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일밤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사건 현장본부로 찾아온 한 실종자가 가족이 생사를 확인을 못하자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있다.
대구지하철 참사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 것은 휴대폰으로 전해진, ‘살려달라’는 희생자들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목 안에 꽉 들어찬 유독가스에 숨이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건 희생자들의 전화는 가족들의 마음을 찢고 또 찢었다.
…18일 오전 10시께 대구시 동구 방촌동 집에 있던 정인호(51)씨의 휴대폰이 다급히 울렸다. 딸 미희(21)양의 전화였다. 미희양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 못나간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끊겼다. 그 순간 텔레비전에 긴급방송이 떴다. 정씨는 허겁지겁 현장으로 달려왔지만 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씨는 “딸이 대학편입을 위해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지하철에 탄 것 같다”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같은 시각 박남희(44)씨도 “엄마 살려줘”라는 딸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무작정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박씨는 “고3인 딸이 피아노학원을 다녔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며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라며 넋을 잃었다. 또 초등학교 6학년인 조효정(12)양은 친구와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뒤,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지하철사고가 나 약속시간을 못 맞출 것 같다”고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구지하철 방화참사 현장지휘본부가 설치된 대구 중앙로역 주변에는 18일 실종자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이 하루종일 이어졌다. 현장지휘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9시 현재 접수된 실종자 150여명은 대부분 직장과 학교에 가기 위해 아침에 집을 나선뒤 지금까지 연락이 끊겼다. 윤승호(53)씨는 “오전 9시 30분께 지하철을 타고 출근한 아내가 종일 연락이 없다”며 “생사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안타깝게 희생된 이들의 소식도 계속 전해졌다.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대구지하철공사는 지방자치단체 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해있지만 사망사고의 경우 보상한도가 10억원(대인 1인당 4천만원)에 불과해 실제 사망자에게 돌아가는 보상금액은 1천만원 미만으로 추정됐다. 1인당 보상한도는 4천만원이지만 이번 사건 사망자가 사건 당일인 18일 오후 현재 13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돼 10억원을 사망자 수로 나눈 1인당 보험금은 770만원에 불과하다. 또 부상의 경우 사고당 보상한도는 500만원이고 1인당은 100만원이어서 140여명으로 추산되는 부상자들에게 돌아갈 치료비는 3만~4만원에 남짓해 실제 치료비를 충당하기에도 역부족이다. 또 피해자들이 개인적으로 생명보험이나 상해보험 등에 가입해있지만 시신의 신원 확인에도 애로가 예상돼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의 유가족들이 보험금을 받는데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항공기 사고 처럼 대규모 인명 사고가 예상되는 지하철을 관리하는 관계 당국이 보상 한도액이 10억원에 불과한 보험에 든 것은 안이한 태도”라고 꼬집었다. 대구/특별취재반 society@hani.co.kr
△ 1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 출구에서 소방대원들이 화재로 사망한 시신을 들고 나오고 있다. 대구/강창광 기자 chang21@hani.co.kr
18일 오전 9시50분 대구지하철 1호선 1079호 전동차(기관사 최정환)는 반월당역을 출발해 대구시내 중심가인 중앙로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출근시간이 막 지난 시간이었지만 열차 안에는 승객들이 적지 않았다. 승객들은 조용한 가운데 신문이나 책을 보거나 일부 승객은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9시55분 전동차가 중앙로역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 전동차의 5호차에 타고 있던 감색 체육복을 입은 김대한(57·대구 서구 내당동)씨가 검은 가방에서 회색 플라스틱 우유통 2개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박금태(37·대구 남구 대명동)씨 등 승객 3~4명이 “위험하니 불을 꺼라”라며 말렸으나, 김씨는 말을 듣지 않았다. 승객들은 격투까지 벌였으나 김씨는 끝내 우유통에 들어 있던 시너로 추정되는 인화물질을 의자에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곧이어 전동차 안이 깜깜해지고, 출입문도 닫혀 버렸다. 불이 나면서 전기공급이 자동으로 끊긴 탓이다. 전동차 안에는 스프링클러 같은 진화시설이 없어 전동차가 불길에 완전히 휩싸이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검붉은 불길과 연기를 보며 공황상태에 빠진 수백명의 승객들은 서로 먼저 역을 빠져나오기 위해 뒤엉켜 몸부림쳤다. 눈을 뜰 수 없는 매운 연기는 지하철역 출입구 4곳과 환기구를 통해 끊임없이 솟구쳤다. 스프링클러 시설이 없는 밀폐된 객차 안은 유독성 검은 연기로 가득 찼고, 승객들의 비명소리로 아비규환 상태에 빠졌다. 객차 문이 잠시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바람에 승객들은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왔으나, 노약자와 여성 등 일부 승객들은 연기에 질식해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출구를 찾는 승객들 뒤로 시커먼 연기가 그칠 줄을 몰랐다.
불은 순식간에 전동차 객차 6량 모두에 번졌으며 때마침 반대편 선로에 서 있던 상행선 전동차에도 옮겨붙었다. 이로 인해 상행선 전동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영문을 모른 채 갑자기 닥쳐오는 불길과 연기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또 정전으로 지하철 중앙로역 일대가 암흑천지로 변해 승객들이 출입구를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등 대혼란을 빚었다.
불은 상·하행 전동차 객차 12량을 모두 태우고 3시간 반 뒤인 오후 1시30분께에야 꺼졌다.
불이 난 뒤 경찰과 소방대원들이 긴급 출동했지만 유독성 연기로 3시간 가까이 현장 진입을 하지 못해 재난은 더욱 커졌다. 중앙로역 기계실에 근무하던 지하철공사 직원 12명이 사고현장에 고립돼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으나, 이들은 모두 숨진 채 발견됐다.
이 화재로 대구 중앙로 일대는 지하철 입구와 통풍구를 통해 시커멓게 뿜어져나오는 연기와 그을음으로 뒤덮였으며,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사고현장에서 나온 이숙자(45)씨는 “올해 서울대에 입학 예정인 딸 현진이가 지하철 내에서 통화를 하다 ‘돼, 안돼’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며 “부상자 명단에 딸이 없다”고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