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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은 시집 모양일까 - 김신용론 / 최라영
내 관은 시집 모양일까-김신용론
최 라 영
1.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김신용 시를 읽으면 그동안 평범한 일상인에게는 낯설었던
세계 속 사람들의 삶이 한 편의 사실적 다큐멘터리가 되어서 펼쳐진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 깡통을
놓고 구걸하는 사람들, 거리를 지나갈 때나 지하철을 탔을 때 구걸하며 지나가는 맹인 혹은 아이와
함께 구걸하는 사람들, 혹은 옛 서울역에서 부스스한 머리와 악취
나는 행색으로 밤잠을 청하는 노숙자, 부랑자. 이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지나치면서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잠시 짓다가
다시 우리의 생활권 밖으로 쉽게 잊혀지곤 한다.
아니, 우리가 잊고 외면하려는 사람들이다. 김신용은 우리의 시선 속에 단지 ‘아웃사이더’로서 포착된 그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들 속에 귀속되어 있으면서
그들의 보여지는 삶 이면의 비참한 삶의 구체적 실상을 연민이나 동정을 배제하고 사실적으로 형상화한다. 그가 이미 그 사람들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혹은 그들보다
더한 추락의 삶을 견뎌냈기 때문에
아마도 그에게는 연민이나 동정이 필요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우리가
일상인으로서 살 때는 알 수 없는 바닥 인생들의 비참한 사실적 군상들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태생을 ‘시궁쥐’가 아닌 ‘새앙쥐’로 비견하는데,
즉 자신이 최소한의 일상적 테두리의 소속 계층이었다고, 말하자면 집에 가면 따스한 잠자리가 있고 먹을 밥이 항상 있었다는 어린시절 그의 술회처럼 그는 적어도 우리가 분류한 사회계층의 테두리에 소속된
한 개인이었다가 갑자기 끝없는 나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는 1945년생으로 아버지를 잃고 13살부터 고아가 되어
서울로 올라와 부랑자 생활을 하였다. 1950년대는 6·25 전란으로 대다수가 실직자거나 굶어 죽는 이가 태반인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그는 고아가 되었고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소년원 생활을 하였으며 계속적으로 추락의 삶을 살았다. 그의 시는 그 끝없는 나락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나락을
함께 겪는 주변의 군상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한다.
그의 초기 시편들은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사진기자가 그 추락의 끝까지 사진기를 공중에 들이대며 찍는 것에 비견된다. 그의 시가 주는 낯섦 혹은 새로움이란 그 추락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경악감에서 먼저 비롯한다. 적어도 글쓰기, 시쓰기란
우리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생계유지가 가능한 자들의 영위 분야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하철
부랑자, 노숙자, 거지, 죄수 등의 실제적인 체험을 그들 중심의 시각에서 담아내고 주동적 인물로 내세우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의 시가 지니는 의의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기존 우리
문학에서 ‘노동자의 삶’이라 하면 ‘못 가진 자’,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보여주는 삶이란 우리의 분류 계층의 하위에 속하는 범주에도 근접하지 못하고 이들마저 부러워하는 ‘부랑자’, ‘거지’ 등이다. 즉, 문학작품 속에서 순식간에 지나가거나 엑스트라격인 사람들이 바로 주인공이
되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즉, 우리 사회의 계층구조를 반영하는 문학의 ‘빈틈’,
즉 사회구조적 그물망으로 포착되지 못했던 ‘정말로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현장르포나 고발적 사실 다큐멘터리의 세계와 흡사하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적 다큐의 요소에
그의 시의 진정성을 배가시키는 국면은 그가 자신의 자전적 체험 밑바닥까지 ‘솔직하게’ 드러내는 진실함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시적 언어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즉, 그의 시편에서 보여주는
낯선 비유어들은 시편 자체에서는 개성적이고 참신한 느낌을 주지만 알고 보면 매혈자, 지게꾼,
죄수들이 사용하는 ‘은어’나 ‘속어’로부터 근원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어휘적 범주로부터 그를 훌쩍 넘어서도록 하는 것은
그의 시에서 구조적으로 작용하는 비유와 상징의 축이다. 그의 시편에서 주로 구사되는 유추 범주는
그가 살아왔던 삶, 운명의 모습을 너무도 절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겪었던 주요한 업인 ‘쪼록꾼(매혈자)으로서의 삶,’ ‘구걸자로서의 삶’ 그리고 ‘지게꾼으로서의 삶’ 등은 그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해내는 주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새가 앉았다 떠난 나뭇가지의
공명에서 평생 지게를 등에 지다가 벗어놓은 자의 등에서 느끼는 ‘환상통’을 유추해내는 것이나
포도넝쿨의 자람에서 ‘수혈’, ‘매혈’의 행위를 환기해내는 것은 그의 지나왔던 삶과 시가 고스란히 혼연일체가 되는 진실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시집은 『버려진 사람들』(1988), 『개같은 날들의 기록』(1990), 『몽유 속을 걷다』(1998), 『환상통』(2005) 등 총 네 권이다. 그의 시세계를 관류하는 특성이자
시정신은 바로 자신을 포함한 소외된 주변 사람들의 사실적이고 생생한 형상들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진실한 연민이나 사회에 대한 비판, 분노가 배제된 측면이 있다.
