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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사(history of science , 科學史) ***
(요약)
과학의 한 분야 혹은 전체 분야를 역사적 현상으로 취급하고 이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의 한 분야.
과학사에서는 우선 과학적 개념이나 이론의 발전 등과 같은 과학내용의 논리적 전개과정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과학사의 연구는 이런 내적 연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사에서는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학자가 살던 시대의 사상적 배경, 당시의 사회제도, 경제구조, 생활방식, 종교 등이 과학자 및 그가 행한 과학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과학과 그것을 둘러싼 외적 요인과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과학사학의 유래는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각각의 과학분야들이 지니고 있던 자신들 분야의 역사 연구와 교육의 전통이다. 물론 이 같은 분야사들은 각각의 과학분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대부분이 그 분야의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교육되었다. 과학사학 유래의 또다른 갈래는 인류의 지식 전체의 발전과정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철학자들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인류지식 역사의 필요성을 강조한 베이컨, 18세기의 콩도르세, 19세기 이후의 오귀스트 콩트, 윌리엄 휴얼, 에른스트 마흐, 피에르 뒤엠 등이 이 전통에 해당된다.
이 두 갈래의 전통에서 수행된 과학사의 연구는 양쪽 모두 과거의 과학을 지나치게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보려는 한계성이 있었다. 이러한 한계성을 벗어나서 과거의 과학을 그 자체로서 이해하고 과거의 사회·문화의 일부분으로서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현대적 관점의 과학사가 나타난 것은 아주 최근인 20세기 초였다. 이 시기에 과학사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된 데에는 몇 가지 큰 요인을 들 수 있다. 우선 가장 큰 요인은 지성사학자들의 영향이다. 20세기에 들어 여러 지성사학자들이 과학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다루게 되면서 현대적 관점의 과학사에 대한 인식이 얻어졌다.
다른 또 한 가지 영향은 20세기초 이후 과학사학이라는 독자적 분야의 형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과학사학의 선구자들의 노력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지 사턴은 과학사학의 전문학술지인 〈아이시스 Isis〉를 창간·편집했고 하버드 대학에 과학사 강의를 처음 개설하는 등, 과학사학이라는 분야를 독자적인 학문분야로 성립시키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
조지 사턴의 노력과 지성사적 전통을 이어받은 쿠아레, 카시러, 버터필드 등과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 아래 1940년대말에서 1950년대초에 이르면서 과학사학 자체를 전공으로 하고 과학사의 몇몇 전문분야에서 본격적인 연구업적을 내는 여러 젊고 유능한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에 의해 50년대말에서 60년대에는 과학사의 전문교육을 받은 많은 우수한 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미국대학들의 대규모 양적 팽창이 수반되었으며, 이런 배경 아래 60년대를 통해 미국의 모든 중요대학들에 과학사학과나 전공과정이 개설되어 전문연구 인력이 급속히 팽창되고 다른 분야와 겨룰 수 있는 연구수준이 빠르게 확립되었다.
* 과학(science , 科學) 과학 자연에는 인류가 살아 남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여러 규칙성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태양과 달의 주기적 운동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규칙성에 대한 단순한 이해가 과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식된 어떠한 규칙성은 단순히 인간의 지적 능력의 결과일 수 있다. 인간은 혼돈보다 규칙적인 형태를 선호하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규칙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 진정한 규칙성은 자료에 대한 공정한 검토를 거친 후 세워져야 한다. 규칙성이 수학적으로 표현되어 자연의 법칙이 된 후에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어떤 이들은 진정한 이해는 법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과관계의 영역에는 큰 불일치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근본적 인과관계에 의한 추구를 포기하고 수학적 기술에만 의존하고 있다. 반면 생물학은 분자·세포·유기체와 같은 실체들의 활동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인과관계와 설명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과학에서 허용되는 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것은 과학사의 많은 부분에서 자연철학자들이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힘에 호소해왔다는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근대과학은 자연법칙에 제한되어 있고 초자연적인 것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합리적 신성에 대한 믿음은 세계에서 합리적 질서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몇몇 과학자들은 합리적인 자연세계에는 그것을 이끌어주는 어떤 합리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비록 이러한 믿음이 어떤 특정한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과 관계되지 않더라도). *** 역사 천문학 - 17세기 네덜란드 지도제작가 프레데리크 더빗이 만든 성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천문학이 가장 먼저 출현한 과학으로 보인다. 천문학은 종교와 의례적(儀禮的) 차원에서 깊은 관계가 있었고, 이에 따른 천문학연구의 강조는 수학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하늘의 변화는 지상의 중요한 변화를 예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천문학과 점성술은 중국에서 국가들이 태동했던 BC 2000년경부터 정부체계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연금술(화학의 선조였던)·의학·지질학·지리학 등도 국가에 의해서 장려되었고 널리 번창했다. 높은 수준의 실제적 지식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수백 년 동안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수준은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야 도달되었다. 인도의 천문학은 실제적·종교적 일을 위한 달력의 제작에 이용됐다. 태양과 달의 운동이 강조되었고, 항성은 이러한 발광체(發光體)들이 가장 먼저 운동하는 배경으로만 여겨졌다. 한편 인도 수학은 꽤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기하학과 대수학이 두드러진다. 특히 대수학은 인도 계산법체계의 유연성에 의해서 자극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후에 서구에서 힌두-아라비아 숫자로 전해졌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문명도 천문학과 점성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복합사회를 형성했다. 여기서도 달력은 실제적·종교적 중요성 모두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력). 아직은 복잡한 수학을 사용한 천문학은 없었지만 마야의 달력은 주의 깊은 관찰과 상당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이집트에서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주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험한 날씨와 지진이 빈번한 재앙을 몰고왔던 중국에 비해 이집트에서의 생활은 평온했다. 아마도 이러한 상대적 평온이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물리적 죽음 이후에도 그 평온을 보전하려는 엄청난 지적·육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했던 것 같다. 이집트 신학과 피라미드는 이러한 열의의 표현이었다. 이당시 천문학은 매년 일어나는 나일 강의 범람을 예측하기 위한 날짜 계산에 주로 이용되었고 수학은 거의 요구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는 중국과 더 비슷했다. 땅은 거칠었고, 따라서 광범위한 저수(貯水)와 관개사업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다.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리사업(水理事業)에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요구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신학의 강력하고 전제적(專制的)인 신들의 파괴적인 힘들을 저지할 만한 능력이 필요했다. 평야도시에는 승려계급이 운용하는 사원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승려들은 주요한 공공사업을 계획하고 신의 파괴적인 분노를 피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아마도 무게와 크기의 측정체계에서 비롯되었을 메소포타미아의 수체계는 60(도·분·초 체계의 기원)이라는 수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들 큰 강을 중심으로 한 문명들은 둘 다 복잡한 신학을 발달시켰는데, 이 신학은 인간의 위치와 운명에 대한 많은 질문에 해답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 종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 종교는 사원보다는 모닥불놀이에 알맞는 민간설화 모음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에는 통찰력있는 탐구방식을 위한 폭넓은 여지가 남아 있었고, 철학과 그것의 가장 오래된 자손인 과학이 출현했다. 헬레니즘 전통에 따르면 최초의 자연철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였다. 그는 BC 585년 일식을 예언했고, 원의 지름이 그 원의 면적을 반으로 나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기하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의 단일물질인 '물'(물은 기체·액체·고체의 모든 상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임)의 변화로써 관찰되는 모든 자연현상들을 설명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것으로부터 우주를 질서있는 구조로 파악하는 견해와, 이러한 질서는 기계적인 질서가 아니라 유기체적인 질서라는 확신이 생겼다(모든 현상에는 목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목적은 자연적으로 그것의 목표에 봉사해야 했다)(-> 목적론). 이런 추측은 지적 폭을 확장시켰고, 이후 대부분의 논의는 근본원소에 대한 그의 이론을 좀더 세련되게 비판하는 것이었다. 여러 종류의 단일한 근본원소들이 제시되었다.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은 흙(차갑고 건조함)·불(뜨겁고 건조함)·물(차갑고 습함)·공기(뜨겁고 습함)로 자연의 대립되는 성질들을 설명한 4원소설을 받아들였다. 한편 피타고라스는 음조(音調)가 현의 길이에 비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성적인 것(음색)이 정량적인 것(정수에 비례하는 수)으로 환원되었고, 결국 수학에 기초한 물리학이 태어난 것이다. 생물학은 상당히 목적론적이며(유기체의 한 부분은 유기체 안에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이해됨), 해양생물에 대한 훌륭한 관찰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전통의 대표자이다. 물리학의 경우 목적론이 그렇게 분명하지 않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에 대해서도 목적론을 부가해야 했다. 그는 스승이었던 플라톤으로부터 항성과 행성이 문자 그대로 신성하고, 따라서 완전하다는 식의 목적론적 견해를 물려받았다. 즉 천체들은 완벽하고 불변하는 운동인 원운동만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모든 운동의 궁극적 원인은 우주 바깥에 있는 최고의, 혹은 움직이지 않는 동자(動者)인 신(神)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에우클레이데스가 기하학에서 한 증명처럼 지레의 법칙을 정확하게 증명할 수 있었던 수학자였다. 그는 물리적 특성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바꾸어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게 만들었는데, 유체정역학에 이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BC 5세기까지 병(病)은 신의 벌 또는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되었고, 주술이나 기도에 의해 고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이에 반해서 히포크라테스는 병은 자연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레노스는 소위 영(靈)에 바탕을 둔 3부분의 체계 위에 그의 생리학 체계를 완성했다. 3가지 영은 자연의 영, 생명의 영, 동물의 영이었고 이 영들이 각각 정맥·동맥·신경을 지나면서 전체적으로 신체를 생동케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독창적 연구정신은 로마인들에게는 꽤나 생소한 것이었고 과학적 혁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스 유산은 흥미 위주였던 로마 백과전서에서 축소되고 손상되었다(예를 들면 플리니우스의 〈자연사 Natural History〉가 있음). 그러나 고대의 학문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독교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고전을 충실히 베껴서 후세를 위해 보관했다. 동방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계속 강성했고, 고대의 전통을 이어갔다. AD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나 거대한 제국을 만든 아랍인들에게 고대과학은 귀중한 보물이었다. 힌두 수학자들과의 접촉 그리고 정밀한 천문학의 필요성은 수와 기하학에 대한 아랍인들의 연구를 고무시켰다. 또한 그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고전을 열심히 재발굴했고, 번역했다. 이슬람 천문학과 점성술은 거대한 관측소 건설로 크게 융성했는데, 이 관측소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예측을 점검해볼 수 있는 여러 관측자료를 제공해주었다. 수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대수학의 발달을 자극했다. 서구에 고대 학문을 전달하는 것 외에도 중세 유럽에는 몇 가지 중요한 발명이 있었다.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얻는 데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과학은 주로 신의 창조를, 즉 신(神) 자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성서뿐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자연에 대한 지식을 신학 속에 조심스럽게 포함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 2가지 책(자연과 성경)은 서로 모순되었고, 마침내 양자간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고대 권위의 무조건적 수용에 대한 최초의 심각한 타격은 신대륙의 발견이었다. 그리스의 위대한 천문학자이며 지리학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 위에 유럽·아프리카·아시아 3대륙만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학자들은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은 거꾸로 뒤집혀 걸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하지만 좀더 신뢰할 수 있는 과학에 의존했던 항해술은 그당시 많은 부(富)를 약속했기 때문에,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서 수행된 항해는 수학의 발전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543년에 출판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과학혁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아닌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아 복잡함을 단번에 제거하고 우아한 단순성으로 환원시켰다. 행성의 겉보기 역행(逆行)과 순행(順行) 운동의 경우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구들로 이루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는 여러 가지 기묘한 고안이 필요했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에서는 다른 행성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지구만의 궤도운동으로도 설명이 가능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는 행성의 밝기변화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더 깨끗하다고 해서 곧바로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에는 몇 가지 수학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만약 지구가 회전한다면 왜 그 표면에 있는 사람들이 떨어져나가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아무도 지구의 공전에 따른 별의 위치변화(연주시차)를 관측할 수 없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별까지의 거리가 지구의 공전궤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별의 시차가 관측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왜 신이 우주에서 지구를 그리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이것은 당시 사회체제의 근본을 뒤흔드는 심각한 문제였다. 티코 브라헤는 별과 행성의 운동을 상당히 정확하게 측정했는데, 태양 주위를 지나가는 혜성의 경우 달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천상(天上)의 완벽함에 대한 고대의 믿음에 의문을 던졌다. 전통적 우주관에 대한 훨씬 더 심각한 도전은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오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해서 달표면에도 산이 있고,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태양에 흑점이 있고 무수히 많은 별이 존재함을 관측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발견했다. 역학에서 갈릴레오의 공헌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데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그는 운동하는 물체는 그 운동을 유지하려 하며, 지구표면의 물체는 지구와 함께 운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운동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작 뉴턴은 그의 천재성 덕택에 탐구되어야 할 현상들을 잘 선택할 수 있었고, 자신이 고안한 미적분학(라이프니츠에 의해 동시에 발명된)으로 힘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에 잘 정리되어 있는데, 지상과 천상의 물체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물리학이 그 내용이다. 