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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박희용
현장 휴머니즘 詩美學
—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를 읽고
舞鶴山人 박희용
시집을 받고, 찬찬히 읽으며 한 구비 시의 회랑을 돌 적마다 잔잔한 감동이 쌓여갔다. 시집을 덮자, 그동안 『경북작가』와 『들문학』에 실린 몇 편의 시를 읽으며 피상적으로 알았던 시인의 내면세계가 드디어 내 마음의 창으로 환하게 보였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뭔가 아쉬워,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내 카페 양백산맥의 「명시감상」 방에 올리기 위해 내 마음의 젓가락으로 고른 작품이 전체 55편 중 17편으로 삼분지 일이다. 널리 알려야지 이 좋은 시들을, 자발적 의무감으로 한 자 한 자 치노라니, 시인이 문득 발생하는 시취를 가다듬어 글자로 옮기고, 구절을 만들고, 행을 만들고, 연을 만들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던 마음이 두~웅 울려왔다. 그 울림소리를 타고, 시인이 불러낸 사람들이 초추의 따신 햇볕 아래 수줍어하고 있었다.
누가 수줍어하는 그들을 시집 속에 불러냈는가?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민중이니 서민이니 인민이니 갖가지 이름으로 불러냈지만, 이처럼 ‘사람’으로 불러낸 시인이 있는가? 모두 다 ‘인간’으로 불러내 자기 앞에 줄 세웠다. 줄 세워 자기의 시선으로 깎고 다듬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만족했다.
‘인간’은 사회적 명제이지만 ‘사람’은 개체적 명제이다. ‘인간’은 타자의 시선이지만 ‘사람’은 자기의 시선이다. 타자의 시선을 가진 인간은 구속받지만, 자기의 시선을 가진 사람은 자유롭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타자의 시선을 버리고, 자기의 시선을 최대한 투영한다. 언어를 시적으로 조립한다는 재주 하나만 다를 뿐, ‘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다. 그리하여 시인의 도움으로, 그들이 남이 붙여준 장식과 도구 없이 맨 사람으로 자기 몫의 삶의 현장에서 수줍게 웃고 선 것 만으로도 이 시집은 이 시대의 증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재순 시인의 관심은 사람이다. 시인이 하루 종일 생활하는 공간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시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의 앙금이다. 갖가지 경향, 유파, 이즘, 형식, 언어 등등으로 시를 나누어도 역시 시는 일상의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자기가 속한 일상의 연속에서 시를 앙금 짓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김재순 시인은 업무상으로나 일상으로나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질펀하다.
먼저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 슬픈 장미 여인, 전태일, 오라버니, 할배뻘 남자, 폐지리어카 아저씨, 비정규직 남자, 공사장 잡부, 김씨 할매, 낮술 할마시, 포장마차 아줌마, 노부부, 이삭 줍는 할머니, 공무도하가 이룬 사내, 할인 가극 보는 여자, 서민 아파트 사람들, 동네 어르신들, 명절날의 ㄱ씨, 클럽 ‘황태자’의 여자, 쪼그라진 어머니, 절필을 생각하는 시인, 가시 박힌 오라비, 열일곱 처녀, 늙은 딸, 혼자서 몸이 젖던 여인, 그 집 아지매, 단풍나무 여인, 라면 한 끼 그대, 우리 발바리, 나를 두고 떠난 당신」 등 30명이다.
그런데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다. 모습과 하는 짓만 봐도 생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지위가 높거나 부자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인 역시 속한 집단이 기층사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익숙한 사람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시인이 상류층에 속했다면 그들을 만날 인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류층의 사람들 중에 자기 계급의 시를 쓴 사람들이 있는가? 과문하지만 그런 시는 전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숨 쉬고 살아서 움직이는 곳은 기층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기층사회에 속한 자로서의 시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눈높이는 딱 정면이다. 위로 치켜보지도 않고 아래로 깔아보지도 않는다. 치켜보면 안달이 나고 깔아보면 오만해진다. 똑바로 봐야만 진솔하게 노래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현실과 현장을 똑바로 본다. 물론 이 똑바른 시선을 시인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시인들 중에도 똑바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김재순 시인과 다른 시인의 차이라면, 다른 시인들의 시선은 차가운 겨울처럼 냉엄하지만 이 시인의 시선은 복숭아꽃 피는 봄날처럼 따뜻하다는 점이다. 다른 시인들은 대상을 객관적 눈으로 관찰하는 입장이지만 이 시인은 관찰자가 아니라 대상과 동병상련하는 동반자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나,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겉만 보았지 속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인은 대상의 겉을 뚫고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김재순 시인이 ‘수줍어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지 살펴보자.
<그에게 가다>에 등장하는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은 이 시집에서 유일하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데, 아마 시인이 생각하는 가상의 당신은 뮤즈가 아닐까? 또는 ‘재웅의 가슴에 바늘을 꽂게 하는 당신’일수도 있다. 하여튼 시인의 잠재의식에 깊숙이 찍힌 어떤 당신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그가 누구일까?
<슬픈 장미>의 여인을 보는 남성들의 눈은 얼마나 칙칙한가. 그러나 이 시인의 눈은 ‘작고 빵빵한 궁디’를 흔드는 여인의 심정을 통찰하고 있다. 생활을 위하여 꽃잎을 활짝 열지만, ‘거대한 아가리’로 ‘잡것’들을 잡아먹어 버린다는 상상으로 간들대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여자. 일상의 밤에 피어나는 캐피탈리즘, 자본주의의 생리를 난도질해버린다.
‘그때의 순이 분희 영자’ 등 수많은 노동의 은행잎과 그 은행나무 전태일, ‘고요히 손 모으는 한 여자’가 이루는 <은행나무의 분신>은 48년 전의 과거와 현재 풍경을 비장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전태일’에 대한 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시인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요란하게 전태일의 의미를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에 옮겨놓고 있다.
<오라버니>는 국가경제가 발전할수록 버림받는 정도가 심해지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다. 국민경제가 발전하면 농촌경제도 덩달아 발전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농촌경제는 언제나 도시경제의 시다바리이다. 지난 날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공업노동자들의 식비를 낮추는 저미가와 저채소가 정책에 희생되었고, 지금은 여러 나라와의 FTA에서 희생물로 전락하였다. 외국산 쌀 수입 때문에 항상 쌀이 남아도니 쌀값이 오를 까닭이 없고, 흉년이라서 돈 좀 될 만하면 온갖 채소, 과일, 양념 등을 수입해서 상승세를 꺾어 버린다.
