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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저 아래 십자가 있는 푸른 집이 보이지요.”
창가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섬기는 교회란다. 십자가가 우뚝 보인다. 그곳 장로인 조청로 교장의 안내이다. 어제 삼일절 예배를 4층 강당에서 드릴 때 전체 교직원에게 인사했다. 첫 출근 하면서 먼저 교장실을 찾았다. 어느 교회 나가느냐 해서 아직 정하지 못했다 하니 선뜻 자기 교회로 나오란다.
거제도 장승포의 중고등학교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새 학기 교직원 첫 예배에 오상백 교목이 금 그릇과 은그릇을 설교했다. 인사 때 그 말씀 따라 턱도 없이 금 그릇이 되겠다고 얘기했다. 보수동 복병산 언덕에 자리 잡아 부산항과 영도, 남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학교이다. 바로 아래 집에서 가기 쉬운 보수동 광덕교회에 나갔다. 놋그릇이나 알루미늄, 사기, 질그릇이 많다. 금 그릇과 은그릇은 드물다.
제대로 교회 다닌 적이 없다. 찾아간 것은 어릴 때 성탄절 날 하도 요란해서 뭐 하는가 싶어 학교 옆 갓 지은 초가지붕 예배당엘 가봤다. 장로가 청년들과 생나무를 베와 세우고 흙벽을 발랐다. 지붕을 올리니 비바람 피하는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지어졌다. 바닥은 흙으로 무얼 깔고 펑퍼져 앉아야 했다. 가득 찼다. 앉을 데가 없어 기웃거렸다. 산지사방에서 꾸역꾸역 모였다. 찬양 때 교회당이 흔들린다. 설교자가 과수원에서 보던 장로이다.
지난해 학교 앞 언덕 사과밭 농막에서 예배를 드린다 해서 갔다. 마치고 사과를 주워 먹을 수 있을까 해서이다. 예배 중에 보니 바닥에 떨어진 사과가 먹음직하다. 목 아프게 큰 소리로 마루 난간에 서서
“요셉아 요셉아 ---.”
외친다.
내성 읍내에 사는 장로로 새벽에 나서 걸어 30리를 왔다. 성경책을 안고서. 마치면 우우 내려가 사괄 주워 먹는다. 주인이 떨어진 걸 맘껏 먹으란다. 서너 개 먹으니 짝한다. 더 먹을 수 없다. 많이 먹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밖엔 못 삼켰다.
먼 골짝에 사는 아이들까지 몰려들어 방이 차고 마루에도 빼곡히 끼여 앉았다. 장로가 마루 난간에 서서 설교와 기도를 이어갔다. 입가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렇게 하다가 겨울이 닥치니 난방이 안 돼 이리 옮기게 됐다. 믿음 좋은 젊은이들이 집일을 잠시 두고 뒷산에 가 기둥 나무와 서까래를 베와 끙끙 뚝딱 만들었다. 초등학교를 마치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무료로 중학 과정을 가르친다 해서 그리 몰려들었다.
읍내 중학 가기 어려운 형편들이다. 가끔 안동 사범을 가는 학생이 있었다. 어쩌면 거길 다 가나. 조례 때 소개하면 부러웠다. 통신학교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이 많았다. 농사일 거들면서도 배우려 애썼다. 그걸 교회가 도와줬다. 흑판을 걸어놓고 첫 시간은 국어, 둘째 시간은 과학, 역사 등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종을 쳐 수업 시간을 알렸다. 물야교회에서 중학 과정 공부하는 학생이 있었다. 꿈같은 일이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면 마당에서 제기차기나 헝겊 공을 갖고 놀다가 버리고 뛰어 들어갔다. 한 분 선생님이 이 과목 저 교과를 가르쳤다. 해박하다. 오훈 농사꾼이 된다. 그러니 보내준다. 부산에 와 동래 부곡동 사는 교회 다니는 아내를 만나 몇 번 손 잡혀 나갔다. 그냥 지켜보며 따라다녔다. 1년간 장승포에 있을 때 천주교 학교여서 수녀 선생들과 지냈다.
부산으로 옮기니 기독교 학교여서 믿음을 물어본다. 믿겠다 하고 금 그릇이 되겠다 했으니 이제 나가야 한다. 조 교장의 교회는 멀다. 큰길을 여러 개 타 넘어야 한다. 아내가 그 먼데 말고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국제시장과 부평시장이 바로 옆이고 남포동과 어시장 자갈치를 걸어갔다 올 수 있는 부근이다. 동료 교사도 있다.
“질그릇이 되겠다 말할 걸.”
언덕바지에 살면서 출근했는데 오르내릴 때면 십자가가 보인다. 수업 중에도 내려다보면 덩그러니 눈에 들어온다. 온통 가는 곳마다 지켜보고 다니는 길을 밝혀주는 것 같다. 남주철 목사가 담임이어서 그를 좋아했다. 고향 물야 과수원 주인을 잘 안다 해서이다. 더 정이 가고 그때 설교하던 작달막한 장로와 비슷하게 생겼다. 열정을 다해 설교했다.
