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의 시와 '모래 여자'에 대하여 - 중앙일보에서
모래 여자
김혜순
모래 속에서 여자를 들어올렸다
여자는 머리털 하나 상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여자는 그가 떠난 후 자지도 먹지도 않았다고 전해졌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숨을 쉬지도 않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와서 여자를 데려갔다
옷을 벗기고 소금물에 담그고 가랑이를 벌리고
머리털을 자르고 가슴을 열었다고 했다
여자의 그가 전장에서 죽고
나라마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고 했건만
여자는 목숨을 삼킨 채
세상에다 제 숨을 풀어놓진 않았다
몸속으로 칼날이 들락거려도 감은 눈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다시 꿰매 유리관 속에 뉘었다
기다리는 그는 오지 않고 사방에서 손가락들이 몰려왔다
모래 속에 숨을 여자를 끌어올려
종이 위에 부려놓은 두 손을 날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낙타를 타고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꿈마다 여자가 따라와서
검은 눈 번쩍 떴다
여자의 눈꺼풀 속이 사막의 밤하늘보다 깊고 넓었다
[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수상시 ]
김혜순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및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현재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음화』『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잔의 붉은 거울』등. 김수영문학상·현대시작품상·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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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같은 '여성의 삶' 깊고 조용하게 응시
―미당문학상 심사평
본심 후보가 된 열 분의 250 편이 넘는 시들 가운데서 한 편을 뽑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라면 관점과 취향에 따른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고, 그런 만큼 일렬로 순위를 매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250여 편의 시 속을 조심스레 헤집고 들어가 오랜 시간 의견을 조율하였다.
우선 전체적인 느낌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발표작품이 너무 많아서인지 몰라도 긴장이 풀어진 작품이 비교적 많았다는 점, 그리고 너무 사적인 세계에 빠져있는 경향이 지적되었다. 그래서 우선 '시적 긴장'과 '시적 공공성이라는 관점에서 좀더 신뢰감을 준 몇 분의 시인으로 좁혔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서 10여 편이 후보작으로 선별되어 각 작품에 대한 진지한 논의로 들어갔다.
논의는 작품의 어떤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시인의 전체적 성향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전개되었고, 어떤 작품에 대한 부정적인 지적과 그에 대한 동의가 있으면 그 작품은 제외되었다. 가령 어떤 작품은 강력한 추천을 받았으나, 최근 우리 시단에 유행이 되고 있는 '선(禪)적인 모호성'이 지적되어 제외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김혜순의 '모래 여자'가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김혜순은 30여 년의 시력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 시단에서 가장 개성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개성이 워낙 강하다 보니 그의 시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은 이도 있지만, 그런 이들조차 김혜순의 시가 고수의 경지인 것은 인정하는 편이다.
김혜순의 시 가운데서 '모래 여자'와 '비단길 3'이 특히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언어와 상상력의 다채로움, 탄력성, 자유분방함의 면에서 '비단길 3'이 훨씬 김혜순다웠다. 그런가 하면 사막 한가운데 서서 "내 몸은 엿보는 구멍이야. 세상의 광활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야"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홀로 서 있는 자의 두렵고 외로운 존재감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에 비해 '모래 여자'는 차분하게 정제된 언어를 보여주는 시다. 미라의 발굴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마치 미라의 발굴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모래 여자의 존재를 조금씩 펼쳐 보여준다. 독자들은 숨을 죽이고 모래 여자가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이제 어떤 모습으로 남았는지를 비밀의 베일을 펼치듯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 모든 모습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그 모래 여자가 결국은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의 환유임을 알게 된다. 언어도, 상상력도 조용하지만 그러나 독특한 미학을 바탕으로 깊이 흐르는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모래 여자'는 어떤 면에서는 김혜순적이고, 다른 면에서는 김혜순적이 아니다. 김혜순의 깊고 조용한 응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 우리 시대 여성성의 한 기호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보다는 조용함이라는 생각에서 '모래 여자' 쪽을 조용히 선택했다.
◆ 심사위원 = 정현종, 김주연, 황현산, 최승호, 이남호 (대표집필 이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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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시가 너무 어렵다고요 ? `여자들은 함께 울고 웃어요`
바리데기 전설이란 게 있다. 버려진 한 여자아이가 남의 손에 자란 뒤 저승에서 약수를 구해와 죽은 아버지를 살려낸다는 얘기다. 효를 강조하는 빤한 옛날 얘기 중 하나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여자아이는, 버려졌다 하여 바리데기라 불렸다. 원래는 이름도 없었던 것이다. 버려진 이유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을 받는다. 잘못이라면 여자로 태어난 것뿐이다. 저승에서 약수를 구하는 과정도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저승에서 밥 짓던 물이 훗날 약수로 밝혀진다. 바리데기는 그 물로 아비를 살린다.
모든 언어는 여성에 의해 재해석될 수 있다. 아니 여성에 의해 발설됐을 때 언어는 비로소 평등해진다. 올해 미당문학상 수상자 김혜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리데기 전설의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이 무속신화를 삼는다.
바리데기 전설은 여러모로 김혜순을 설명한다. 시인에겐 바리데기처럼 이름에 읽힌 사연이 있다. 1978년 그가 평론으로 등단하고서 얼마 안 됐을 때 한 남성평론가가 막말을 한다. "식모이름으로 어떻게 평론을 해먹어?" 지금도 종종 회자 되는 소위 '식모사건'이다. 어쨌든 시인은 이후로 비평을 삼갔다. 대신 식모 이름으로 식모의 시를 썼다.
김혜순의 시 세계도 바리데기 전설을 닮았다. 남성이 찾아내지 못하는 속뜻을 여성 독자는 용케 읽어낸다. 시인은 서른 해 가까이 한국의 여성시를 대표했다. "김혜순 시인에게 와서 우리 시의 여성성은 비로소 착근을 한 느낌이다"(안도현)라는 찬사가 있었을 정도다. 반면에 '문제의식은 첨예하지만 너무 난해하다'란 지적도 있었다. 시인의 생각은 물론 달랐다.
"내 시가 어렵다는 건 남자들 얘기예요. 문학을 몰라도 여자라면 제 시를 느껴요. 함께 웃고, 함께 울어요. 문단에서 난해하다고 부른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최근 시 시계의 변모가 읽힌다는 시각에도 시인은 동의하지 않았다. 어미의 품처럼 넉넉해졌다는 해석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이제야 내 언어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시인은 자신했다. 미당문학상 수상작 '모래 여자'에 대한 의견도 엇갈렸다. 심사위원들은 수상작에서 "갖은 소외와 수모의 삶을 조용히 견뎌온 한 여성의 삶을 알게 된다"고 평가했지만, 정작 시인은 "여행시"라고 잘라 말했다. 지난해 여름 고비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옛 공주의 미라를 목격했단다. 그래서 감상을 적었을 뿐이란다.
중앙일보 66년 지면에서 당시 울진국민학교 6학년 4반 김혜순 양의 동시 한 편을 찾아냈다. 폐병을 앓던, 그래서 학교도 제대로 못 가고 홀로 문학을 꿈꾸던 소녀는 '부채는 강바람 싣고 왔을거야'라고 노래했다. 시인에게 40년 전 일을 물었다. "세상에, 그게 아직도 있어요?" 그러고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은 여성전사의 날 선 냉소도, 어미의 푸근한 미소도 아니었다. 시인은 40년 전 소녀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글 =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