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
에베소서 6:5-8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본문에서 "종들아"라고 하는 '종(δοῦλος 둘로스)'은 그 당시의 '노예(slave)'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노예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모두가 자유함을 누려야 하는데, 실제 상황은 노예제도라는 삶 속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며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 속에서 갈등을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노예라는 것은 조상 대대로 노예로 살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빚 대신에 종으로 팔려가기도 하고, 전쟁에 패하여 포로로 끌려온 고학력의 지식을 갖춘 노예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예들은 주인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고, 벌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 있는 종들에게 주인을 섬길 때에 육체의 상전이 아닌 그리스도께 하듯 최선을 다하여 섬기라고 성경은 명령합니다. 그 이유는, 때로는 짐승과 같은 상전을 만나게 되었을 경우에 그에게 충성을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예인 사람이 사랑의 주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를 섬겨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아무리 짐승과 같은 상전일지라도 그를 불쌍히 여기며 섬겨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좋은 상전을 만났어도 노예임을 한탄하며 살아간다면 그의 인생은 지옥과 같기 때문에 천국을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시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사는 사회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갑니다. 그리고 공동체에는 반드시 상하 구분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건 상사 즉 리더가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리더를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1) 두려워하고 떨며 순종하라
이 말은 윗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우리의 뜻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천국과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즉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마음 속으로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무시하는 사람의 말을 순순히 따르지 못합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거슬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기분 나쁘고, 저렇게 말해도 기분이 나빠서 순종하기가 힘이 듭니다. 즉 리더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나오기 때문에 충성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있는 곳에 윗사람이 있다면, 혹시 그 사람이 나보다 학력이 낮고 나이가 어리고 성질이 못되거나 우유부단하거나 모든 면에서 나보다 떨어진다고 할지라고 그 사람을 리더로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나보다 모든 것이 나은 리더일 경우, 질투심 때문에 그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성령의 열매와 반대인 육체의 열매들이므로 크리스천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악한 대통령이나 악한 상사라고 할지라도 그 권세에 거스리지 말고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예수님도 정치를 간섭한 적이 없고, 정치에 대해 뭐라고 하지도 않으셨으며,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여 선을 행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상전도 하나님의 권세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피조물이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말이 아니지만,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즉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섬겨야 할 윗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겠으면 그곳을 나와야 합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계속해서 리더를 거스리며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 죄값이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지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윗사람에 대해 불순종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해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아가 하나님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며,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성실한 마음(단 마음)으로 순종하라
'성실한 마음'이라는 헬라어 'ἁπλότητι τῆς καρδίας 하플로테티 테스 카르디아스'는 '성실한 마음, 일편단심(singleness)', '단순함'(simplicity)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즉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두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일을 하게 될 경우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므로 성실한 마음으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정직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6절에 나오는 "눈가림만 하여"라는 말과 상통하는 말로서 윗사람이 볼 때에만 열심히 일하는 척 하는 것도 포함한 말입니다. 즉 그의 마음이 단순하지 못하고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눈가림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이는 곳(외모로)만 꾸미고 남들이 볼 때에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지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을 더욱 잘 관리하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더욱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보고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사람들은 두 마음을 품고 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양다리를 걸치고 계속해서 저울질을 합니다. "어느쪽이 나에게 더 유리할까"를 생각하며, 이쪽 저쪽에 모두 마음을 주면서 여차하면 더 좋은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 즉 성실하지 못한 자를 미워하시며 반드시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치시며 그 주상을 헐으시리라"(호 10:1-2)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5:7-8)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be devoted) 저를 경히(despise)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6-8)
7절의 '단 마음'이라는 것은 헬라어로 'εὔνοια 유노이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비, 선행(benevolence)', '호의, 친절(good will, kindness)' 등의 뜻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7장 3절에서는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찌라"의 "의무를 다하고(due benevolence)"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대하는 것이나, 종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세상적으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절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면 모두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이 의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종이 윗사람을 섬기는 태도가 남편들이 아내에 대해서 해야할 태도와 같다고 말씀합니다(물론 아내가 남편에게 해야할 태도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 태도는 선하고 자비하며 친절한 마음을 갖고 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만약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은 윗사람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며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은 자기가 속해있는 곳의 리더를 위해 몸을 바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즉 에베소서 5장21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 이후에 인간 관계에 대해 나오는 것이므로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모든 인간관계는 한쪽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피차 복종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라