얼마 뒤 그만두고 떠난다기에 갑자기 무슨 일로 가는가 생각이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이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하는 상냥한 목사였다. 더욱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것이 감동이었다. 서순복 전도사와 정분이 났다는 소문이 그를 나가게 했다. 서울 말씨를 쓰는 전도사도 교회 건사를 참 잘했다. 덩치 큰 교회를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살면서 보살폈다. 쫓겨나는 목회자들이 뜬 말에 시달리다 등지는 걸 자주 봐 왔다.
모두 떠나가고 없다. 오래 있지도 않았는데 그사이 지루했는가 밀어냈다. 그럴 수 없고 안 되는 일인데 그리됐다. 정말 있었는지 사람들 일은 알 수 없다. 그렇다니 그렇게 믿고 세월이 그대로 흘러간다. 고향 사과밭을 잘 아는 남 목사는 다른 교회로 가 당회장을 맡아 노회 회장까지 한 훌륭한 목사이다.
“목사와 여전도사가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안 땐 굴뚝에 연기 나나.”
문창석 목사가 왔다. 산골에 살면서 주말에 왔다가 산 넘어 읍내 학교엘 갔다. 아버지가 고갯마루까지 올라와 잘 다녀오라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설교가 가슴을 찡하게 했다. 육이오로 갈라지면서 다시는 못 만나게 됐다. 평생 부모 그리움이 한으로 남았다. 뒤를 이어 김오기, 양기호 목사가 시무하다 갔다. 오기 목사 설교는 굵고 진중한 목소리로 성도들을 압도했다. 해박해 들을 것이 많았다.
콧수염을 길러 가까이 다가가기 서먹하다. 맘대로 되지 않는가 바로잡을 수 없었던가. 틀어져 기우는 모습을 보이더니 기호 목사 때는 그만 너 나 하다가 갈라서고 말았다. 목사 편의 신도들이 안고 나갔다. 가까운 사거리에 예배당을 차렸다. 몇 해 뒤엔 사하구 괴정 산기슭으로 교회를 세워 옮겼다. 서로 만나는 일이 없다. 맨몸으로 나가 어찌 살까.
이강희 전도사가 한동안 교회를 지켰다. 시끌시끌하다 나가고 허전한 예배당을 가녀린 여자 몸으로 장로들과 견뎌냈다. 신창부 목사가 왔다. 설교와 찬양 때 믿음이 가는 눈빛과 목소리가 좋았다. 심방 때 가족을 위해 기도하면 그 목소리가 천상에서 울려오는 것 같다. 듣고 나면 성령이 머물러 평안함을 느낀다. 진실한 기도가 와 닫는다. 꼭 다문 입술 그윽한 눈빛이 믿음직하다.
강희 전도사는 그 와중에도 주일 결석한 신도들 집집이 전화를 해 안부를 물었다. 명랑하게 친구처럼 전화하고 끊었다. 로비에서 깍듯이 이름 부르며 인사하는데 안 보였다. 시집갔단다. 하반신을 못 쓰고 휠체어를 타는 형편없는 장애우에게 갔다. 평생 손발이 되어주고 밀고 당기며 보살피기 위해서다. 여러 말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오래도록 가슴이 짠하다.
“거룩하다.”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목사 쫓아내는 교회로 이름났다. 오는 목사가 별난지 교인들이 남다른가 어찌해서 무던하지 않다. 무슨 말썽이 생겨 바람 잘 날 없다. 선교지 종소리를 내는데 창부 목사가 최수복 집사 원고 내용을 트집 잡아 일일이 고쳐놨다. 그게 뒤집혔다. 내 평생 교수로 재직 중 책 내고 논문 썼는데 이렇게 잘못 썼다며 갈기갈기 줄 긋고 고침을 받기는 처음이란다.
“집 가까운 교회로 옮기련다.”
“비위가 상해 못 다니겠다.”
사모의 태도로 말이 많다. 당회에 거론이 있었다. 앞자리에 앉도록 권고를 받기도 했다. 교회를 휘젓고 다녀서 불편하다. 남편 목사와 같이 행동한다. 부목사나 전도사, 사무원에게 지시하고 명령한다. 남편이 만류해도 안 듣는가 보다. 신도들과도 말을 많이 해서 언짢았다. 주방일을 일일이 이래라저래라 지적하고 간섭한다. 넘난 행동이다. 목사가 둘이다. 부인이 거추장스럽다. 가만있질 못하는 성미다.