그러니 ‘어린 미루나무 그윽하게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그만 ‘더벅머리 충혈된 눈 머리띠 붉게 묶는 사람’이 되어 ‘가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심각한 비극은 ‘오라버니’가 도시가 아니라 자기가 꽂은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개화기 귀화목인 미루나무를 FTA의 상징으로 본다. 한때는 ‘칠월의 미루나무 이파리처럼 자신의 앞날도 반짝이리라’ 믿었던 미루나무가 이제는 ‘회창거리는 가지 무수히 뻗어 목을 옥죄려는 미루나무 숲’으로 변신하여 한국농촌을 피폐하게 하는 원흉이 되어버렸다. 한 때의 기대이든 FTA이든 미루나무가 모든 죄를 덮어쓰고 충돌 사고를 기다린다.
이 시대의 농민들은 탈출구가 없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하고 억울한 울화뿐이다. 차라리 도시를 향하여 가속 페달을 밟으면 속이나 시원하지 자기가 꽂던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거대한 자학이다.
“우리 오라버니 살려주세요!”하며 이 시인은 절규한다. 양심 있는 도시인이라면 ‘오라버니’가 핸들을 돌려 도시로 쳐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농산물이 비싸다고 투정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생활비를 조금만 줄이면 이 땅 농촌의 수많은 ‘오라버니’들이 가속 페달을 밟다가 미루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를 피할 수 있다.
<뿌리를 내리다>에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조용히 소화시키는 시인의 숨결이 있다. 도시인들은 농촌의 노총각들의-그것도 혼기를 훨씬 넘긴-동남아 아가씨 선택을 비판하며 농촌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렇다고 자기 딸은 절대로 농부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 농촌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다. 오만한 자들은 “농촌 노총각들이 오죽 못났으면 장가도 못가서 후진국의 아가씨를 사 오냐”라며 비아냥댄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는가.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고, 농촌 총각에게 시집 올 처녀가 전무하니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기의 할배뻘은 될 것 같은 이 남자’도 한 때는 ‘요 이쁜 것 이쁜 것’ 하며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젠 ‘아기와 색시에게 보내는 그윽한 저 눈빛’이 되었다. 무엇이 그의 눈빛을 그윽하게 만들었을까? 그 의미를 도시사람들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같은 농촌 사람들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안다. 그래서 ‘나직하고 또렷한 우리말’을 하는 여자는 ‘동네 앞 느티나무처럼 굳건하다’며, 세상이 도도하게 부정과 비판으로 흘러도, 시인은 혼자만의 따뜻한 가슴을 열어 그들 부부로 대표되는 한국 농촌의 행복을 기원한다.
이 시인만이 피폐한 농촌에 돋아나는 새싹을 예언하고 있다. 누가 이 시인만큼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농촌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참여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은 장가 못 가는 농촌 노총각들의 애환 정도까지를 시화 했을 뿐, 이국의 여성이 한국의 모성이 되고 흔들리던 눈빛의 ‘이 남자’가 ‘그윽한 저 눈빛’이 되는 경지를 모른다.
<이십만 원의 힘>에 등장하는 ‘저 아저씨’를 누구 눈여겨 본 시인이 있는가? 드물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다. 하물며 시인들이 그러할 진데 대중들은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해서 동정심, 측은지심이라고 하자. 물론 이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무시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스쳐 지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폐지 아저씨’의 면사무소 출입의 시작과 끝을 유심히 본다. 기초생계비 수급대상자로 뽑히기를 이 시인은 진심으로 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한턱 쏘겠습니다”하는 ‘저 아저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덥석 받아들인다. 부자들에겐 한 달 이십만 원이 하찮을 것이지만, 하루 종일 쏘다녀도 몇 천 원 폐지뿐인 리어카아저씨에겐 한 달에 이십만 원이 하늘만큼 높은 돈이다. 그래서 리어카는 감격한다. 그 옆에서 시인은 그 감격을 생생하게 현장보도 한다. 당사자보다 더 감격한 시인의 현장보도로 밑바닥 삶이 비로소 우리사회의 삶에 포함되고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저 혼자만의 감정 도취인가? 저 혼자만의 지적 유희인가? 패를 지어 경쟁하는 시단에 적응하여 유명해지기 위함인가?
아니다. 기초생계 수급비 이십만 원에 독수리 날개를 달고 힘이 펄펄 나는 한 민초의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옮겨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시인은 시인이 이 시대에 할 일을 너끈하게 했다.
<붉은 어깨 도요새>에서는 ‘머리털이 뭉치고 빠진 늙은’ 노가다, ‘낡은 민소매 셔츠’가 못다 덮은 ‘얇고 붉은 어깨’를 가진 늙은 노동자를 본다. 하지만 그는 ‘수척한 몸’이지만 ‘시베리아까지는 꼭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강골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과 같은 우리 사회 너머에는 ‘찌질한 하천’과도 같은 변두리가 있다. 변두리 인생들은 사회 축에도 끼지 못하고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 스물 몇 번째 하천을 기웃거리는 도요새처럼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나 이 시인의 눈 속에서는 그들에게도 인생이 있고 사회가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가는 것들에게도 내재한 의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역할은 장엄하다.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 그 남자’는 ‘불씨 하나 받으러’ <동학교당에 간다>. 먹고 사는 일이 늘 위태롭지만, 눈빛이 형형했던, 가죽신을 만들어 군용금을 대던 할아버지를 둔 후손답게 이제 자신이 불을 일으켜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동학교당에 열심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빈부귀천을 초월해서 한 가지 뜻을 세우고 용맹정진 하는 사람들이 박혀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 시인의 눈에 발견되어 삶의 현장에 불려 나왔다. 비정규직이라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많은 차별과 무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간다. 이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든든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비정규직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 비정규직 남자를 시의 무대에 올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외면보다 내면을 보기를 청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우리 사회에 샘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시인의 눈은 비정규직보다 삶이 고달픈 어느 홀아비에게로 옮겨진다. 채용 시 스펙보다 성품을 보겠다는 현대그룹 광고는 한갓 달콤한 <채용의 조건>일 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겐 ‘어차피 꿈’이다. ‘소월과 휘트먼 우암과 플라톤 박헌영과 애덤 스미스의 얼굴이 자정까지 너울거리는’ 그의 내면세계 풍경은 여느 보통직장인의 경지보다 더 화려하지만, 역시 세상은 외면이 화려해야만 채용이 된다. 그러나 새벽부터 시작되는 밥벌이가 비록 고단하지만, 이미 ‘마음 한 곳을 절단’했기 때문에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시인은 엄숙한 목소리로 삶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물음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 고학력과 고스펙으로 좋은 직장에 채용되어 풍족하게 살아가는 일상과, 전자고 졸업 정도여서 채용되지 못해 날품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가꾸는 일상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유의미한 인생이냐고.
마음 한 곳을 절단하지 않고서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열지 못하는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가정의 행복’을 절단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온 마음으로는 내면세계 신비의 극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한 곳을 절단하기 위하여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을 것인가!
