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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 자유로부터의 도피(윤유)
저자 에리히 프롬/출판 휴머니스트
1941년에 출판된 현대 고전. 중세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근대인들이 오히려 '불안감'때문에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권위에 순응하거나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이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현대에 와서는 권위주의에 순응하는 것보다도 근대보다 훨씬 더 다양해진 선택지 앞에 오히려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심화된 듯하다.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개성'이 중요한 시대라는 말은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MBTI가 대유행을 하는 것을 보면 개인이 소속될 수 있는 집단이 다양해진 것이지 에리히 프롬이 말한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보인다.
적당히 튀지 않고 살아가려면 그냥 근대인처럼 살아가는 게 편하겠다 싶기도 하지만 '나 너무 무지성으로 사나?' 싶을 때 한 번씩 고전을 읽으면 한 번이라도 정신을 다잡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중세 사회에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가 분석하여 보여주려는 것은 근대인이 아직도 불안하다는 것이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같은 인간이 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우리가 직면한 중대한 어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 발달이 감정 발달을 훨씬 앞지른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 인간과 현 상황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20세기에 살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심장은 아직도 석기시대에 살고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직 독립적이고 합리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인간은 혼자이고, 인간 자신을 빼고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권위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견뎌내려면 그들에게는 신화와 우상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토록 강려갛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주관적인 자의식,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다른 별개의 실체로 의식하는 사고 능력이다. 그 자의식의 존재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은 자신을 자연이나 타인과는 별개의 존재로 의식하고, 죽음과 질병과 노화를 의식하며, '그'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이나 우주와 비교하여 자신이 너무나도 하찮고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으면, 그의 삶이 어떤 의미와 방향도 갖지 않으면, 자신이 한낱 티끌처럼 느껴질 것이고, 개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느낌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과의 원초적 일체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자유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이 '개인'이 되면 될수록, 자발적인 사랑과 생산적인 일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결합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의 자유와 개체적 자아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는 끈으로 세계와 자신을 묶어서 일종의 안전보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은 우리가 개인의 성장 과정에서 본 것과 같은 변증법적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힘과 통합이 증대되는 과정,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의 이성이 더욱 강해지고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가 강화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개체화는 또 한편으로는 고독과 불안이 늘어나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의심,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심이 강해지고, 그와 함께 개인으로서의 자기가 너무 무력하고 하찮다는 느낌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체화 과정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상황이 개성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지 못하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안도감을 주었던 기본적인 관계를 단절당하면, 이 불균형 때문에 자유는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자유는 의심과 동일해지고, 의미와 방향을 잃은 삶과 동일해진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나 세계와의 관계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더라도 불안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 자유에서 벗어나 그 관계 속으로 도피하거나 복종으로 도피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생겨난다.
인생의 의미가 의심스러워지고, 타인이나 자신과의 관계가 안전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명성이 의심을 침묵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명성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영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비교할 만한 기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을 제약과 불안정에서 불멸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지도자의 심리와 추종자들의 심리라는 두 가지 문제는 물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동일한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들의 성격 구조는 중요한 점에서 비슷할 게 분명하다. 지도자가 갖고 있는 특별한 사고력과 실행력 같은 요소는 제쳐놓고, 그의 성격 구조는 대개 그의 신조가 호소하는 대상의 특별한 성격 구조를 좀 더 극단적이고 명쾌하게 보여줄 것이다. 지도자는 추종자들이 이미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상을 좀 더 분명하고 솔직하게 공식화할 수 있다.
루터와 신의 관계는 인간의 무력함에 근거한 복종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루터 자신은 이 복종을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자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복종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루터의 사상 체계 전체로 보아 그가 말하는 사랑이나 믿음이 사실은 복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루터는 '의식적으로는' 신에 대한 그의 '복종'이 자발적이고 애정 어린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력감과 죄의식으로 가득 차서, 그 때문에 신과 그의 관계는 '복종'의 성격을 띤다.
우리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지는 데 매혹되어, 자유가 전통적인 적들한테 거둔 승리의 의미를 '내부'의 제약과 충동과 두려움이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사에서 우리가 얻은 것과 같은 종류의 자유를 '더 많이' 얻는 것이 자유의 유일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고, 필요한 것은 그런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권력에 맞서서 자유를 지키는 것뿐이라고 빋기 쉽다. 물론 우리가 얻은 자유는 있는 힘껏 지켜야 하지만, 자유의 문제는 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 우리는 전통적인 자유를 지키고 늘려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체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종류의 자유도 얻어야 하고, 이 자아와 삶을 믿을 자유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사랑은 원래 어떤 특정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 머물면서 꾸물거리고 있는 자질이 어떤 '대상'에 의해 현상화할 뿐이다. 증오는 파괴를 원하는 열망이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열망이다. 사랑은 '애착'이 아니라, 그 대상의 행복과 성장과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그 대상과 내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비쳐오지 않는다. 고독감, 두려움, 당혹감은 그대로 남는다. 사람들이 그것을 영원히 참을 수는 없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질 수는 없다.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예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양심'은 그 의미를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제는 외적 권위도 내적 권위도 개인의 삶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타인의 정당한 요구를 방해하지만 않으면 모든 사람은 완전히 '자유롭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권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공공연한 권위 대신 '익명의 권위'가 지배한다. 그것은 상식과 과학, 정신 건강, 정상성, 여론 등으로 가장하고 있다. 그것은 자명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어떤 압력도 가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유별난 메커니즘은 근대 사회에서 정상인 대다수가 발견하는 해결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리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근대인에게 자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근대인은 자신이 좋아 보이는 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알았다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익명의 권위에 순응하고, 자신의 자아가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가 그럴수록 무력감은 더욱 심해지고, 그는 더욱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근대인은 겉보기에는 낙관적이고 창의적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무력감에 압도되어 다가오는 재앙을 마비된 것처럼 멍하니 지켜볼 뿐이다.
인간이 사회를 제어하고 경제 기구를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적에 종속시킬 때만, 또한 인간이 사회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인간은 지금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고독과 무력감을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은 오늘날 가난에 시달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큰 기계의 톱니나 자동인형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삶이 공허해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출처] [후기] 에리히 프롬 / 자유로부터의 도피|작성자 윤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