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立巖) 남정우(南廷瑀)
樂民 장달수
의령군 유곡면 판곡(板谷) 마을은 의령(宜寧) 남씨(南氏)의 세거지(世居地)다. 마을 뒤에 옥녀봉과 천마산이 우뚝하게 솟아 있어 인물이 많이 난 마을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을 두고 사람들은 옥녀탄금혈(玉女彈琴穴)이라 불렀다 한다. 즉,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서 거문고를 타고 있는 지혈로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고 재물까지 넉넉한 마을이란 뜻이 담겨 있다 한다. 마을을 들어서니 먼저 의양서당(宜陽書堂)이 눈에 들어온다. 의령 남쪽에 있는 서당이란 뜻의 의양서당은 조선 단종 때 생육신 중 한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유덕을 기리는 곳이다. 추강의 사적(事跡)이 있는 곳에 의령남씨 후손들이 학가정(學稼亭)을 건립하여 추모를 했으며, 뒤에 의양서당을 건립해 학덕을 기렸으나 대원군 때 훼철돼 다시 의양서당을 건립해 지금 유덕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추강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판곡에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쉽다. 한말 선비 입암(立巖) 남정우는 이곳 판곡 출신의 대표 선비다. 1869년 남구원(南龜元)의 아들로 태어난 입암은 중형(仲兄)인 소와(素窩) 남정섭(南廷燮), 조카 남창희(南昌熙)와 함께 기호학맥의 거유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노백헌 정재규(鄭載圭), 농산 정면규(鄭冕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노사학파(盧沙學派)의 학맥을 계승한 선비다.
한말 기호학맥을 계승한 입암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부모가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를 할 줄 알았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성현(聖賢)의 경전(經典)을 주로 공부했다. 가학으로 공부할 때에 영남학맥의 대표 학자 한주 이진상의 8대 제자 중 한사람인 홍와 이두훈이 집에 찾아와 입암의 자질을 시험해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와 이두훈은 입암의 중형인 소와 남정섭의 동서였다. 입암은 집안으로는 소와 남정섭의 가르침을 받았고, 밖으로는 홍와 이두훈의 지도를 받아 학문이 날로 발전했다. 입암은 선현의 학문 정진을 자기 지향점으로 삼았다. 일찍이 한주학파의 중심인물인 홍와 이두훈으로부터 학습지도를 받은 입암은 노사학파의 중심인물이란 노백헌 정재규, 농산 정면규의 학맥을 계승한다. 합천의 노백헌 정재규, 농산 정면규 등이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듣고 중형인 소와와 함께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청했다. 노백헌과 농산은 입암의 자질을 시험 해보고 기특하게 여겨 입지(立志)와 독서 그리고 마음 다스리는 방법 등을 자세히 지도하였다. 입암이 이러한 학문 요체를 듣고 잘 따르며 크게 깨달아 정진하여 십년 만에 학문이 날로 발전할 수 있다. 입암은 노사학파의 정통성을 신봉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영남(嶺南)과 기호(畿湖)의 학맥들이 병존함을 인정하였다. 이는 기호학파의 학문을 공부하기 이전에 한주학파의 학문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노사학파의 이기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심통성정(心統性情)에서 심(心)의 주재성(主宰性)을 인정하여 심을 이(理)로 파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성리학적 입장은 특히 의리(義理)의 실현이란 도학적(道學的) 관심에 집중되었다. 이는 노사학파를 계승한 선비들이 누구보다 구국(救國)에 앞장섰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할 수 있다.
입암의 구국 정신은 나라에서 단발령이 내리자 스승인 노백헌이 의거를 일으키려고 계획을 하자 입암도 동참을 하고자 한데서 잘 드러난다. 당시 의거를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구국 정신은 남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입암은 스승 노백헌에게 “500년 종묘사직이 하루아침에 적에게 무너졌는데 사대부들로부터 평민들까지 한사람도 죽음으로써 천하 대의를 앞세우려는 사람이 없습니까”라 했다. 이때 노백헌은 동지와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재촉했다. 그리고 바로 정산(定山)으로 달려가서 면암 최익현과 함께 영호남 유림들에게 포고문을 띄워 노성 궐리사(闕里祠)에 모여 의거를 약속했지만, 외부 방해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이로부터 5년 후, 경술년 나라가 완전히 망하자 입암은 수일 동안 울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때 의령 부림에 사는 안창제의 권유로 중형과 요동으로 떠났지만 노모가 연로한 것을 비롯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수개월 후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1911년 스승 노백헌이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과 함께 주자가례에 따라 법도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문집 간행의 일에도 참여했다. 1944년 마을 문화(文禍)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경이 물었다. “일한 합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하기를 “나는 한국인이다” 일경이 다시 말하기를 “회복할 방법이 있는가” 대답하기를 “일은 사람에게 있고 이치는 하늘에 있다. 너희 일본이 힘으로 우리나라를 속인 것은 하늘의 명을 어긴 것인데, 우리 한국의 광복이 어찌 없겠는가”라 했다. 일경에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본 집안사람들이 위태롭게 생각했다. 하지만 입암은 개의치 않고 일경을 나무랐다. 마침 일이 잘 해결되어 일경에 더 이상 고초를 겪지는 않았지만, 입암의 선비다운 기개를 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입암은 이로부터 세상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유유자적하게 살며 학문 정진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해방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후인 1947년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9세다. 기문에 이르기를 “군자의 성품은 비록 크게 이름이 나도 더하지 않고 비록 궁하게 살아도 덜지 아니하니 어찌 이름이 드러나는 것과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따지겠는가. 오직 세월 가는 것을 잊고 세상이 변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진실 되게 공경을 주로하고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를 하여 인의예지를 마음에 심고 몸에 베풀어 본성을 잃지 아니할 따름이니 이것이 은거하며 몸을 수양하는 실체이니 그대의 무궁한 뜻이로다”고 일생을 나타냈다. 노사의 학문을 충실히 공부해 이를 바탕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고향에 은거하며 자신의 마음을 닦는 공부를 평생하며 선비의 길을 간 입암 남정우의 일생을 잘 대변해 주는 글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