65세 퇴임을 정했다. 장로들이 이 규정을 따라 여럿이 은퇴했다. 막상 목사가 지키지 않는다. 교회에서 정한 것을 업신여기고 노회 규정에 따라 70세까지 하겠단다. 이 분란으로 시끌벅적하다. 같이 정해서 당회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쪽을 찢어냈다.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다행히 장로 한 분이 그 내용을 복사해 뒀다.
“교회법이 우선이다.”
“아니다 노회법이 앞선다.”
날마다 시끌벅적 실랑이질이다. 복사한 것은 소용없다. 인정할 수 없단다. 주일 오후엔 제직회가 열려 해지도록 설전이 오가며 불의함을 지적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바로 서기 직책을 파면하면서 강경하게 나간다. 떠나가길 바랐지만 어림없다. 주일 설교를 또박또박 강단에 올라와 진행한다. 두 패로 갈라져서 서로 남남처럼 지낸다. 흑백이다. 네 틀렸다. 내 옳다. 벅적벅적했다. 목사가 민주다. 모두 부글부글한다. 노회는 목사를 감싸주는 것 같다.
장로도 갈라져 네 편 내 편이 되어 말끝마다 맞선다. 신도들도 확연히 목사 편과 반 목사 편으로 돌아서서 삿대질로 속을 썩인다. 반 목사 편은 노회 재판에 하소연했다. 당회에서 결정하고 회의록에 담긴 내용을 목사만 겉돈다는 것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재판은 강경하고 격렬한 얘기를 해결해 줄 듯 다 듣더니 물 탄 듯 흐지부지해 버렸다.
“유야무야로 만들었다.”
“가재는 게 편인가.”
안 되겠다. 노회 재판이 물컹하니 사회법으로 부탁해 목사를 바로 세워야겠다며 가까운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교회 출입이 제한되었다. 그러니 단상에 오를 수 없고 처지가 난감해졌다. 서로 상처가 깊게 났다. 원하는 많은 퇴직금을 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텼는데 15년을 함께한 목사를 그럴 수 있나. 대접해 나가게 했다. 몇 해를 그리 지루하게 끌었다.
“긴 시간 지쳤다.”
“상체기로 얼룩졌다.”
“목사가 언성스럽다.”
목사가 고집 피우면 노회 법으론 해결할 수 없는가 보다. 신도들이 많이 시달렸다. 장로와 권사, 집사들 모두 두 쪽으로 갈라져서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오래도록 그렇게 이어져 내려간다. 믿는 사람들의 희한한 모습이다. 설교를 마지못해 듣자니 엉덩이가 배긴다. 그 시간이 어찌 그리 안 가는가. 회의 땐 반대와 찬성이 엇갈려 진행이 엉망이다. 여 저기 숙덕거림이다. 그래도 주일이면 모두 잘 나왔다.
장로나 권사, 안수집살 세우려면 어렵다. 표가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몇 표가 모자라 장로를 할 수 없었고 나이 들어 멀어지고 말았다. 믿고 의지하며 따르려던 것이 난장판이다. 한동안 목사 없이 지났다. 그래 난동이 났으니 무슨 덧정이 있겠나. 얼마 뒤 장신대 교수인 민경수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많은 위로가 됐다. 갈급했던 성도들이 좋아했다.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을 찾았다. 그의 환한 둥글둥글 얼굴에다 또렷하면서도 부드러운 표준말이 좋았다. 평이하지 않고 높았다가 낮아지는 설교가 시소처럼 즐거웠다.
또렷한 발음과 억양으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가슴에 닿았다. 어렵게 청빙을 거쳐 서울에서 김현준 목사가 왔다. 대학병원 주위 새 아파트에 거처를 마련했다. 편하게 오래 있으면서 교회를 보살펴 주길 바랐다. 정성을 다했는데 다음 해 그만 나갔다. 부인이 서울에 직장을 그만둘 수 없어 미적미적하다가 혼자 생활하는 게 어려웠나 보다. 학위와 유학 등 서류가 바르지 않다는 문제도 생겼다. 꼬투리가 없을 수 없다.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
또 무슨 무슨 잡음도 있었다니 서로 못 할 짓이다. 용서하고 덮으며 참아야 하는데 앞앞이 드러내고 민망함을 보였다. 벌거벗기길 좋아한다.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 난다. 그에게만 잘못이 있겠나. 이래서야 은혜의 빛이 나리겠나. 오다가도 되돌아가재 싶다. 아낸 집 가까이에 나가잔다. 바로 옆이다. 몇 발 걸어가면 된다.
“수십 년 정들었다.”
“내 집 같은데 어찌 떠나나.”
맨날 보수동 언덕 집과 학교에서 십자가를 내려다보며 살았다. 햇볕이 반사된 찬란한 금빛이 변함없다. 사람이야 냄새 풀풀 나지만 성령으로 빛나던 향기로운 곳이다.