뉴턴의 3가지 운동법칙과 중력법칙은 새로운 우주체계를 통제하는 데 충분했지만, 그에게는 신의 도움이 있을 때만 가능했다. 〈광학 Opticks〉(1704)에서 뉴턴은 한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실험적으로 연구하고 숨어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 De humani corporis fabrica〉(1543)는 갈레노스의 해부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책이었다. 이것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해부학 연구의 돌풍을 일으켰는데, 이 조류는 윌리엄 하비가 인체에서 피의 순환을 발견함으로써 그 정점에 올랐다.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1628)에서 하비는 심장과 혈액의 관계를 펌프와 도관체계에 비유했다. 새로운 기구의 발명과 신세계(新世界)로의 팽창은 정보의 홍수를 가져왔다. 자신들의 자료에 대한 확신을 원했던 자연철학자들은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논평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과학학회와 관련 학술지가 생겨났다. 발표되는 새로운 규칙들은 언어의 정확성이 요구되었고, 기꺼이 정보를 공유하고자 했다. 만약 보고된 논문의 결과를 다시 얻는 데 실패할 경우에는 처음 보고된 결과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18세기에는 많은 물리문제가 복잡한 해석학적 방법에 의해 수학적 문제로 환원되었다.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강력한 도구를 제공했던 변분법(變分法)을 개발했다. 장 르 롱 달랑베르와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역학을 완전히 수학화하는 데 성공했다. 피에르 시몽 라플아스는 행성의 중력에 의한 섭동(攝動)이 주기적이며, 신의 개입 없이도 태양계가 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뉴턴을 능가했다. 화학에서의 주요한 진보는 화학반응에서 공기의 역할과 일반적인 기체의 역할을 밝힌 것이었다. 화학자들은 일군의 특별한 기체들의 모임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성질을 연구했다.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일련의 정밀한 실험들을 통해 연소란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고 부르던 연소성을 가진 물질이 타는 물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산소라 이름붙인 기체와 물체가 서로 결합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한스 크리티안 외르스데드는 전선을 통해 전기가 흐를 때 주위에 있던 자침이 영향받는 것을 발견해서 전기와 자기가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류와 자석에 의해 형성되는 힘의 형태에 주목했다. 그는 장이론(場理論 field theory)의 기초를 쌓았는데, 이것에 의하면 에너지는 실제적 혹은 가설적 입자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계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기분해에서 일정량의 전기력이 일정량의 화학물질을 분해시킨다는 것을 관찰했는데, 이것은 제임스 프리스콧 줄, 로베르트 마이어, 헤르만 폰 헬름홀츠 등의 연구를 자극했다. 그들은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을 제안했다. 전기와 자기현상은 윌리엄 톰슨(후에 켈빈 경)과 제임스 클럭 맥스웰에 의해 분명한 수학적 형태로 표현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물리세계는 에테르(ether) 속에서 다양한 역학적 변화들을 기술하는 수학적 형식들로써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원자의 미시세계도 비슷하게 이해되었다. 존 돌턴은 원자의 종류가 그것들의 무게에 의해서만 구분된다고 가정했다.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 의해 고안된 주기율표는 기본적 성질들을 지배하는 원자구성입자가 존재함을 암시했다. 생명과학에서 카를 폰 린네는 18세기에 어느 정도 인위적이었지만 합리적인 2명법(二名法) 체계를 도입했다.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種)이 변한다는 생각을 제안했지만 일반적 동의를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주로 그가 작인(作因)을 설명하는 데 시대에 뒤떨어진 화학에 의존했고, 완전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종의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을 모았을 뿐만 아니라 순전히 자연적 원인으로만 설명되는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그 메커니즘이 자연선택이었고, 이 자연선택에 따라 작은 변화들이 생존경쟁을 통해 선호되거나 제거되었다. 그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 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1859)>은 유기체 세계에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자크 뢰프는 하등동물의 소위 본능이라는 것은 단지 물리화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박테리아가 많은 질병의 특정한 원인임이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앙리 베크렐은 1896년 방사능을 발견함으로써 원자가 쪼갤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불변하는 것도 아님을 밝혔다. 20세기 물리학에서 골치 아픈 문제의 하나는 원자로부터 방출되는 복사에 관한 것인데, 당시에 알려져 있던 역학원리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또한 물리학자들은 감지할 수 없는 에테르의 가설적 성질들에 더욱더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스 플랑크는 열복사문제에 대한 해답에 고전열역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개념을 도입했다. 고전물리학에 가장 큰 파문을 던진 것은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특수상대성 이론이었다. 이것은 에테르의 존재와 에테르에 의존하여 설명했던 물리학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물리학을 사건(event) 그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사건과 관찰자 상호관계에 대한 연구로 재정의(再定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관찰된 것, 즉 발생한 사건은 이제 다른 사건에 대한 관찰자의 상대적 위치와 운동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아인슈타인과 플랑크는 전자기 복사가 불연속 에너지 양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실험적으로는 전자기 복사가 간섭 또는 회절과 같은 파동적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루이 드 브로이는 단순히 이러한 2중적 존재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제안했고, 에르빈 슈뢰딩거는 계의 에너지 준위와 그밖의 관측 가능한 성질들을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파동역학'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측정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시각에 새롭게 영향을 미친 또다른 혁명인 양자역학이 시작되었다. 그것의 특징 중 하나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제시한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어떤 계를 교란시키지 않고 그 계에 대한 정확한 측정을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묶고 있는 쿼크(quark)나 색깔힘(colour force)과 같은 색다른 현상들이 결국 원자구성입자 세계에 대한 우리 시야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대론·양자역학·입자물리학과 같은 새로운 물리학은 상식에 위반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물리학자들로 하여금 물리적 실제의 한계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혁명은 화학과 생물학으로 번져나갔다. 화학자들은 오늘날 분자재단(molecular tailoring)을 당연한 일로써 행하고 있다. 유전공학은 진화과정에 인간의 적극적 개입을 가능하게 했고 특정한 일을 위해 인간을 포함하여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인간을 가공해내는 후자의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로 여겨지게(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상관없이) 될 수도 있다. 가장 오래된 과학인 천문학은, 무한히 넓고 상상할 수 없는 격렬한 사건들로 가득찬 우주상을 그려왔다. 우리는 태양이 우주 속의 수십억 개 은하계 중 하나의 은하계에 속해 있는 수십억 개 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억 광년 떨어진 데서는 퀘이사[準恒星體 quasi-stellar objects]로 불리는 강력한 물체가 감지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초기 팽창을 표시해주는 '대폭발'(Big Bang)의 희미한 전자기 반향(反響)을 검출했다고 믿고 있다. 우주 자체의 기원과 구조 그리고 별의 일생과 소멸에 관한 이론들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원자를 포함해서 물질의 기원에 대한 이론에 도움을 주었다. |
* 물리과학사(history of the physical sciences) (요약) 물리세계에 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의 역사. 물리과학은 물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정밀하고도 체계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물리과학은 물리학·화학·천문학·지구과학의 4가지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중 처음 3가지 과학의 역사와 그 범주·주요관심사·방법을 다루게 되며 지구과학은 독립된 글에서 다룬다(-> 지구과학). 현대적 의미에서의 물리학은 19세기 중엽에 역학·광학·음향학·전기학·자기학·열역학과 같은 몇몇 분야의 종합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종합은 자연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힘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고 변환될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경계는 다소 임의적이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물리학이 개별 원자의 구조와 운동에 관심을 가진 반면, 화학은 분자의 특성과 반응을 다루기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이 모든 물질에 공통된 일반적인 성질을 다루는 반면, 화학자들은 서로 다른 원소, 화합물의 독특한 특성을 다룬다. 천문학은 지구 이외의 전체 우주에 관한 과학이다. 18세기까지의 천문학은 태양·달·행성·혜성 등을 주로 연구했지만 지난 2세기 동안 별, 은하, 성운, 성간 물질 등에 대한 연구가 중요시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물리학과 천문학은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을 통해 점점 더 밀접히 결합하고 있다. 1. 물리과학의 기원 1. 개요 물리과학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 유물론까지 거슬러올라간다. BC 6~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애니미즘(자연물·자연현상·우주에 영혼이 있다는 믿음)을 거부하고 세계를 보통의 관찰가능한 자연적 현상으로 설명했다. 이들은 어떻게 혼돈에서 질서가 나왔는가, 이 세계의 다양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운동과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형상과 질료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 과학의 기초가 되는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설명은 이후 2,000여 년 간 서구과학의 토대가 되었다. 2. 고대 이집트, 서남 아시아, 그리스의 천문학 서양 천문학의 기원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1년을 12달, 365일로 나누어 12달이 있는 달력을 만들었으며, 이는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약 BC 1800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은 천문학적 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에 관심을 두었으나, 기하학의 모형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BC 5세기)은 우주가 본질적으로 수학적이라고 믿었으며, 우주의 중심에 불기둥이 있고 그 주위를 태양·지구와 같은 천체들이 돌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우주에 대한 최초의 물리적 모형이었다. 플라톤(BC 4세기)은 천문학자들에게 등속 원운동만을 사용해서 천체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하는 이론을 만들라고 종용했다. 에우독소스(BC 4세기)는 동심구(同心球)의 조합으로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는 모형을 만들었다. 에우독소스의 체계에서 각 행성은 4개의 동심구를, 태양과 달은 3개의 동심구를 필요로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에우독소스의 구를 천체의 작동을 나타내는 실재로 받아들여서 우주는 지구를 55개의 천구가 마치 양파처럼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심구 이론은 행성과 지구의 거리가 변하는 것과 최대이각(금성과 태양이 이루는 최대각은 48°, 수성과 태양은 24°라는 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헤라클레이데스는 금성과 수성은 지구가 아닌 태양의 주위를 돌며, 태양과 나머지 행성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하루에 1번씩 자전을 하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이는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외의 영향은 미미했다. 히파르코스(BC 130경)는 천문학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춘분점의 이동을 비롯한 수많은 관측을 남겼으며, 지구가 우주의 기하학적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지점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는 '이심원'(離心圓)이라는 이론적인 도구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이 이심원이 주전원(周轉圓)이라 하는 기하학적 도형과 수학적으로 동치라는 것도 증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140경)는 주전원 이론을 그리스 천문학에 체계적으로 적용했다. 그는 행성·태양·달의 운동을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체계를 만들었으며, 그의 책 <알마게스트> 이를 집대성해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천문학자들에게 그리스의 천문학을 전수하는 데 기여를 했다. 이 책은 이후 1,500년 동안의 천문학의 골격을 세웠다. 3. 그리스의 물리학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성과 그것에 내재하는 단일성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레우키포스(BC 5세기)· 데모크리토스(BC 5세기 후반)· 에피쿠로스(BC 4세기 후반에서 3세기초)와 같은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들은 자연은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원자론에 대항해서 스토아학파(제논[BC 4~3세기]·크리시포스[BC 3세기]·포세이도니오스[BC 100경])는 자연을 활동적인 정신인 프네우마(pneuma)가 가득한 공간과 물질의 연속체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원자론자나 스토아 학파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운동에 원인이 필요하다고 가정했으며, 매질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주를 달의 천구 이하의 지상계와 그 이상의 천상계로 나누었으며, 지상계에서는 수직의 낙하운동과 상승운동을, 천상계에서는 등속 원운동을 원인이 필요없는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구분했다. 이외의 다른 모든 운동은 외부의 원인이 필요한 자연스럽지 못한 운동, 또는 강제된 운동으로 여겼다. 아르키메데스(BC 3세기)는 수학을 정역학·수역학과 같은 물리 문제에 적용했으며, 지레의 법칙을 유도했고, 부체(浮體)의 문제를 다루었다. 4. 이슬람과 중세의 과학 그리스 과학은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정점이었다. 로마 제국은 이론적인 문제에 관심이 적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의 압박은 과학자들을 동방으로 쫓아냈다. 이들은 이슬람에 정착해서, 그리스 원전을 번역하고 그것을 발전시켰다. 이슬람 과학은 12~13세기에 서유럽으로 유입되었다. 후기 중세의 과학자들은 이슬람으로부터 유입된 그리스 과학의 체계 속에서 16~17세기 과학 혁명의 발판이 되는 수준 높은 과학을 발전시켰다. 역학은 중세에 가장 발전했던 분야였다(물리학). 사람의 손을 떠난 투사체를 계속 운동하게 하는 원인에 대해 중세 초기의 필로포노스와 이븐 시나(라틴 이름은 아비케나) 같은 이슬람 과학자들은 투사체에 주어지는 비물질적인 힘을 상정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뷔리당은 이를 발전시켜 임페투스(impetus:지상과 우주의 운동이 임페투스와 저항 사이의 투쟁의 결과라고 생각했음)라는 양을 도입하는데, 이는 투사체의 초기 속도와 물질의 양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중세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식을 실험적으로 검증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자연에 존재하는 실제 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 중세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1277년 교황 요한네스 21세는 신학에 위배된다고 생각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219가지 명제를 금지시켰다. 이 명제 중에는 "최초 원인(신)은 여러 세계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금지령은 여러 세계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낳았다.(아리스토텔레스주의). --------------------------------------------------------------------------------------- *** 과학혁명 (개요) 15~17세기까지 과학적 사고는 혁명을 겪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을 대신하는 새로운 자연관이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 그 자체가 독자적 분야로 등장했다. 이 시기 과학의 특징으로는 추상적 사고, 정량화의 중시, 기계적 자연관, 실험적 방법의 도입, '왜'가 아닌 '어떻게'의 추구 등을 들 수 있다. 1. 천문학 과학혁명은 천문학에서 시작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 등속 원운동의 원칙에 위배되며, 조화와 단일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이를 포기했다. 