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부모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비난을 받으며 자존감을 잃고 방황하게 해서 미워하며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까? 마귀의 원대로 미워하며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자녀들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자녀 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아비들아"라며 아버지만을 언급합니다. 이는 아버지가 가정의 대표이므로 가정 교육의 전적인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대체로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버지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다는 명목아래 가정을 팽개치다시피 하고 어머니가 자녀 양육을 혼자 떠맡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들은 가정의 방관자로 지내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재판관으로 돌변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못되면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은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웠길레 저 모양이냐?"라고 하면서 재판을 시작합니다. 만약 재판을 거부할 경우, 괴씸죄까지 씌웁니다.
그러나 자녀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며 회개하는 아버지를 둔 가정은 주 안에서 희망이있습니다. 성경을 알고 있다면, 자녀가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책임이므로 자신이 말과 행동으로 잘못 보여주며, 잘못 양육한 것을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머니의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아비들아"라고 했지만, 이것은 아버지가 가장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그 말 속에는 엄마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들을 교육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이며,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주의할 점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보여도 아이들 역시 죄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자기의 죄성과 욕망을 통제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부모의 적절한 통제를 받지 않고 자란 아이들을 보면 행동하는 것이 버릇이 없고 불쾌감만 줍니다.
그래서 부모는 반드시 자녀들의 욕망을 적절하게 통제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회초리를 들기도 해야 합니다. 만일 자녀가 부모로부터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성장하여 사회 생활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초리를 들 때에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감정이 들어가면 아이를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화풀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징계할 때, 감정이 앞서서 아이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비이성적이거나 혹은 너무 무섭게 하면, 아이는 분노하게 됩니다.
부모가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며 소리를 질러대면, 아이는 그것을 배울 뿐만 아니라,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의 귀를 닫게 되므로 어떠한 말도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또한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부모에 대한 복수심까지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이를 바로잡기는 커녕 그 안에 있는 죄성에 더욱 자극을 주어 자녀의 상태를 더 악화시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알듯이 적극적인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를 때리거나 죽이는 등 폭력적이 되며, 소극적인 아이들은 술과 담배, 마약, 섹스, 도박, 무서운 영화나 게임 및 그림 등에 빠져 들어가거나, 매사에 책임감이 없고 게으르고 될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살아갑니다.
"격노케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로 “자극시키지 말라”(do not embitter)는 의미입니다. 자녀에 대한 징계는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적절해야 합니다. 아이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분노만 쌓이게 하는 것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를 분노케 하는 태도나 말, 행동을 피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부모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처럼 무조건적이며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또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고 있는 부모라면, 자녀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긴 것임을 알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책임있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양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자녀들이 왜 부모를 향해 화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 다양하게 나와있습니다.
첫째로, 편애입니다. 이삭 부부는 서로 다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렇게 한쪽으로 사랑이 기울어질 때에 자녀들은 상처를 받고 형제애에 금이 갈 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취향에 꼭 맞는 남성스러운 에서가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주려고 하다가 그것을 알게 된 리브가와 야곱은 남편과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합니다.
부모의 편애로 인해 벌어진 장자권의 싸움은 에서로 하여금 쌍동이 형제 야곱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자기 뜻대로 자녀를 양육한 결과, 아내와 아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아들끼리는 원수가 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남은 아들마저 멀리 떨어져서 보지도 못하고 살아야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또한 이삭의 아들 야곱은 12아들 중에서 특히 요셉을 편애함으로 나머지 아들들의 분노를 초래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동생 요셉을 팔아먹음으로 발산했습니다.
둘째로, 지나친 방임과 무관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 교육에 있어서 만큼은 실패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지극했지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나 형제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어떻게 자녀를 교육해야 하는 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는 들에서 양을 치며 살았기 때문에 싸움이나 양을 다루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에는 많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부모 형제들로부터 방치되어 살았습니다. 그결과 그 역시 그의 자녀들을 그렇게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암논이 그의 딸 다말을 건드린 사건을 듣고 혼자 화를 냈을 뿐, 아무 벌도 내리지 않고 아무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말과 그의 오빠 압살롬은 매우 분노하여 때를 기다렸다가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다윗은 암논이 죽은 것만 슬퍼할 뿐 압살롬을 잡아오라는 등의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세월이 흘러 압살롬을 다시 데려온 다윗은 그를 용서하지도, 벌을 주지도 않고 내버려 둡니다. 그것이 압살롬에게는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을 사람을 보냈지만, 아무 대답이 없자, 요압의 밭에 불을 지릅니다. 방치해 둔다는 것은 무관심하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하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자녀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면 그 분노의 결과는 반드시 부모에게 돌아옵니다.
셋째로, 비난과 저주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의 성품은 참 아름다왔습니다. 왕자인데도 친구인 다윗이 자기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줄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사울은 끊임없이 요나단을 비난하며, 그것도 부족해서 화를 참지 못하여 요나단의 엄마까지 욕을 합니다. “네가 그러는 것은 네 엄마가 패역 부도하니까 너도 네 엄마 닮아서 그러는 것이다”라며 아들만 욕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까지 비난하며 저주했습니다(삼상20:30).