즉, 전체적인 그의 시세계 흐름을 살펴볼 때 자신이 지나온 삶의
구체적이고도 진실한 기록에 너무나도 충실하다는 점과 그가 겪어온 삶만이 잡아 낼 수 있는
상상의 독자적 측면을 높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시를 써온 연륜의 시인들이 지니는
그만의 ‘정신적인 에너지’랄까, 인간이자 시인으로서 세계와 인간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측면을 잡아내기가 어렵다.
비판이나 분노마저도 적어도 아주 최소한의 여건이 갖추어져야 그에게는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삶과 죽음에 대한 상념밖에 없는, 죽음에 임박한 병자나
굶주림의 극한에 이른 사람이
여타의 감정이나 사상을 토로할 힘이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사실적이고 소외된 군상들의 생생한 현장세계는
기존 우리 시문학에서 다루어왔던 노동자, 자본가의 갈등이나 가난한 자의 삶을 넘어서
논외의 부표하는 인간들의 군상을 중심적으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리얼한 구체적 형상화를 통하여
그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또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인식과 비판적 각성을 일깨우게 한다.
그의 시는 비교적 일관된 시정신을 보여주면서도 변화의 흐름을 보여준다. 즉, 『버려진 사람들』 중심의 자기고백적 사실적 삶의 기록,
『개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를 중심으로 한, 주변 사람들의 고통 현장의 기록 그리고 『환상통』 중심의
자기성찰적 면모나 자기 삶의 상징화된 세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발가벗어야 한다./저기 시멘트의 벌판, 불모의 땅이 보이지. 네 풀씨의 넋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남들이 먹고 걷어차버린 깡통처럼/
쭈그러진 여인의 성기까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만 토하고 말았어, 내장이 뒤집혀지도록/토해라, 토해! 등을 토닥여주며 그는 속삭였어, 지금까지 네가 먹어온 것/순한 토종개처럼 입고 배워온 것, 잘 길들여진 눈물과 체온들을/그 토닥임 따라 꾸역꾸역 게워내고 있었어,//
눈을 떴을 때/타는 구토의 목을 축인 방화수통의 거뭇한 물 위에는 퉁퉁 불은 쥐새끼 한 마리가/허어옇게 배때기를 까뒤집고 있었어.
―「어둠에 대하여」 부분
시든 혈관 속을 다시 흐르게 하고 싶어, 단돈 팔백 원의 수수료를 얻으려고/정관 수술대에 누운 내 텅 빈 스물두 살의 알몸,//하얀 시트가 깔린 이 땅, 저 겨울의/
神의 메스, 추위가 지나간 자리/목이 잘린 내 꿈의 정자들, 해의 백열등 아래서/어떤 살을 갖다 붙여도 사람 형체가 될 수 있는 뼈다귀 하나로/파아랗게 돋아나고 있었다. 그 어두운 학살의 땅엔/
흰 壽衣를 펴들고 막 첫눈이 내리는데……
―「작은 告白錄」 부분
옴꽃이 피어/고름 뚝뚝 떨구는 두 손을 내밀었지/
텔레비전 카메라 앞으로, 마치 구걸을 하듯/골목은 깊고 어두웠지만, 저 기계의 눈에/비참의 사타구니까지 보여주고 싶었어/
눈부신 조명 불빛 아래/轉落의 고향까지 밝혀/더이상 나락일 수 없는 세상, 저 앵글의/
허어연 백태가 낀 눈에 인각시키고 싶었어/이 도시의 신경, 보이지 않는 무선을 타고/
꺼진 브라운관의 가슴들 속에 눈물을 켜고 싶었어/콘크리트의 살갗에 옴꽃으로 피어 있는 이들/아무리 고름 흘려도/
피고름을 흘려도, 간지럽다고/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는 서울, 이 시멘트빛
―「저 기계의 눈에 골목은 깊고 어두워」 부분
위의 시편들은 그가 13세부터 부랑생활을 하면서 겪은 끝없는 추락의
정거장과 같은 징표들을 보여준다. 「어둠에 대하여」는 서울역에서 굶어죽기 직전의 자신에게
누군가가 시장의 쓰레기 더미 속 밥찌꺼기와 생선 뼈다귀를 먹도록 해주었고 그것으로 자신의
허기를 채웠던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목을 축인 방화수통의 물 위에서
물에 불은 쥐새끼가 떠 있는 것을 본 장면이다. 이 시편은 그에게 부랑의 통과의례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굶어서 죽을망정 구걸이나 쓰레기를 뒤질 생각을 못하던 시인에게 그가 살 방향을 고통스럽게 제시해준 대목이다. 그는 ‘발가벗어야 한다 네 풀씨의 넋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모든
버려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나이의 말을 지키며 그의 삶을 산 셈이다.