그러나 한 곳이 절단된 마음은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온전한 몸과 온전한 마음을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진 결심을 해서 마음 한 곳을 절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모두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가 된다면, 곧 생산이 멈추어져 세상이 끝맺음 할 것 아닌가.
‘새벽마다 고물 트럭에 시동을 거는’ 그에게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정주영이 나타나 채용을 허락한다면, 그는 당장에 달려갈까 아니면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가꾸기 위해 현재의 일상을 계속할까 궁금하다.
위안부 할머니와 소녀상 문제가 계속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할 턱이 없으니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삶에 대해 동정하는 시선과 말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파고든 글들은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글들은 그들의 아픈 상처보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인도적, 반인륜적 만행을 규탄하는 것들이다.
녹두꽃은 전봉준 장군의 이미지와 겹쳐 민중의 꽃이 되었다. 또한 녹두꽃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백성들의 근성과 부합된다.
그 녹두꽃이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피었다.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다 왔지만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것이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현실이요 인성이었다. 그러나 김씨 여성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어찌 못살까’ 정말 모진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살아서 결국 다랑논을 이루었다. 풀뿌리 나무껍질 따라서 이어진 김씨 할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상이다. 여느 여성들처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유명해진 여성들보다 훨씬 삶의 궤적이 인간적이다.
김씨 할매를 일으켜 세워 오늘이 있도록 한 힘은 무엇인가. 바로 녹두꽃이다. 비록 작고 흔하지만 앙징스런 모습은 바로 우리 땅 여성들의 마음 그대로이다.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녹두꽃의 의미를 현실화 했다. 전봉준의 녹두꽃이 투쟁의 꽃이었다면 김씨 할매의 녹두꽃은 생존의 꽃이다. 생존 앞에 만물이 경건하다. 그러므로 김씨 할매의 녹두꽃 앞에 독자들은 옷깃을 여며야 한다. 시인은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웃 김씨 할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로 김씨 할매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꼴을 수없이 당한 위안부 할머니와 녹두꽃을 결합함으로써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나는 조선의 여성상을 완성했다.
휴머니즘이 따로 있는가, 이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바로 휴머니즘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진심으로 운 사람들, 시인들 있는가? 어쩌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 세워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을 취하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소녀상 백 개 세우는 것보다 이 한 편의 시 <녹두꽃, 만발하다>가 김씨 할매와 동료들의 깨어진 몸과 마음을 동여매는 끈이 될 것이다.
층층 다랑논을 지키려고 올해도 논둑마다 녹두꽃이 만발이다, 고맙다 녹두꽃!
할마시, 꽃미남 총각, 백수 아들이 등장하는 <낮술의 힘>은 면사무소 부근에 사는 민초들의 힘든 삶의 모습 한 장면을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 공공근로권을 가진 면사무소 직원 총각에게 ‘우리 아들’ 공공근로 취직을 청탁하는 할마시, 그것도 맨 정신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고 낮술 소주 두어 잔의 힘을 빌려야만 할 수 있는 시골 늙은 모성의 징징 우는 모습에서 농토가 없는 농촌 무산자들의 현실을 볼 수 있다.
도시는 그래도 노가다들이 입에 풀칠은 할 정도의 일거리가 있다. 하지만 농촌은 농번기 말고는 노가다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다. 그래서 할마시에게는 낮술의 힘과 애원, 아부를 동원해서라도 ‘우리 아들’의 공공근로 취직 성사가 절박하다. 공공근로라고 해도 항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워낙 벌이할 데가 없으니 공공근로라도 해야만 근근이 목숨 줄을 버틸 수 있다.
임용권을 쥔 꽃미남 총각은 “할머니, 왜 그려셔요” 질색이고, 행인들은 ‘할마시 낮술 먹고 총각에게 징징데네, 보기 추하네’ 써늘한 눈길로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아들을 취직시키기 위한 늙은 모성의 분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촉촉하다.
낮술의 힘과 시인의 눈길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보증대로 ‘휴지 줍는 거 잘하고, 풀 뽑는 거 잘 하고, 공중변소 청소도 잘하는’ 아들은 분명 공공근로 취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에겐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이 장면이 시인의 눈길에 의해 우주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부유한 물질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우리나라 도시 구석 곳곳에 서 있는 <포장마차 아줌마>마다 사연이 있다. 장만한 포장마차 앞에서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겠는가. 그리고 하루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가. 그 중에 한 아줌마는 ‘늘 아득한 어딘가를 더듬던 그 눈빛의 홀아비’에게 ‘스물한 살을 내주었던 처녀’는 ‘홀아비의 아이’를 ‘그녀만 한 처녀’로 곱게 키웠다. 모진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태 ‘스물하나의 얼굴’이다.
시인은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사연을 아는 사람들마다 어리석은 눈먼 사랑이라고 뒷말을 하지만 시인은 그녀의 사랑을 순정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리고는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랑이 있지만, 이런 순정의 사랑도 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포장마차 아줌마의 일생을 위로한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곳은 활력소이다. 제아무리 풍요한 물질을 누리며 살더라도 마음에 활력소, 즐거움이 없다면 그냥 몸만 삐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포장마차 아줌마에게는 스물하나의 순정이 평생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삶은 미록 남루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스물하나가 뱅뱅 돌며 활력을 일으킨다. ‘홀아비의 아이’는 어머니의 활력을 이어받아 이 땅의 좋은 모성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시란 게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이 시가 다시 묻고 있다. ‘어설픈 콧소리와 웃음’에 혹한 남정네들 몇이 겨우 술김에 관심할 뿐, 어느 누가 이 포장마차 아줌마의 삶을 눈여겨 볼 것인가. 이 땅 대부분의 시인들은 ‘아 이 포장마차 아줌마 생활력이 대단하구나’ 정도이다. 그러나 시인의 섬세한 눈길은 아줌마의 과거 현재 미래를 깊이 본다. 시인의 눈길에 따라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이 화사하게 꽃으로 피어났다. 그 순정이 한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한 생명을 반듯하게 키워냈음을,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순행하고 있음을 시인은 증언하고 있다.
<어떤 노부부>에는 가난 속에서도 한평생 정성스레 살아온 노부부의 늦복이 소박하게 담겨있다. 젊은 날의 일꾼 부부는 소 돼지 똥치며 살아도 금슬이 좋았다. 늙어서도 할아버지는 끌고 할머니는 ‘한 수족 끌며’ 민다. 때는 ‘온몸에 땡볕을 꽂고’이다. 아들딸이 있지만, ‘막 실뿌리 내리기’ 때문에 더위 먹으면서 폐품을 모은다. 그런 노부부의 마음 때문에라도 아들딸의 뿌리는 반드시 굵어질 것이다. 또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다.
