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내시경
소환장 받자마자 구겨 넣을 참이었으니, 쇠할수록 맞서자는 몸의 지론이다 그러다가 아내에게 던진 귀띔 한방으로 아차, 팽글팽글 소용돌이에 쏠려 도착한 도립병원 검진실
위내시경 도정과는 너무 다르다 호스가 항문으로 입(入)해서 아랫도리 속속들이 휘젓는다는 정보에 벌벌 떨거나 말거나 준비된 코스대로 팍팍 돌아가는데
검사 3일 전, 우선 검은 콩과 팥이 금물이다 김치와 나물도 안 되고 수박이나 포도, 옥수수도 금지된다 흰밥, 흰죽, 두부, 바나나만 오케이라니 빨갛고 까만 놈들 차단하는 것이고
검사 전날부터 금식이다 '그까이 꺼 굶으면 된다' 술 담배 밧줄 자르듯 쌍둥 결별해도 아쉽지 않다 작심하면서 갸웃갸웃 흔드는 마음 내가 잘 안다 검사 열세 시간 전
조제된 쿨프렙산 두 모금 마셨다 벌컥벌컥 들이키자마자 어럽쇼, 물똥이 터지기 시작했다 수정과 빛깔에서 점차 맑은 사이다 빛깔로 죽죽 새더니
드디어 세 시간 전, 생수 섭취로 탈수 예방하란다 혹시 영원히 못 깨어날지 모르지만 그렇게 마감해도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도 아주 잠깐 들었다
‘바지 갈아입으세요.’엉덩이 튿어진 아랫도리 갈아입는다 고무줄 당기면서 떠오르는 기시감. 그러니까 다섯 살 때 입던 그 포즈로 아그적아그적 수술대에 올랐다
천사표 간호사 주사 한 대 꽂으며 왈, ‘이제 졸릴 거예요’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아 전전반측 헤매는 찰나 어럽쇼 ‘푹 주무셨지요’란다 어느새 80분 지나고 상황 종료라는데
울긋불긋 대장 통로 가리키며 미주알고주알 돌입이다 몇 개의 용정 도려냈고 일주일 후 나머지 통보 주겠단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눈발 소식 없던 69세 초입, 새해 멀쩡한 한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