「작은 告白錄」은 좀 더 한 단계 더 추락한 한 지점을 보여준다.
피를 팔아서 생을 연명하고 피를 팔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구걸로 연명하던 시인은 22살의 나이에
‘팔백 원의 수수료’를 받기 위해 정관 수술대에 누웠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일명 ‘쪼록꾼’으로서의 그의 삶은
그의 시세계 전반에 ‘수혈’, ‘채혈병’, ‘바늘’, ‘빈혈’ 등과 관련하여 주요한 비유적 어휘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 기계의 눈에 골목은 깊고 어두워」는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나락의 끝이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그 바닥의 끝을 의심할만한 지점에까지 내려간 화자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쓰레기 더미와 생활하다 심한 옴에 걸려 전신에서 고름을 흘리던 시인은 ‘우리 추락의 내력을 캐내어, 저 모닥불 같은 내일을 마련해주’겠다는 보도기자의 말에 ‘고름 젖은 손을 더욱 뜨겁게
피워올렸’지만 다음 날 부랑자 단속자 강제노역의 갱생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초기 시세계는 그의 삶의 나락이 끝없는 것임을, 마치
지진으로 균열 난 땅의 깊은 틈바구니 속과 같은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의 시에서는
세상에 대한 분노나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그저 자신이 당하는
대로 그 삶을 제 것인 양 수용하고 수락하면서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인간의
끝없는 비참의 나락을 담담히 술회한다는 것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나락의 끝없는 무한궤도에서 그는 그 나름대로의 휴식과
안식처를 얻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휴식과 안식을 얻는 곳과 상황은 보통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것조차 나락의 한 장면으로 보일 것이다. 즉, 그는 그의 부랑자 입사식 격인 ‘쓰레기를 먹으며 사는 방식’을
가르쳐주었던 ‘그’의 말대로 ‘모든 버려진 것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방식을 배웠던 것이다.
내 뻥 뚫린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머리 위/
작은 창에는, 거미줄에 죽은 날벌레가 흔들리고 있었어. 그 밤./내 몸에서 풍기던,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악취는/
그 밀폐의 공간 속에 고인 악취는 얼마나 포근했던지/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네. 마약처럼/
하얀 백색가루로 녹아서 내 핏줄 속으로 사라져간/그녀,/독한 시멘트 바람에 중독된 그녀./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그녀의 품 속밖에 없네.
―「공중변소 속에서―개같은 날의 연가」 부분
계간을 하다 독방에 갇힌 무기수의 새 한 마리/
창살 밖으로 아무리 날려 보내도 되돌아오는 새/밥알을 씹어 먹이를 주어도 끝내 거부하며 굶어죽어간 새/그 불가사의한 죽음에 머리 갸우뚱이며/다마를 박으며, 배 터진 개구리의 뜨거운 피를 탐닉하며/
마치 이카루스처럼/그렇게 나래를 만들며, 출감 때/해를 향해 날아오르고 싶어 꺽꺽거렸다//
영혼이라는 올가미에 목을 매달고……
―「꿈꾸는 자의 잠」 부분
의식 없이도 살 수 있는, 마비의 나라로 가는 통과의례처럼/밤의 전라도 밥집 골목으로 들어서면 보였다./빛깔도 냄새도 없는, 연탄가스가 펼쳐주는 마비의 세계―/
자동차와 가로수가 성교를 하고, 하늘과 굴뚝/집과 아스팔트가 혼음을 하는 그 몽유도원,/
그 몽유의 나라를 떠돌며, 새로 조립된 그 세계의 질속에/나는 온몸으로 성기가 되어 처박히곤 했다.