역사도 오래다. 처음은 부산교회였다. 일본인들이 세워 예밸 드렸다. 신사나 조상신을 믿는 그들에게 기독교 예수님의 사랑이 있겠나 했다. 부산과 서울, 군산 등지에 교회를 세우고 전국에 전도해 나갔다. 부산교회로 시작했다. 일본인 목사가 설교했다. 일인들이 가까운 중앙동 용두산공원 주위에 중심교회도 세웠는데 남구 쪽으로 더 크게 옮겨가면서 갈라져 에덴공원 옆 하단 새중심교회가 또 하나 생겼다. 이 교회가 구름처럼 일어나더니 다시 바닷가 명지에 참한 예배 전당을 지었다. 드넓은 마당에 10여 층 높이로 큼직하다. 본당 1, 2층이 꽉 찬다. 만 명 가까이 모이니 설교자가 춤을 추면서 하나님! 하나님! 외친다.
일본기독교회의 조선전도는 1904년 노일전쟁 때 계획을 세웠다. 그 뒤 일본군이 새로 부설된 경부철도로 이동할 때였다. 부산을 거쳐 인천항으로 보급품을 운반할 때 들어왔다. 이치약재상 2층을 빌어 부산전도를 시작했다. 오오에 장로가 집회를 열던 곳이다. 구도자나 침례교 신자도 있었다. 서동 가옥으로 이전하고 십자가를 세운 교회 모습이다.
오전에 열, 저녁에 열댓 명이 참가했다. 몇 달 만에 예배자가 증가하고 기도가 잘 됐는데 오오에가 군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자 초대 아키모토 시게오 담임목사도 사고로 사임했다. 2대 와다 호우코우 목사가 부임했다. 성탄절 예배에 첫 세례식이 거행됐고 홍도관에서 성공회와 연합예배를 드렸다. 2백 명 가까이나 참석했다. 서양인 두세 명과 한국인 다섯 명도 있었다. 일본인이 급증했다. 장티푸스가 창궐했다.
다시 예배 처소를 서산하정으로 옮겼다. 당시 평양 대부흥이 일어 한국 전체에 영향을 줬다. 3대 우에다 요시오 목사가 왔다. 4년이 지났어도 교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가을에 안중근의 통감 이토히로부미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 지배에 대한 감정의 표현이다. 합방되던 해 봄 오오이케 앞으로 교회당을 다시 이전했다. 예배 처소를 더 넓은 곳으로 옮겼다.
전도회를 밖에서 하다가 안에서 가졌다. 경성에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모두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다. 초대 아기모토 시게오가 다시 4대 목사로 왔다. 오오이케 골목 집 한 채를 빌려서 수리해 예배를 드렸다. 40명이 참석했다. 10년 만에 전도국에서 독립해 부산교회 설립식이 거행되었다. 점점 교회다워져 갔다. 장로 다섯, 집사 두 명의 안수례도 가졌다.
경성교회와 군산교회, 부산교회 세 교회의 조선중회가 결성되었다. 5대 나카자와 토미베에 목사가 설교했다. 교회에 활력이 생겼다. 이듬해 감리교회와 협동 전도를 했다. 9월 1일 전날 밤은 교인들이 장대 끝에 매단 커다란 초롱불을 앞세우고 작은 등불도 들었다. 중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나카자와가 사임하자 한동안 목사 없이 지났다. 천왕숭배를 강요했다.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년 이상 계속되었다. 사상자와 피검 희생자가 속출했다. 6대 스즈키 타카시 목사가 발령됐다. 콜레라가 창궐하여 부산에 비상이 걸렸다. 방역으로 전쟁터와 같았다. 1926년 2월에 정기총회가 열렸다. 교세 보고에서 배찬자와 수세자가 일백 명, 아침과 저녁 예배에 140명이다. 부산교회가 점점 커져만 갔다.
재정은 수출입이 3천 엔이며 회당부지 매입에 1천 엔 상환, 인근 부지를 사들여 부산교회당 신축을 결의했다. 재임 초에 스페인 독감으로 두 자녀를 잃었고 계속되는 부인의 병구완이다. 그래선가 저녁 예배에 요한복음 말씀으로 감동을 주었다. 전도 집회 때 감리교와 성결교, 구세군과 합동으로 했다. 스즈키 목사도 건강이 나빠 병원을 자주 다녔다. 목사의 부산교회 사랑이 대단하다. 그 와중에도 교회를 키워나갔다.
1932년 회당 건축을 결정하고 총공사비 2만5천 엔을 들여 그해 12월에 준공한다. 보리즈 미국 건축가의 설계이다. 1층은 일요학교와 교실 11개, 2층은 예배당 280석과 사무실, 사교실, 부인회실, 도서실이다. 3층은 다다미 8조 넓이의 전망실이 만들어졌다. 성탄절을 새 회당에서 드렸다. 650명이나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다. 목조로 아름답고 웅장한 예배당이다. 보수동 사거리 편안한 곳에 자리해서 우뚝 솟은 부산교회이다.
