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바람 쐬러 갑시다.” 아내의 말에 “춥지 않은가?” 어깃장을 쳐본다. “에그 춥기는, 운동하기 싫으니 별 핑계를 다 대시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아내에게 댓살 먹은 아들처럼 어깃장 치는 게 재미있어졌다. “여보, 청소기 좀 돌릴래요?” “깨끗한데 뭘 돌려?”하고 꾸물거리면서 아내가 재촉하기를 굳이 기다려 마지못해 하는 척 하며 청소기를 돌린다. 젊어서는 ‘나는 바깥사람이야.’ 하고 손도 안 대던 일이지만 삼십여 년을 함께 살다보니 소소한 일을 하께 하는 것이 어느새 재미있고 감사한 일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저절로 재촉하고 잔소리 하는 아내가 밉지 않고 오히려 오래 된 책처럼 친근하고 사랑스럽고 정다운 것이다.
젊을 때는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벌컥 화를 내고 종일 말을 하지 않거나 여린 심성을 가진 아내를 대 놓고 비난했으니, 이제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언행을 하는 속 좁은 남자였다는 자괴감이 든다. 시장에서 과일을 고르거나 채소를 더 달라는 아내를 인정도 없는 이기적인 여자라고 매도하고, 골목의 좁은 길에서라도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 길을 건너는 것을 보면 얼굴에 멸시하는 빛을 보이곤 했으니 아내는 이런 고지식하고 저만 잘났다는 교만한 심판관(?)하고 사는 것이 무척 피곤했을 것이다.
이제 늦게나마 착한 어린이 같이 말 잘 듣는 남편, 이해심이 많은 남편, 집에서는 굼뜨고 조금은 어벙하여 아내의 잔소리가 필요한 남편, 그러나 언제나 아내 편이 되어 주고 울타리가 되어 주는 남편으로 살려고 마음먹고 보니, 이 일이야말로 나로서는 큰 깨달음이고 축복이며 또 감사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 이 쯤 되니 아내의 잔소리가 오히려 고마워졌다. 밥상에서 ‘이것 드세요. 저것 드세요. 국물은 많이 먹지 말아요.’라고 하는 것을 ‘다 사랑해서 그러는구나.’ 라고 감사하게 되었다. 부창부수라고 할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할까? 아니면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의 힘이라고 할까? 아내가 나를 보는 눈도 날이 갈수록 연애할 때와 같이 고와지고 원래의 유순한 본성이 얼굴에 웃음꽃으로 활짝 피어나게 되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공원의 크고 작은 운동장에서 동네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구경한다. 배드민턴은 코트에만 세 팀 있고. 족구 동호회인지 청장년의 사내들이 공을 이마로 받더니 멋진 폼으로 공을 네트 너머로 내리꽂는다. 그들의 젊음이 조금은 부러워진다. “젊어서 좋네!” “그럼요.” 정자가 있는 호젓한 곳에서 한 두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는 것은 흔한 정경이다. “보기 좋네!” “우리도 애들 오라고 해서 고기나 구워 먹을까?”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니 덩달아 행복해진다. 언제부터인가 아는 분들과 그 자녀들이 잘되는 것이 나에게도 기쁨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오순도순 싸우지 않고 속이지 않고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TV에서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고 도우며 사랑하는 모습, 울거나 헤어지는 모습을 보면 슬며시 눈물이 고이곤 한다.
공원을 밝히는 나무 모양 전주 위의 가로등 빛이 따뜻하고 다정하다. 공원 건너편 초등학교의 야트막한 나무울타리를 투우사의 정열 같은 덩굴장미꽃이 덮고 있다. “덩쿨장미꽃은 밤에 보아도 참 이쁘네!” “그래, 덩쿨장미는 흔하면서도 정말 예뻐, 나는 진한 녹색 잎과 어울려 타는 듯한 붉은 꽃잎이 너무 좋더라.” 덩굴장미꽃을 보니 갑자기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었다.