그러자 요나단은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를 떠나서 먹지도 않고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비난하는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수처럼 생각하는 다윗을 만나 오히려 다윗과 더 친밀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악한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요나단과 결탁해서 사울을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비난과 저주를 거침없이 자녀와 배우자를 향해 내뱉을 경우, 그는 결코 부모의 뜻을 순종하지 않고 부모와 원수가 됩니다.
칭찬을 받지 못하고 비판 속에서 자라는 사람은 책임감이 결여된다고 합니다. 또부모가 허구헌 날 남을 비판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자란 자녀 역시 마찬가집니다. 혹시 여러분 자신이나, 여러분의 자녀가 책임감이 없다면, 부모가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면 80-90%는 맞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잘해도 또 비난할 것이기 때문에 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해도 그만, 못하면 당연히 욕을 먹기 때문에 책임감이라는 것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혼날 거! 결국 하라는 것만 합니다. 스스로 찾아서 하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사람의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항상 긴장되어 있습니다. 잘못해도 부모가 웃으면 괜찮고, 잘 해도 부모가 찡그리면 안 되는 것이므로 매사에 책임감이 없고 부모의 표정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잘잘못의 기준이 없고, 무엇을 달성하려는 노력도 부족합니다. 무엇을 해봤자 칭찬을 받을지 야단맞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사에 무력해 보이며, 게을러 보이며 순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한번 입을 열면 가시와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사람은 기회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으며 앞에 나서서 하지 못하고 뒤에서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자녀를 격노케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들이 상처 때문에 낙심하여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부모의 말을 겉으로는 들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비웃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자녀를 분노케 만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도록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녀들에게 소리도 지르고 화를 내지만, 자녀들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분노가 속으로 쌓일 때, 그것이 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서 결국 ‘분노하는 것’이 자녀의 제2의 천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만, 부모가 하나님을 반역하므로 마귀의 형상인 분노하는 자녀로 바꾸어놓는 것이므로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 문제가 주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한, 부부관계도 자녀관계도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로 인해 깊이 뿌리내린 분노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엉뚱한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 열매를 보고 사람들은 피하게 됩니다.
또한 자라면서 받았던 똑같은 상처를 되풀이 하고싶지 않아서 비슷한 상황이 되면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가시를 만들어 방어벽을 쌓습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두려움들이 인간관계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것을 모른채, 두려움을 주안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만든 가시 안의 감옥에갇혀서 괴로와 합니다. 그 가시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너무나 아파하는데, 그래서 아프지 않으려고 멀리 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를 혼자 두었다고 더 상처 속에 헤메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대를 이어 계속해서 유전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절대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성령충만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부모는 소극적으로 자녀를 자극하여 화나게 하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양육도 감당해야 합니다. “양육한다”는 말은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아이들의 성장에 필요한 균형있고 적당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어서 아이들이 발육부진이나 비만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주의 교양과 훈계를 공급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양육이라는 말은 단순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영·혼·육" 즉 "지·정·의"의 전인교육을 말합니다. “양육하다”라는 헬라어 “παιδεία”(파이데이아)는 먼저 자녀에게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주어서 아이의 지성을 설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설득된 지식을 삶에 적용해서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주어서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 아는 것과 깨닫는 것과행하는 것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양육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러한 지식이 자녀의 몸과 마음에 완전히 배이도록 하는 교육이 바로 “파이데이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설명할만한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Nurture(양육) & Admonition(책망), Training & Teaching 또는 discipline & Instruction 등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즉 훈련과 가르침, 훈련과 교훈, 책망과 교훈 등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육하라”는 말은 자녀를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가르쳐주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몸에 배도록 지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가르쳐준 지식을 머리로만 갖고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갖고 있는 지식대로 실천하는 즉 지식과 행동이 일치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양육”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이 그런 생활을 하고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자라면 공산주의자가 되듯이 우리가 무엇을 훈련시키고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 교양”으로 훈련시키고 가르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본 뒤에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은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좋은 학력을 갖추어야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못배운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들의 배운 지식이 있고 사회적인 위치가 있기 때문에 자꾸만 자기가 알고있는 지식을 앞세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데도, 자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자기의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또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학력자를 그의 부모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했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에게 성경 말씀을 잘 가르쳐서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주고, 선악에 대한 분명한 분별력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와 특기(예능, 체육, 컴퓨터) 에만 중점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주의 교양과 훈계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돈은 얼마를 들여서라도 세상 공부를 시키면서, 금보다도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아이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돈을 주고 교육을 받는다면 하시겠습니까? 이 학원, 저 학원 밤 늦게까지 보내면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하는 중고등부 집회나 성경공부는, 세상 공부하는데 피곤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막고 있는 부모들이 과연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부모들 조차 세상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조금만 피곤하면, 교회의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고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수요집회나 금요집회에 참석하던 부모들도 다음날 직장에 중요한 일이 있거나 또는 피곤하면, 직장에는 꼭 나가야 하므로 교회를 당연하게 빠집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예배가 필수인데, 많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건강하고 컨디션이 좋을 때, 모든 환경이 괜찮을 때 드리는 것이고, 세상 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떠한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행동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아파도 직장에는 꼭 나가지 않습니까? 골프광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골프치러 새벽부터 일어나서 나가지 않습니까? 새벽기도회는 건강해도, 잠이 깨었어도 나가지 않으면서......