예배드릴 때마다 자리가 차 성도들이 형언하기 어려운 기쁨을 누렸다. 최고의 부흥기를 맞았다. 부산전도 30주년 기념 축하식이 거행됐다. 부산교회 장로들의 사식과 성서낭독, 기도, 교회 역사, 축전, 축사 대독을 맡았다. 설교는 아키즈키 목사와 축사는 오오시마 부산 부윤, 조선인 교회 대표 이약신 목사가 했다. 마지막 스즈키 목사의 답사로 끝을 맺었다. 최고의 전성기 부산교회다. 신도들이 넘쳐났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부산은 대륙침략 병참기지로 군대 중개지의 역할을 감당했다. 근위 내각이 국민정신총동원을 개시하고 팔굉일우, 거국일치, 견인지구를 내걸며 조선인을 옥죄었다. 교회도 기미가요 제창,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등을 강권했다. 스즈키는 1939년 4월 20년간의 목회를 했던 부산교회를 사임하고 고향인 마츠야마로 떠났다. 교회를 일으킨 목사이다. 교회당에 그의 숨결이 남아있다.
5월 말경 마지막 7대 카라우지 타다시 목사가 전주교회에서 부산교회로 전임해 왔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학도전시총동원체제와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폈다. 가미다나 설치와 히노마루 게양을 요구하다가 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므로 패전에 항복을 선언하게 됐다.
“기세등등하다가 꺾이고 말았다.”
“최초의 원폭 투하다.”
“두 도시가 날아가고 쑥대밭이 됐다.”
소련군이 참전해서 이내 평양으로 들이닥쳤다. 만주나 조선 북부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목숨만 부지한 채 남하했다. 미군이 진주한 것은 조금 뒤이다. 세화회를 통해 귀국길에 올랐다. 카라우지 목사가 미군 통역을 맡았다. 교회는 예배와 일요학교를 이어가다가 가을에 회당을 경남도청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남북으로 갈라 38선을 만들어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삼팔선 이북과 남쪽은 소련군, 미군에 의해 일본 관리와 경찰, 기업인, 민간인들을 통제하고 보호 철수시켰다. 이때 군경과 관리를 먼저 떠나게 했다.
11월 25일 부산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광덕교회로 바뀌고 인계되었다. 교회 인근 경남도청 학무국장이던 초대 목사 윤인주는 마지막 목사 카라우지와 명치학원대학 신학부 동창이다. 광복 이듬해 초 부산교회 신도들의 철수가 거의 끝날 무렵 카라우지 목사와 가족들도 부인의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보수동 32번지 번듯한 교회는 날아갈 듯 십자가가 솟았다.
“일인들이 마음먹고 지은 예배당이다.”
“초대 윤 목사가 교회를 받아 잘 보살폈다.”
세월이 지나 교회에서 가고시마 카라우지 목사를 찾아가 25주년 기념품과 감사패를 전했다. 1972년 옆 김치공장의 화재가 번져 40년 동안 예배드리던 정든 교회당이 안타깝게 소실되고 말았다. 다음 해 고우다 하츠타로 장로가 부산교회 신도회를 만들고 회보 활천(活泉)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우에키 츠네하루 주선으로 신도들이 새로 지은 그리웠던 교회를 찾아왔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교회다.”
“새로 지어도 옛터가 그리워 왔다.”
1998년 50년이 넘어 대부분 세상을 떠났는데도 카라우지 목사의 장남 카라우지 쇼이치 부부가 찾아와 부모가 건사하던 회당에 며칠 머물다 갔다. 또 일본 선교 100주년이 되는 2004년 여름에 떠나갔던 나이 많은 신도와 그 후손 수십 명이 방문하여 함께 주일 예배를 드렸다. 경주 유적지와 산업 현장, 국제시장, 맛집을 돌고 토산품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환대에 감사하며 다시 오고 싶다.”
“이제 돌아가면 해산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41년간 찬양하고 기도하며 섬긴 부산교회 후손 신도들을 따뜻이 보듬어 환영했다. 가족을 잃어가면서도 온 정성을 다해 지어준 스즈키 목사의 부산교회당은 타버려 이제 흔적이 없다. 목조건물과 교적부, 회의록이 남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문화재 교회로 십자가가 더 빛났을 것이다.
이사하면서 몇 번이나 옮기려 했다. 아는 사람과 저 내려다보이는 정든 십자가가 발길을 사로잡는다. 어디 살아계실까. 두 손 잡고 인사하는 남 목사가 보고 싶다. 언덕 집까지 뛰어 올라와 교회에 데려가던 고 권사, 평안도 산 고개에서 아버지와 헤어지던 문 목사의 얘기가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반지하 셋방을 찾아와 간절히 기도해 주던 신 목사가 고맙다. 아들 결혼식 때 강 목사와 박 목사가 주례와 기도를 해줘 두고두고 생각난다. 아들 장염으로 위험할 때 병실을 찾아 기도해 준 강 목사와 박 목사다. 출혈이 심해 수술실로 갈 때 가다가 말고 다시 돌아와 손잡고 기도한 강 목사다. 살아난 아들인데 어찌 우리 잊을 수 있나.