조그만 임대아파트가 노부부에겐 천국이다. 폭염 속 호박잎이 되었던 몸과 마음이 ‘하얀 타일 깔린 욕실에서’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찬물 한 번 끼얹으면’ 금세 ‘펄펄 기운이 솟는’다. 그들에게 오만 원짜리로 가득 한 007가방을 주면 받을까? 분수에 넘친다고 펄펄 뛰며 사양할 게 분명하다. 그들이 한탕 불로소득을 노리며 평생을 살았다면 ‘조그만 임대아파트’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인심은 아파트 평수를 따지며 더 큰 평수 아파트를 향하여 평생 동안 질주한다. 같은 단지라도 평수의 차이에 따라 목에 힘주는 각도가 다르다. 그러니 세상인심에는 열 몇 평 임대아파트는 아파트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몫의 인생을 성실하게 산 노부부에겐 임대아파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그들만의 순수한 행복이다.
세상인심에는 폐품리어카를 끌고 미는 노부부는 하찮은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 말한다. 누가 있어 시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참된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만족입니다”라는 종교가나 유명인사의 말 백 마디보다 이 시 <어떤 노부부> 한 편의 울림이 더 깊지 아니한가? 시인의 눈길을 따라 함께 바라보고, 시인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듣는 세상인심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 시 앞에서 나 자신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이삭 줍는 할머니>에서 시인은 절규한다. “국민소득 삼만 달러 시대란 겉으로만 번쩍이는 시대가 아니냐”고. 이 할머니들의 현재는 ‘그때 그날’과 다름이 없다. 물론 성장한 자녀들은 삼만 달러 시대에 얼추 가까울 거다. 그러나 세상에서 출세한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새 집을 장만해주었다는 소문은 귀하다. 말로만 “우리 집으로 오시지요”이다. 또한 어머니들도 짐이 될까봐 도시의 자녀들 집에 얹혀사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그러면서도 주운 이삭을 모아두었다가 손주들에게 용돈을 준다. 그래서 농촌에 남은 늙은 어머니들의 삶은 속을 다 내준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다. 도시의 자녀들이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는 모성을 기억하라고 시인은 절규한다.
시인이야 ‘공무도하가를 다 이루었네’라고 <예언의 노래>를 불러주지만, ‘서마지기 다랑논’과 ‘돌담 위 해바라기’와 ‘어린 것들 재롱’을 버리고 ‘그라목손’을 마신 ‘저 추레한 사내’가 낙동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참혹하다. 물가에 가지런히 놓인 낡은 운동화와 꼬부랑꼬부랑 그의 어미가 엎어진 고무신이 만드는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을이 왜 패총이 되었으며, 중년 사내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국민소득 삼만 달러라고 광고치는 이 시대에 왜 농촌은 붕괴되어야만 하는가. 아마 중년 사내는 감당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빚을 짊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혼자만의 빚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은 패총’이 되고를 보니 혼자만 망한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쫄딱 망한 것 같다. 요즘은 덜하지만 한 때 축산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어 축산에 매달린 적이 있다. 근데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증이 필요한데, 농협에서는 그 보증을 마을 농민들이 서로서로 보증을 서는 ‘상호연대보증’제도로 하였다. 서로 보증만 서면 거액을 빌려서 축산업을 할 수 있으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거기에 매달리고 말았다.
근데 축산업이 순조롭게 발전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과잉 시설 투자에다가 한미 FTA 등으로 외국산 축산물이 싼값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축산물가가 폭락하고 말았다. 축산농들은 폐업 당하고 결국 거액의 농협 빚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마을 상호연대보증을 섰으니, 한 농가가 무너지면 온 마을 농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누구의 잘못인가? 거액 융자가 쉽다고 마구 축산업에 나선 농민의 잘못인가? 아니다, 농협을 앞세운 정부의 농촌정책이 잘못이다. 축산물 가격이 높으니 축산을 하고 싶은 것은 농민의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농협에서, 정부에서 축산정책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추진하며 상호연대보증 제도만 시행하지 않았다면 거액을 빚내기 어려운 농민들 다수가 포기하였을 것이다. 적정한 시설 투자가 이루어졌다면, 또한 외국으로부터 오는 수입 축산물을 어느 정도 차단했다면 축산물 가격이 안정되었을 것이다. 그 축산장려자금, 이율? 거의 공짜 아니었나? 떡밥에 달려드는 피라미 떼처럼 농사 짓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밖엔.
그 피해가 고스란히 축산 농민에게, 마을을 뒤덮어 버렸다. 오죽해서 ‘낡은 운동화 가지런히 물가에 벗어놓고’ 중년의 사내가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 갔을까.
누가 ‘그라목손’으로 한살이를 마친 축산업자의 영혼을 위로해 줄까? 다만 한 시인이 비장한 목소리로 공무도하가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한다. 마을 입구에 서서 선량한 농민이 죽어나가는 비극과 통째로 무너지는 농촌마을의 현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발한다. 세상은 시인의 목소리를 똑똑하게 듣고, 중년 사내의 입수를 강제한 농협과 정부의 거대한 정책적 폭력을 비판해야 한다.
<가극을 보다가>의 나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지방 소도시의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서민들은 가극 보기가 어렵다. 기회도 없지만, 설혹 있다 해도 할인 받지 않고서는 보기가 어렵다. ‘나도 한번 보리라’ 작심하고 ‘할인 받은 S석에 앉아’ 가극을 본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대와 선율에 넋이 풀리지만 시인의 마음은 오히려 뒤돌아 고향의 들판으로 향한다. ‘보이지 않는 채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밭에서 엉금거리는 팔순의 어머니와 서푼짜리 과원에 꽁꽁 묶인 남루한 오라비 내외가 실재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대로 천민인 그들의 노역’과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통속’의 가극, 그리고 빅또를 쪼이를 생각하는 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 사이에 선 나의 의식은 긴 머리칼, 거친 목소리, 단순한 멜로디로 사랑과 고독과 자유를 노래한 빅또르 최에 공감하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시인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할인 받은 S석’이고 고향의 들판이다.
<네온의 꽃밭을 보다>에서는 같은 거리인데도 낮과 밤이 반대인 도시의 모습을 시인은 어두운 낯빛으로 깊이 신음한다. ‘저 거리’ 낮의 모습은 마음 한 곳이 절단된 어머니와 눈물 가득 머금은 어린이, 보행기에 몸을 기댄 노인들, 담요를 두른 중년의 남자, 맨발의 주정꾼이 잠을 자는 곳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의 풍경은 싹 사라지고, 목말을 탄 아이, 젊은 커플, 웨딩카 같은 자동차들이 계속 지나가는 형형색색 네온꽃이 만발하는 행복한 곳이 된다.
유리창에 기대선 사람이 어두운 낯빛으로 ‘저 거리’의 낮과 밤에 교대하는 가난과 부유, 고난과 행복을 염려하지만, 그 혼자만의 염려일 뿐, 사람들은 ‘꽃들의 축제장’에서 밤을 즐긴다.
