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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좇는 삶, 파리와 뭐가 다를까”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오온의 감옥에 갇힌 자 | |
“오온·십이처·십팔계라는 세상의 감옥 탈출하려는 자가 수행자”
요즘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유튜브는 ‘감옥이야기’입니다. 올해 새롭게 발견한 미국의 교도소이야기입니다. 주로 살인이나 강간, 마약밀매 등 흉악범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와 달리 수감자들이 직접 출연하여 다큐 형식으로 제작된 것이기 때문에 감옥에서 삶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감옥다큐가 금년 1월부터 올려져 있습니다. 볼거리가 많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불자들이 스님들 살아가는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듯이, 감옥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흥미진진합니다. 불자들이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고 묻듯이, 수감자가 어떤 죄를 지어 들어 왔는지도 관심사항입니다. 이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한 번도 체험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큐 프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 하는 것입니다.
이제 두 편을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보아야 할 감옥이야기는 많습니다. 단지 두 편의 다큐만 보았을 뿐인데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수감자의 입장에서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라 봅니다.
감옥중의 감옥
감옥 중에 감옥이 있습니다. 독방입니다. 유튜브 ‘NGC 갱스터 파라다이스 교도소 24시 탈옥불가’에서는 독방생활을 보여줍니다. 지하에 11평방미터 가량의 작은 독방이 있는데 이곳에 수감되면 모든 자유는 박탈됩니다. 소리까지 차단된 독방에서 24시간을 보내는 자들은 단 1시간만 운동할 자유가 보장 됩니다.
독방에서 1년, 2년, 3년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이성을 잃기 시작합니다. 사람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어서 미쳐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벽이 조여 온다든가 환시와 환청으로 거의 미치광이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독방으로 가는 자들은 교도소 규율을 어긴 자들입니다. 사회에서 법과 질서를 어기면 감옥에 보내듯이, 교도소 내에서 법과 질서를 어기면 독방에 수감됩니다.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큰 징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에 ‘갱스터 파라다이스S4 E02 장기 복역수로 살아남기’가 있습니다. 독방에 갇힌 자는 “감금을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면 대부분은 마음을 고쳐먹죠.”라고 말합니다. 독방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딸에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감옥이라는 곳은 생각을 고쳐먹게 하는 곳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유를 박탈당했을 때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대부분 범죄는 전과자에 의해 저질러집니다. 범죄도 팔레토 법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의 80%는 20%의 전과자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통계가 이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수감자도 있습니다.
다큐에 따르면 형량이 60년 남은 자가 있습니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자는 면회가 유일한 낙입니다. 부모와 딸이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는 것이 유일한 삶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60년 형량이 남은 자는 운동을 하는 등 자기계발에 충실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가족과의 재회 순간을 위해 거듭나기 때문이라 합니다. 특히 딸과의 재회할 때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갱생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변화를 원하고 보다 나은 사람으로 발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면 설령 방법이 없다고 해도 할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갱생하기 때문이죠.”(한수감자, 갱스터 파라다이스S4 E02 장기 복역수로 살아남기)
아무 희망이 없는 곳이 감옥입니다. 희망이 있다면 하루 빨리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량이 50년, 60년 된다면 포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형량이 60년 남은 장기수는 단지 딸에게 변화된 모습을 주고 싶어서 좁은 독방에서 자기 계발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
유튜브 감옥 다큐를 보면서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감옥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여 있는 삶이라면 감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쇠나 나무나 밥바자 풀로 만든 것을
현명한 님은 강한 족쇄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석이나 귀고리에 대한 탐착,
자식과 아내에의 애정을 강한 족쇄라고 말한다.” (Dhp345, 전재성님역)
쇠로 만든 족쇄가 있습니다. 감옥에서 난동을 부리는 수감자에 대하여 손에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쇠사슬로 채웁니다. 족쇄를 채우면 도망가지 못할뿐더러 행동반경도 제한됩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단단한 쇠사슬이라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풀어질 수 있습니다. 또 쇠사슬은 칼로 끊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족쇄가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족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가 있습니다. 그것은 탐착과 애착이라는 족쇄입니다. 보석과 귀걸이 등 보석으로 이루어진 장신구는 탐착의 대상이 됩니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탐착은 쇠붙이로 만든 족쇄보다 더 강한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탐착보다 더 강한 것이 애착일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쇠붙이로 만든 족쇄는 성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족쇄가 아닙니다. 그 어떤 강력한 족쇄라도 칼로 끊어 버릴 수 있지만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라는 족쇄는 끊을 수 없습니다.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족쇄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착과 애착에 묶여 살아갑니다.