우리는 '노예 근성'이라는 말과 '주인 의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기인되었을까요? 이 말은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잘 다스리라는 청지기로서의 주인의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청지기노릇이 싫고 하나님처럼 되고싶은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게 되었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에 있을 동안은 자유를 누리며 주인의식을 갖고 살았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인간은 항상 '혹시 벌을 받지않을까'하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눈치만 보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성을 갖고 태어난 인간은 계속해서 노예 근성을 갖고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난 사람은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 주인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 근성을 갖고있는 사람들의 특성은 모든 일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항상 용두사미(龍頭蛇尾, end (up) in an anticlimax)로 끝납니다. 용의 머리와 뱀의 꼬리처럼 시작은 큰 비전을 갖고 힘있게 잘 나가다가 점점 가면서 흐지부지해지는 일이나 사람에게 이 말을 씁니다. 이것은 대부분 노예 근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노예제도하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예는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하라는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모든 책임은 주인이 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계획도 없고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그것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없이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처음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만 하고,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던 것도 그만 둡니다. 무엇이건 끝까지 가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어떠한 이유를 발견해내서 중간에 그만둡니다. 매사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며 책임을 지고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면 혹시 잘못되었을 경우에 받을 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잘 되는 것 같으면 그것은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칭찬이나 유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즉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기분이 좋으면 괜찮고, 주인의 기분이 나쁘면 무언가 좋지않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회와 눈치만 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유리한 쪽으로 얼른 몸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도 끝까지 가지 못합니다. 중간에 어려움이 생기면 또다시 포기하고 다른 것을 찾아다닙니다. 또 이러한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한 마디에 울고 웃고 합니다.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 사람과 잘 지내려고 하지만, 자기에게 잘못을 지적하거나 충고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단정하고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세상의 모든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가는 사람처럼 자기 연민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기만을 바라며 자기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또다시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의식을 갖고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주인의 아들과 종의 아들은 마음가짐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의 아들은 항상 주인의 눈치를 보며 우울하게 살아가지만, 주인의 아들은 사랑의 마음으로 종을 보살피더라도 그것이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려는 성실하고 자비한 마음이므로 자세부터가 다릅니다. 노예 근성을 갖고있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종으로부터 해방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주인의식을 갖고 살기 때문에 항상 당당합니다. 마귀의 종노릇하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보이지만, 매우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로마시대에 비록 종의 신분으로 살더라도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갖고 그리스도를 섬기듯 상전을 섬겼을 때에 성실한 종의 태도에 감동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종들은 그들의 상전을 감화감동시켜서 그들도 크리스천이 되게 함으로 얼마나 놀라운 일이 발생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자유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집안에서는 종들을 종으로 부리지 않고, 자기들과 같이 자유한 상태로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단지 밖에 나갔을 때에는 로마의 법을 따라 주인과 종의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상전들이 왜 종들을 종으로 부리지 않고 자유함을 주었겠습니까? 크리스천 종들은 자유를 주어도 그 자유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여전히 상전을 하나님 섬기듯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로를 존중해주며 피차 복종하며 섬겨주는 관계가 크리스천들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하나님되시도록 인정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의 삶 속에 진정한 복으로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종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라면, 상황은 누군가를 섬겨야하며 고통스런 일들이 발생할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의 신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 즉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의 자녀답게 우리는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충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인의 자녀라고 교만하고 게으르게 살아간다면, 아무도 그러한 사람을 존경하며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히 충성을 다하자 그 집안의 모든 것을 관리하는 위치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보디발의 아내의 죄로 인해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디를 가건 불평 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성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감옥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고, 결국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까지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요셉이 아버지가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한 말씀에 성실하게 행하지 않았으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을 찾으러 갔다가 없으니까 형들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결국 어렵게 어렵게 형들을 찾게 되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형들에 의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든 그렇게 성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매사에 임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은 계속 되었지만, 그 고난이 그를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길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총리가 되어서도 형들에게 복수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음을 가르치며 형들이 불안해 할까봐 오히려 형들을 위로해 줍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태도 즉 '단 마음'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보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이므로 서로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마귀의 자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로 삼아주신 이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상대방을 주께 섬기듯 단 마음(benevolence)으로 섬겨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종으로 살기를 원치 않고, 종을 부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저 역시 종처럼 누군가를 섬겨주는 삶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의 말을 듣고 제 뜻에 따라주며 살기를 원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저와는 반대로 종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고, 종처럼 섬겨주기 위해 이땅에 오셨습니다.
인간들이 너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보시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몸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제가 너무 잘못 살고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데, 저는 말만 크리스천이고 실제의 삶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섬겨주기 보다는 섬김을 받고 싶었고, 리더가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불평의 말을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보다는 저의 의를 드러내기를 좋아하였고, 제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변명하느라 바빴습니다.
종이 상전을 섬기듯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하지 못했으며, 그리스도를 섬기듯 가족과 성도들과 상사에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리스도께 하듯이 모든 사람에게 특히 리더에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의 고집이 너무 세서 어떠한 리더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못하는 저 자신을 성령께서 만져주옵소서.
이것은 제 의지만으로는 작심삼일처럼 쉽게 되질 않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저를 도와주옵소서. 저에게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마귀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온전히 주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느 곳에서든 무엇을 하든 겸손히 충성된 자로서 살아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13년간을 종살이를 했던 요셉이 어디에서든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성실하고 충성하므로 어디에서든 인정받고 높임을 받아 결국 나라의 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것처럼 저 역시 요셉과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저의 마음을 이제는 마귀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온전히 성령께서 주관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그리스도의 종답게 매사에 섬기는 자세로 겸손히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의 섬기는 모습을 통하여 귀한 열매가 삶 속에서 주렁주렁 열리게 하시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 수 경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