또 교회에는 조금만 몸이 좋지 않거나, 아이가 열만 나도 안 나갑니다. 아이가 아파도 직장에는 꼭 나가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부탁하면서까지 직장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면서 교회에 갈 시간에는, 아이가 아픈 것을 언제부터 그렇게 신경썼다고 아이 때문에 갈 수 없다는건지요? 다 핑계입니다. 가기 싫은데 마침 잘 된 겁니다. 정말로 예배드리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면, 아이를 업고서라도 교회에 올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이를 위해 기도할 겁니다. 그러나 아이아 아픈 것에도 관심이 없고, 예배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러 교회에 가지 않는겁니다.
또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지장이 있으므로 저녁예배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세상일보다 별볼일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커서도 문제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양육하기 때문에 가족 간에 갈등만 커지게 되는 겁니다.
또 어린 아이에게 세상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거나, 그들이 추는 춤을 따라하게 하는 기가막힌 부모들이 있습니다. 아마 자기 딸이 커서 헤픈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실제로 그러한 씨를 지금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십대의 우상"이 생기면서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우상"천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그러한 우상을 섬기라고 가르칩니다. 즉 TV를 틀어놓고 소위 " 아이돌(idol:우상)"이 나오는 것을 보며 영혼과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더러운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고, 그들이 추는 성적 타락의 춤을 따라하게 합니다. 즉 하나님처럼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상 앞에서 성의 제물이 되어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학교나 교회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기본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교육은 부모의 교육임을 잊지 맙시다!!!
자녀가 잘못되면, 자녀만 힘들까요? 부모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부모가 져야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잘하건, 못하건 "저 아이는 누구 아들(딸)이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부모는 자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며, 자녀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훈계를 하여 바르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훈계를 할 때에는 자녀를 격노케 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반드시 사랑으로 훈계를 해야 합니다. 잠언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시에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는지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때부터라도 시작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이미 늦었어”라며 포기하기 때문에 포기한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다 자랐다고 생각하는 자녀일지라도 끊임없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자녀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는 경건의 훈련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매일 일어나서 기도하며,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잠자기 전에 기도하며, 운전하기 전에 기도하며, 남들과 말하기 전에 기도하며, 말하면서도 기도하고, 공부하기 전에 기도하며, 매사에 기도하는 훈련 즉 거룩한 습관이 몸에 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을 받았을 때마다 감사하며, 식사하기 전과 식사한 후에 감사하며, 용돈을 받더라도 꼭 십일조를 떼어서 바치는 생활을 하게 하며, 결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탈세하지 않하도록 정직을 가르쳐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참석하도록 가르치며, 예배가 얼마나 큰 복을 받는 자리인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는 자녀치고 복을 받지 않는 자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항상 부모로부터 축복기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역시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습관이 형성되고, 부모를 축복하는 것이 몸에 배어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편의를 봐준다고 예배에 자주 빠지게 하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녀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들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쳐주는 결과를 가져와서 나중에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말을 듣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양파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양파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3개의 양파를 하나는 교탁 위에 올려놓고 아이들이 매일같이 쳐다보며 사랑한다는 말을 했고, 다른 하나는 매일 보면서 미워한다고 했고, 또 다른 양파는 아예 구석에 방치해 놓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얼마후 사랑을 받은 양파는 싱싱하게 잘 자랐지만, 미움을 받고 자란 양파는 잎이 틀어지고 보기 싫은 모습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관심하게 방치해놓았던 양파는 잎도 시들시들해지고 뿌리도 썩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혹시나 두 양파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두 양파에게 매일 사랑과 칭찬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후 2주일이 지나자, 죽어가던 양파가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실험으로 아이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또 어떤 아픔과 장애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 치유될 수 있다는 법칙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무관심하게 버려진 것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 본이 되어 양육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부부간에는 오랜 세월동안 살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이 습관이 된 부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도 그치고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그것이 편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양파실험이 보여주었듯이 차라리 싸우며 미워하며 사는 것은 그래도 살아있지만, 무관심한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역시 일일이 가르치려면 귀찮고 때로는 싸우기도 해야하고 여러 가지로 힘이 들기 때문에 “믿는다”는 이름 하에 방치해 두기도 합니다. 우리의 입에서 “I don’t care”이라는 말이 나오면 안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그 말은 크리스천이 사용하면 안 되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은 항상 “I care”이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가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양육하시느라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언제든지 찾아가도 우리의 부모님들처럼 감정적으로 대하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분노하게 하지도 않으십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 힘이 드십니까? 가정 생활이 고달프십니까? 이세상에서 완벽한 가정은 없고, 완벽한 부모도,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사랑의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고, 불가능하지만 전능하신 주님 앞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그 동안 그 짐을 혼자 지고왔던 교만을 회개하며 주님 안에서 치유받고, 주님 안에서 다시 회복되는 역사가 우리 가운데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