“여보, 내가 병장일 때 고상병이란 친구가 같이 군대생활을 했어. 덩굴장미 이야기는 전에 했을텐데.....” 아내가 처음 듣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런데 그 친구가 고등학교 때 장가를 갔다는 거야. 손이 귀한 집이라서 어른들 성화로 억지 장가를 들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여자애들과 마주치면 정말 언제나 창피하여 죽고 싶었다는 거야.”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 데 속으로 생각하며 말을 잇는다.
“그런데 그 친구 등하교 길에 이층집이 하나 있었는데, 늘 그 집에서 같은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가 그 친구를 내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숨곤 했다는 거야, 아내가 별로 예쁘지 않았는지,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건지, 이 친구는 처음 보던 날부터 한 눈에 그 애가 너무 좋아졌다는 거야. 매일 등하교 길에 보다보니 서로 낯이 익어 손을 흔들기도 하였는데 처음에는 눈이 마주치면 얼른 창문 뒤로 얼굴을 감추던 여자애가 몇 달이 지나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더래. 저 애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그 애와 직접 만나고 싶어 미치겠더래.
그 나이면 그럴 거야. 나도 자기가 보고 싶어서 새벽 같이 뛰어가서 담 너머로 세수하는 모습만 보고 다시 뛰어오고 했으니 말이야” “내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럼 그 때는 자기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내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다 나 혼자만 보고 싶었으니까.” 아내가 몇 번 들어도 좋아하는 서로 너무 잘 아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면서 계속하여 말을 이어갔다.
“덩굴장미꽃이 그 이층집 담을 온통 덮은 어느 날, 그 친구가 종이를 입에 넣고 꼭꼭 씹어 미농지 여러 겹으로 싸서 제기처럼 만들어서 거기에 편지를 넣고 이층 창문의 그 여자애에게 휙 던졌대. 그랬더니 다음 날 그 애도 편지를 돌돌 말아 살짝 아래로 떨구더래. 편지를 펴보니 오늘 오후에는 집에 아무도 없으니 학교 갔다 오다가 이층으로 올라 올 수 있냐고 쓰여 있었대.” “여자 애도 참 맹랑하네.” “자기도 나를 매일 만났잖아? 좋아서 못 견디겠는데 그 나이에 무슨 짓을 못하겠어.” “다음 날 하교 길에 그 집 아래로 가서 그 애와 눈짓을 교환 후 주위를 살피며 대문을 밀고 들어가 그 집 이층에 올라갔다는 거야.
자기도 알지만 그 때만 해도 작은 도시에는 이층집이 별로 없었잖아 아마 그 집이 잘 살았나봐. 이층에 올라가니 그 애 방문이 열려있어서 들어갔는데 역시 백합 같이 하얀 얼굴의 예쁜 그 여자애가 드레스 같은 긴 치마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더래. 그런데 그 집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더라는 거야. 그래서 창가에 한 다리를 올리고 앉아 가진 폼을 잡으며 '나, 네가 너무 좋아!‘라고 고백했다는 거야. 그랬더니 그 여자애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이더니 ’내가 이래도 좋아할 수 있어?'하고 울먹이며 갑자기 치마를 확 들어올리더래. 그런데 깜짝 놀라며 언뜻 보니 다리가 없더라는 거야. 그 친구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대로 창밖으로 자빠지며 곤두박질 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담장 아래로 떨어졌더래.”
“아주 소설을 썼네, 소설을 써, 그 사람이 지어낸 애기겠지.” “글쎄, 그 건 확실히 모르겠구... 하여튼 그 때는 덩굴장미가시에 얼굴이랑 팔이 온통 찔리고 긁힌 것도 몰랐다는 거야, 이 친구가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없이 겨우 모자랑 책가방을 수습하여 집으로 뛰어 왔는데 누나같은 아내가 아무 말 없이 만신창이가 된 자기 얼굴과 팔에 아까징끼(머규롬)를 정성껏 발라 주더라는 거야.” “재미는 있네,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그 여자애는 너무 너무 불쌍하네.” “그래 너무 안됐어, 지선양처럼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살아갔거나 착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면 좋을 텐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남동공단에 불 켜진 공장이 몇 개 내려다보인다. 호구포공원은 서쪽의 남동공단과 동쪽의 주택지를 제방 같은 둑을 쌓아 분리해 놓고 야트막한 동산을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그래서 한 편은 공단이고 한 편은 주거지인 것이다. “저 공장들이 밤에도 바쁘게 돌아가야 되는 데, 우린 그래도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애들은 큰 나라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데다 아이들은 적게 낳았지 부양할 노인네는 수명이 점점 길어지지, 정말 걱정이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간경화이니 그리 오래 살진 못하겠지만 아내는 오래 살 텐데 아이들이 효도하며 늘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는 데 하며 ‘하나님, 아내를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순간 마음으로 기도한다.