대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과 지구의 위치를 바꾸어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지구를 그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1543년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천문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16세기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모두 거부했지만 새로운 천문학의 수용에 결정적 역할을 한 천문 관측을 수행했다. 1609년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의 자료에 근거해서 행성의 궤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2가지 법칙을 발표했다. 즉 ① 행성은 태양을 1초점으로 하는 타원운동을 한다. ② 태양으로부터 행성에 그은 선분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을 그린다. 이로 인해 등속 원운동이라는 오래된 관념이 깨지게 되었지만, 케플러의 법칙은 왜 행성이 타원 운동을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1618년 케플러는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그의 3번째 법칙을 발표했다. 한편 1610년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사용해 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목성이 지구처럼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관측했다. 그는 또한 금성의 위상 변화로부터 금성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공전함을 증명했다. 이러한 관측 결과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지지해주었다. 2. 역학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지구를 운동하는 행성으로 바꾸었으며, 그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갈릴레오는 임페투스 역학에서 출발했지만, 곧 이를 버리고 새로운 우주체계에 잘 맞는 수학적인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발전시켰다. 그는 자유낙하법칙(낙하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얻어내고, 이를 초기 형태의 관성의 법칙과 결합시켜 투사체 운동이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그는 관성의 법칙을 사용해서 지구의 운동과 관련된 물리적 문제인 "왜 쏘아올린 화살은 제자리에 떨어지나", "사람은 왜 지구가 도는 것을 느끼지 못하나" 등을 설명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자연현상을 물질과 그것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기계적 철학을 제창했다. 그는 힘이 진공을 가로질러 다른 물질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공간을 채우는 물질적 실체인 에테르를 통해서만 전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 그는 물체가 관성운동에 따라 직선운동을 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한 물체가 또다른 물체가 차지한 공간을 점유할 수 없기 때문에, 실제 가능한 운동은 소용돌이 운동이라고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모든 자연현상은 물체의 충돌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정량적인 충돌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헨스는 이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아이작 뉴턴은 그의 기념비적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 〈프린키피아 Principia〉라고도 함)에서 과학혁명기의 역학과 천문학 분야에서 제기된 주요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과학혁명을 완결했다. 이 책은 케플러의 법칙에 물리적 근거를 제공했으며, 일련의 법칙으로 천체 물리와 지구상의 역학을 통합했다. 또한 뉴턴의 힘의 개념은 기계적 철학과 수학적 전통을 종합했다. 뉴턴은 이 모든 결과를 다음의 3법칙에서 밝혀냈다. 첫째, 모든 물체는 그 물체에 가해진 힘에 의해 그 상태를 바꾸도록 강요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나 직선 운동의 상태를 계속하려 한다. 둘째, 운동의 변화는 주어진 힘에 비례하며 그 변화의 방향은 힘이 주어진 방향과 같다. 셋째, 모든 작용에 대해 항상 반대 방향의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존재한다. 이중 2번째 법칙은 1750년 스위스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 의해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값(F=ma)"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뉴턴은 임의의 두 물체 사이에 중력이 작용하며 이 중력이 진공을 통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물체의 중심간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중력을 사용해서 행성에 대한 케플러의 법칙과 갈릴레오의 자유낙하법칙을 유도했다. 3. 광학 그리스의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 BC 300)로부터 다루어지기 시작한 광학은 이슬람의 알하젠을 거쳐, 13세기에 이르면 로저 베이컨, 로버트 그로스테스트에 의해 발전했다. 17세기 케플러는 맺힌 상의 한 점이 물체의 한 점과 대응한다는 이론을 내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렌즈의 기하학적 이론을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빛을 기계적 철학의 연구 주제로 포함시켰으며, 이로부터 반사. 굴절의 법칙과 같은 수학적 법칙을 유도했다. 17세기의 광학, 특히 색깔의 문제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업적은 뉴턴이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빛 입자의 회전 속도의 차이로 색의 차이를 설명했음에 반해, 뉴턴은 실험을 통해 백색광이 서로 다른 색깔을 갖는 광선의 혼합임을 보였고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왜 서로 다른 색깔의 광선으로 나누어지는가를 설명했다. 또 '뉴턴의 원무늬'라 부르는 간섭 현상도 설명했다. 뉴턴은 빛을 입자로 보았지만 반면에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에테르의 가상적 진동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반면 호이헨스는 빛을 매질의 진동으로 간주하고, 파면(波面)이라는 개념을 정립해 이로부터 반사와 굴절, 그리고 당시 새롭게 발견된 복굴절을 설명했다. 4. 화학 화학은 철학·연금술·야금학·의학이라는 다양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연금술은 많은 화학 물질에 대한 오래된 경험을 화학에 제공했다. 화학은 17세기 기계적 철학의 등장과 더불어 다른 분야와 용어를 공유하게 됐다. 기계적 철학은 다른 과학 분야에 성공적으로 적용되었고, 이러한 성공은 화학자들로 하여금 화학을 기계적 철학의 용어로 재해석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로버트 보일은 모든 화학적 성질을 기계적 철학의 용어로 설명함으로써, 기계적 철학에 실험적 증거를 부여하려 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 *** 계몽사조에서 20세기까지의 물리과학 (개요)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수학적 엄밀함과 〈광학〉의 실험적 방법은 18, 19세기 과학의 모형이 되었다. 천체역학은 〈프린키피아〉를 따라 발전했으며, 광학·전기학·자기학·화학에는 〈광학〉의 영향이 컸다. 1. 천체역학과 천문학 뉴턴의 이론은 1759년 목성과 토성의 중력이 핼리 혜성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예측함으로써 천체 현상과 관련된 그 위력을 검증받았다. 그렇지만 태양-지구-달과 같은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3체문제는 18세기를 통해 풀리지 않는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결국 3체문제는 라플라스에 의해 어느 정도 해결되었는데, 그의 〈천체역학개론 Traité de mécanique céleste〉(5권, 1798~1827)에는 이 3체문제를 비롯해, 태양계의 안정성을 뉴턴의 중력체계를 바탕으로 설명한 결과가 수록되었다. 뉴턴의 이론은 새로운 행성의 발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왕성의 불규칙한 운동이 천왕성보다 더 멀리 있는 다른 행성의 중력에 의한 결과라는 예측이 대두 되었으며, 이는 1846년 해왕성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1915년 천왕성의 운동중에 해왕성의 원인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요소가 있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다시 1930년 정밀한 관측을 통한 명왕성의 발견을 낳았다. 19세기 후반기 수성의 궤도에서 뉴턴의 중력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오차가 관측되었고, 천문학자들은 또다른 행성의 존재를 예견했지만, 관찰되지 않았다. 이는 1915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설명되었다. 18, 19세기의 천문학이 뉴턴 학설의 일색은 아니었다. 독일 천문학자 요한 엘레르트 보데는 행성 궤도의 평균반경을 나타내는 간단한 수열을 만들었는데(r=(n-1)×3+4, n=1,2,3……), 보데의 법칙에 따르면 이 수열의 9번째 수인 28에 해당하는 행성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해야 했다. 이후의 계산은 이 자리에 세레스라는 소행성이 존재함을 보임으로써 확증됐다. 라플라스는 태양계 형성론에 관해서도 중요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태양계가 뜨겁게 팽창해서 회전하는 대기였다가 식어서 수축하면서 그중 일부가 떨어져나가 식으면서 행성으로 변했다는 가설을 제창했다. 영국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이 성운은 별로 응축된다고 밝힌 이후 라플라스의 이론은 '성운설'로 불렸다. 이외에도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는 빛의 광행차를 발견했으며, 1838년 프리드리히 베셀은 지구의 공전에 의한 '별의 시차' 효과를 최초로 관측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를 입증했다. 2. 광학 18세기의 광학은 뉴턴의 이론이 지배했다(물리학). 그렇지만 18세기 중엽 오일러는 빛을 에테르 매질의 진동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제창하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초 영국의 토머스 영은 빛의 파동이론을 제창했으며, 이에 의해 간섭 효과와 다양한 색깔 효과를 설명했다. 파동이론은 1815년 프랑스의 오귀스탱 장 프레넬에 의해 발전했다. 프레넬의 정교한 파동이론은 빛의 입자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반대에 직면했으며, 특히 반사에 의한 빛의 편광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프레넬은 1817년 빛을 종파가 아닌 횡파로 가정하면 편광이 설명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빛이 횡파이기 위해서는 그 빛이 통과하는 에테르가 몇 가지 독특한 성질을 지녀야 했다. 프레넬은 지구 위에서 운동하는 투명한 물체가 에테르의 일부를 '끌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이후의 실험(특히 1887년 마이컬슨-몰리 실험)에서는 에테르가 운동한다면 나타날 수 있는 운동의 효과가 관찰되지 않음을 보였으며, 조지 F. 피츠제럴드와 핸드리크 A. 로렌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운동하는 물체가 운동의 방향으로 길이가 수축된다는 로렌츠-피츠제럴즈 수축 가설을 제안했다. 이 가설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대체되었다. 3. 전기학과 자기학 18세기말 프랑스 과학자 샤를 A. 드 쿨롱은 전기력·자기력도 뉴턴의 중력처럼 역제곱 법칙을 만족시킨다는 것을 보였다(전자기학). 1820년 한스 C. 외르스데드는 전류의 자기효과를 발견했고, 이는 1827년 앙드레 M. 앙페르에 의해 자기력이 전류의 효과임이 밝혀짐으로써 설명되었다. 1831년 마이클 페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1843년 제임스 P. 줄의 열의 일해당량을 비롯한 일련의 발견은 자연계의 힘들이 근본적으로 단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앙페르는 전자기 작용을 중력과 같은 원거리 작용으로 파악했지만 패러데이는 힘이 전달되는 역선(力線)을 강조했다. 독일의 빌헬름 E. 베버와 루돌프 콜라우슈는 원거리 작용을 선호했고, 스코틀랜드 과학자 제임스 C.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을 수학화시켜 장론을 완성했다.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은 빛이 전자기현상이며, 가시광선 이외의 파장을 가지는 전자기파가 존재하거나 또는 인공적으로 발생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는 1887년 독일의 하인리히 헤르츠에 의해 검출되었다. 4. 화학 17세기 기체에 대한 연구는 스웨덴의 예오리 E. 슈탈에 의해 플로지스톤 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플로지스톤이 물체에 포함되어 있다가 그 물체가 연소하거나 하소할 때 빠져나오게 된다.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거부하고 연소는 물체와 산소가 결합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이 새로운 산소이론은 명명법의 혁신과 더불어 화학의 혁명을 이룩했다. 19세기초 존 돌턴은 원자론을 제창했다. 이는 물질이 왜 일정한 비례로 결합하는가를 설명해주었다. 돌턴은 수소원자 하나와 산소원자 하나가 결합해서 물을 만드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렇지만 프랑스 화학자 게이 뤼삭은 2부피의 수소가 1부피의 산소와 결합해서 1부피의 물을 만든다는 돌턴의 원자론과 잘 부합되지 않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1811년 이탈리아 화학자 아메데오 아보가드로는 돌턴의 원자가 실제로는 '분자'라는 가설을 이끌어내 돌턴의 원자론과 게이 뤼삭의 부피 실험을 통합했다. 아보가드로의 가설은 1860년에 이르러서야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810~60년에 이르는 시기에 험프리 데이비를 비롯한 많은 화학자들의 실험에 의해 화학적 결합력이 본질적으로 전기력임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원소들이 발견됐다. 러시아의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는 원소의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 *** 20세기 천문학의 발전 (개요) 20세기 천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은하계 바깥쪽에 존재하는 우주에 대한 연구이다. 18세기말 윌리엄 허셜이 관측한 성운에 대해 은하계 안에 있는 가스 구름인지, 은하계 밖에 있으며 은하계에 필적하는 또다른 천체인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1925년까지 미국의 천문학자 베스토 멜빈 슬라이퍼는 40여 개의 성운의 도플러 효과를 관측했는데 모두가 적색편이(관찰자에서 멀어지는 물체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보임을 발견했다. 1923년 에드윈 허블은 성운까지의 거리를 케페우스 변광성을 이용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계산했다. 허블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약 9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성운이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또다른 은하계임을 보였다. 1929년 허블은 슬라이퍼의 관측을 바탕으로 이 은하들이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속도와 거리를 계산한 결과 우주의 팽창은 약 20억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1950년대에 이르러 이 '허블 나이'는 약 100억 년으로 늘어났다. 소련 천문학자 게오르기 가모브는 팽창하는 우주에 기초를 두고 고온·고밀도의 상태로 시작한 우주가 폭발했다는 소위 '대폭발이론'을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내놓았다. 천문학자들은 대폭발 당시 복사된 복사선이 현재는 0 K보다 조금 더 높은 값임을 예측했으며, 이 우주배경복사가 1965년 벨 연구소의 아노 펜지어스와 로버트 W. 윌슨에 의해 검출되었다. 이 발견에 의해 우주는 약 100~200억 년 전에 고온·고밀도 상태였음이 판명되었다. 1. 별의 진화와 원소의 형성 19세기 열역학은 태양의 나이를 약 2,000만 년으로 계산했음에 반해, 방사능을 이용한 지질학적 증거는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임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태양과 같은 별이 계속해서 빛을 내는 원인은 20세기 천체·물리학자들의 주요관심사가 되었다. 별의 스펙트럼 분석은 별이 수소·헬륨과 같은 원소로 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1938년 독일 물리학자 한스 베테는 양성자가 헬륨이나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기 위해 융합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가설을 발표했다. 베테의 이론은 몇몇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장 타당한 이론으로 인정받고 있다.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의 별의 진화에 대한 이론에 의하면 별은 대부분의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된 이후에 급속하게 팽창·수축한다. 만일 별이 태양보다 더 무거우면 그 별은 폭발해서 초신성이 되며, 그후 별의 중심핵은 중성자별이 된다. 이 중성자별은 1930년대에 예측되었는데, 1967년에 발견된 펄서(빠르고 매우 규칙적인 전파 펄스들의 발생원)가 중성자별임이 판명되었다. 더욱 무거운 별은 중성자별의 단계를 넘어서 검은 구멍(black hole)이 된다. 검은구멍의 존재는 1916년 독일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에 의해 예측되었는데, 1980년대에 X선원과 일부 은하계의 중심에 검은구멍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2. 태양계 천문학 이 분야는 1960년 미·소의 우주경쟁이 불붙으면서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가지 예로, 인간이 1969년 달에 착륙하기 이전에는 달의 생성에 대해서, 지구와의 동시 생성설,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서 지구에 붙잡혔다는 설, 지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설 등의 3가지 가설이 있었다. 그렇지만 달에서 가져온 암석을 분석함으로써 이 3가지 가설이 모두 충분치 못함이 드러났다. 그결과 최근에는 화성 크기의 천체가 지구에 충돌해서 생긴 가스가 응축되어 달이 되었다는 새로운 가설이 가장 설득력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20세기 물리학의 발전 (개요) 20세기의 물리학 분야를 보면, 1896~1932년의 기간은 16~17세기의 과학혁명에 비견할 만한 혁명적 결과를 이루었으므로 가히 20세기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18, 19세기 뉴턴 물리학에 의해 정립된 공간·시간·질량·에너지·원자·빛·힘·결정론·인과율 등의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 새 이론은 물리적 세계가 인간의 관찰과는 무관한 객관적 실재를 가진다는 믿음을 뒤흔들었다. 1. 방사능과 원소의 변환 1896년 프랑스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에 의한 방사능의 발견과 이후 퀴리 부부(마리퀴리, 피에르퀴리)의 연구는 방사능 연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방사능이 알파 선과 베타 선의 2종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중 알파 선은 헬륨핵과, 베타 선은 전자와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러더퍼드는 방사능이 한 원소에서 다른 원소로의 변화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이론은 물질이 변하지 않는 92가지 원소로 되어 있다는 19세기 화학자들의 믿음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2. 