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정말 갑자기다.
총선투표일인 내일의 휴일을 어떻게 보낼까 얘기하다 제주? 한 것이 진짜가 됐다.
출발 몇시간을 앞두고 발권과 좌석배정까지 모바일로 해결하고 옆집에 놀러가듯 집을나섰다.
생애, 첫 새벽 투표를하고
각자 빨강과 파랑 베낭을 메고 휘파람 불듯 제주에 도착하니 파란 하늘과 노오란 유채꽃이 우릴 반긴다.
예쁘다.
내 이걸 보러 왔노라, 몸을 낮춰 유채꽃에 입맞춤하고 어루만진다.
4월의 제주는 싱그럽고 갓 씻고난 얼굴처럼 말갛고 빛이 났다.
지난해 5월,
올레 20길 끝지점인 세화포구에서 오일장을 둘러보고 작별을 했었다.
그로부터 1년만에, 정확히 11개월만에 다시 찾은 세화오일장터는 감회가 새롭고 반갑기까지했다.
먹음직스런 호떡도 사고 맛집인 재연식당에서 옥돔도 먹고
해녀박물관 앞에 위치한 간세에서 21길 시작인 스탬프를 쾅 찍고서 드디어 출발이다~
하늘은 몹시도 푸르고 바람은 선선했다.
멀리와 가까이의 물 색깔이 각기 다른 제주의 바다.
짓푸른 또는 부드럽고 연한 민트색아이스크림같은 옥빛 물결.
넓은 유채밭사이에 서면 내 모습도 노랗게 물들것같고 연둣빛 나무 아래 서면 나도 마치 싱그러운 나뭇잎이 될것같다.
21코스는 마지막을 뜻하는 종달바당까지의 여정으로 원레는 15.2km였으나 일출봉 녹지공간 조성사업에 따른 임시우회로
10.8km로 줄러들었으며 올레 코스중 가장 나중에 만들고 가장 짧다.
현무암과 너무 잘 어울리는 유채밭과 초록초록 보리밭길을 온갖 호들갑과 긴 침묵을 오가며 걷다보니
억새가 이쁘던 지난 가을 아들딸과 세유니랑 일출봉 정상을 올랐다 내려와 들른 멋진 카페가 나온다.
아......이 길을 차로 지나긴했지만 왔던 길이구나.
반가움에 사진을 찍어 '여기!생각나지!' 하고 보냈더니 '오~ 그걸 기억하네' 아들이 감동한다.
투명한 물빛이 예쁜 하도해수욕장과 문주란꽃이 가득 피면 섬 모양이 토끼같다는 토끼섬을 지나
석다원 맞은편에서 중간스탬프를 찍는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불분명한 바닷길을 걷다 21코스 3분의 2지점인 지미봉에 오르니
아......조각보를 펼쳐 놓은듯한 광활하고 탁월한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왼쪽의 우도와 오른쪽 일출봉의 뛰어난 자태에 도저히 담담할수가 없다.
제주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아련한 그림이다.
세화포구 해녀박물관에서 시작된 21길의 마지막 지점을 지나 1코스 시작점 근처인 킴스캐빈게하에서 첫밤을 지냈다.
차분하고 예의바른 안주인을 만난 안도감도 잠시,
근처에 식당이 없어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총선 결과를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일출봉을 보며 일어나 드디어 올레 시작점인 1코스 구간이다.
게하 바로 뒷길에서 휘날리는 올레리본을 따라 말미오름을 오르니 어제와 같은 지미봉의 감흥이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하얀 탱자꽃을 말미오름 정상에서 보고
연이어 알오름을 오르고 내려오니 본격적인 종달리 해안도로가 시작된다.
한치를 말리는 제주다운 풍경너머 저 멀리 성산일출봉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내내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마치 스토커처럼 일출봉은 따라다녔다.
성산일출봉에 당도하고서야 어제 저녁 오늘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먹는다.
나랑 다니면 배곯아 죽겠다는, 여기저기서 많이 듣던 말을 또 듣는다.
통통한 갈치조림을 든든히 먹고 천혜향주스를 한 손에 들고 우도가 보이는 일출봉에서 느긋한 시간을 갖는다.
사진을 좀체로 찍지않는데 여기선 안찍을수가 없다.