심한 장애우를 위해 그의 아내가 되려 내 발걸음으로 찾아가서 결혼한 이강희 전도사가 떠 오른다. 병들고 외로운 노인들을 위해 산청 깊은 산속에서 결혼도 마다하고 몸 바쳐 수고하는 이밝음 목사를 본다. 목사 쫓아내는 교회여도 냄새나는 신도들이어도 지붕 위 저 높은 곳엔 녹슬지 않고 더욱 반짝이는 십자가가 아름답게 아롱진다. 이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고 걷는 사람을 본다. 거룩한 광덕교회이다.
중구 교회 뒤 언덕에 살다가 사하구 서쪽으로 이사 가니 바로 옆에 교회가 있다. 수요일은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된다. 이곳저곳 다닐 때마다 옮기려 맘먹기도 했다. 별난 데 있나 다 그렇고 그렇지. 하다간 또 그래도 다니던 곳으로 가자 광덕교회로 간다. 어디든 수틀리는 데 없겠나. 마음 맞춰가면서 살아야 한다. 아내는 교회 일을 많이 해서 목디스크를 얻었다. 이사 가니 가까운 교회로 가고 싶다. 다 우리 교회보다 큼직하다.
“목이 뻐근하다.”
교회 부엌 일은 해도 해도 밑도 끝도 없이 많다. 반찬 만들 때면 종일 엎디어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한다. 약삭빠르지 못해 다 맡아 한다. 기관 일을 받아 월요일엔 한 아름 헌금 돈을 안고 은행을 가야 했다. 선교회와 권사회 회장도 맡아 힘든 일을 나누지 않고 혼자 애썼다. 지쳐서 파김치가 돼 집으로 들어온다. 종일 시멘트 바닥에 쪼그려 나물 다듬고 나면 목이 찌릿하다. 하던 일을 다 끝내는 성미다.
“교회 일이라면 몸 바친다.”
커다란 솥에 밥과 국을 짓고 끓여야 하며 산더미 같은 설거지는 어쩌나. 빗자루 물걸레를 들어야 한다. 사찰이나 지휘자, 반주자처럼 돈을 받는 것이 없다. 도로 남달리 헌금했다. 종처럼 일하고 바쳐서 살아왔다. 장로 권사 되기 쉽나. 천국 오르는 일이 등산길처럼 수월하나. 시키면 순종하는 믿음이다. 다른 교회는 어떤가. 거기가 거기다. 신도는 그대로다. 아니 줄었는데도 한 분이던 목회자가 여럿이다. 목사가 자꾸 늘어났다.
“교회가 안아야지 어디로 보내겠나.”
갈등으로 바람에 갈라지는 나뭇가지처럼 목사와 함께 나가는 아픔을 본다. 더 설교하겠다며 버티는데 근접 못 하도록 내친 게 걸린다. 잘 있는 목사를 떠밀어 보내는 걸 보면서 이러면 되겠나. 서서히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람 보고 믿나 하나님만 뵙고 의지하며 산다지만 이웃이 좋아야 명당이다. 성령은 어디든 계셨다.
“들먹들먹 나가게 하는 일이 또 생기면 어쩌나.”
고향 척곡교회에서 같이 일하자며 설립자 후손인 김 장로가 권했다. 방학 때면 아내와 벌초하곤 씻은 뒤 기도드렸다. 갈 때마다 살살 달래어 꼬드겼다. 작은 땅도 있어서 솔깃한 말에 갈 뻔했다. 때마침 몽골에 갈 일이 생겨 여러 달 낯선 땅에 머물다 왔다. 척곡교회 일을 어떻게 할까. 자고 나면 생각으로 골몰했다. 김 장로가 만날 때마다
“장로가 되어 같이 일하자.”
“교회학교와 본당이 국가 문화재이다.”
울란바토르엔 한국선교사가 세운 국제대학교와 유비대학교가 있다. 그곳에 머물며 주일은 안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서 예밸 드렸다. 몽골 청년들을 가르치면서 통학비와 먹을 걸 줘야 했다. 우리나라에 와 식당이나 이삿짐센터 등 허드렛일을 하려고 말을 배웠다. 언어시험을 거쳐야 하므로 열심히 배워나갔다. 한국에 서로 가려 안달이다. 어눌한 데 없이 천상 한국인과 같다. 남자와 여자 모두 힘이 세다.