―「어두운 기억의 거리 2―전라도 밥집 골목」 부분
그가 나락의 가운데서 휴식과 인식을 얻는 장소는 주로 ‘기차역’, ‘공중변소’, ‘감옥’ 등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공간은 뿌리를 박고 사는 일상인들에게는 ‘집’과 거리를 두는 비일상의 공간인 것이다. 먼저 「공중변소 속에서」는 더러운 공중변소 속에서
마약 중독자인 여성과 성을 체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지금도 내 돌아가야 할 고향. 그 악취 꽃핀 곳
그녀의 품 속밖에 없네’라고 술회한다.
그리고 「꿈꾸는 자의 잠」은 감방에서 자신의 몽상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감방에서 겨우 그는 그 나름으로 꿈을 키울 공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새’란 그가 감옥에서 그의 성기에 끼워넣은 다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다시 사회로
나와서 좌절의 나날을 보내다 22살의 나이에 굶주림의 끝에 정관수술비를 타려고 정관수술을 한 이후
‘병 속의 새’ 혹은 ‘황소의 뿔’이라 불렀던 자신의 꿈의 상징이었던 성기 속 ‘다마’를 빼내어 버린다. 그가 그의
시에서 자신을 ‘寒苦鳥’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매우 적실한 측면이 있다. 뻔히 앞으로의 삶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꿈을 꾸면서 또 끊임없이 좌절하며 사는 것이다.
「어두운 기억의 거리」는 그가 추위에 못 이겨 식당 문 앞의 연탄화덕을 안고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의식이 몽롱한 ‘마비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라면 혼절의 체험인 이것이 그에게는 ‘몽유도원’ 격이다. 그리고 그의 소설 속 기록에서도
보듯이 연탄가스에 중독된 체험은 그다지 불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비의 세계’는
그에게 주어진 현실을 망각하고 의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기에 그에게는 잠깐의 휴식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그는 끝없는 나락의 궤도에서의 휴식을 ‘공중변소’, ‘감옥’, ‘의식 마비의 세계’ 체험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일상인의 논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겠지만
도대체 그가 체험했던 나락의 바닥은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2. 지게 멜빵만은 불길 속에서 건져내면서
『버려진 사람들』 이후 『개같은 날들의 기록』과 『몽유속을 걷다』에서 두드러진 점은 자기고백적 삶의 기록 외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다양하고도 사실적인 삶의 모습을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그의 시편이 단순히 자기 체험의 솔직한
고백 범주를 넘어서는 것도 이러한 비참한 사람들의 삶의 생생한 형상화를 통한 관찰 내지 고발 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그의 나락의 심연은 끝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나락의 끝에서 그는 한 가닥 삶의 의지를 잡게 된다.
“당신은 이제 피를 뽑으면 죽어요. 아시겠소? 당신은 피를 뽑을 것이 아니라 피를 집어 넣어야 하는 환자란 말이오. 환자. 내 말 알아듣겠소?”/
뒤에 서 있던 쪼록꾼들 속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웃지 마! 시펄놈들아―. 너희들도 머지 않았어.”(……) 그러나 그 끊어진 길에서 나는 보았던 것이다./
지게는 눈에 반쯤 덮여 있었다. 이 땅의 경제발전의 상징인 듯 솟아오르고 있던 S빌딩 신축 공사장의 쓰레기 더미 곁, 지게는 수의를 덮고 있었다. 아니, 그 수의를 미사포처럼 쓰고 있었다.
―『달은 어디에 있나 2』 부분
모닥불이 꺼져갈 즈음, 그는/갑자기 지게를 부수기 시작했다./
돌을 주워 들고, 절망이듯/지게를 내리칠 때마다 뼈 부서지는 소리는/잿빛 암울한 허공에 손톱자국을 긋고 있었고/
겨울 짧은 해/엷은 햇살이 비껴 흐르는 청계천/불씨만 남은 모닥불 곁에 웅숭거린 막벌이꾼들은/
알을 낳듯 찌푸린 얼굴로 말이 없었다./서울 지게꾼 반평생에 남은 것은 골병밖에 없다고/
자신도 모르는 그 발작에도/제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느꼈을까. (……) 내일이면 母川으로 되돌아올 어쩔 수 없는/
그의 回歸를 위하여, 순간이나마/허망을 뜨겁게 불태워준 그 뼈의 반란에/몸을 맡긴다./
어떤 무거운 짐도 버티게 해줄 지게 멜빵만은/불길 속에서 건져내면서……
―「청계천詩篇 2―관절염」 부분
그는 ‘쪼록꾼’으로서 자기 포기의 삶을 살다 마침내 다시 피를
뽑으면 죽는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는다. 그 나락의 끝에서 그는 지게를 만들어 등에 건다.