시인이 관찰자로서만 끝날까? 그건 아니다 시인 역시 배우와 함께 ‘짓’ 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인이나 배우나 바깥사람이 볼 적엔 함께 군중이다. 다만 시인과 군중의 차이점은, 군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까지는 똑같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냉큼 돌아선다. 돌아서서 이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구역질한다. 그러나 군중은 낮에 달게 자고 밤이 되면 다시 <네온의 꽃밭을 보다>의 주인공이 된다. 좁혀 말한다면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시각의 차이라고 할까.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어디쯤일까, 무엇일까. 누가 관중이고 누가 배우인가. 서로, 내가 관중이고 너는 배우이다 하며 자위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배우는 단순한 연기뿐이지만 관중은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빌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배우보다는 관중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 모두가 배우인데도 말이다. 하여튼 즐기면서도 불만하는 시인의 시선을 군중들은 느끼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일단 시인의 시선은 도덕률의 흐름이고, 군중의 즐거움은 세월의 흐름이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면 <서민 아파트>. 평당 가격이 고공인 아파트 고급아파트는 품위를 논하지만, 저공인 아파트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 사람들은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친다. 그래서 비싼 아파트 고급 아파트는 단정한 형식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산다. 하지만 서민 아파트 사람들은 준수해야 할 형식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스스럼없이 내놓는다.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칸나가 창을 두드리고 키를 높이고 붉게 피고, 백발의 할머니와 좀 젊은 아낙들이 서로 의지하며, 두런두런 저녁 늦도록 사람 소리가 들리는 이곳이야 말로 사람 사는 세상임을 시인은 소박한 목소리로 세상에 내놓는다.
‘몇 십 년 후, 이 마을은 무엇으로 불릴까요/ 산이 마을을 덮어 만든/고려장골일까요’, 시인의 예언이 아니라도 농촌의 붕괴는 이제 상식이다. 아이 울음소리 끊어진지 이미 오래이고 학교는 면소재지에 불과 전교생이 이삼십 명 뿐인 초등학교 하나뿐이다. 읍소재지라도 변두리에는 빈집이 듬성듬성하고, 면소재지는 도로 가에 집들만 사람 사는 기척이 날 뿐이다. 산골마을은 혼자 사는 노인네들만 엉금엉금 기는 집 몇 채 말고는 빈집이 수두록 하다. 수십 년 후의 우리나라는 산업구조와 생활환경의 고급화 그리고 인구감소로 인해 대도시-중도시-소도시-읍소재지에만 사람이 살고 면소재지는 이하는 다시 산이나 골짜기로 환원될 것이다
그 전조로 이미 ‘산은/참나무와 자목 덤불/ 골목까지 내려보내/ 마을 정탐’ 중이다. 아니 정탐 중이 아니라 이미 반 쯤 점령했다. 무너지는, 아니 무너진 이 마을을 보며 <산이 준비하다>라고 시인은 예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서울 친구들은 ‘아이들 용돈도/ 큰손으로 주는데’ <명절날의 ㄱ씨>는 ‘땅뙈기에 아무리/육수를 쏟아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이 모자라고 새끼들 새 잠바 한 벌 못 사 입히고 팔순 어미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준다. 세상 사람들은 ㄱ씨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못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도시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땅만 파는 농투성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잘 난 사람만 살 곳인가? 못난 사람도 끼여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다. 그리고 공평한 세상이라면,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ㄱ씨는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일했어도 사는 형편이 남루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시인은 ㄱ씨의 삶을 통해 농촌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 거둔 농작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므로 빈곤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농산물 값은 그대로인데 공산품인 비료, 농약, 농자재, 잠바 값은 해마다 오르고, 틀니 등 의료비는 아득히 고가이다. 그러니 농사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해결방법은 농산물 값이 오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산물 값이 조금만 오르면 도시 소비자들은 물가가 비싸다고 난리를 친다. 도시사람들 자기들은 수십 수백만 원짜리 상품을 척척 사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정부는 곧 알아서 외국 농산물을 대량 수입해서 시장 가격을 떨어뜨린다. 농촌인구보다 훨씬 많은 도시인구들의 입과 손에 정권의 명운이 달렸기 때문이다.
누가 있어 우리나라 농촌의 수많은 ‘ㄱ씨’를 눈여겨보고, ‘조금씩 작아지는 ㄱ씨’가 더 이상 작아지지 않도록 하자고 외치는가. 이 시인이 있어 바로 가까이에 있는 ㄱ씨의 아픔을 대신 호소하고 있다.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는 사내들에게는 한갓 유희의 대상이지만 시인에게는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로 보인다.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갖는 이미지는 ‘행복’이다. 클럽의 접대부로서 병술과 줄담배, 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지만,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숭아 꽃밭’ 이 이 황폐한 여인의 가슴 속에도 숨어 있음을 시인의 예리한 눈은 보았고, 또 그것을 자신 있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어린 것들 떼어놓고’ 유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고달픈 삶의 원인을 직시하고, 반드시 ‘어린 것들’과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을 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성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다시 따뜻해지는 것이다. 황폐한 삶을 혐오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시인의 마음이 일파만파가 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시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부분이 어디에나 있는 법, 클럽 황태자에 가는 사내들이여 후회 없이 즐기되, 거기에도 한 삶이 뜨겁게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자.
시는 정에 뿌리를 둔다. 그 정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시인이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 시인은 희귀하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의 정은 본능의 것이지만 시인의 정은 본능의 시련을 거쳐 한 숨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은 철광석이다가 갓 제련된 무쇠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정은 그 무쇠덩이를 계속해서 정련한 강철과 같은 것이다. 이 시인이 클럽 황태자의 여자를 보는 눈은 몇 번의 정련을 거친 강철 눈이다.
이 시인의 눈은 시공을 넘나든다. 시도 때도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지금까지 나타난 사람들하곤 빛깔이 다른 사람들이 떼로 나타나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귀신도 양반은 4대조가 현신하고 백성은 2대조가 현신한다. 그런데 더 유명한 양반은 불천위라고 5백 년 전 귀신도 또렷하게 현신한다. 그러나 동학의 귀신들은 자손이 없어 현신할 데가 없다. 그런데 상주의 한 여류시인이 쓴 <축제문(祝祭文)>을 듣고는 흐릿하게나마 현신한다.
그들은 ‘머리 풀어헤치고/ 창백한 얼굴 검은 입술 긴 손톱’이다. 아직 ‘영원한 안식처’를 못 찾아 가끔 시인의 꿈에 나타나 “네 이년!” 고함을 지르며 목을 조인다. 그러나 시인은 시 한 편 올리면서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이다.