원자 핵 1911년 러더퍼드는 얇은 금박에서 알파 입자들이 산란되는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원자가 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핵 모형을 제시했다. 1920년대를 통해 과학자들은 양성자와 전자가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양성자와 같은 무게를 지니지만 전하가 없는 중성자를 발견했으며, 카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핵이 궁극적으로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우라늄 핵을 중성자로 타격했을 때 바륨과 크립톤이 생성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계속되는 연구 결과로 우라늄에 의한 핵분열로 큰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원자탄의 제조와 직결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 미국은 맨해튼 계획으로 원자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3. 아인슈타인의 1905년 뉴턴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1665~66년에 빛의 본질, 중력의 작용, 미적분학의 기본개념을 발견했다고 한다. 과학의 역사를 통해 이에 필적할 만한 일을 1년 동안 한 사람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뿐이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1년 동안특수상대성이론, 복사에 대한 양자이론, 브라운 운동에 대한 이론 등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이 '정지한' 물체를 기술할 때와 '운동하는' 물체를 기술할 때 방정식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결과는 동일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 모순의 근원을 절대 공간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찾았으며, 그 대안으로 첫째, 자연의 법칙은 모든 관성 좌표계에서 동일하며, 둘째, 빛의 속력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는 2가지 가정을 세웠다. 아인슈타인은 이 2가지 가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도했다. 첫째, 한 좌표계에 있는 물체의 길이는 다른 좌표계의 관찰자에게 로렌츠-피츠제럴드의 수축 법칙의 결과만큼 수축되어 관측된다. 둘째, 각 관찰자는 다른 좌표계의 시계가 더 천천히 감을 관찰한다. 셋째, 절대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넷째, 물체의 속력이 커지면 그 질량은 증가한다. 이중 마지막의 질량의 증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식은 에너지와 질량의 상호 변환을 나타내는 E=mc2이다. 빛의 생성과 변환에 대한 논문(흔히 '광전 효과에 대한 논문'이라 불리는)에서 아인슈타인은 빛과 전자기 복사가 마치 입자와 같은 광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빛이 파동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지만, 빛에 입자의 성질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보완했다. 1905년 무렵, 오귀스트 콩트, 에른스트 마흐, 빌헬름 오스트발트, 피에르 뒤엠, 앙리 푸앵카레와 같은 실증주의 철학자나 과학자 사이에는 원자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브라운 운동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과학자 사회에서 원자의 존재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4. 양자역학 닐스 보어는 러더퍼드의 핵 모형을 받아들여, 마치 태양계처럼 핵 주위를 전자가 회전하는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그는 여기에 양자가설을 사용해서 2가지 제한을 했는데, 첫째, 전자가 특정한 궤도 위에만 존재할 수 있고, 둘째, 전자가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전이할 때 복사선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것이었다. 빛이 파동인가 입자인가에 대해, 2가지 새로운 실험 결과가 입자론을 지지했다. 미국의 로버트 A. 밀리컨이 광전효과를 실험적으로 검증했으며, 아서 H. 콤프턴은 X선이 전자와 충돌할 때 마치 입자와 같은 성질을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드 브로이는 파동-입자 이중성이 빛 이외의 전자나 다른 모든 입자에 적용된다고 제안했다. 1926년 에르빈 슈뢰딩거는 이러한 제안을 바탕으로 '파동역학'을 만들었다. 이 파동역학은 어떤 계(系)의 파동함수도 만족시키는 방정식을 그 구성요소의 질량·전하로 얻어냄으로써, 계의 에너지 준위를 구하는 것이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이론의 가장 편리한 형태이며,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막스 보른도 양자역학에 기여했다. 양자역학을 만든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이론의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보른은 파동 함수를 전자 위치의 확률 분포로 해석했으며, 하이젠베르크는 "위치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속도는 불분명해진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로 보른의 해석을 분명히 뒷받침했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통해 보른과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에 반대했다. 보어는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과 같은 양자물리학의 특성이 고전 물리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완하는 것이며, 파동과 입자의 성질은 우리가 무엇을 측정하는가에 의존한다는 '상보성원리'를 제안했다. 코펜하겐 해석으로 알려진 보어의 관점은 물리적 실재가 측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양자물리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받아들여졌다. 1970, 1980년대의 실험은 이러한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 20세기 화학의 발전 양자 물리학의 발전과 함께 화학 결합의 본질을 양자역학을 응용해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1927년 독일의 발터 하이틀러와 프리츠 론돈은 2수소원자계의 파동함수를(스핀을 포함해서) 근사적으로 구했는데 비대칭적인 파동함수는 인력을 낳았고 대칭적인 파동함수는 척력을 낳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전자의 스핀이 반평행일 때 2수소원자계는 분자를 형성할 수 있다. 하이틀러-론돈 방법은 미국의 존 C. 슬레이터와 라이너스 C. 폴링에 의해 발전되었다. 특히 폴링은 공유결합 방법을 제창했는데, 이는 2원자가 각각 전자를 하나씩 내놓아 공유한다는 가정하에 전자쌍에 대한 파동함수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의 과학자 로버트 S.멀리컨은 분자 궤도함수에 근거한 분자 구조이론을 제창했다. 이 이론에서는 전자가 특정 원자에 귀속해 있지 않고 전체 분자에 걸쳐 있는 양자 상태를 점하는 것으로 다루어졌다. 1930년대의 양자화학은 공유결합 이론이 지배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분자궤도함수 이론이 더 강력한 이론으로 대두되고 있다. |
*** 생물학사(history of biology) * 생물학의 초기역사 멘델의 유전법칙 1. 개요 옛 사람들은 독이 없는 식물들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했고 위험한 육식동물의 습성을 알고 있어야 했다. 고고학상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문명발달 이전에 유용한 동물들을 가축화했고 농사 방식을 발달시켜왔다. 그러므로 생물학의 오랜 역사는 인류가 약 5,000년 전에 문자를 쓰고 기록을 보존하기 시작한 시대보다 앞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최초의 생물학적 기록 최초로 기록된 생물학사의 많은 부분은 아시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이 재배식물에 관해 만든 얕은 부조와 그들의 가축 의술을 묘사한 조각에 나타나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대추야자가 유성생식한다는 것과 꽃가루를 수 식물에서 얻어 암 식물의 수정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추야자 수확에 관한 기록은 BC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또한 그들이 남긴 파피루스의 기록 중에는 BC 1600년경의 의학과 관련되는 해부학적인 설명과 BC 1500년경에 기록된 심장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옛 기록에는 사실과 미신적인 것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한편 무덤과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와 고기품(古器品)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도 상당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 보존된 미라는 그들이 부패를 방지하는 식물을 보존제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또한 출토된 다양한 식물성 목걸이와 얕은 부조들은 이집트인들이 이미 BC 2000년에 식물들을 약초로 이용하고 약용 가치를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BC 2880년경에 신농(神農)이 여러 약초들의 효능과 콩과 같은 중요 식용식물들에 관해 기술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누에를 길렀고, 나무에 구멍을 뚫는 곤충을 죽이기 위해 곤충을 먹는 개미를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의 원리도 알고 있었다. BC 2500년경의 인도 서북지방 사람들은 농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BC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문서에는 약 960가지 약초의 이용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해부학·생리학·병리학·산과학(産科學) 등에 관한 정보도 함께 들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지방의 고대인들은 생물학상의 정보를 많이 축적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귀신들과 영혼들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지식인들도 자연적인 것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지향했다. 3. 그리스·로마 시대 그리스 문명의 출현으로 그리스에서는 신비적인 태도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하나의 특정한 원인은 특정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파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인과율(因果律) 개념은 훗날 과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서 이 철학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고 사람들은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이러한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생물학을 확립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과학에서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합리적 사고방식이었다. ① 생명의 기원과 인간에 대한 이론:그당시 그리스에는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알크마이온·히포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테오프라스토스 등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나타났다. 탈레스는 우주에 피시스(physis)라는 창조력이 있으며,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물은 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물은 물, 흙,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체온에 관여하는 기체성 물질로 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물질들이 다양하게 혼합되어 흙·기(氣)·불·물의 4원소가 생겼다고 믿었다. 그는 생명체가 진흙 속에서 자연발생하고, 처음 생겨난 동물은 물고기였으며, 이 물고기들의 후손들이 물을 떠나 건조한 육지로 이동한 뒤 변형되어 다른 동물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초기의 진화설을 완성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알크마이온은 동물의 구조를 연구하여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기술하고, 시신경을 발견했으며, 뇌를 지능의 장소로 인식했고, 배(胚)의 발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시조로서 한 학파를 이룩했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여 인체 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인식했다. 이 학파 사람들은 모든 생물체는 4가지의 체액 즉 혈액·흑담(黑膽)·점액(粘液)·황담(黃膽)으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는데, 혈액은 심장에서, 흑담은 비장에서, 점액은 뇌에서, 황담은 간에서 각각 유래한다고 생각했고, 이 체액들이 조화를 잃으면 사람들에게 다혈질·우울·냉담 또는 화를 잘 내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BC 4세기 중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전성기에 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물의 형태·분류·생식·발생·운동 등 생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동물연구 Historia animalium〉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는 실증적 관찰의 시범을 보였고, 생물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했으며, 여러 생물학적 원리를 공식화했다. 예컨대 그는 모든 생물은 습성과 서식지에 적응되어 있고, 구조상의 상동성과 기능상의 상사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물의 분류에 있어서도 외부구조상의 차이가 아닌 보다 기본적인 분류기준을 설정하고자 했으며, 생물계가 하나의 조직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발생의 과정도 문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③ 식물학적 연구: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의 생활 조건과 일반 형태를 고려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를 했고, 〈식물 연구 Historia plantarum〉·〈식물 역사 De historia causis plantarum〉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 저서들에서 식물의 형태, 박물학, 약물 작용, 식물의 성장 및 식물과 토양 또는 기후와의 관계를 기록했으며, 500여 가지의 식물을 기재했다. ④ 그리스 시대 이후의 생물학 연구: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이후 학문의 새로운 중심지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이었다. BC 3세기 이후 300년 동안의 중요한 생물학적 발전은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학자는 헤로필로스였다. 그는 인체를 해부하여 다른 큰 포유동물들의 구조와 비교했으며, 뇌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고 뇌는 신경계의 중심이며 지능의 장소라고 인식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해부학). 로마인들은 큰 자연과학적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연의 연구 Historia naturalis〉(37권)를 편찬한 플리니와 의학자이자 최초의 실험생물학자라고 할 수 있었던 갈레노스를 배출했다. 4. 아랍과 중세 유럽 갈레노스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생물학의 연구는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중세(476~1453) 유럽에서의 자연과학은 경제적인 정체와 신학적 논리 및 종교적 억압으로 인해 거의 1,000년 동안 암흑시대였고, 생물학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중세, 이슬람교). ① 생물학에 대한 아랍의 우위:9세기에 스페인까지 진출한 아랍인들은 과학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3~11세기의 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아랍인들의 과학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혁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등의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그 내용에 관해 주석을 달았다. 868년경에 사망한 알자히즈의 저서 중 하나인 〈동물에 관한 책 Kitāb alhavawān〉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주로 아랍적인 작품이었다. ② 식물학과 동물학의 발달:중국의 제지술은 8세기부터, 인쇄술은 13세기부터 아랍과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고안된 아라비아 숫자가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십자군 원정(1096~1291)을 통해 아랍의 철학과 과학이 유럽에 소개되었다. 13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M.스콧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고, 중세의 위대한 박물학자인 독일의 A.마그누스는 〈식물에 관하여 De vegetabilibus〉(7권), 〈동물에 관하여 De animalibus〉(26권)를 라틴어로 저술했다. 마그누스의 저작은 그리스 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 자신이 새로 관찰한 사실들도 포함했다. 그결과 식물학과 동물학이 발달했으며, 해부학은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5. 르네상스 시대 14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가 동요되면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과 더불어 모든 문화의 융합으로 학문의 재탄생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중세기의 아랍에 의해 중계된 자연과학은 유럽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분야에서는 우선 해부학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었고, 식물이나 동물의 관찰과 기재를 통해 분류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해부학에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갈레노스의 방법을 타파하고 가축과 인체를 해부하여 비교한 결과, 사람과 말 사이의 뼈와 관절의 배열에 상동성이 있음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벨기에 태생의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교수였던 베살리우스는 혁신적인 해부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식물학 연구의 근원은 약용식물에 대한 연구였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식물학자인 O. 