그의 인생의 제 2의 직업인 ‘지게꾼’으로서의 그의 삶이 상징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게’란 그의 ‘등뼈’처럼 여겨질
정도로 그리고 지게를 지지 않으면 지게가 마치 등에 있는 듯한 ‘환상통’을 느낄 정도로 지게는
이후 그의 삶의 한 분신이 된다. 일명 ‘쪼록꾼’과 관련하여 시에서 그의 비유축이 주요하게 나타난 것처럼 ‘지게꾼’과 관련한 ‘등뼈’, ‘관절염’, 등의 비유도 주요하게 나타나는데 ‘지게꾼’과 관련한 비유는
그의 삶의 주요 상징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위 시에서 ‘그’라는 한 지게꾼이 자신의 지게를 부수는 장면에서
‘우리’로 표상된 ‘지겟꾼들’은 마치 ‘제 몸이 부서지는 아픔’을 느낀다. ‘우리’는 부서진
그 잔해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면서 ‘어떤 무거운 짐도 버티게 해줄 지게 멜빵’만은 불길 속에서 건져낸다.
지게를 부순 그의 반란을 시인은 ‘뼈의 반란’이라고 명명한다. 자신의 ‘등뼈’로 주로 비유되는
지게와 지게꾼으로서의 시인의 삶은 끝없는 나락에의 어둠 세계에서 더 이상은 추락하지 않으려는
삶의 의지의 한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와 같이 나락의 길을 걷는 혹은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삶의 사실적 형상들을 너무도 자연스런 목소리로서 포착해내고 있다.
푸른 하늘이 갑자기 여우 웃음을 울기 시작했다/
요강 탱크가 그렁거리고 베개 폭탄이 터지고/
냄비가 낮게 비행하며 기총소사를 퍼붓는 중세의/
무덤 속 같은 복도에는 이호실 찐다가 소아마비의/
다리를 절룩이며 비닐 우산을 팔러 뛰어 나가고/
당시인은쓰리꾸운나느은또옹갈보기부니나빠서한자안했다와유감있나이시발녀니또지랄하네/육호실은 이윽고 육박전이 벌어지고 옆방/
검은 안경 부부의 연습용 이미자는 눈치도 빠르게/찬송가 소리로 싹 변하고
―「陽洞詩篇1―소나기」 부분
분장을 한다/목발을 짚은 다리에 붕대를 감고 義手를 낀다/믿어줄까? 겨울에는 반신반의의 물음표가 떠오른다/좀 더 야비해지기로 한다. 일당만 주면 임대해주는/
아이를 등에 업고, 서울에서 가장 불쌍한 아비가 되기로 한다/
흰 붕대에 가짜 피의 머큐롬을 칠하고, 남루를 깊게 눌러쓰고/아이에게는 수면제를 탄 드링크를 먹이고
―「一人 전쟁」 부분
이래봬두 남대문 콩고리패 댓빵꾼이라구! 그러나/
결정적으로 서커스에 밀린 남사당패꼴로 만든 것은 바로 저 레미콘 때문이었어, 저 콘크리트 알을 낳는 기계닭/
저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버리는데 우린 뭐/할 게 있어야지, 내 참 드러워서…… 삽자루 꺾고 말았지/
저 기계한테 이길려면 저놈 올라타고 마누라 몰듯 해야 하는데/그러나 어쩌겠소 배운 도둑질이 이짓뿐인데……/
그렇다고 술만 축내고 있음 어떡하느냐구? 젊은 친구, 노가다밥 더 먹어야겠구만―/
이게 술인 줄 아슈? 이게 바로 깡다구요, 깡다구!
―「다시, 酒店에서」 부분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양동이 이 땅의 조그만 종기일 때부터/
곪아 난치의 환부가 되어버린 오늘까지/하루도 거르지 않고 뼉다귀를 고으며 늙어온 할머니의/뼛국물을 할짝이며/
우리는 얼마나 그 국물이 되고 싶었던지/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분신하고 싶었던지
―「陽洞詩篇 2―뼉다귀집」 부분
「陽洞詩篇 1―소나기」는 시인이 사는 양동 판잣집의 얇은 위아래
그리고 옆 벽을 너머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하여 사람들의 삶의 사실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나기가 내리는 가운데 이호실 찐다가 소아마비 다리를 절룩이며 비닐 우산을 팔러 나가고 육호실은 부부
육박전, 옆방 검은 안경부부의 연습, 십호실의 화투장 소리, 집주인 뚜쟁이 뭉치의 악착같은 골목 서성임 속에서 시인은 더러운 화장실로 뛰어간다.