비슷한 얼굴과 몸집이다. 국내 수만 명이나 사는데 표가 나지 않는다. 식당 음식 나르는 사람이 예쁘고 명랑해서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의외로 몽골이라 말한다. 힘이 좋아 무거운 냉장고와 농짝을 덜렁덜렁 들어 나른다. 그들이 대부분 교회에 나간다. 거기서 가르치면서 선교를 했기 때문이다. 몇 푼 안 되는 선교지원금으로 가난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교사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 청년들을 돕는다. 여비가 없어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
말레이에도 갔는데 그 뜨거운 햇볕 아래 밀림이나 산골짝, 구릉지를 찾아다녔다. 회교국가이다. 원주민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교회당을 지어서 예밸 드렸다. 아기를 안고 다니는 아이가 있어서 동생인가 물으니 낳았단다. 몽골이나 아세안 국가들이 모두 사는 게 형편없다.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고생하는 걸 봤다. 「소명」이나 「창끝」 선교영화에서 보던 대로다. 가르쳐 목사를 세우는 선교이다. 나라에서 회교도에게만 문명의 혜택을 줬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크고 작아도 모두 십자가를 높이 세웠는데 다 빛나는 걸 본다. 하나같이 붉은색이다. 홍색이거나 적색, 자색도 보인다. 밤에는 모두 드러나는 교회들이다. 십자가가 빼곡하다. 이리 교회가 많은가. 십자가가 천지다. 서서히 변해서 이색 저색으로 변하는 걸 보면서 밤하늘의 별들과 속삭이는 소리가 소곤소곤 들린다.
“밤만 되면 첨탑의 붉은 십자가가 돋보인다.”
“따뜻한 빛이다.”
광복절 광화문 광장에서 시국 모임이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휩쓸리며 엉겼다. 연두색 복장의 경찰이 선명하게 경계를 서고 경찰 버스가 빈틈없이 긴 줄로 막았다. 확성기가 소리 소리치고 따라 외치는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교회에서 많이 나가고 각종 보수 단체에서도 참석했다. 선거가 어떻다 대통령은 어찌하라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낀다.
“부정이다.”
“물러나라.”
현장 사진이 카톡으로 나돌았다. 그걸 받아 권사들에게 보냈다. 참석했느냐 목사의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그만 기가 막혀 잠도 설치고 음식도 거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흔하게 카톡으로 주고받는데 오해를 받은 것이다. 코로나로 온 세상이 야단인데 다중 집회에 갔다 왔으니 집에서 근신하며 지내야 한다. 광화문 집회 사진이 겹쳐 돌았다. 동영상을 만들어서 카톡으로 누볐다.
교회 예배에 나오면 어쩌나 얘기다. 옮길 수 있으니 위험한 짓을 했다는 것이다. 어느 장로도 갔다 왔을 것이다. 추측하면서 여럿이 사무실에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눴다. 듣고 있던 목사 한 분이
“확인해 볼게.”
하면서 무심코 전화 한 것이 그만 집사람을 가슴 아프게 했다. 그런 사진은 흔하게 흘러 다니는데, 참석해서 찍어 보낸 거라며 단정한 것이다.
“집회에 참석했으니 자가격리해야 한다.”
“폭탄 코로나를 안고 교회 오나.”
권사 모임 카톡에 잘 아는 사이여서 보냈다. 평소 서로 허물없이 주고받았는데 별나게 누군가 지레 서울 갔다 왔다며 퍼뜨렸다. 뜬눈으로 보낸다. 설령 갔다 왔으면 잘했다 해야 하잖나. 사랑 무슨 교회에서 저리 애타게 시국 발언과 모임을 이어가는 데 힘을 합치는 동참 모습이 우리 교인들에겐 필요하다. 거기다 덜렁 전활 해서 참가했느냐 다그치니 화가 났다.
“죄인 취급이다.”
전화를 계속 주고받으면서 음성이 커져만 갔다. 처음은 대수롭잖게 여기고 그냥 지났는데 그게 나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남편이면서 가만히 있나. 어찌 뭐라 말을 해야 하지 않나. 막 야단이다. 된통 험한 말을 들었다. 평생 뒷바라지하며 살았는데 헛살았다. 마누라가 어려운 곤경에 처했는데 시달리면 얼른 달려들어 도와야지 강 건너 불 보듯 남 일처럼 여기냐며.
“남편이란 사람은 뭐하나.”
혼났다. 며칠째 밥을 먹지 않고 잠도 못 잤는가 눈이 캥하고 꺼칠하며 얼굴이 핼쑥하다. 그러잖아도 천식과 목디스크가 있는데 저러다 도지면 큰일이다. 전화한 여자 목사에게 걸었다. 받지 않는 걸 보니 민망한 일이어서 피하는 것 같다.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이냐고. 답장이 없자 담임목사에게 연락했다. 당장 전화가 왔다.