그들은 무지렁이였음을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꿈은 ‘태풍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펼치는 것이었지요’라며 확실하게 추인한다. ‘칠월의 나무, 넉넉한 상, 분향, 선녀보살’, 더구나 ‘달과 별’에다 ‘망초꽃들도 저렇게 손을 흔듭니다’로 막 내리니, 1894년 호남벌에서 ‘찢긴 육신들’은 충분히 해원하지 않았을까.
동학, 참 가슴 아픈 말이다.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운동 등 좋은 말 많지만 ‘동학난’이란 말이 실감난다.
‘동학난’에 대한 말과 글이, 지금까지도 무성했듯이 앞으로 우리민족사가 계속되는 한에는 남과 북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가 있었다면, 쓰여진다면, 그 귀신들이 누구의 길을 안내 받을까? ‘선녀보살들이 길고 흰 명주수건을 감았다 풀면서 안내하는 길을’ 가지 싶다.
3부부터는 나와 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첫째는 어머니다. ‘지팡이 소리’가 이 시인의 어머니일 뿐일까? 아니다, 이미 시에 등장하였음에 개인을 넘어 만인의 어머니이다. 왜냐? 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며 가장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쪼그라진 어머니’가 왜 하필 ‘주차된 차량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현실이다. 시골 노파가 조심성도 없이 죽 늘어선 자가용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사는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를 나타내는 캇! 한 장의 사진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안락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다수는 ‘쪼그라진 어머니’가 사는 시골이 고향인 부모를 둔 도시 태생들이다. 그들은 현재의 삶하고는 전혀 다른 고향을 경원한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 모습에다가 가치를 부여할 따름이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가용을 주차시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들에게, 자기 차에 근접하는 노파는 위험인물이다. 혹여나 차가 다치지나 않을까 아내나 친구와 하하호호 웃고 지껄이면서도 눈은 힐끗힐끗이다.
그들에게 부모의 고향 시골을 얘기해준들 알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이미 그들과 시골은 정서적 단절이 확연하다. 그러므로 ‘주차된 차량 속으로 들어갑니다’는 그들에겐 한갓 위험 요소일 뿐이다.
‘쪼그라진 어머니’를 너무 확대 해석 하는가? 의미를 지나치게 부하하는가? 그러나 ‘쪼그라진 어머니’는 이 시인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만인의 어머니다. 가정에서는 시인 한 사람의 어머니였지만 시의 대상이 되면서 만인의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금태 안경에 메이커로 쫙 빼입은 어머니를 상상하는가? 그것은 서양식 상상이다. 조선의 어머니는 ‘삐걱거리던’이다가 ‘낡은 목덜미까지’ 보이다가 ‘거뭇거뭇한 뒷머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졌다. 왜?
누구나 늙으면 쪼그라지고 지팡이를 짚는다. 어디 죽을 때까지 탱탱한 사람 있는가. 허리 꼿꼿한 사람 있는가. ‘쪼그라진 어머니’도 한 때는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에 붙이던’ 청춘시절이 있었다. 콩 콩 ‘지팡이 소리’가 하루 종일 먹고살기에 바쁜 일상인들에게 생로병사의 본질을 잠시 생각하게 한다.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은 지상에 없다’라고 시인은 이를 악문다. 고향이 왜 사라졌는가. 우선 시인 자신이 성장했다. 성장한 눈으로 보는 고향은 무언가 허전하다. 자연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다. 동심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떠나고 동네 오라버니와 이웃 아주머니들도 도시로 떠나거나 늙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결코 고향을 버리지 않는다. ‘환삼덩굴까지도 그리워라 그리운’, ‘내 심중에 들어찬 고향’이다.
그러나 고향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인은 ‘내 시가 부끄럽다’며 <절필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쓴 시와 시인이란 이름표가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앞에 부끄럽다. 추곡 수매하던 날, 오라버니가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 든’ 모습을 보며 ‘왜 저 지랄이야’ 소리쳤던 것이 이제야 부끄럽다. 왜냐면,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어둠을 향해 탈곡기 전조등을 쏘아대며 농사일에 골몰하는 오라버니와 현장에서 함께 했고, 나이 들어 세상 물정을 넓게 접하며, 추곡 수매가가 농업노동의 강도에 비해 터무니없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시 소비자들은 쌀값이 오르면 싫어한다. 싸고 맛있는 쌀을 원한다.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익은 배가 고가이면 비싸다고 불평한다. 굵고 시원한 배가 고급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한 데도 말이다. 레저에는 십만 원 단위로 돈을 쓰면서도 말이다.
과거 산업화 초기와 중기에 걸쳐서, 벼농사는 농민들이 하지만 추수한 벼의 가격은 정부가 매겼다. 저곡가정책이 연속되었다. 저임금을 주며 산업노동자들을 부리기 위해서는 농산물 가격이 낮아야만 했다. 농산물 중에서도 중심인 쌀은 반드시 정부의 통제 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쌀값이 조금 오를 만하면 저가의 외국쌀을 수입해서 곡가 상승을 막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풍요해지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슬슬 추곡 수매 양을 줄였다. 농민들이 수매하고 남은 쌀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해도 쌀 소비가 줄어든 시장에서는 헐값일 뿐이었다. 한미 FTA 후부터는 값싼 미국 쌀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에서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해마다 11월이면 생산한 전량 추곡 수매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상경 시위를 한다. 그러나 도시소비자들은 농민들의 추곡 수매 투쟁을 불평한다. ‘까짓 거 농민들이 벼농사를 안 지으면 미국 쌀 수입해다 먹으면 되지 뭐’하며 단순하게 생각한다. 도시소비자들은 자기들의 원뿌리, 부모들의 고향이 시골임을 잊어버렸다. 기억해도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시대가 바뀌면서 농업도 바뀌고 있다. 과거 할 게 벼농사뿐이었던 시대가 가고 농업도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이제 추곡 수매가 때문에 ‘멱살잡이 주먹질’을 하거나 상경 투쟁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하지만 농업의 본질인 벼농사만큼은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농촌이, 농업 현실이 좋아지면, 시인은 절필 생각을 접고 다시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를 쓸 것인가?
이어서 등장하는 <그 집 아지메>와 <위층에는 누가 살까>, 너무 흔해서 심드렁한 이웃 사람들도 일단 시의 무대에 등장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사회 속의 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갖가지 음담을 펴놓고 흐물거리던 아낙네들’도 ‘바람 없는 숲처럼/ 물소리만 내려 보내는 위층’의 존재도 세월이 가면 ‘조금씩 소멸’한다.
시인의 시선은 <그리운 화개리>를 거쳐 <오늘의 스타>에 머문다. ‘머리카락의 서캐 범벅, 부스럼 딱지’ 흔하던 친구가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서 스타가 된다. 그녀의 춤은 우리들이 ‘펄쩍펄쩍 뛰며 와와 소리를 지를’ 정도로 요란하다. 어린 날의 가난을 딛고 일어서 ‘공작의 날개처럼 활짝 펼친’ 친구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촉촉한 물기가 맺힌다.