브룬펠스는 독일의 식물을 기재하여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브룬펠스). 16세기를 통하여 네덜란드·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도 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이 기간에 식물에 대한 분류체계가 크게 향상되었다. 스위스의 식물학자 G. 보앵은 식물을 속명과 종명으로 명명함으로써 이명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동물학에서 영국의 E.워튼, 프랑스의 P. 블롱, 스위스의 C. 게스너, 이탈리아의 U.알드로반디 등이 나왔으나 식물학의 발전을 따르지는 못했다. 16세기에 중국에서는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1552~78)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식물 약 1,100가지, 동물 약 410가지가 기재된 훌륭한 박물서였다. ** 20세기를 향한 생물학의 진전 (개요) 17세기에 생물학 분야에서는 학문의 교류를 위한 과학학회가 창립되고, 현미경의 발달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물학에 커다란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17~18세기에 걸쳐 체계화와 분류가 생물학을 지배했으며, 사람을 포함한 생물의 비교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18세기에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겨난다는 오랜 자연발생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연발생설은 19세기 중엽에 L. 파스퇴르에 의해 반증되었다. 대양을 건넌 생물탐사는 식물과 동물의 종류에 관한 지식을 더욱 늘리고 19세기 진화설의 토대가 되었다. 19세기는 생물학이 크게 발전한 시대로 진화설의 구체화와 세포설이 수립되고, 현대 발생학을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전의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1. 혈액순환의 발견 영국의 W. 하비(1578~1657)는 실험을 통하여 혈액순환을 연구한 결과를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Exercitatio anati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에 정리했다. 그는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모세혈관을 예견했으며, 후에 M.말피기가 이것을 발견했다. 2. 과학학회의 창립 학회는 학자들의 모임으로서 연구 결과의 발표 및 정보 교환을 통해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가장 먼저 창립된 학회는 1603년경 로마에서 창립된 이탈리아 스라소니 아카데미(Italian Academy of the Lynx)였다. 이후 기존의 작은 학회들을 1662년에 통합한 영국 런던의 왕립학회, 1666년 창립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과학학회가 설립되었다. 학회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출판물을 내는 일인데, 그 첫번째 것은 프랑스에서 1665년에 출판된 〈학술잡지 Journal des Savants〉였으며, 3개월 후에 런던의 왕립학회는 〈철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창간했다. 3. 현미경의 발달 확대경은 기원전에 아시리아인들도 사용했지만, 복합현미경이 발명된 것은 1590년경이다. 그후 기술의 발달에 따라 복합현미경이 개량되어왔으며 관찰기술도 발달했다. 그결과 생물의 미세구조를 밝히고 매우 작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말피기·레벤후크·스왐메르담·그루·훅 등의 현미경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말피기는 생물의 미세구조 연구를 창시했고, 레벤후크는 세균·원생동물의 발견과 동물의 정자를 처음으로 관찰했으며, 스왐메르담담은 동식물의 미세해부를 시도했다. 또한 그루는 식물해부학의 창시자였고, 훅은 1665년에 식물의 세포를 발견하고 명명했다. 4. 분류학 원리의 발달 17~18세기의 가장 저명한 분류학자는 J. 레이와 C. 린네였다. 레이는 박물학자로서 처음에는 주로 식물을 연구했으며, 〈일반식물지 Historia generalis platarum〉(1686~1704)에서는 1만 8,600가지의 식물을 기재했다. 또한 처음으로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을 구분했으며, 그후 동물을 해부학적인 유사성으로 분류했다. 그는 여러 세대 동안 특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종(種)이라 하여 처음으로 종의 개념을 명확하게 했다. 반면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체계적인 분류에 필요한 분류학적 범주로서 강(綱)·목(目)·속(屬)·종·변종(變種)의 5계급을 설정하고, 각 종의 학명을 이명법으로 명명하는 방식을 확립했다. 실제로 식물 약 1만 8,000종과 동물 4,162종을 명명했고, 그 분류계급에 맞추어 분류했으며, 동식물의 분류를 체계화하는 데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5.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연구 구더기가 썩은 고기에서,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생겨난다는 식으로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발생설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설을 믿었고 17세기 중엽까지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발생설에 대한 학자들의 시비가 계속되었다. 하비는 "모든 생물은 알에서 생긴다"고 하면서도 자연발생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1860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파스퇴르가 실험을 통해 종래의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후 새로운 각도에서 최초의 간단한 생명체가 어떻게 지구상에서 발생했는지를 논할 수 있게 되었다. 6. 생물학상의 탐험 16~17세기에 많은 유럽 여행자들이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 등지의 식물과 동물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과학적 탐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8, 19세기였다. 이러한 노력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은 영국 정부가 후원한 엔데버호(1768)·인베스티게이터호(1801)·비글호(1831~36)·챌린저호(1872~76) 등의 항해인데, 비글호 항해에는 C. 다윈이 참여하여 여행중 많은 연구 재료를 수집했고, 시간과 공간의 격리에 의하여(자연선택) 새로운 종이 형성된다는 생각을 착상했다. 7. 세포설의 발전 1665년 훅의 세포 발견 이후 세포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1830~40년 독일의 H. 몰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세포분열을 연구했고, 1838, 1839년에는 독일의 M. 슐라이덴과 T. 슈반이 식물이나 동물의 구조 및 기능상의 단위는 세포라는 세포설을 제창했다. 그후 원형질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감수분열 현상도 밝혀져 생물현상을 세포 수준에서 연구하려는 방향이 설정되었다. 8. 생물의 진화설 린네는 종의 불변성을 믿었지만, 16세기 이후 식물과 동물의 종류에 관한 지식이 많이 축적됨에 따라 생물의 종들에 대한 조상 문제를 숙고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C. 다윈(1809~82)의 할아버지 E. 다윈(1731~1802)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의 J. 라마르크는 진화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첫번째 인물이었다. 라마르크는 저서 〈동물철학 Zoological Philosophy〉(1809)에서 진화론을 전개했으며 계통수(系統樹)의 개념을 정립했다. C. 다윈은 1836년 비글호 항해를 마친 후 장기간의 연구 끝에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영국의 경제학자 T. R. 맬서스와 영국의 지질학자 C. 라이엘의 영향을 받았다. 과잉번식된 자손 중에 적자가 생존하는데, 지질학적인 시간이 경과되면 이같은 자연선택을 통하여 새로운 종이 형성되어 나온다는 다윈의 진화사상은 A. L. 윌리스에 의해서도 동시에 발표되어 생물학 발전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철학·사회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종분화). 한 예로 생물학 분야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분류학상의 계통탐구를 들 수 있다. 9. 생물의 생식과 발생에 관한 연구 "배는 형체가 미리 형성되어 있어서 발생중에는 단지 커질 뿐인가? 아니면 형체가 없는 상태로부터 분화하는 것인가?" 이것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의문이다. 전자와 같은 생각의 학설이 전성설(前成說)이고 후자와 같은 것이 후성설(後成說)이다. 18세기까지는 전성설이 지배적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전성설에 대한 반증들이 많아졌다. 에스토니아의 K. E. 베어는 배엽설(胚葉說)을 확립해 전성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1823~30년에 꽃피는 식물에서 유성생식 과정이 밝혀졌고, 1879년에는 동물의 수정과정이 관찰되었다. 1880~90년에 벨기에의 E. 베네당과 기타 여러 학자에 의해 생식세포 형성시의 감수분열 현상이 밝혀졌다. 10. 유전의 연구 유전의 기본법칙은 1865년 오스트리아의 멘델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1900년에 그 법칙이 재발견될 때까지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멘델 이전이나 이후에 유전에 관한 논의는 계속 있었다(멘델 법칙). 예를 들면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 개체의 특징은 환경과 접촉함으로써 얻을 수 있고 이런 획득형질은 유전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라마르크는 그의 진화설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을 지지했다. 1885년 독일의 A. 바이스만은 유전형질이 생식질에 의해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F. 골튼은 형질의 유전적 본질을 연구하여 우생학(優生學)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19세기말에는 염색체와 유전과의 관계가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독일의 T.H. 보베리는 그러한 공헌자 중 한 사람이었다. 11. 생리학의 발전 17세기에 하비가 혈액순환의 원리를 발견하면서 실험생물학을 탄생시킨 후 18~19세기에 식물생리학과 동물생리학이 꾸준하게 발달했다. 19세기 중엽까지는 생물현상에 관한 종래의 생기론적 견해를 없애고 물리화학적 방법을 생물학연구에 적용하여 생리학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프랑스의 C. 베르나르는 간의 글리코겐 형성 기능을 비롯해 동물생리학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으며, 기계론적 입장에서 실험생물학의 방법론을 수립한 공이 크다. *** 20세기의 생물학 (개요) 19세기를 세포생물학 시대였다고 본다면 20세기는 분자생물학이 발전해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 중요한 개념의 발전 X선 회절과 전자현미경 등의 현대적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세포의 초미세구조를 탐구하여 세포 기능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이 생겨났다. 세포 분자구조에 관한 연구는 20세기의 생물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생명현상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과학분야가 함께 이런 연구에 집중되고 있다. 20세기의 또다른 발전은 사람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천연 자원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등으로 말미암은 물리적인 환경 파괴와 각종 화학물질로 인한 오염이 가속화되어 생태계의 안정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물학자들은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 즉 생태학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인구폭발, 공해). 2. 생물학의 연구분야 생물학에는 여러 중요한 분과가 있다. 연구 대상 분류군에 따르면 식물학·동물학·미생물학의 세 분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더 세분하면 조류(藻類)를 연구하는 조류학, 어류를 연구하는 어류학, 세균을 연구하는 세균학, 바이러스를 다루는 바이러스학 등이 있을 수 있다. 미생물학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파스퇴르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또한 생물의 성질들을 대상으로 하여, 생리적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 발생현상을 다루는 발생학 등 여러 가지 분야도 함께 발전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생리학과 발생학이 많이 발달했는데, 이것은 세포생물학·생물물리학·생화학의 연구성과에 기인한다. 이것은 세포생리학·세포화학·초미세구조의 연구를 불러일으켜 구조와 기능을 연관시키고자 했다. 또한 생물의 체제에 분자·세포·조직·기관·개체·집단 등의 수준이 있다는 관점에서 생물학을 분자생물학·세포생물학·개체생물학·집단생물학 등으로 구분하는데, 집단생물학은 동식물들의 집단과 그 환경과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3. 생물학과 다른 과학 분야와의 관계 17세기에 현미경의 발명이 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된 것은 생물학이 물리학 발전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18세기에는 생물학의 연구에 중요한 산소·이산화탄소·물의 성질에 관한 화학이 발달했다. 오늘날에는 생화학과 생물물리학의 형태를 통하여 화학과 물리학이 생물학, 특히 분자생물학 분야에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생물학이 의학 및 농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질학도 고생물학의 생물학적 연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새로운 분야인 우주생물학은 우주 탐험에 관련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연구활동을 통하여 생겨났다. 4. 사회 및 과학적 가치의 변화 새로운 발견과 개념의 발달에 따른 도덕 및 윤리적 책임과 더불어 사회에서 생물학자들의 역할은 결국 그들의 사회 및 과학적 가치 체계에 관한 재평가를 불러일으켰다. 과학자는 그의 발견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 즉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기초연구에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것에 있을 수 있는 오용과도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자와 기타 모든 과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은 실험실의 저울과 같이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 가치는 평가되어야만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생물학자는 사회의 점진적 발전을 위하여, 특히 윤리상의 문제와 인간 환경의 인위적 조절이나 유전자의 인위적 조작 등에 관한 판단 영역에서 자기의 사회적 의무와 기능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5. 미래 문제에 대한 대처 우리는 장차 대응해야 할 많은 생물학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 산업발전이 가속됨에 따라 물리적으로 자연환경이 심하게 파괴되고 폐기물로 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는 문제, 인구의 증가와 한정된 지구자원의 문제들은 매우 심각하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은 머지 않아 발견되겠지만, 건강하고 생산적인 지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설정하기 위해서 생물학자들은 사회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 한국의 생물학사 한민족의 현재 영토인 한반도와 과거 영토였던 만주지방에서는 지방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BC 70000년 이전에 구석기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후 중석기문화(BC 10000년 이전에 시작)·신석기문화(BC 6000년 이전에 시작)·청동기문화(BC 2000년 이전에 시작)·철기문화(BC 700년 이전에 시작)를 거쳐오는 동안, 조상들도 의식주 해결 및 치료 등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 과정에서 주변의 식물과 동물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 응용해왔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세기까지 생물학이 독립된 학문 분야로서 연구되고 전승되어온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고학상의 자료, 농업·의학·어업·식품에 관한 고문헌, 사서(史書) 등에 산재하는 생물학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생물학사적인 고찰을 해야 하지만 중세(고려시대) 이전의 남아 있는 관련 고문헌은 거의 없다. 예로부터 한국의 문화는 대륙(주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했는데, 농업과 의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생물학(주로 분류학) 분야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고조선시대에 유입된 본초학(의학의 일부)이었다. 중세 말기부터 근세(1392~1863)에 들어와서 자주적으로 향약(鄕藥)을 연구,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1236경), 조선시대의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1431)·〈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1433)·〈동의보감 東醫寶鑑〉(1613) 등이 발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동물이 연구되었다. 해부학은 동양의학이 실질적으로 해부를 수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발전이 거의 없었고, 생리작용의 설명은 일관되게 음양오행설에 의존해왔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1470~94)에 실린 팔도 각 고을의 토산품은 그시대 생물의 지리적 분포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18세기에 실학이 진흥되면서 많은 박물서와 경제서가 발간되었는데, 생물학(주로 분류학)과도 관계가 있다. 대표적인 것들로 이수광의 〈지봉유설 芝峰類說〉(1633), 홍만선의 〈산림경제 山林經濟〉(1715경), 정약전의 〈자산어보 玆産魚譜〉(1814), 김려의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1803 탈고, 1882 출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1834~45)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자산어보〉는 저자가 흑산도에서 다년간 해양생물을 직접 관찰하면서 분류·기재한 최초의 해양동식물조사 보고서이다. 산림경제(山林經濟) 19세기 중엽 유럽인들이 한국의 식물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연구 발표한 예들이 있었으나, 유럽식 생물학은 조선 말기인 1896~1910년에 각급 학교의 교육을 통해서 도입되었다. 한편 학교 교육과는 별도로 1880년대에는 일본을 통하여, 1900~05년에는 중국을 통하여 진화사상이 한국에 도입되었다. 