누명을 씌웠다며 사과와 함께 그 말을 한 남자 집사를 알려주고 전화를 하도록 일렀단다. 기다렸는데 조용하다. 다음 날 저녁 무렵에 연락이 오고 사과를 받았다. 아마 담임목사가 엄하게 얘길 했는가 보다. 처음은 미안하단 말 대신 교회 일이 많아 힘들다는 얘기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동정을 얻으려는 변명 같은 말에 또 질려서 정곡을 찔러 이르자 그제야 잘못했다며 정중히 고개 숙였다.
그때부터 얼굴을 펴고 조금씩 음식을 입에 넣었다. 어렵잖은 일이 이리 커질 줄 가족이고 남편인 나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 불거졌다.”
“하찮은 일로 봤다가 식겁했다.”
별일이겠나 그냥 넘어가는가 했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그나저나 큰일 났다. 교회를 안 가겠단다. 나보곤 가라는데 어찌 다니나. 평생 같이 잘랑잘랑 갔는데 혼자 나가지나. 남 목사 때부터 40년 넘게 교육부서 일을 맡아 가르치고 기도하며 살아왔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이사하면서도 굳건히 다니며 한 교회에서 예배드렸다. 갈라졌을 때나 정년 문제 난장판 속에서도 견뎠다. 십자가를 보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식당에서 이런저런 얘기하고 지하 요한 선교실에서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던 게 그립다. 야외 예배 때 보물찾기가 재미있었다. 다 두고 훌쩍 떠나야 옳겠나. 그렇게 한다고 속 시원해지겠나. 나는 보수동으로 아낸 명지로 잘하는 짓이다.
오래 부대끼며 살다 보니 교우들이 형제 같은 가족이다. 앞앞이 다 알고 지내는 허물없는 사이다. 울퉁불퉁 사사건건이 있었지만 일일이 생각하며 사나 잊어야지. 그래그래 지났는데 이제 그곳으론 발을 끊어야 하나. 정 떼는 게 어렵다 하잖는가. 돌아서서 여상스럽게 살 수 있을까. 겪어보지 않아 알 수 없는 일이다. 자꾸 생각나면 어쩌나. 같이 이곳저곳 다녔던 선교회가 생각난다. 오후 예배 때까지 얘기하던 게 좋았다.
저리 굳은 마음인데 제풀에 물러지고 풀어져 돌아와 잠잠해질까. 담임목사에게 떠나겠단 말까지 했으니 언어는 약속이잖나. 나완 상의도 없이 덜컥 내뱉어 버렸다. 참으면 되는 일일 수도 있는데 이 지경으로 돌아섰으니 어디서부터 끄나풀을 찾아 실타랠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뒤엎어진 물그릇이요 쏜 화살이다. 쓸어 담을 수 없다.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이다. 돌릴 수 있나. 내가 가운데서 어찌 붙이고 이어줘야 할까 난감하다. 몇 달 지나면 저절로 언제 그랬냐 무심해질까. 단단히 화났다. 떠나면 그만이란다. 나도 어중간 따라나서야지 쩔레쩔레 말썽 교회로 가지겠나.
앞으로 어디 가나. 근처 교회로 가겠단다. 그 낯선 델 어떻게 다니나. 젊고 활달하기나 하나 붙임성이라도 좋나.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희끗거리는 반백인데 청년들에게 짐이 될라. 이리저리 다니는 변덕일 수 있다. 귀에 익은 찬송가여야지 어려운 성가를 불러 알아듣지 못해 지루하다. 또 걸핏하면 일어서라 한다. 한번 세우면 오래 간다. 어질어질하고 다리도 아프며 엉거주춤한 게 불편하다. 손뼉도 쳐야 하고 번쩍번쩍 치켜들기도 한다. 다른 종교들은 집 가까이 나간다. 쓸데없이 다니던 교횔 고집하고 있다.
낯설어도 한참 지나다 보면 적응이 되고 큰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한 사람씩 또래 교우들을 사귀어야 한다. 그러다가 정들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영화 끝날 때 화면이 하얗게 되듯 없었던 것처럼 잊혀나 질까. 형제자매보다 더 오래 사귄 성도 가족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잘못 말이 이렇게 벌집 쑤신 듯 한집안을 발칵 뒤집어놓나.
시어머니 초상에 가장 많이 우는 며느리다. 남남인데 그리 슬피 우는가. 생전 못살게 굴며 힘들게 한 것을 대물려준 정이 고마워서다. 남달리 착하게 살아보려 애쓰는 지지고 볶았던 예배당 사람들이다. 다 여염집 사람이다. 봄날 쌓였던 응달 눈 녹듯이 사그라져 그래도 나갔던 곳으로 가보자 말이 기다려진다. 새로 더 높은 중구 복지관 건물이 들어서 남녘을 가려도 오붓한 십자가가 하늘로 치솟는다.
세로로 난 긴 곧은 믿음에 어긋난 짧은 가로를 안고 서 있는 십자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