다음 시선은 ‘멍자’에게 머문다. ‘나처럼 홀로 늙어가는’ 멍자는 시인의 유일한 동거생물이다.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뜨거운 암컷 발바리의 목줄을 풀어놓으며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는’ 시인은<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한 마리 애완견이 완전한 가족이 된다. 시집 전편에 흐르는 현장 휴머니즘이 동물에게까지 넘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춘정은 같다. ‘봄비 줄줄 흐르던 밤, 그만/ 남정네를 다락방에 숨기고 말았다는’ ‘그 집 아지매’나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는’ 발바리나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한갓 생물일 뿐이다.
‘멍자’처럼 아픈 청춘이었을까, ‘오뉴월 서릿발 내리게 하는, 빠진 송곳니를 다시 돋게 하는, 제웅의 가슴에 비늘을 꽂게 하는, 나를 두고 떠난 당신’을 시인은 ‘물결에 실려’, ‘세월에 실려’ 흘려보낸다.
‘첫사랑이 고개 돌리지 않았다면
이만한 딸아이 내게도 있을지 몰라
벙그는 목련꽃 같은 스물하나
눈 내리는 창가에 처연하던 스물하나’
-뿌리를 내리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시인의 일생은 한 권의 시집에 담긴다. 해마다 시집 한 권 너끈히 묶어내는 시인들이 숱하지만, 이 시인은 시력 삼십 년 만에 이 한 권 시집, 그것도 백을 넘지 못하는 55편으로 평생 시업을 일단은 정리한다. 그래서 여러 편 곳곳에 ‘첫사랑의 아픔’을 고백하고 있다.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느티나무 그늘>,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 ‘인숙이 집은 아직 그대로네/ 허름한 나무대문 희미한 갓전등/.../담배나 캔맥주 사러 나갔다가/ 슈퍼가 너무 멀어 인숙이 집 골목이/미로라서/ 미아처럼 헤매다 그곳에 흘러들었겠지// <어느 골목을 지나다>.
스물한 살의 첫사랑을 평생토록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 늙음이 저만치 오면 문득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첫사랑의 아픔으로 늙음을 물리친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늘 스물한 살의 아픔으로 촉촉이 젖어있다.
시인은 ‘첫사랑의 아픔’을 반평생 지금까지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에게서 그것을 치유시키거나 빼앗는다면, 그는 다시는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인뿐만이 아니라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을 것이다.
‘꽃잎이/ 돌부리와 마주쳐 멈칫하다가/ 곧 흘러갑니다/ 내 마음 옛일에 걸려 휘청하다가/ 곡 흘러갑니다’.
다시 이어서 ‘작은 꽃송이/ 연어가 아니어서 돌아오지 못하듯/ 내 마음 거꾸로 선 비늘 하나 없어/ 돌아오지 못합니다/ 흐르고 흘러갑니다// <풀꽃을 냇물에 던지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연륜이 쌓이면서 ‘첫사랑의 아픔’을 한갓 추억으로 풀어버린다.
그러나 시인은 집요하다. ‘흐르고 흘러갑니다’라고 했지만, 연륜이 쌓일수록 다시 ‘거꾸로 선 비늘 있는 연어’가 되어 ‘첫사랑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하여 무섭게 거슬러 오른다. 그러면서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이 동질임을 발견하고,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을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 둘의 치유를 통합하고 있다. 이 힘이 바로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들은 좌판위의 생선이 아니라 생활의 강물에서 살아 퍼덕이는 연어들이다. 어느 여류시인, 아니 남류시인의 시집보다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노동자는 많지만 노동시인은 귀하다. 마찬가지로 농민은 많지만 농민시인은 귀하다. 생활인은 많지만 생활시인은 귀하다. 풍경과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는 음유객은 많지만 음유시인은 귀하다. 서정인은 많지만 서정시인은 귀하다. 지식인은 많지만 지식시인은 귀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귀한 그들로 하여금 ‘시인’이란 말을 뒤에다가 붙이도록 하는가.
원론적인 정의이지만, ‘시인’이란 노동자, 농민, 생활인, 지식인들 가운데에서도 관찰력과 표현력이 우수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언어 조립 능력이 우수하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김재순은 ‘시인’이란 말을 뒤에 붙여도 될 만하다. 그렇다면 ‘무슨 시인’이라 붙일까?
김재순 시인은 생업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서 다양한 생활시를 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면소재지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 눈높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시골마을 출신이고, 농업에 종사하는 오라버니를 늘 보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그러니 관찰의 각도가 맞아 쓴 생활 현장시가 최단거리로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현장에 몸담지 않은 시인들이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쓴 생활시나 농촌시들 과는 달리 진정성이 뭉클 만져진다. 시인의 장기이자 본령인 관찰과 묘사 차원을 넘어 대상과 합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
해방 전후 프로시인들이나 산업화시대 민중시인들이 노동현장이나 농업현장 등의 생활전선에서 오래 생활하지도 않고서 쉽게 쓴 노동시와 농민시, 민중시가 갖는 작위성과 허구성에 비해 이 한 권의 시집은 이 시대의 간고한 민중생활을 증언하는 실제실감의 시적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다.
고은의 30권짜리『만인보』가 비록 방대하지만 초점이 흐리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한 권『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는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알차고 값지다. 고은은 관념으로 만인을 훑었지만, 김재순은 가슴으로 이웃 수십 명과 함께 서로 안고 울었다. 다른 시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시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김재순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건져 올렸으니 ‘생활시인’이요, 농업에 직접 종사하기도 하면서 시를 쓰기에 ‘농민시인’이요, 이 시집에 등장시킨 사람들을 통틀어 ‘민중’이라 부르기 때문에 ‘민중시인’이란 말을 붙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하나, 내가 민중과 생활의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지, 서정의 관점에서 보면 ‘서정시인’이란 말을 붙여도 괜찮을 만한 시들이『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이 시집에도 여러 편 들어있다. 내 눈맛에 맞게 고른 시가 17편이지, 두 배나 되는 나머지 38편은 보는 사람 각자의 눈맛과 입맛에 따라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후인들의 시각이 기대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들은 여타의 서정시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수작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연애편지
그 처녀 열일곱
불 때서 밥하다가
애인의 편지를 받았지
양은솥처럼 달아오른 마음, 뒤란
꽃그늘서 편지 뜯었지
애인도 편지지에
꽃들을 잔잔하게 그렸고
그러나
몰라, 그녀는 잘 몰라
빽빽하게 쓴 글씨가 무언지
낱말 몇 개 건너뛰고 또 건너뛰고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은 그녀는
코흘리개 아우 불러
답장을 쓰고
글자로는 잘 못하지만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지에 붙이던
검은 치마 귀밑머리
바람에 날리던
그 처녀
내 어머니
봄 6
가슴 속
꿈틀거림 치밀어
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
저 할마시
이젠
사뿐사뿐 흐드러진 개나리꽃 꺾어들고
돌담에 기대서서
애마르게 부르던 그 옛날처럼
점 찍어둔 영감 이름 부를 것인가
휘영청 달 밝은 시냇가
낮은 버드나무 아래서
물새처럼 열 오를 것인가
뿌연 거울에
얼룩진 얼굴을 들이밀며
처진데 쓸어 올리며
어쩌자고 전신에
달걀노른자 찍어 바르는가
아아.