걷다보니 어느새 광치기해변 도착이다.
이곳 역시 세유니랑 조개껍질을 주우며 재밌어하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광치기해변은 일출봉을 가장 예쁘게 조망할수있는 최고의 장소로 많이 찾지만
1948년 4월3일 양민 학살의 비극적인 현장이기도하다.
이제는 지워지고 없으나
휴가를 맞은 여행객들은 일출을 보러오고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치고 자신들 부모의 피를 마신 모래에서 논다.
새벽바위 앞에서 제주도민 10분의 1을 학살한 사건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삼촌을 잃은 시인 강중훈씨의 시비 앞에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마침내 14.6km의 1코스 완주의 스탬프를 찍는다.
시들긴하나 달콤한 귤을 까먹으며 정자에서 쉬다 2코스인 온평포구의 들머리인 고성리로 들어섰다.
오늘의 소회를 기록도 하고싶고 무리하지않고 한코스만 걷기로한 원칙도 준수할겸
예약해둔 들마을이란 뜻의 뱅디가름게스트하우스로 찾아갔다.
올망졸만 꾸며진 오밀조밀하우스다.
밤이면 별을 관측하기 좋다는 방에 들어서 짐을 풀었다.
저녁도 먹고 동네구경도 할겸 일찍 나와 예쁜 시골길을 걷다가 노포인 보룡제과에서 착한 가격의 빵도 사고
강추하는 부촌식당의 갈치조림에 실망도하고 느릿느릿 제주의 품을 더듬으며 둘쨋날을 마감했다.
다음날
아침상으론 생애 처음 받아본다는 진수성찬 밥상이 우릴 기다리고있음을 알지 못한채 잠이 들었다.
첫댓글 내키지않은 글을 올리느라 여간 힘들었습니다.
보고하듯 올리고나니 조금 후회도됩니다.
재밌지가 않아서 말이죠.
즉흥적인걸 별로 좋아하지않은 성향인데 어쩌다보니 그렇게된거지요.
첫날엔 26.68km 33980보를 걸었어요.
둘쨋날엔 2474km 31560보를 걸었구요.
좀 한가해지면 2편도 쓸께요.
즉흥적인 계획이나 용기,용감하게 나선 제주길이 정말 치밀하고 정교하게 짜여져있어요. 길,골목 모퉁이까지도 섬세한 지도 같습니다. 디테일..발걸음마다 함께하는 언니의 감정도 솔직, 꽃처럼 맑고 멋있어요. 여행가답습니다. 부럽기도하구요.
사월의 제주.의미가 있네요. 제주를 추모하는 마음도 함께.
언니의 글에는 따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여러 길들이 있지요. 오늘도 빠른 걸음 부지런히 따라가며 제주를 보았네요. 2편도 기대합니다^^
뭐 그런 겸손한 자기 댓글을 올렸을까요?
언니~가뭄에 콩나 듯 아기편지가 얼마나 반갑고 재미있는데ᆢ진짜 아기자기 올망졸망 살아있는 표현력이 이 아침 아주 상큼합니다 ㅎ
여행지다 하고 다니다 보면 필요이상 주전부리로 더부룩하고 살쪄 돌아오는 것 같아 컨디션 조절장애?를 경험하는데 언니는 가뿐하고 기분좋은 배불리움으로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 되었을 것 같네요ㅎ
빠른 글 올려주셔서 반갑고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초롱초롱 아주 잘 읽었어요^^
한아씨 말대로 정말 가보고 싶고,일출봉 보이는 침실은 특실이겠지요. 통영인지 남해인지? 가족 나들이 갔을때 바다보이는 쪽은 어르신들 주무신 기억납니다.진짜 멋지던데.금세담(존칭 생략^) 표현대로 아기편지 글 올라와 너무 기뻐 눈이 1cm는 튀어나올 뻔했지요.그리고 재밌는데요.
영희씨는 항상 여행다운여행을해요
출발부터 가볍게 , 가보고싶은 길따라~
4월의 노오란제주가 그려 지네요
2탄 기다려요 !빨리요 ㅎㅎ
4월의 제주여행 방안에서 잘 하고 있습니다.생애 처음~ 진수성찬 무척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