「一人 전쟁」은 일당만 주면 임대해주는 아이를 등에 업고 목발,
다리, 붕대, 의수 등의 분장을 하며 깡소주로 얼굴에 철판을 깔려는 사나이가 그냥 골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酒店에서」는 한 노동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하여 ‘서커스에 밀린 남사당패꼴’로
된 자신의 처지를 ‘콘크리트 기계’와 ‘레미콘’에 밀려 깡다구로만 버티는 ‘잡부’가 된 사연을 보여준다.
산업화, 기계화로 자신의 일을 잃은 노동자의 삶의 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이러한 ‘노가다꾼’조차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즉, 그는 사회의 구조 하층에도 낄 수
없었던 처지였던 것이다.
「陽洞詩篇 2―뼉다귀집」은 할머니 뼉다귀집의 한 풍경을 보여준다.
새벽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주운 돼지뼈를 고아서 파는 뼉다귀집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고
걸레의 구정물이 흥건한 식당으로서 그가 시와 소설에서 형상화하는 사람들 즉 ‘날품팔이, 지게꾼,
부랑자, 쪼록꾼, 뚜쟁이, 시라이꾼, 날라리,
똥치꼬지꾼’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사회의
저층에도 편입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시인이 뼉다귀집에서 부러워한 것은 ‘그 국물’이다.
즉, ‘뼈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솥 속에서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하는 것이다.
위의 시편들은 각각 자신과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의 아웅다웅 사는 각양의 모습,
한 위장 구걸꾼의 준비 풍경, 한 노동자의 전락의 술회,
이들 부랑자들이 모여드는 뼉다귀집의 풍경 등이다. 일상인에게는 낯설겠지만 시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웃의 표정들이었던 것이다. 그
런데 이러한 형상화에서 시인은 어떤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적 표현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점이 그의 사실적 형상화를 더욱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치 현장 르포나
허구적이 아닌 사실적 장면을 구축하여 더욱 리얼하게 독자에게 다가오도록 한다. 이것은 이들보다 더
아래의 바닥까지 빠져간 시인의 연륜이 이들의 삶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서술하게 한 서사의 힘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편에서는 어떤 작위적 결말이나 희망이나 구원의
표정 등을 볼 수 없다. 그저 그가 체험한 대로 보이는 대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릴 뿐이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고통받는 현장을 담아내고 기록하고자 하는 ‘사진기자’의 정신과 유사한 것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현장과 사람들의 선택적 찍기나 편집,
강조해야 할 부분 등의 간접적 장치망을 통하여 자신의 의식을 드러내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참의 사타구니’까지 세상에 고발하고자 하는 ‘고발정신’을 기저로 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특기할 부분은 과거 우리 사회에서 막노동꾼이나 청소부하면 사회 저층으로 인식되었는데 여기에 편입되기를 갈망하나 그것마저도 얻지 못하는
부표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점이다. 청소부를 부러워하거나 현장에서 막노동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장면은 그의 시나 소설 속에서 여과 없이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가 고아가 되고 부랑자가 된 시기가 1950년대
후반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후의 척박한 현실을 개척해나가기에 어린 그는 나약하였고 생의 의지가 결핍되었었다.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의 나락을 끊임없이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면서
‘다시 피 뽑으면 죽는다’는 의사의 말에 비로소 지게꾼, 즉 삶의 의지 한 가닥을 보여준 것이다.
3. 내 뼈의 가지에는 寒苦鳥가 울고 있다
『개같은 날들의 기록』과 『몽유 속을 걷다』에 이어 『환상통』의 시기에 이르면 그의 시세계는 다소의 변화를 보여준다. 즉,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디테일의 형상화가
사라지면서 추상화된 상징이나 자기반성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담담하고 감정개입 없이
기술되던 그의 시작 방식은 어느 정도 자기연민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시가 지녔던
비참한 사람들의 고통 받는 군상들의 얼굴표정들은 엷어지고 그것이 추상화된 상징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일상 혹은 자연의 한 부분을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시키는, 우리가 접하는 다른 서정시인들의 시 형상화 스타일과 유사한 면모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후기시의 형상화에서 두드러진 점은 모든 사물들과 자연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읽어내는 점이다.