고목 둥치에
움이 돋았네
느티나무 그늘
저 고목의 느티나무
이파리 왜 저렇게 많은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수령 오백 년, 저 나무 아래
빗물처럼 머물던 사람들
가면서 떠나면서
마음 한 쪽 베어서 걸어놓은 것이야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나
자꾸만
저 그늘에 이끌리네
유명한 서정시인들 중에는 평생 동안 목숨이니 사랑이니 고향이니 하면서 순수서정을 내세우는 시인들이 많다. 서정의 승화랄까, 발전과 확장이 정체 되었다. 그에 비해 김재순 시인의 서정시들은 그들의 도시서정적인 표현법에 비해 세련되지는 못했겠지만 기층생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싱싱하게 살아있다.
하여튼 비교적 작은 이 한 권의 시집이 품고 있는 성격이 여러 갈래이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무릉도원, 따뜻한 봄날 복숭아꽃 활짝 피어있는 풀밭에서 하루 종일 소요하는 즐거움을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팔자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해도 순간에 지나가는 형식이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무릉도원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복숭아 꽃밭’은 없다.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복숭아 꽃밭’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재 한다. 어디에? 일상인들이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지, 이미 현실 속에 들어 있다. 그가 가리키는 ‘복숭아 꽃밭’은 상상의 세계 멀리 아득히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일상의 현실 속에 감춰져 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드는 따뜻한 관계, 견권지정繾綣之情 속에 ‘복숭아 꽃밭’이 있다. 그 일상의 현실에서 톡톡 발견한 인간의 진실이 현장 휴머니즘으로 흐르는 시인의 세계가 바로 복숭아 꽃밭이다. 그 ‘복숭아 꽃밭’으로 다 함께 가기 위해 시인은 세상사람 모두 들으라고 시를 쓴다.
또 하나, 시인 혼자서 가야할 길이지만 함께 할 여러 일행을 청한다. 그 중에서도 ‘잃어버린 사람’ 노무현을 먼저 부른다. 이 글을 쓸 처음엔 내가 아둔해서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 시인이 ‘노무현이예요’ 살포시 고백했다.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
- - -
또 만나고 싶어요, 노무현.
-그에게 가다-
<그에게 가다>는 이 시집 맨 앞에 자리한다. 권두시이다. 뜬금없이 정치 얘기라서 좀 의외이지만, 노무현이란 사람을 통해서 정치를 보는 시인의 관점을 알 수 있다.
흔한 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백 사람의 시인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사회를 좀 더 유연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물론 형식적인 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는 법, 시인은 노무현 같은 정치인이 ‘복숭아 꽃밭’으로 민중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시집에서 갈파한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정치에서 나올 수 있다.
리어카 아저씨가 ‘이십만 원의 힘’을 낼 수 있었던 원천은 ‘저소득층 복지정책’이 아닌가. 또한 ‘붉은 머리 도요새’를 이제 철새가 아니라 텃새가 되도록 하고, 내세울 것 별로 없는 젊은이들이 ‘채용의 조건’에서 해방되어 제각기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고,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핀 녹두꽃들’이 활짝 웃도록 하고, ‘낮술 마신 할마시’의 아들이 공공근로에 뽑혀 어머니께 낮술을 자주 대접하도록 하고, ‘포장마차 아줌마’의 아이가 마음 어둡지 않게 자라도록 하고, 세상의 모든 ‘폐품 노부부들’이 조그마한 임대아파트라도 마련하도록 하고, 축산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여 ‘패총의 마을’을 다시 인정이 흐르는 마을이도록 하고, 그리하여 면소재지에 사람 냄새가 그득하도록 하고, ‘ㄱ 씨’가 땀 흘려 일한 만큼 살도록 하고, 1894년 동학항쟁에서 쓰러진 목숨 값이 21세기에는 비로소 고귀하도록 하고, 생명의 근원인 쌀이 제값을 받도록 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게 바로 정치가 아닌가.
그래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는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가 되어버렸다.
정치적 희망이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시인은 ‘피 묻은 깃털 하나/ 가슴에 꽂고/ 포석들을 어루만지며/ 저도 돌 하나 놓습니다’를 맹서하며, 후일을 기약하며 더욱 더 사람들 내면의 자각을 호소하기 위하여 눈 부릅뜨고 세상 사람들을 기록하였다.
하루를 이어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꿈을 형상화 한 말, ‘무릉도원’은 절이나 교회, 성당에 가면 고승대덕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하기 쉬운 말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표현하기 쉬운 시 화법이다.
그러나 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내는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보다 한결 생생하다. 그들은 인간의 목소리로 인간을 말하지만, 이 시인은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말은 머리로 생각하도록 만들지만 이 시인의 말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단박에 점염되는 느낌이다. 서정이든 지성이든 고발이든, 가짜와 꾸밈이 허다한 시단에서, 김재순 시인의 시집이 울리는 진정성의 목소리는 동심원을 그리며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명의 바람을 타면 들풀의 속삭임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심심산골 산꽃과 들꽃은 인간들이 봐주지 않아도 홀로 곱게 피었다가 조용히 진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산꽃이고 들꽃이다. 인간들은 그들을 통틀어 ‘잡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잡초가 아니라 저마다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이다.
누가 그들에게 한 줄기 따뜻한 시선을 보냈는가, 함께 희로애락하는가. 시인들? 하많은 시인들 중에 유독 김재순 시인만이 그들이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임을 조용히 언어로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깊은 산사에서 울리는 저녁범종소리처럼.
시인은 시집으로 한 시절 한 평생을 매듭 한다. 뻥튀기하여 수십 권 시집을 낸다고 대단한가? 아니다, 단단하게 압축된 단 한 권의 시집으로도 충분히 시인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집을 내는 즐거움을, 독자는 좋은 시들을 읽는 즐거움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정신의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아니겠는가.
한 권 좋은 시집을 읽게 해 준 김재순 시인께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민다.
하여튼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그 시집을 한 번 읽어 볼 일이다.
2018년 5월 5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
첫댓글 멋진 시집평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