1896~1910년에는 유럽인들이 한국의 식물과 동물을 연구하는 주역을 담당했고, 일본인들도 이런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의 산림자원과 수산자원의 조사도 시작했다. 1910~45년에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생물학 및 그 관련 분야의 교육과 연구의 주역을 담당했지만, 고등교육 기관에는 생물학 관련 전공학과가 없었고, 단지 농학·임학·수산학·의학 관련 전문학교나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교과과정에 약간의 생물학 관계 교과목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한국인 생물학자들의 대부분은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창립) 출신이었다. 이의경(또는 이미륵)은 플라나리아의 재생에 대한 연구로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1928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외에 1910~45년에 생물학과·식물학과·동물학과를 졸업한 사람은 일본에서 유학한 6명뿐이었다. 1923년경 일본인들이 주동하여 조선박물학회(朝鮮博物學會)를 창립하고 〈조선박물학회잡지〉(1924~44)를 제40호까지 발간했다. 여기에는 분류학 관계 논문이 비교적 많이 실렸다. 조선총독부는 산림·수산 자원을 계속 조사하여 1945년까지 한국의 식물상과, 척추동물 및 일부 무척추동물(연체동물, 갑각류·십각류, 곤충 등)의 동물상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한편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1910 창립)가 발행한 〈조선의학회잡지〉와 기타 의학 분야 학술잡지 등에는 임상 논문 이외에도 생리학·형태학·기생충학에 관한 것들도 실려 생물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사이에도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와 같은 한국인 식물학자들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 朝鮮植物鄕名集〉을 발간했고, 동물분류학에서 조복성(곤충)·원홍구(조류)·석주명(나비류)·백갑용(거미류), 동물세포학에서 강영선의 논문이 나왔다. 1945년 8·15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은 생물학 분야에서도 각자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여기서는 남한에서의 발전만을 다루도록 한다. 1945년 12월 조선생물학회가 창립되고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최초로 생물학과가 신설되었으나 1960년경까지는 8·15해방 후의 사회혼란, 6·25전쟁과 그 후유증, 산업의 후진성, 과학 및 기술의 낙후성, 학자의 부족 등으로 생물학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신설 생물학과의 증가, 유학생의 증가, 생물학 관련학회의 창설과 학회지의 창간 등으로 점차 생물학 발전의 기틀이 잡혀 조선생물학회는 1951년 대한생물학회로 개칭되었고, 1956년 〈생물학회보〉를 창간했다. 이 학회는 1957년 한국식물학회와 한국동물학회로 분리되어 한국생물과학협회를 구성했다. 1959년에 한국미생물학회가 창립되어 이 협회 산하에 들어갔다. 문교부가 1959년부터 〈한국동식물도감〉을 발행하도록 함에 따라 분류학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국가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자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의 제정과 과학기술처를 발족시켰으며, 과학교육진흥법도 제정했다. 1976년에는 한국과학재단법이 마침내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시책들이 기술적 측면에 너무 치중되어 왔으나, 점차 기초과학을 중요시 여기게 되어 1977년 서울대학교에는 자연과학종합연구소가 설치되었고, 다른 여러 대학교에도 기초과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에는 유전공학육성법이, 1989년에는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이 제정되었다. 그결과 기초과학의 발전을 위한 교육·연구·시설에 대한 투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으며, 생물학 분야도 나름대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1960년대까지는 선진국에서 이미 많이 발전된 주요분야들(분류학·형태학·생리학·발생학·유전학·세포생물학·생태학·미생물학·분자생물학 등)이 거의 모두 부진 상태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발전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발전하는 양상은 생물학 관련 학과의 증설과 관련 학회의 창립에서 엿볼 수 있다. 1992년 2월 현재 관련학과의 수는 생물학과 66, 미생물학과 20, 분자생물학과 6을 포함해 모두 92개 학과이며, 1학년 모집정원은 4,045명이다. 이밖에도 생물학의 응용학과로서 농생물학과·유전공학과 등의 72개 학과가 11개 대학교에 있으며 1학년 모집정원은 2,664명이다. 학회는 위에서 서술한 3개 학회 이외에 한국해양학회(1966 창립)·한국육수학회(1967 창립)·한국식물분류학회(1967 창립)·한국전자현미경학회(1967 창립)·한국곤충학회(1970 창립)·한국균학회(1972 창립)·한국생태학회(1976 창립)·한국유전학회(1978 창립)·한국동물분류학회(1984 창립)·한국분자생물학회(1989 창립) 등이 창립되어 각각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다. 이 학술지들의 질은 연구 인력의 증가, 연구 분야의 다양화, 그리고 연구 여건의 향상으로 점점 향상되고 있다. |
* 의학사(history of medicine) * 요약 : 의학을 역사적인 사건이나 시대별로 분류하는 학문. 의학은 1800년 이후에야 본격적인 학문으로 성장하였다. 그 이전의 역사는 미미했으나서양에서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진 히포크라테스의 의료행위 정신이 선서 형태로 남아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해부학과 생리학 분야가 발전을 이루었고, 18세기에는 근대적 병리학이 출현했다. 18세기말의 의학적 진보로는 제너의 종두법을 들 수 있다. 1800년 이전의 동양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중국의 대표적인 의학문헌으로는 〈황제내경 黃帝內經〉이 있고, 의료행위로는 침술이 발달했다. 한국에서는 전통의학을 바탕으로 중국 의학과 불교에 의해 전래된 일부 인도 의학이 밑바탕이 되었다. 조선 후기 명의로는 허준, 의학문헌으로는 그의 저서 〈동의보감 東醫寶鑑〉을 들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인체구조가 거의 알려졌고, 감염성 질환 분야에서 세균학이라는 분야가 큰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에 들어서는 건강의 유지가 질병 치료 이상으로 중요하게 떠오르면서 예방의학 분야에 발전을 가져왔다. 1. 원시 의료와 민속 인류가 처음부터 죽음과 질병을 자연적 현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감기처럼 흔한 병은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약초요법 등으로 치료했지만 심한 질병들은 전혀 다른 범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치료도 떠도는 영혼을 몸속의 원래 제자리에 다시 불러들이거나 사악한 침범물을 주문·마법·미약·흡인 등의 방법으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2. 고대 중동과 이집트의 의학 역사 시대 초기의 의학에 대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데, 고대 메소포타미아 의사들의 설형문자 점토판이 주된 자료이다. 그들은 질병의 예후를 예측하기 위해 희생동물의 간을 보고 점을 쳤다. 고대 이집트 의학의 모습은 바빌로니아 의학보다 명료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최초의 의사는 BC 2000년대의 임호텝이다. 예상과는 달리, 사체를 미라로 만드는 당시 관습은 인체 해부학에 대한 연구를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3. 동양의 전통 내과와 외과 1) 인도 인도 의학은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 의학사상은 베다라는 경전, 특히 BC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타르바베다〉에 잘 나타나 있다. 베다 의학은 마술적인 치료로 가득 차 있다. 대략 BC 800~AD 1000년은 인도의학의 황금기이다. 힌두교도들은 인체에는 3가지 신성한 보편적 힘의 소우주적 표현인 3가지 원소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각각 정령(공기)·점액·담즙이라고 불렀으며, 건강은 이들 3원소의 균형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힌두교도들의 철저한 신앙 덕택에 치료에 있어서 위생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고대 힌두 의학은 외과분야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매우 광범위한 종류의 외과도구들이 쓰였다. 수술 도중에 마취제로 알코올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뜨거운 기름과 타르로 지혈했다. 2) 중국 중국의 의학체계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외래 영향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이었다. 중국 의학문헌의 대다수는 〈황제내경 黃帝內經〉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황제내경〉의 권위는 오늘날까지도 대단하다. 유럽 의학은 19세기초에야 비로소 중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아직도 전통적 의학체계가 널리 활용되고 있다. 중국의 전통 병리학은 음양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국인들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많은 질병을 분류했는데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진단을 함에 있어서 증세의 경과, 환자의 입맛, 냄새, 꿈 등에 관해 상세히 물었으며 그들이 진단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진맥이었다. 침술은 BC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중국 의학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때부터 침술에 대한 유명한 책이 끊임없이 나왔지만 그동안 요법이 크게 개선된 점은 거의 없다. 침술의 이론은 몸의 경락에 있는 음과 양에 영향을 주어 치료하며, 치료하려는 증세나 장기에 따라 침을 놓는 자리가 선택된다. 3) 한국 한국의 의학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전통의학을 바탕으로 중국 의학과 불교에 의해 전래된 일부 인도 의학에 의해 발전했다. 특히 낙랑·대방 시대에 인접한 한나라에서 의학이 전래되었다고 본다. 삼국시대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인삼 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백제에서는 질병을 치료하고 약제를 공급하는 약부(藥部)가 있었으며, 의박사·채약사·약사주 등의 관리가 있었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의학교육기관과 불교가 융성하여 승의(僧醫)가 있었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신라문화를 이어 교육기관과 약전(藥典)과 같은 의료기관이 있었으며, 후기에는 의사관제도(醫事官制度)가 실시되어 교수관(敎授官)에 의한 교습이 시행되었다. <조선시대> 전기(1392~1567)에는 중앙의약제도가 설정되었으며, 지방의약기관과 의원이 설치되었다. 후기(1568~1800)에는 병란에 의해 국력이 쇠퇴된 시기였으나, 허준 같은 명의가 배출되었으며 그의 저서 <동의보감>은 중국·일본에서도 널리 인정하는 명저이다. 동의보감〈동의보감〉, 목활자본(1613 간행본) 이 책의 이론적 배경은 중국의 〈황제내경〉 등을 참조로 해서 도교적인 철학과 실생활에 맞는 생활의학의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정(精)·기(氣)·신(神)을 중히 여겨 조섭수양(調攝修養)을 우선으로 하고, 치료법으로 약석(藥石)을 사용하는 것을 다음으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17세기부터 서양의학서가 천주교리서와 함께 들어오기 시작하여 실학자들이 어느 정도 연구하기 시작했으나 의학적인 성과는 별로 없었다. 4) 일본 일본의 의학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까지는 중국·한국의 전래되어 내려오던 한의학이 주를 이루었으며, 약간의 서양의학이 서양의 선교사나 선원들을 통해 전해졌다. 2. 서양 의학의 뿌리 1) 그리스 초기 의학 마법에서 과학으로의 변화는 여러 세기에 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 그리스 사람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가지 자연현상에 대해 원인과 이유를 찾도록 한 것은 아스클레피우스 사원의 사제들이 아니라 초기 철학자들이었다. 엠페도클레스의 우주관에 따라 인체는 혈액·점액·황담즙·흑담즙으로 구성되었다는 4체액설이 대두했다. 이 설에 따르면 건강의 유지는 4가지 체액의 조화에 의존한다. 2) 히포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그의 생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히포크라테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을 이루는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몇 권의 저자일 수도 있고 그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이 붙은 저작들은 서양의학의 한 이정표, 즉 질병을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의사들은 질병의 그러한 자연적인 원인을 찾기 시작하게 된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히포크라테스는 자연치유력을 강조했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를 환경과 관련지어 병이 아닌 인간으로 다루었다.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이른바 '히포크라테스 선서'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의료행위에 대한 장전일 것이다. 3) 헬레니즘 의학과 로마 의학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면서 헬레니즘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사상 최초로 해부학에 관한 저작을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헤로필로스와 생리학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에라시스트라토스라는 위대한 의학자가 있었다. 기원 후 몇 세기 동안 그리스 의사들은 로마로 이주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갈레노스였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의술을 배워 그 방법을 따랐으며 체액설을 지지했다. 그는 해부학의 의의를 강조했으며, 사실상 맨처음으로 실험생리학을 학문으로 확립했다. 당시에는 인체해부를 법으로 금했으므로, 갈레노스는 동물의 관찰에 자기 지식의 토대를 둘 수밖에 없었다. 의학이론과 시술법에 대한 로마의 공헌은 그리스에 비해 무시할 정도로 작지만, 공중보건에 관한 로마인들의 태도나 처리는 매우 뛰어났다. 3.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세계의 의학 1) 번역가와 성자들 초기 기독교는 의학 발전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종종 거론된다. 이는 병에 걸리는 것이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 여겨졌고, 그러한 신의 징벌은 기도와 회개에 의해서만 나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후원 아래 병자들에게 베풀어진 간호와 가료는 중세 초기 동안 의학에 대해 가해진 불관용적인 태도보다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교회가 의학에 대해 한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전적인 그리스 의학문헌을 보존하고 번역한 일이다. 이 무렵 기적적인 치료와 관련된 많은 성자들이 등장했다. 2) 아랍 의학 중세시대를 통해 의학을 보존했던 또다른 곳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초기의 유명한 의사로는 라체스가 있었다. 그보다 조금 후의 인물인 아비케나(980~1037)는 '의사 중의 왕자'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저서 〈의학 정전 al-Qānūn fῑ aṭ-ṭibb〉은 고전이 되었다. 아랍 의학의 가장 큰 기여는 화학과 약물에 대한 지식과 그 제조에 있다. 4.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 의학 1) 살레르노와 의학교 아랍 의학이 번창하던 무렵 유럽 최초의 조직적인 의학교가 이탈리아 남부 살레르노에 세워졌다(-> 살레르노대학교). 살레르노 의학교는 그당시 가장 훌륭한 의학기관이었으며 중세 의학교의 본보기가 되었다. 중세의 의사들은 증상을 분석하고 분비물을 검사하여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식사·휴식·수면·운동·목욕 등의 처방을 내리거나 구토제 또는 설사약을 주거나 방혈을 했다. 2) 새로운 학문의 전파 14~16세기에 걸친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의 단순한 부활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물을 보는 관점의 변화, 전통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고와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의학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우선 인체의 구조에 관련된 해부학과 그 기능에 관한 생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1543년 〈인체의 구조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출판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이 혁명적인 저서에서 그는 갈레노스의 오류를 많이 바로 잡았다. 베살리우스의 작업은 팔로피우스와 파브리키우스 아브 아콰펜덴테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외과는 해부학의 개혁과 발전에 힘입어 많은 발전이 있었다. 앙브루아즈 파레는 16세기의 외과학을 지배했는데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5. 계몽시대 유럽 의학 1) 하비와 실험적 방법 1628년에 하비는 고전적인 저서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Exercitatio Anat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을 출판했다. 하비의 저서는 여러 번에 걸친 조심스러운 실험의 결과였다. 하비가 혈액순환을 발견한 것은 의학 발전의 한 이정표였다. 결과를 도출한 새로운 실험방법은 그 결과 자체 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이었다. 2) 단순한 체계를 찾기 위한 쓸모없는 탐구 17세기에는 환자 진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쉽고 단순한 체계를 발견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인체는 기계라는 데카르트의 생각은 의학사상에 커다한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물리학자라고 했으며, 생명현상을 화학과정으로 생각한 학파는 의화학자로 자처했다. 3) 18세기의 의학 18세기에도 환자를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존 브라운은 항진성 질환과 무력성 질환인 2가지 병만이 존재한다고 했으며, 치료도 진정요법과 자극요법만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한편 18세기에는 근대적 병리학이 출현했다. G. B. 모르가니는 1761년에 〈해부학 연구에 바탕을 둔 질병의 원인과 발병장소에 관하여 De sedibus et causis morborum〉를 출판했다. 700여 회에 이르는 부검의 예를 토대로 기술한 이 책에서 모르가니는 사후 소견과 생존시의 임상적 특성을 관련지으려고 노력했다. 라엔네크는 간단한 청진기를 고안했으며, 아우엔브루거는 타진법이라는 또다른 흉곽질환 진단법을 개발했다. 18세기말에 이루어진 의학상의 진보 가운데 의미가 큰 것으로는 제너의 종두법이 있다. 이 시대에는 유사과학의 풍미와 더불어 건전한 과학적 사고도 착실한 진전을 보였다. 물리학·화학·생물학의 진보는 임상의학의 모든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토대가 되었다. 6. 19세기 과학적 의학의 발달 1) 생리학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현미경학과 주입술의 새로운 방법으로 인체구조는 거의 완전하게 알려졌다. 신체의 미세구조까지도 이해되었다. 