가죽 끈에 묶인 개처럼
탐착과 애착에 묶여 살아가는 한 이 세상은 감옥과 다름없습니다.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정해진 영역 내에서만 자유가 허용됩니다. 직장과 가정을 왕복하는 삶이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알고 보면 개가 개목걸이에 묶여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죽 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도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가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가게 되고, 만약 그가 앉으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앉게 되고, 만약 그가 누우면 막대기나 기둥으로 가까이 눕게 된다.”(S22.10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우리들이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와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오온이라는 감옥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에 감겨 따라 돌므로 물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형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태어남, 늙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에서 해탈하지 못한다고 말한다.”(S22.100)라고 말씀했습니다.
오온이라는 감옥
오온이라는 감옥에 묶여 있는 한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탐착과 애착이라는 강력한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커다란 바다가 마르고 닳아서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산의 제왕 수미산이 소모되고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광활한 대지가 소모되고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을 지라도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는 뭇삶에게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라고 나는 설하지 않는다.”(S22.99, 전재성님역)
윤회하는 요인에게 대하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특히 갈애에 속박되었기 때문에 윤회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속박이라는 말은 족쇄가 채워졌다는 말입니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는 집착입니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오온의 감옥에 갇혀 살기 때문에 괴로운 삶, 윤회하는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오온, 즉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감옥과도 같은 곳입니다. 누군가 50년 살다 죽으면 50년 형기를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60년 산다면 60년형을 받은 것이고, 70년 산다면 70년 형기를 받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삼계를 윤회하기 때문에 또 다른 집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멈추지 않는 한 영원히 삼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합니다.
집 짓는 자는 누구?
부처님은 오온이라는 집을 부수었습니다. 오온이라는 감옥을 부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표현 했습니다.
“나는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며
그러나 발견하지 못하고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니,
거듭 태어남은 고통이다.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꺾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3-15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집 짓는 자를 찾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집 짓는 자는 누구일까요? 게송에서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집 짓는 자는 ‘갈애’였습니다. 오온에 대한 집착, 자식과 아내에 대한 애착 등의 가장 가까운 요인이 갈애입니다.
부처님은 마침내 집 짓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갈애를 부수자 서까래가 부서지고 대들보가 무너졌습니다. 다시는 오온이라는 집을 짓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오온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존재를 윤회케 하는 열 가지 족쇄
존재를 오온이라는 감옥으로 붙들어 매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애착이라는 족쇄라 합니다. 마치 감옥에서 수감자에게 족쇄를 채워 형량이 끝날 때 까지 못 나가게 하듯이, 오온의 감옥에 붙들어 매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열 가지 족쇄라 합니다. 경전적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열 가지 결박이 있다. 열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과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분노이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자만, 흥분, 무명이다.”
(A10.13,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 ‘결박의 경(Saṃyojana sutta)’에 실려 있습니다. 초불연에서는 ‘족쇄 경’이라 했습니다. 열 가지 결박에서 앞에 세 가지, 즉 개체가 있다는 견해, 회의적 의심,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은 성자의 흐름(예류자: 수다원)에 들면 극복됩니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은 돌아오지 않는 자(불환자: 아나함)가 되면 완전히 극복됩니다. 높은 단계의 결박 다섯 가지는 거룩한 자(아라한)가 되면 모두 극복되어 오온의 감옥에서 해방됩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
평생 동안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무기수들입니다. 유튜브 감옥 다큐를 보면 무기수에 대하여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감옥에서 동료들에 대한 폭행도 서슴지 않고 심지어 교도관들도 공격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한 것입니다. 독방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옥중의 감옥을 독방이라 합니다. 수감자들은 독방에 갇히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홀로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감입니다. 홀로 있다 보면 벽이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고 환시와 환청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서서히 미쳐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모두 가지 않으려 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무기수들은 감방이 자신의 유일한 세계입니다. 마치 가죽끈에 묶여 있는 개와 같은 신세입니다. 그런데 답답해서 미쳐 날 뛰면 독방에 수감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독방에 들어가면 홀로 있기 때문에 대부분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독방은 ‘무문관’을 연상케 합니다.