오늘도 우리의 화제는 어김없이 외손녀로 흐른다. 벌써 어른처럼 의뭉하며 속이 깊은 다섯 살짜리 첫째 외손녀 다연 이야기, 발발이 같이 행동이 잰 애교덩어리 둘째 외손녀 다예 이야기를 나눈다. 외손녀 이야기는 언제 나누어도 행복하고 몇 번을 반복해도 재미있는 것이다.
공원 낮은 곳에 있는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애완견 동호회원들이 개들을 데리고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참 좋은 세상이야.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으니 말이야.” 공원 저 쪽 역사는 개통을 준비하느라 그런지 아직 불을 훤하게 밝히고 있다. “호구포역이 유월 말에 개통된대, 이 노선과 상동 노선이 개통되면 우리는 전철로 다녀도 될 걸, 그런데 우리는 전철로 다니면 오붓한 재미가 없을 테니 계속 차로 둘이 함께 다녀야 될 것 같아.” “고뤠에!” 아내가 덩치는 엄청 크지만 귀염성 있는 개그맨 말투를 흉내 낸다. 아내가 슬며시 팔짱을 낀다. 낮에도 가끔 팔짱을 끼는 아내지만 사실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다보니, 오월을 보내는 이 밤 동쪽 하늘에 뜬 보름달이 집에서 나올 때 보다 더 높이 솟아 구름 뒤에서 부러워하며 우리를 엿보다 들킨 듯 그 환한 얼굴을 슬며시 내밀고 있다.
첫댓글
나이 들어가는 남편의 길을 그대로 따라오시는군요.
사랑받고 산다는 것은 모범적 가정의 표본.
아니 설거지와 청소기 일을 이제야 하신다니?
별나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산책하는 두분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나이들어 살아갈 날이 많지 않기로 말한다면 나보다 더 할까.
여생이 짧기 때문에 느끼는 아내를 향한 사랑이 달콤하지만 씁쓸하게도 느껴집니다.
내 집에서 교회까지 자동차로 20분남짓.
주일아침 둘이서 자동차로 그 한적한 길을 오가며 나누는 평범한 대화에서
조촐한 행복을 느끼는 나,
크게 다를바 없는 평범하고 자상한 사람들의 행복인것 같아서 공감합니다.
두분의 앞날을 축복 합니다.
나도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지켜줄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남편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따듯하고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부부의 롤모델이십니다. 소설 같은 별난 얘기도 재미있었구요.
글 올린지가 오래되어 하루 저녁 산책 이야기를 산책길 펼쳐진대로 써 보았습니다. 별 이야기도 아닌데 좋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두 분의 다정히 걷는 모습이 보이느눈요.
저도 아내 손 이끌고 밤나들이 좀 해봐야겠습니다.
수필의 진미를 느껴봅니다. 분량을 줄이면 문학성과 완성도가 더욱 높아지겠습니다.
제목을 바꿔보심이...'오월의 달밤에'
200자 원고지로 24매 분량은 통상적인 15매 내외에 비해 많네요.
요즘음은 자꾸 짧아지는 추세라, 심지어는 5매 수필이 많은 관심을 불러 모으지요.
감사합니다. 범선생님 말씀대로 '오월의 달밤에'라고 하면 운치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수필이라기엔 다소 밋밋하여 올리기를 망설이던 부족한 글이구요. 다만 군더더기처럼 붙은 고상병 이야기를 아내에게 한 후 혹 잊을까하여 넣었구요. 뺄까 하다가 우리 펜넷회원님들 심심풀이 하시라고 넣었더니 역시 사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귀한 말씀 마음에 새겨 좋은 글 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