城孤氣寡하여 劣保疲羸로되 彭門則 地險兵强하여 恐行狂悖하니 以玆斟酌하면 可見端倪라
그리고 임회(臨淮)의 경우는 성이 외롭고 기세가 미약하여 파리한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는 반면에, 팽문(彭門)의 경우는 지세가 험하고 군사가 강하여 제멋대로 굴고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짐작하더라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況無諸道히 綱船은 曾過泗州本路한데 今則皆因此寇로 却滯諸綱하여 近則浙東․浙西로 遠則容府․廣府히 竝未聆饋運하니 何濟急難가
더군다나 제도(諸道)에서 선박으로 강운(綱運)할 때는 사주의 본로(本路)를 지나갔는데, 지금은 모두 이 도적으로 인하여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까이로는 절동(浙東)과 절서(浙西)로부터 멀리로는 용부(容府 용주(容州))와 광부(廣府 광주(廣州))에 이르기까지 화물을 운송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위급한 환난을 구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某見發楚師하여 俾誅徐孼은 一則遵行詔旨하여 救援隣封하고 二則得靜長淮하여 欲登征路니 固非貪泗民之租稅요 挑徐帥之兵戎이니 蓋分曲直之端하여 將保初終之節이라
내가 지금 초주(楚州)의 군사를 징발하여 서주(徐州)의 도적을 소탕하려 하는 것은, 첫째는 조지(詔旨)를 준행하여 이웃 봉강(封疆)을 구원하고, 둘째는 장회(長淮)를 안정시켜 출정(出征)의 길에 오르려 함이요, 사주 백성의 조세(租稅)를 탐내거나 서주 원수(元帥)의 군대에 도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니, 이는 대개 곡직(曲直)의 단서를 분별하여 시종(始終)의 절조를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泗州는 二年閉壘하여 一境絶煙이라 織婦停梭하고 耕夫釋耒라 滿城軍食도 猶仰給於弊藩하니 闔郡賦輿는 固難徵於疲俗이어늘 將軍은 謂某藉其地利하여 搆此隣讎라한데 細閱來言이라도 難知深意라
사주는 2년 동안이나 성문이 닫혔으므로, 온 경내에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습니다. 길쌈하는 여인들은 베 짜는 일을 멈추었고, 밭 가는 농부들은 손에서 쟁기를 놓았습니다. 성안의 군사들이 먹는 양식도 폐번(弊藩)에서 공급하고 있으니, 그 고을의 부세(賦稅)를 피곤한 백성들에게 거둔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장군은 내가 그 지역의 이익을 차지하려고 이웃 사이에 원수를 맺고 있다고 하였는데, 보내온 글을 자세히 보아도 그렇게 말씀하신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泗州는 不獨咸通之際에 得振雄聲이요 曾於天寶之中에 亦遵直道라 況于濤尙書는 政條旣擧에 武略兼精하여 收百姓之歡心하고 得三軍之死力이온
사주는 함통(咸通) 연간에 성세(聲勢)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천보(天寶) 연간에도 정도(正道)를 고수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우도(于濤) 상서(尙書)로 말하면 선정(善政)을 펼치는 위에 무략(武略)이 또 정밀해서, 백성의 환심을 얻음은 물론이요 삼군(三軍)이 死力을 다하고 있는데도
* 함통(咸通): 중국 당나라 의종 때의 연호(860~873년). 중국 당나라 제20대 황제인 제20대 의종(懿宗) 이최(李漼, 재위 859〜873) 때의 연호이다.
* 천보(天寶):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742~756년).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인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 재위 712~756) 때의 세 번째 연호이다.
將軍便令棄而不問이면 理復如何오 徐州는 實有大愆하니 固非小患이라 若將助虐이면 豈謂輸忠가
장군이 그만 버려두고서 묻지 못하게 한다면, 사리에 비추어 볼 때 또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서주는 실로 큰 악을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만약 포학한 그 행위를 조장한다면, 어떻게 충성을 바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某今所俟者는 戮當道之豺狼하고 奮乘秋之鵰鶚하여 星言夙邁하여 電擊專征이라 必與王令公腹心見知로 首尾相應에 齊驅蛇陣하고 豁展豹韜하여 剋復上京하고 奉迎大駕로되 亦不敢負秣陵之節度하고 爭强弩之功名이라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길을 가로막은 시랑(豺狼)을 먼저 처치하고, 가을 하늘의 독수리처럼 떨쳐 일어나, 새벽 별을 보며 빨리 달려가서 번개가 치듯 정벌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반드시 왕 영공(王令公)과 복심(腹心)의 지기(知己)로서 수미(首尾)가 서로 응하는 가운데, 일제히 군진(軍陣)을 몰고 도략(韜略)을 전개하여, 상경(上京)을 수복하고 대가(大駕)를 영접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또 감히 말릉(秣陵)을 절제(節制)하는 일을 저버리고서, 강노장군(强弩將軍)의 공명을 다투지는 않을 것입니다.
* 말릉(秣陵): 회남(淮南)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16년(211)에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말릉으로 천도(遷都)하고 이름을 건업(建業)으로 고쳤는데, 진(晉)나라가 오나라를 평정하고 2개의 읍으로 나누면서, 회수(淮水) 이남은 말릉이라 하고, 이북은 건업이라 하였다.
所冀는 得繼前勞하여 自防後患하여 使藺相如之謙德이 不損雄威하고 費無極之讒徒가 皆歸顯戮이니 捨此之外에 餘無所云이라 敬佩良箴하여 豈離愚抱아 伏惟監察하소서 某再拜하노이다
내가 장군에게 바라는 바는 지난날의 공로를 잇고 뒷날의 후회가 없도록 하여 인상여(藺相如)와 같은 겸손한 덕이 웅위(雄威)를 손상함이 없게 하고, 비무극(費無極)과 같은 참소하는 무리가 모두 공개 처형되도록 하는 것이니, 이 밖에는 다시 말씀드릴 것이 없습니다. 경계해 주신 말씀을 삼가 간직하여, 언제나 마음속으로 되새기겠습니다. 삼가 양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某)는 두 번 절하고 아룁니다.
* 藺相如之謙德: 인상여가 국가의 일을 우선하고 개인적인 감정은 뒤로 돌리며 자신을 굽힌 것을 가리킨다. 염파(廉頗)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장군이다. 인상여(藺相如)가 재상(宰相)에 임명되었을 때, 그가 승복하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인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모욕을 가하려고 계속 시도하다가, 국가의 일을 우선하고 사감(私憾)은 뒤로 돌린다는 인상여의 말에 감복하여, 가시나무 매를 등에 지고 인상여를 찾아가서 정중히 사과하며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 비무극(費無極): 초평왕~소왕 시기의 둘도 없는 간신. 참소와 아첨, 음모에 능해 언장사와 작당하여 초평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투성연(鬪成然)을 죽이고 채 대부 조오(朝吳)를 추방한 일을 시작으로, 평왕으로 하여금 며느리를 취하게 하고, 미워하던 세자 건(建)을 송나라로 쫓겨가게 한 후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며, 세자 건의 태부(太傅)였던 오사(伍奢) 부자를 처형했고, 좌윤 백극완(伯郤宛)을 죽이고 양씨(陽氏), 진씨(晉氏) 양 집안을 도륙내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음. 이로 인해 초나라는 급격히 내정이 혼란해지고 국력이 기울어 후에 오나라에 의해 미증유의 국난을 겪게 됨. 결국 영윤 낭와(囊瓦)와 심윤술(沈尹戌)에 의해 처형되었으나 초나라에 끼친 악영향은 실로 심대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