생리적 과정의 이해는 해부학 지식만큼이나 중요했는데 19세기에 들어 특히 독일에서 빠른 속도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2) 세균설의 확립 19세기 의학의 발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감염성 질환이 매우 작은 생물체들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일이다. 세균학이라는 분야를 확립한 공로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게 가장 먼저 돌려야 할 것이다. 영국의 리스터는 파스퇴르의 발견에서 방부원리를 도출해 외과에 적용했다. 세균학의 또다른 선구자로는 독일의 코흐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세균을 배양·분리하고 검사 방법을 발견했다. 3) 임상의학과 마취에서의 발견 그레이브스와 스토크스가 임상진단과 교육에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미국이 이 시기의 의학에 공헌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전신마취의 도입이었다. 전신마취는 수술에 따르는 통증으로부터 환자를 해방시켰고, 외과의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수술할 수 있도록 했다. 4) 19세기말의 발전 방부법과 마취술이 외과의 모습을 일신하는 동안 질병 전파에 관한 연구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건강의 유지가 질병의 치료만큼이나 중요한 관심사가 되면서 예방의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과학지식이 엄청나게 증가함에 따라 의술의 모습은 급격히 바뀌었고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에 따라 의학교육과 의료의 수준을 관장하는 공공기구와 전문직 단체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7. 19세기 한국의 의학 1) 종두법 1796년 영국의 제너가 발견한 종두법은 청나라를 통해 많은 서양학 서적과 함께 유입되었고, 이를 정약용의 저서 〈마과회통 麻科會通〉에서 다루고 있으며, 1835년경에 시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뒤 1876년 병자수호조약 때 박영선이 일본에서 우두종법을 배워서 제자인 지석영에게 전했고, 지석영이 제생의원과 일본에서 여러 기술을 배워 종두를 실시했다. 2) 한의학 19세기에 들어서 한의학에는 〈동의보감〉을 계승한 여러 서적들이 제작되었는데 사상의설(四象醫說)이 있는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과 이석곡의 〈의감중마 醫鑑重磨〉 등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한 저서이다. 특히 이제마의 사상의설은 종래 한의학의 음양오행설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체질에 중점을 두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3) 서양의학의 전래 서양의학의 직접적인 전래는 1876년 조일수호조약이 성립되면서 일본거류민을 위해 여러 항구도시에 병원을 설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885년 미국 선교의인 알렌이 건의하여 광혜원(廣惠院:제중원)을 설립했고 여러 선교차원의 병원이 설립되면서 서양의학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8. 20세기의 내과학 <개요> 20세기에 들어 수많은 발견과 발전이 있어서 의학의 면모는 이전 시대와 완전히 달라졌다. 의학의 강조점도 인간의 생존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연락이 손쉽게 된 것도 의학이 이 시기에 급격히 발전하게 된 요인이다. 전문화 경향이 강화되었지만 그들 전문가 사이의 협동작업도 활발해졌다. 따라서 이 시대의 발전과 성취를 어느 개인이나 소집단의 공으로 돌리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1) 감염성 질환과 화학요법 세균·리케차·원충류·바이러스 등 수많은 병원성 미생물이 발견·분류되었으며 예방접종제와 화학약물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① 에를리히와 비소제제:에를리히는 여러 병원체에 대해 각종 화학물질의 효과를 실험했다. 그는 살바르산이라는 비소제제의 효과를 시험하여 성공했는데 이것은 감염성 질환의 치료와 관리에 화학요법의 시대를 열었다. ② 술파제제:1932년 게르하르트 도막은 프론토질이라는 붉은색 염료가 연쇄상구균감염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설파닐아미드는 곧 더 안전하고 강력한 새로운 술파제제로 대치되었다. ③ 항생제: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은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라는 곰팡이가 포도당구균에 억제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10년 뒤 하워드 등이 순수한 형태로 페니실린을 분리했다.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 그뒤 대량 생산되고 여러 가지 형질과 균주가 개발되어 다양한 질병에 항생제로 쓰이고 있다. 1944년 왁스먼이 결핵균에 효과가 있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했으며, 파라아미노살리신산(PAS)과 이소니아지드 등을 혼합하여 사용함으로써 결핵치료에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다. 2) 면역학 화학요법의 발달이 극적인 효과를 가져 왔지만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해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바이러스성 질환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면역학의 발달이 큰 역할을 했다(-> 백신). ① 항균면역요법:장티푸스는 1897년 영국의 라이트가 죽은 장티푸스균으로 예방백신을 개발했다. 파상풍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파상풍 항독소가 예방을 목적으로 쓰이면서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1930년대에 효과적인 백신과 톡소이드가 개발되었다. 디프테리아 항독소는 파상풍 항독소와 마찬가지로 1890년 베링과 기타사토가 개발했다. 그뒤 더욱 효과적인 면역제가 개발됨에 따라 디프테리아 면역제는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 되었다. 결핵은 1908년 알베르 칼메트와 카미유 게랭이 독성이 약해진 결핵균을 만들었고, 이 독성이 약해진 결핵균으로부터 BCG 백신이 제조되었다. ② 바이러스성 질환에 대한 면역요법:천연두를 제외하고는 20세기초까지도 효과적인 바이러스성 질환 백신이 개발되지 못했다. 처음으로 만들어진 바이러스 백신은 1930년대말 맥스 테일러가 개발한 황열병 백신이다. 1945년 인플루엔자에 대한 비교적 효과적인 백신이 만들어졌다. 1954년 솔크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했으며, 1960년부터는 세이빈이 개발한 경구용 소아마비 백신이 쓰이게 되었다. ③ 면역반응:20세기 후반 전자현미경학의 발달로 세포구조를 더 깊이 파악하게 되었으며, 화학적 방법의 진보로 복잡한 대사기능을 더 면밀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단백질과 효소를 생성하는 과정을 조절하는 유전물질인 DNA의 중요성은 더욱 명백해졌고 생체가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병원체와 손상물질에 대해 항체를 만들어내는 면역능력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3) 내분비학 ① 인슐린:20세기초 여러 내분비샘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분리·동정하고 특성을 밝히는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은 1921년 밴팅 등이 인슐린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발견으로 당뇨병 환자들의 운명은 거의 확실한 죽음에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으로 순식간에 변하게 되었다. ② 코르티손:1949년 헨치 등은 강력한 소염작용을 갖는 물질인 코르티손을 부신피질에서 분리했다. ③ 성호르몬:성호르몬에 대한 연구와 지식도 풍부해져서 산아 조절에 관한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응용되었다. 4) 비타민 영양학 분야에서의 가장 괄목할 발전은 '보조 식품인자'인 비타민을 발견한 것과 그것이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비타민에 관한 개념이 확립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가지 비타민이 밝혀졌다. 당시에는 화학적 구조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A, B, C 등으로 표기되었다. 5) 악성종양 20세기에 들어 발전이 의학의 표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분야가 악성종양(암)이다. 20세기 후반 대부분의 산업국에서 암은 심장병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사망원인이다. 악성종양의 원인은 아직 잘 모르지만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치료법으로는 아직도 수술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방사선요법과 화학요법의 사용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암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예방의 중요성을 더 인식하게 된 것이다. 6) 열대의학 20세기 전반에 말라리아·황열병·나병이라는 중요한 열대병들을 거의 정복하게 되었다. 말라리아가 실제로 거의 근절되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DDT라는 살충제가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역시 모기가 전염시키는 황열병에 대해서도 살충제가 대단한 효과를 나타냈다. 1930년대에 개발된 설파 계통의 약물은 어떤 약물보다 나병 치료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9. 20세기의 외과학 1) 20세기 초엽 오랫동안 감염·통증· 쇼크라는 3가지 장애물이 외과의사들을 괴롭혔다. ① 당시의 객관적 상황:감염에 대항하는 방법으로서 무균법은 빠른 속도로 지지를 확보해나갔다. 무균법은 베르크만이 1886년 증기소독법을 개발함으로써 임상에 활용되기 시작했고, 마취법은 세기가 바뀔 무렵부터 서서히 진보했다. 1910년 클로로포름 대신 아산화질소를 에테르와 섞어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쇼크가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문제였다. 20세기초 쇼크의 주된 원인라고 알려졌던 것은 심한 출혈이었으며, 당시 출혈이 생기게 되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쇼크의 원인, 생리적 영향, 예방과 치료법에 대한 연구의 진척 정도가 외과 발전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했다. ②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발전:20세기의 첫 10년은 이행의 시기였다. 외과의사들은 조직과 출혈을 신중히 다루게 되었다. 외과의 각 분야가 확장됨에 따라 점차 전문화되었다. ③ 복부외과:복부외과는 주로 빌로스 덕분에 초기상태를 넘어서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새로운 복부수술의 많은 부분이 암치료를 위한 것이었지만 충수절제술(맹장수술)은 이미 19세기말에 충수염(맹장염) 치료를 위한 수술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④ 신경외과:영국의 윌리엄 메이스윈과 빅터 A.H. 호슬리는 외과의사도 뇌와 척수의 질병치료에 기여할 바가 많음을 증명했다. ⑤ 방사선과:1895년 콘라트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이어 X선을 통과시키지 않는 물질을 체내에 투입하여 여러 장기와 구조물을 관찰하는 실험이 시작되었다. 2) 제1차 세계대전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전쟁을 통해 외과가 발전했고 외과의사들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민간인의 진료에도 활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얻은 값진 교훈은 재활에 관한 것이다. 외과의사들은 그들의 임무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이 기간은 흔히 외과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 시기로 여겨지고 있다. ① 쇼크 문제:쇼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혈액량을 회복시켜야 하는데 우선 혈액 자체가 문제가 되었으므로 혈액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리고 혈액 수혈의 빈도와 양이 늘어남에 따라 혈액은행이 필요하게 되었다. ② 마취와 흉부외과:마취 영역에서의 진보는 외과의사들을 훨씬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1933년 랠프 워터스가 전신마취제인 사이클로프로판을 도입했으며, 곧이어 정맥마취법도 개발되었다. 1942년 그리피스와 존슨이 순수하게 정제된 큐라레를 혈관에 주입함으로써 근육을 이완시켰고 이로써 마취사들은 환자의 호흡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마취 분야의 진보로 덕을 가장 많이 본 분야는 흉부외과였다. 4)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군대외과의 원리가 현대전에 재도입됨에 따라 신체 변형, 사지 손실이 훨씬 감소했다. 이것은 주로 군대 내 외과기구를 재조직하여 전상자가 빠른 시간 안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데에 기인했다. 손상의 종류나 부위에 따른 전문화 경향이 심화되었으나 가장 큰 변화는 상처 부위의 감염을 술파제와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① 기술공학 분야에서의 도움:외과의사들은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지만,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한 결과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힘을 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생겨났다. 이는 특히 의공학 분야와 신소재 개발 영역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외과의 영역은 수술용 현미경이 도입됨에 따라 더욱 더 넓어졌으며, 특히 신경외과수술 등에 여러 가지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② 심장외과:심장수술에 대한 의사들의 태도는 오랫동안 의심과 불신으로 얼룩져 있었다. 몇몇 성과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실험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심장병은 외과적 문제라기보다는 여전히 내과적인 문제였다. 이 분야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급격히 발전했는데, 처음에는 선천성 장애를 교정하거나 개선하는 데에 노력이 기울여졌다. 그뒤 체외순환법이 개발됨에 따라 심장과 혈관에 대한 과감한 수술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③ 장기이식술:외과의 성과는 1967년 C. 버나드가 사람의 심장을 이식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면역억제술의 발전으로 이식분야는 엄청나게 발달하여 이제 신장이식은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심장이식에서 발생하는 거부반응도 사이클로스포린이라는 면역억제제가 개발됨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이식). 10. 20세기 한국의 의학 1) 일제강점기 이전 갑오개혁(1894)의 영향으로 의료업무에 대한 직제가 바뀌었는데, 1907년 광제원과 관립의학교를 통합하여 대한의원이 설립되었고 치료부·의육부·위생시험부의 3부로 나뉘었다. 그밖에 교육시설로는 대한의원교육부가 있었으며, 대구와 평양에서는 동인의원에서 의학강습소를 열기도 했다. 사립학교로는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 의학교로 개칭하고 1909년 정식으로 사립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정부인가를 받게 되었다. 2) 일제강점기와 8·15해방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의료행정이 보건과 방역으로 나뉘었다. 보건사업에는 서양의학에 의한 의사와 한의학을 다루는 의생(醫生)으로 이원적 제도를 실시했으며, 모자라는 의료인력을 위해 한정된 권한의 의료인들을 국가에서 허가했다. 의학교육제도에 의해 의학강습소들이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6년제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되었다. 국치적인 수난기 동안에도 일본·독일·미국 등지로 유학하고 돌아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연구·실험논문들을 발표했으며, 국제의학의 수준을 능가할 만한 업적은 아니지만 분야별로 세분된 문제에서 독창적 역량을 나타냈다. 8·15해방을 맞이하면서 남한지역은 미군정시기를 거쳐, 1948년 단독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의료행정이 현실에 맞게 독자적으로 정비되어갔다. 미국의 의료행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국가행정기관이 여러 단계를 거쳐 보건사회부로 정착되었다. 국립으로 보건의료원·의료원·정신병원·결핵병원·나병원·해상검역소·공항검역소 등을 설치했고 지방에 시립병원과 보건소를 설치·운영했으며, 세계보건기구(WHO)와 연계하여 의료사업과 가족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 수립 후 서울과 지방에 많은 의과대학과 병원이 신설되기 시작하여 1990년 현재 의과대학 23개교와 한의학 5개교, 400여 개의 병원이 설립되어 있다.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20세기 기초의학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독자적인 연구성과가 각 분과별로 계속 발표되고 있다. 임상의학이나 고도로 발달한 외과학·정신의학·방사선의학 등에서 많은 성과가 있어서 전반적으로 국제의학수준에 접근하고 있다. |