내 무정란의 폐수가 그대 청정해역을 적신다//
폐사한 조개껍질들이 빈 무덤을 이룬다//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빨이었고 손톱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에는 갑각류의 짐승이 기어나온다//나는 끊임없이 내 속의 아이의 목을 비틀어야 했다
―「赤潮」 부분
2/지금/그 드므에 내 얼굴을 비쳐보면 어떨까?/썩은 물웅덩이 같은, 생선 뼈다귀 하나 없는 늙은 死海 같은 얼굴을 보고/나도 놀라 도망칠까?//
내 의식의/위장병이며 소화불량인, 그 정신의 유문 협착증세가 만들어낸/곰팡이 핀 빵이거나/노상방뇨의 오줌자국 같은 얼굴들―.//
3/지금 내 시쓰는 일은/그렇게 드므에 얼굴을 비쳐보는 일
―「드므가 있는 풍경」 부분
「赤潮」는 자신의 오줌을 ‘무정란의 폐수’와 연관시키고 나아가
‘적조’와 연관시켜서 ‘죽음의 띠’를 연상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빨이었고 손톱이었다’, ‘내 눈에는 갑각류의 짐승이 기어나온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 관한
혹은 자신의 일부에 관한 형상화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불결한 것에 주로 견주어 표현하고 있다.
「드므가 있는 풍경」에서 그는 처마 밑에 빗물이 고이도록
놓아둔 넓적하게 생긴 독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썩은 물웅덩이 같은 생선 뼈다귀 하나 없는 늙은 死海 같은 얼굴’ 혹은 ‘곰팡이 핀 빵이거나 노상방뇨의 오줌자국 같은 얼굴들’이라고 표현한다. 그의 후기시에서
두드러진 것은 이와 같이 자기반성적 자기성찰적 면모이다. 그리고 자신의 시쓰기의 의미에 대하여
자각적으로 인식하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시쓰기를 ‘드므에 얼굴을 비쳐보는 일’이라고 표현하는데 그의 시쓰기는 실상 다른 시인들의 시쓰기와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그가 추락한
나락의 세계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즉 그 추락의 심연, 어둠의 세계를 좀 더 확연하게 형상화하는
‘글쓰기를 통하여’ 그 세계로부터 정신적인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굶으면서도 책을 사고 시를 쓰는 것, 나아가 그가 내던져진 추락의 주변세계를 파헤치고 드러냄으로써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지하 군상들을 지상의 세계에 적나라하게 찍어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각성과 인식을 유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지하 속 어둠 세계에서 지상 세계의
여느 시인들의 시보다 공명을 주는 독특한 자리에서 빛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라, 온몸 비틀어지는 포도나무처럼 걷고 있다/
고뇌의 가지를 비틀어 올리는 뿌리, 돌보는 이 없어도/넝쿨에는 미숙아 같은, 영양실조의 포도알들이 꿈처럼 그렁 맺혀 있다/
봄볕은, 그 빈혈의 가지에 수혈의 주사기를 꽂고 있지만/벌거벗은 벌판이 자꾸만 아스팔트처럼 자라나/
독풀들, 그 흡혈의 이빨이 더 무성하다/저녁 어스름이 벌판 위에 제초제처럼 내리고/
희망은, 길의 끝에 무덤을 만든다/모든 길의 끝에는 무덤이 있다/지금 혼자 걷는 내 산책길의 끝,
무덤가에 서면/땅거미 속으로 협궤 열차는 또 망초꽃 가득 싣고 흘러가고/곡괭이로 시를 쓸 수 있는
세계를 향해 나는 걷고 있는가?/내 뼈의 가지에는 寒苦鳥가 울고 있다
―「내 뼈의 가지에 寒苦鳥」 부분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나오는 그 환상통,/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뼈였다/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등뼈,//
언젠가/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내 등은,/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 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환상통」 부분
위 두 시편은 ‘寒苦鳥’와 ‘환상통’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詩作의 주요 제재로 취하고 있다. ‘한고조’는 인도 히말라야 산맥에 산다는 상상의 새로서 이 새의 암컷은 추운 밤에 추워 죽겠다고 울고 수컷은 날이 새면 집을 짓겠다고 울다가도 날이 새어 따뜻해지면 집 지을 생각을 잊고 놀고 지내기를 되풀이한다고 한다. 그리고 ‘제 살 제가 먹고, 끝내 제 흔적마저 먹어버린다는 寒苦鳥,/
그 입술이 붉은 새가 지천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부목일기 2」 부분)는 그의 시구절이 있다.
‘한고조’는 삶에의 수동성과 ‘쪼록꾼’으로서 매혈하며, 즉 자신의
몸의 일부인 피로 밥을 사먹으며 그러한 삶 때문에 빈혈로 죽기 직전까지 갔던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환상통’은 ‘쪼록꾼’으로서가 아니라 삶에의 일말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지게꾼’으로서의 그의 삶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자신의 등에 접골된 등뼈와 같았던 지게를 부수고’ 나서 ‘텅 빈 공터’와 같은 상실감을 ‘환상통’으로 보여주고 있다. 환상통이란 그 증세의 원인이 사라졌는데도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듯한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한고조’와 ‘환상통’은 쪼록꾼, 매혈로서 생을 연명했던
수동적인 그의 삶과 그 비참한 삶의 바닥끝에서 지게꾼으로서 연명했던 그의 삶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제재들이다.