바깥세상이야말로 감옥
불교에 무문관이 있습니다. 종종 불교TV 다큐에서 무문관 생활을 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또 스님들은 무문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문 없는 문’이라는 뜻의 무문관(無門關)은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고 진리를 깨닫고자 합니다. 오현 스님은 백담사 무문관에서 90일 동안 독방수행을 마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곳(무문관)이 감옥이 아니라
집착과 혐오에 사로잡힌
바깥세상이야말로 감옥이다.”
선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감옥이라 했습니다. 이유는 집착과 혐오라 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탐욕과 분노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감옥과 같다는 것입니다.
선사는 바깥 세상에 대하여 집착과 혐오에 사로잡힌 감옥이라 했습니다. 특히 ‘집착’이라 했는데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대하여 집착했을 때 오온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오온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것은 감옥이 좋아 감옥에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50년 형을 선고 받은 자가 50년 동안 감옥에서 보낼 때 보낼만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류가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켜 독방에 보내졌을 때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어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합니다.
무문관 수행을 하는 것은 내면을 보기 위함일 것입니다. 마치 독방에 수감된 자가 벽밖에 쳐다 볼 일이 없듯이, 무문관에 들어가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감옥에 갇힌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합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
오온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한 오온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오온이라는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온이라는 ‘집을 짓는 자’는 다름 아닌 ‘갈애’라는 것입니다. 집을 짓는 자를 발견 했을 때 서까래도 부서지고 기둥도 부서졌다고 했습니다. 윤회의 감옥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감옥에 수감되면 자유가 박탈됩니다.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사람들도 개의 신세나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식과 아내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있는 한 가죽끈에 묶인 개의 신세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들은 형량이 50년이 남았든 60년이 남았든 출소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노숙자들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노숙을 하는 것도 자유에 대한 갈망일 것입니다.
감옥임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합니다. 꽉 묶인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죽끈에 묶인 개처럼 직장과 집을 ‘왔다갔다’ 할 뿐입니다. 감옥과도 같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감옥 같은 세상도 살만한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감옥임에도 감옥임을 잊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맛지마니까야 ‘아누룻다의 경(M127)’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파리들이 막대나 바구니로 옮겨질 때에 ‘우리의 삶은 항상하거나 견고하거나 영원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 파리들은 어디에 머물든지 그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M127, 전재성님역)
파리들은 이곳저곳에 옮겨 다닙니다. 그런데 어느 곳을 가든지 기쁨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갈애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어쩌면 파리와 같은 존재들일지 모릅니다. 늘 즐길 거리를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초전법륜경에서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 라고 고집성제를 정의한 것과 같습니다.
갈애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갈애로 오욕락을 추구했을 때 당면한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파리가 이곳저곳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갈애 때문입니다. 인간도 윤회의 감옥을 잊어버리게 해 주는 것이 갈애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즐길 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환희하며(tatra tatrābhinandinī)”라 한 것입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감옥
독방과 감옥, 참으로 공통점이 많습니다. 감옥에서 난동을 부려 독방에 갇힌 자는 “감금을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면 대부분은 마음을 고쳐먹죠.”라 했습니다. 스스로 무문관에 들어 간 선사는 “집착과 혐오에 사로잡힌 바깥세상이야말로 감옥이다.”라 했습니다. 공통점은 홀로 벽을 마주 하고 있으면 내면과 만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감옥에 있는 자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합니다. 수행자는 영원한 자유를 찾고자 합니다. 수감자는 다시는 감옥으로 되돌아가고자 않기를 바랍니다. 수행자는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사는 자는 감옥을 탈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고자 합니다. 여기저기 즐길 거리를 찾아다니며 기쁨을 찾는 파리와 같은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감옥을 탈출하고자 합니다. 그 감옥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세상의 감옥입니다.
유튜브 다큐에서 60년형을 선거 받는 자는 딸을 만날 날을 고대하며 자기계발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60년이라는 긴 형기가 남아 있지만 갱생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60년이라는 형기가 끝났을 때 “감옥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라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산 자가 임종에 이르렀을 때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감옥으로 되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