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장미 (외 1편)
김 이 솝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는 슬리퍼를 끌며, 안녕?
들리지 않는 네 목소리 안개, 골목, 어둠
사라지기 위해 오는 밤
붉어지기 위해 오는 밤
나는 네 혐의를 존중해 물증 없는 사물은 유죄지
한동안 연락을 끊겠습니다
적국에 가 있겠습니다
안개는 풍경에 수갑을 채우고 갑자기 침울해지네요
어둠 속에서 첨벙첨벙, 꽃잎에 끌려가네요
내 혐의에 물증이 너무 많아 오늘은 외롭겠군요
미안합니다, 여기는 적국입니다
셔터를 내리던 자의 목덜미로 핑그르르
꽃잎이 떨어지네요 흰 이빨을 열며 안개가 받아먹네요
당신의 죄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적국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미안합니다, 여기는 적국의 골목입니다
안개를 잠그지 않아 똑 똑 똑 빗물이 지네요
담장 밖에선 당신의 얼굴을 증거인멸 하지 않겠습니다
도용하지 않겠습니다
첨벙첨벙, 들리지 않는 네 목소리
안녕?
여기는 적국의 적국입니다
출사出寫
페블비치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39번가 부두에서 금문교까지
베이브리지와 바다 갈매기와 함께, 찰칵
엉클톰스 캐빈*의 주인은 백인
햄버거를 먹고 있는 노숙의 흑인들
재즈와 힙팝과 금문교와 원탁을 배경으로, 찰칵
바람 냄새 가득한 침엽수림
태평양은 출렁이고
호텔 하우스키퍼는 한국 여인
여인의 숲과 바다와 9홀을 돌아 나오며, 찰칵
젖은 불빛의 차창 밖
한강 뒤란을 바라보는 시간은 여기서 멀고
다리 아래 낚싯대를 던져 놓고
방울소리를 기다리는 노인들
영등포역 커피숍 앞
한 개비의 담배를 나눠 피고 있는
노숙인들을 바라보며
비포더 던*을 듣고 있는 지금
*엉클톰스 캐빈 : 39번가 부두에 있는 햄버거집.
*비포더 던(Before The Dawn) : 1980년 발표된 Judas Priest의 히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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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솝 : 대전 출생, 2014년 천강문학상 우수상, 2015년 계간 「시와 소금]」신인문학상,
201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ㅡ「시인정신」2016 봄.여름 합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