이와 같이 그의 후기 시편에서 두드러진 측면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 그리고 주변의 제재로부터 사유의 연상작용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즉 그는 과거처럼
그가 대하는 주변의 사람들과 풍경을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입담으로써 충실히 재현하는 사진기자와
같은 시선을 접고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하여 사유와 연상작용을 중심으로 한 반구상 화가와
같은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세계에서 그의 비유와 상징의 중심어구의
축은 쪼록꾼이자 지게꾼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늘 반영되어 있다. 단적으로 위의 전자 시편에서도 포도나무에
포도알이 열리는 모습을 ‘영양실조의 포도알’, ‘빈혈의 가지에 수혈의 주사기를 꽂고 있지만’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후자의 시편에서는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에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는’ 모습에서
지게를 벗고 환상통을 앓는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켜 나간 것이다.
즉, 그의 시 속에서 그가 연상하고 사유하는 중심축은 너무나 강하게
그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한고조’와 ‘환상통’이외에 그의 삶을 또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얼음 물고기’이다.
이 얼음 나라에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 얼음의 물고기가 산다/
한여름에도 눈을 얼어붙게 하는 혹한의 나라/
땡볕 속에서도 귀를 먹게 하는 빙하가 흐른다/
살아 있는 것은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다/얼지 않으려고 살아 펄떡펄떡 뛰는 것은 죽는다/
핏줄도 심장도 오장육부까지도 얼음이 되어야 살아남는/여기는 불 속의 얼음 나라/질긴 근육과 끓는 뼈는 잠재우고/
동태가 되어, 동태눈깔로 숨을 쉬며/미라가 되어야 살아남는다.
―「냉동공장」 부분
‘생태’보다 ‘동태’를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즉 냉동의 장기간 보관 원리에 빗대어 세상을 ‘냉동공장’에 견주어 서술하고 있다. 즉, ‘망각의 미학’속에 투신해야, ‘세 끼 밥 등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하기 위해 색맹이 되어야’ ‘씨 영그’는 사회, 의식상 ‘얼음’과 같은 무감각 상태가 되어야
살아남는 얼음의 물고기만이 살아남는 사회를 빗대어 형상화한 것이다.
즉, 시인도 이 냉동공장의 얼음 물고기가 되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시인 김신용은 냉동공장의 얼음 물고기라고 누구나 생각했던 그 얼음 물고기가 초자연적인 의지의 힘에
의하여 갑자기 살아나서 헤엄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물고기가 오래 살면 실명해버린다는
둥근 어항과도 같은 모순적 현실 속에서 눈을 질근 감고 얼음 물고기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이 얼음 물고기가 아님을 보여주면서 둥근 얼음 세계 밖으로 펄쩍 뛰어오르기의 사투를 감행하는
끈질긴 생명력과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다.
눈을 부릅뜨고 얼음 어항 밖으로 탈출을 시도한 얼음 물고기가 바로 김신용 시의 의미이다.
끝없는 추락과 모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 자신이 그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관찰한 어둠의 세계를 혼신의 힘을 다해 고발, 폭로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운명이 ‘쪼록꾼’이나 ‘지게꾼’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이 시대의 ‘진정한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귀결되고자 한다.
시인 김신용에게는 다른 여느 시인들이 줄 수 없는 어떤 강한 메시지가 있다. 1950
년대 상황 하에서 고아가 된 한 인간이 얼마나 깊은 나락의 끝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나락의 늪에서 그 어둠의 늪을 헤엄치고 있는 삶의 군상들을 눈을 크게 뜨고 얼마나 열심히 관찰하였는지,
그리고 그 나락의 늪을 끝까지 구석구석 파헤쳐 보여주는 솔직한 글쓰기를 통하여
그가 속하기를 염원했던 사회의 구조틀 속 지상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도달하기 힘든 처절하고도 진실한
시의 晶體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번뇌는 별빛’이라는 종교적 승화의 시구절을 가장 구체적인 표정의 글쓰기로써 보여준 시인이 김신용이다.
만약
내 관을, 아프리카 사람들이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지금 시인이므로 시집 모양일까?
―「벌거벗은 棺」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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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라영 2002년 〈서울신문〉 등단. 저서 『김춘수 무의미시 연구』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