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센터 초급 중학교에 다녔고, 데이브 형은 스트랫퍼드 중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스트랫퍼드 세탁소에서 일했는데, 세탁부 중에서 백인 여자는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가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 데이브 형은 과학박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제작했다. 우리 형은 색도화지에 개구리 해부도를 그리거나 플라스틱 장난감 벽돌과 색칠한 화장지로 ‘미래 주택’을 만드는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데이브의 목표는 원대했다. 그 해의 프로젝트는 ‘데이브의 슈퍼 막강 전자석’이었다. 형은 무엇이든 ‘슈퍼 막강’ 한 것을 좋아했고, 거기에 자기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절정은 ‘데이브의 삼류 신문’이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곧 다시 설명하게 될 것이다.
슈퍼 막강 전자석을 만들기 위한 첫 시도는 별로 슈퍼 막강하지 않게 끝났다. 사실은 아예 작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작품이 데이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책에서 나왔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전자석의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쇠못을 보통 자석에 문지르면 자성이 생긴다. 쇠못에 전달된 이 자력은 약한 것이었지만 약간의 쇳가루를 들어올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실험을 해본 다음에는 이 쇠못에 구리선을 친친 감는다. 그리고 구리선의 양쪽 끝을 건전지의 양극에 연결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전기가 자력을 강화시켜 훨씬 더 많은 쇳가루를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이브 형은 시시한 쇳가루 따위를 들어올리고 싶어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동차나 철도 화차, 더 나아가 군용 수송기 등을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데이브 형은 전기의 힘으로 이 지구를 통째로 돌리고 싶어했다.
우리는 이 슈퍼 막강 전자석을 제작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데이브의 역할은 그것을 만드는 일이었다. 내 역할은 그것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데이브의 새로운 실험은 초라한 건전지를 버리고 가정용 전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데이브는 누군가 쓰레기와 함께 길거리에 내다버린 낡은 스탠드에서 전선을 잘라내고 플러그에서 전선 끝까지 피복을 홀랑 벗겨낸 다음, 이 벌거숭이 전선을 쇠못에 친친 감았다. 그리고 웨스트 브로드 스트리트의 우리 아파트 부엌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나에게 이 슈퍼 막강 전자석을 넘겨주면서 내가 맡은 역할대로 플러그를 꽂으라고 했다.
나는 망설였지만 데이브의 광적인 의욕에는 차마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플러그를 꽂았다. 전자석의 자력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 장치는 우리집의 모든 전등과 전기 제품을 일제히 꺼버렸다. 더 나아가 건물 전체의 전등과 전기 제품이 작동을 중지했고, 옆동의 모든 전등과 전기 제품이 작동을 중지했다. 바깥의 변압기에서 뭔가 팍 터지더니 머지않아 경찰과 몇 명이 도착했다. 데이브 형과 나는 어머니의 침실 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며 조마조마한 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경찰이 떠나자 전기 수리반이 왔다. 스파이크 신발을 신은 남자가 두 아파트 건물 사이의 전봇대에 올라가 변압기를 살펴보았다. 다른 때였다면 넋을 잃고 구경했겠지만 그날은 경우가 달랐다. 우리는 과연 어머니가 소년원으로 면회를 와주실까 걱정하느라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침내 전기가 다시 들어오고 수리반은 떠나갔다. 우리는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위기를 넘긴 것이다. 데이브 형은 슈퍼 막강 전자석 대신에 슈퍼 막강 글라이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나에게 첫 시승의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정말 신나지 않은가!
나는 제멋대로인 동시에 대단히 보수적인데 이 두 가지의 성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애당초 <빌리지 보밋>을 집필하고 학교까지 가져왔던 것은 내가 지닌 광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말썽꾸러기 하이드 씨가 일을 저질러놓고 뒷문으로 슬쩍 도망쳐버린 것이다. 홀로 남은 지킬 박사는 내가 정학당한 사실을 엄마가 아시면 어떤 표정으로 쳐다볼지를 걱정해야 했다.
그녀는 V.I.B 1호 한 권을 말아쥐고 마치 양탄자에 오줌을 싼 개를 신문지로 위협하듯 나를 향해 휘둘러대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말이 아주 꾸지람만은 아니고 물음이기도 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할 말이 전혀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쓰는 작품들을 부끄러워하면서 꽤 오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시든 소설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발표한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게서 하늘을 주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듣게 마련이라는 것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마 마흔 살 때였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림이나 무용이나 조각이나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의 기분을 망쳐놓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나는 독서 속도가 느린 편인데도 대개 일년에 책을 70-80권쯤 읽는다. 주로 소설이다. 그러나 공부를 위해 읽는 게 아니라 독서가 좋아서 읽는 것이다. 나는 밤마다 내 파란 의자에 기대 앉아 책을 읽는다. 소설을 읽는 것도 소설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배움의 과정은 계속된다. 여러분이 선택한 모든 책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종종 좋은 책보다 나쁜 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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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람이 순결이나 동정을 잃은 순간을 기억하듯이 대부분의 작가는 어떤 책을 내려놓으면서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도 이것보다는 잘 쓰겠다. 아니, 지금도 이것보다는 훨씬 낫지!’ 한창 노력중인 풋내기 작가에게, 자기 작품이 실제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작가의 작품보다 낫다고 느끼는 것만큼 큰 용기를 주는 일이 또 있을까?
형편없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쓰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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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좋은 책은 한창 배움의 길을 걷는 작가들에게 문체와 우아한 서술과 짜임새 있는 플롯을 가르쳐주고, 언제나 생생한 등장 인물들을 창조하고 진실만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가령 <분노의 포도>같은 소설은 신진 작가들에게 좌절감과 더불어 저 유서깊은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나 같으면 천년을 살아도 이렇게 좋은 작품은 못 쓸 거야.’ 그러나 이런 감정들은 더욱 열심히 노력하고 더 높은 목표를 갖게 만드는 채찍질이 될 수도 있다. 빼어난 스토리와 빼어난 문장력에 매료되는 것은 모든 작가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이다. 한 번쯤 남의 글을 읽고 매료되지 못한 작가는 자기 글로 남들을 매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정말 독서와 창작을 좋아하고 적성에도 맞는다면, 내가 권하는 정력적인 독서 및 창작 계획도 –날마다 4~6시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서 그렇게 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좋다고 허락을 받고 싶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하라.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