* 지구과학사(history of the earth sciences) * 요약 : 지구과학을 역사적 현상으로 취급하고 이것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의 한 분야. 1. 고대 지구과학 1) 지질과학 암석과 광물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저작이며 그 분야 최고의 연구서였던 테오프라스토스의 〈암석에 관하여 De lapidibus〉는 체계적 서술보다 분류에 치중되어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물리적 속성을 근간으로 한 분류와 광상의 기원에 관한 설명도 제시되었다. 고대인과 중세인들은 지진과 화산폭발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도 했고, 중국인들은 BC 780년경에 이미 지진을 기록했으며 지진계도 발명했다. 산의 암석틈에서 발견되는 조개들은 초기 자연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화석의 기원에 관한 논쟁을 유발시켰다. 중국학자들도 약용이나 골동품으로 수집된 화석의 발견을 기록했고 그 기원을 논하기도 했다. 초기 그리스·로마인들과 중국인들은 지형과 해륙의 위치가 침식과 퇴적에 의해 변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퇴적에 의한 수면상승이나 기후변화에 따른 해륙위치 역전의 순환성을 자연의 질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2) 수문과학과 대기과학 고대 철학자들에게 고체·액체·기체의 모든 상태가 알려졌던 물은 지구의 기원과 그 작용에 관한 초기 이론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탈레스는 지구의 제1물질로 물을 생각했고 엠페도클레스는 불·공기·흙·물을 기본 4원소로 생각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체계에서 구체화되어 17세기까지 서구 과학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4원소설). 물이 강수와 증발을 통해 순환한다는 생각은 서양과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4원소론으로, 지상의 수분이 증기와 구름으로 되었다가 다시 강수로 변하며 순환할 것이라는 정연한 이론을 완성시켰다(-> 물의 순환). 지중해에는 조수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반면, 중국 동해안은 간만의 차가 관찰과 사색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심했기 때문에 BC 2세기의 중국인들은 이미 조석과 달의 주기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또한 지하수에 대해서도 그 기원에 관해서는 학설이 분분했지만 지하수 탐색과 관리의 기술은 BC 8세기 경에 고도로 발달했다. 지하수로가 건설되었으며 로마에서는 지하수 시공방법이 기록되기도 했다. 지구과학은 고대 그리스·로마·중국·아랍에서의 고무적인 출발 이후에는 중세 암흑기를 통해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16세기초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2. 16~18세기 지구과학 1) 지질과학 16, 17세기 연금술사들의 공통된 믿음은, 금속광상은 지구중심에서 분출되는 열에 의해 생성되지만 천체에 의해 활성화된다는 것이었다. 광물과 암석은 유기체 화석과 함께 화석의 일종으로 분류되었는데, 이 분류법이 19세기까지도 통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말에는 외형에 기초한 자연사적인 분류보다 화학적 분류법이 선호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는 고생물학과 역사지질학의 기본원리가 발전했다. 네덜란드의 스테노는 시간의 흐름에 특정 지질학적 사건들을 재구성할 수 있는 세 원리를 제시했으며, 그의 영향을 받은 로버트 훅는 화석의 유기적 설명과 함께 화석이 산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질학적 현상으로 해설하기도 했다(-> 층서학). 18세기의 양대이론은 수성론과 화성론이었다. 베르너를 중심으로 한 수성론자들은 최초의 바다 밑에서 연속적으로 쌓인 화강암과 퇴적암들을 중시했지만 화산활동에 관해서는 거의 설명이 없었다. 화성론의 지도자였던 제임스 허턴은 지구를 역동적인 열기관으로 보았다. 화강암을 관입에 의한 화성암으로 보았으며 유수에 의한 침식과 퇴적, 지열에 의한 융기의 과정에서 보이는 연속순환을 제시했다. 2) 수문과학 해수가 산 위로 상승했다가 다시 흐른다는 물순환의 개념은 18세기초까지도 지속되었으나 해수가 산위로 옮겨지는 과정과 그 과정중의 염분소실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한 여러 해답이 고안되기도 했으며, 구체적으로 순환과정에 참여하는 물의 양을 알아내려는 시도도 있었다. 3) 대기과학 1760년 이후 분석화학자들은 마침내 물과 공기가 서로 변환가능한 동일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어떻게 수증기가 대기로 섞일 수 있는지, 구름상태로 어떻게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다. 17, 18세기에 걸쳐 공기상승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 계속 등장했는데, 1643년 수은기압계가 발명됨으로써 16세기 후반까지 통용되었던 무게 없는 공기의 개념이 변화했다. 18세기말에는 날씨에 따른 기압의 변화는 대기의 일반적 운동 및 순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3. 19세기 지구과학 1) 지질과학 19세기초 프랑스에서 광물학과 결정학이 과학으로 발전했다. 광물의 차이를 결정형태들의 차이로 보게 되었고, 그후 화학에 기초한 광물분류체계가 확립되었다. 편광현미경과 암석박편제작기술로 광물의 광학적 성질과 구성에 근거한 분류도 가능해졌다. 윌리엄 스미스는 "위의 지층은 아래의 지층보다 후에 퇴적된 것이고 화석도 암석의 신고(新古)에 따라 변화한다"는 동물군 천이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화석에 의한 전세계 지층을 대비하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역사상 생명형태의 연속성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화석의 연속선상에서 불연속면들이 발견되었는데, 조르주 퀴비에는 비교해부학적 방법으로 멸종화석들을 복원시켰고 멸종의 원인을 급작스런 지질학적 격변으로 돌리려 했다(격변설). 찰스 라이엘은 격변설에 대항해 지질변동의 원인은 동일하고 그 에너지 강도도 일정하기 때문에 지구는 늘 정상상태를 유지하며 유기체의 진보성도 있을 수 없다는 동일과정설을 주창했다. 그가 생명의 반진보성에 대한 시각을 포기한 후에도 그의 방법론은 암석으로부터 지질변동을 추론하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고 계속 높이 평가되어왔다. 스위스의 루이스 아가시는 빙하기에 북극에서부터 지중해까지 빙하가 전유럽을 덮었다고 주장했으며 빙하기의 증거를 제시했다(빙하학). 19세기 중반경 지층누중의 법칙과 동물군천이의 법칙을 응용해 유럽의 화석을 함유한 지층들을 시간적 순서로 분류했다. 시간의 단위를 결정하고 고생대·중생대·신생대를 구분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서부의 과학적 탐사로 유수에 의한 침식지형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연대측정). 충적과정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졌고, 융기지역이 유년기·장년기·노년기와 준평원시기를 거친다는 지질학적 순환의 개념이 제안되었다. 이 관점은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지형학적 사고를 지배했다. 지구중력의 국부적 이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구내부의 일정한 깊이에서의 정역학적 평형상태를 가정해야 하는데, 이는 지각 위의 무게가 증가한 만큼 가라앉게 되고, 무게가 감소한 만큼 상승하는 지표의 상하운동을 통해 지각의 일반적 평형이 유지된다는 지각평형설로 지칭되었다. 이에 근거해 제임스 홀은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의 연구를 통해, 산맥을 형성한 지층은 침강하는 해저의 수평퇴적분지에 쌓인 퇴적층들이라는 지향사설을 내놓았다. 2) 수문과학 1807년 미국연안조사국이 창설되어 수문학, 측지학, 조수 연구 및 해도작성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창건된 미국 해군이 더욱 광범위한 해양학적 조사를 수행했다. 대서양 횡단의 해저 전신 케이블 건설로 해저의 모양, 해저류, 해저생물의 연구가 촉진되었으며, 연이어 심해에 관한 많은 정보가 수집되었고 표층해류와 해양 도서(島嶼)들의 정확한 위치도 알려졌다. 해수의 정량분석이 이루어졌고 조석현상의 방정식이 세워졌으며 조수예측기가 고안되기도 했다. 3) 대기과학 존 돌턴은 수증기의 증발과 응결이 화학변화가 아님을 밝혔고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기체운동론에서 증발의 역학을 명확히 설명했다. 열기구의 발명으로 상공의 대기조성과 흐름도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구름의 형태가 분류되었고, 대기의 수증기가 이슬점온도 이하로 냉각되어 구름으로 응결되고 먼지와 같은 응결핵이 구름형성에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이해되었으며, 원인에 따른 안개와 강수의 분류연구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다. 폭풍, 특히 적도지방의 회전폭풍우는 많은 관심을 모은 주제였는데, 1697년에 태풍으로 기록된 이래 그 이동방향과 위력에 대한 정보가 지역마다 태풍·허리케인·사이클론으로 보고되고 명명되었다. 1830년대에 전선형성에 의한 상승기류와 수증기의 잠열로서 태풍의 에너지가 설명되었다. 근대 기상학은 분석과 예보의 수단으로 일기도가 개발되면서 출발했고, 일기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전기와 전신이었다. 미국에서는 1860년경에 이미 500군데 이상의 관측소망이 구성되어 있었다. 유럽에서는 1854년에 폭풍에 의해 큰 손실을 입게 되자 프랑스는 국가적인 폭풍경보체제를 갖추었다. 최초의 현대적 일기도가 출판되었으며 온도변화와 강수, 폭풍의 진로를 예보하는 종관기상학이 발전했다. 4. 20세기 지구과학 1) 지질과학 20세기의 지질과학은 기구의 컴퓨터화를 실현한 기술진보와 개념적 진보로서의 판구조론이라는 양대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현대의 기술진보는 특히 방사성 연대측정, 실험암석학, 결정학, 암석의 화학분석, 미고생물학, 지구내부의 지진 탐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 납이 우라늄 붕괴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사성 동위원소로 연령을 측정하는 방법이 개발되었고, 이 결과는 지구역사의 과학적 지식에 큰 충격을 주었다. 켈빈이 추정한 짧은 지구의 나이를 뒤엎고 최소한 46억 년의 역사가 입증되었는데, 이는 운석이나 월석의 측정연령과 일치하는 값이다. 반트 호프는 광물과 암석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규산염 용융체로부터 정출하는 광물에 대한 연구에 자극을 주었다(암석학). 보언이 규산염 체계의 상평형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실험암석학은 저온범위의 반트 호프 연구와 고온범위의 보언 연구에 의해 퇴적암과 화성암의 화학적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실험증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지구내부의 고온·고압 조건을 실험실에서 재현함으로써 변성광물과 암석의 변형에 관한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19세기에는 광물의 외형만을 연구했으나 막스 폰 라우에가 광물의 X선 회절에 따른 반점의 사진을 밝힘으로써 20세기에는 그 내부구조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윌리엄 브래그가 최초로 암염의 원자결정구조를 밝혀낸 후 광물의 결정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X선 분쇄회절기가 개발되어 광물학에 계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880년 그 모습을 갖추게 된 지진학은 지구의 내부구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오늘날 진원은 연약권 경계의 좁고 연속적인 띠와 해저산맥의 줄기 및 판들이 수렴해 섭입하는 베니오프대에 있음이 밝혀졌다. 1950년 이래 인공발파실험으로 지각의 두께에 관한 지식과 함께 보다 정확한 지각 아래의 구조단면도와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이후 판구조론은 지구과학의 전분야를 혁신시켰고 지질학의 다양한 현상을 함께 설명하는 통합 모델과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판구조론이란 암석권을 구성하는 거대하고 딱딱한 몇몇 판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지진활동·화산활동·산맥형성 및 기타 다양한 지구의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이며, 이것은 대륙이동설·해저확장설·판구조론의 순서로 성장했다. 1912년 독일의 알프레트 베게너는 최초의 초대륙 판게아가 갈라지고 이동해서 현재에 이르렀다는 대륙이동설을 주장했다. 그후 이 설에 대한 여러 증거가 제시되었고 1950년대에는 암석의 잔류자기를 연구하는 고지자기학이 발전되면서 대륙이동설이 공인받게 되었다. 또한 1960년대 초에는 대륙을 분리시키는 중앙해령을 따라 새로운 해양지각이 형성된다는 사실과 중앙해령 양측의 해저암석에서 지구자기의 정상 및 역전의 모양이 대칭적으로 기록된 사실이 증거로 밝혀졌다(극이동). 연이어 심해저 시추계획에 의해 해양지각의 실제연령이 추정되면서 해저확장설도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 J. 투조 윌슨은 대륙이동과 해저확장의 개념을 포괄한 판구조론을 제시했는데, 판의 분리·이동·충돌이 일어난 곳은 해령·변환단층·조산대라고 했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조산운동이 판구조론의 용어로 설명되었고 그후 다른 고기(古期) 조산대의 해석도 가능해졌다(→ 판구조론). 2) 수문과학 지구에 있는 물의 97%가 해수이며 나머지 3%의 3/4이 빙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순환의 각 단계에 관여하는 수량도 측정되었다. 또한 동위원소를 비롯한 개선된 방법이 이용되면서 지하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해수의 미량원소와 동위원소에 관한 화학분석과 해양생물의 연구로 해양원소의 양과 비율이 해양생물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오랫동안 식량과 소금의 보고였던 바다는 물과 화학물질, 광물자원 및 에너지의 원천으로 그 비중이 더욱 커져가고 있다. 현재의 해양측신도에 의해 해저면적의 약 20%가 대륙붕으로 대륙사면에는 육성쇄설성 퇴적물로 이루어진 저탁류가 계곡을 형성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해양저의 평정화산(기요)의 실체도 밝혀졌다. 20세기초에는 해류 순환의 동력학과 그 이론적 법칙이 알려졌다. 수압경도력에 의한 유체운동에 관한 취송류 이론이 완성되었으며, 대기의 바람이 일으키는 표층해류와 밀도차이에 의한 해수의 심층순환도 연구되었다. 새로운 기기로 새로운 해류가 발견되었고 인공위성은 해양의 온도분포와 에너지 출입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해수의 화학분석은 해류의 순환경로와 속도, 혼합률에 관해 밝혀주었다. 표면해파 역시 여러 파의 합성과 상호간섭으로 매우 복잡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육·해군 작전에 파고의 예보가 필수적이었던 관계로 이론과 경험적 방법을 결합시킨 예보법이 개발되기도 했다. 쓰나미(해일)나 조석의 예보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금속학과 고체물리학의 이론과 기법은 빙하의 운동에 관한 역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린란드나 남극대륙의 빙관은 중력탐사나 지진관측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고, 시추공을 뚫어 방사성동위원소 측정법과 지구화학적 분석법을 이용한 결과, 빙하층의 연대와 빙하기의 시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빙관에 대해서는 발전된 기기와 컴퓨터, 위성의 도움으로 많은 자료가 축적되었고 그 모양은 수치 모델의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3) 대기과학 대기탐색의 목적으로 19세기말에는 연돌이, 1930년대에는 무인기구로 습도·온도·기압을 전송하는 라디오존데와 항공기가, 1960년대부터는 인공위성이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상층대기에 관한 자료의 수집이 가능해졌다. 기상수치자료를 수학적 공식으로 결합시키려는 노르웨이 학자들의 노력은 측정가능한 변수를 연관시킨 방정식을 만들어냈고 그후 간단한 수열의 형태로 축약되었다. 현재는 방대하고 신속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컴퓨터의 발달로 수치예보의 분석이 가능해졌다. 19세기말에는 11km 이내 대기권에서의 온도감소비율이 알려졌고 제2차 세계대전말에는 지구를 굽이쳐도는 편서풍파동과 그 안의 강한 제트류가 발견되었으며 태풍경로의 예보를 위해 미국에서는 국립연구소가 세워지기도 했다. 1890년 인공강우실험이 시작된 이래 1940년대에 산화은을 구름의 응결핵으로 이용한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강우량 증가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는 없다. 그러나 산업화와 대도시 건물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국지적 기후변화를 일으켰다. 매년 화석연료의 연소로 배출되는 1,200억t의 이산화탄소가 지구 평균기온상승에 기여할 것이다. 도시는 바람과 도시상공의 뜨거운 대기형성 및 오염물질의 방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그로 인한 빙정핵의 과다한 발생으로 강수량과 스모그의 증가가 일어나 태양 에너지의 양을 감소시킬 것이다. |
*** 한국과학사(韓國科學史) (요약) 한국 과학에 관한 발달사. 1. 삼국시대의 한국과학사 한국에서 과학의 역사적 전개는 이 땅에 한국인의 조상이 살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록과 유물로 분명하게 남아 있는 근거에 의한 한국과학사의 서술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특히 초기로 갈수록 과학사의 자료가 될 수 있는 기록은 극히 부족하다. 예를 들면 김부식이 12세기에 완성한 <삼국사기>와 13세기 일연의 <삼국유사>의 경우 과학기술의 내용을 전해주는 기록은 극히 적다. 그렇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과학사 자료가 된다. 일식·월식·혜성 등의 천문기록이 있는가 하면, 가뭄과 홍수 등 땅 위에서 일어난 자연의 부조화도 기록해 놓았으며, 흰 노루나 유난히 큰 벼 이삭, 그리고 3쌍둥이의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자연현상의 기록만 1,000개가 실려 있다. 이들은 자연현상을 그저 과학적으로 관찰해 보고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이상한 현상에 대한 외경심, 즉 재이(災異)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동양적 기본사상에 의하면 우주는 하늘·땅·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인들은 이 삼재(三才) 중 하늘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시대부터 가장 일찍 발달한 과학분야는 천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경주에 남아 있는 첨성대이다. 그 모양, 돌을 쌓은 단(段)의 수, 쓰여진 돌의 수에 이르기까지 첨성대는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신라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신라의 수도 경주에 첨성대가 세워진 647년 전후에는 신라 천문학 발달의 모습이 단편적이지만 기록에 남아 있다. 첨성대(국보 제31호) 대나마 덕복은 당(唐)에서 천문역산학을 배우고 돌아왔고(674), 승려 도증은 천문도를 얻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며(692), 물시계를 만든 기록도 있다(718). 또 이를 관장하는 관서로 누각전을 두고 이곳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배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749). 누각전의 명칭은 물시계 담당 관서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천문역산학을 담당한 본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 어떤 천문학이 발달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자(日者) 일관(日官)이 있었고,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그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세기에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에 학문을 전한 이래 여러 차례 백제와 고구려에서 천문학·역산학·역학·의학·약학 및 그밖의 여러 가지 기술이 전해진 것이 〈니혼쇼키 日本書紀〉에 남아 있다. 특히 602년 백제의 승려 관륵(觀勒)은 일본에 역(曆)을 전하고 역법을 가르쳤는데, 이는 백제가 6세기까지는 천문역법에 대한 수준이 상당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2. 고려시대의 한국과학사 고려시대의 과학을 대표하는 분야로는 단연 지리학을 들 수 있다. 고려의 지리사상은 신라말의 승려 도선(道詵 : 827~898)에서 비롯하는데, 그것은 도참사상과 연결되어 상당부분 지금의 미신에 속하는 전개를 보였다. 그러나 하늘의 별들이 만드는 무늬를 읽어 그 뜻을 파악하려던 당시의 천문학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지리학은 사람이 살고 또는 묻혀 있는 땅의 모양을 읽어 그 인간에 대한 뜻을 읽으려던 점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과학이었다. 천문역산학은 고려초부터 상당히 발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11세기초부터 천문관측 기록이 갑자기 많아지고, 일식을 예보했으나 적중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대체로 11세기초에 고려는 독자적으로 역(曆) 계산을 하고 있었고, 천문학자 등의 과학자·기술자가 과거제도의 한 부분으로 제도화하고 이와 함께 정부의 전문 관서가 정비되어 그들 고유의 활동영역도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문학자나 지리학자의 경우 그 관서는 관상감 또는 서운관(書雲觀)으로 정착하고, 의사의 경우는 태의감(太醫監)·대비원(大悲院)·혜민국(惠民局) 등으로 정착했다. 역산학은 고려 후기 원(元)으로부터 수시력(授時曆)을 배워오는 과정을 통해 한 단계 높은 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보이고, 같은 시기에 고려 의약학은 수많은 '향약'에 관한 책들을 출간해내면서 새로운 민족의학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향약 연구의 활성화는 이 땅의 식물학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열매가 뚜렷하게 남게 된 것은 조선초 세종 때의 일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자기로 대표되는 도자기 기술과 금속활자의 발명을 바탕으로 한 인쇄기술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술의 바탕에는 그에 상당하는 과학이 발달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도자기 기술의 근거가 되는 열(熱)의 문제나 풀무 등에 대한 과학지식의 정도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용을 알기가 어렵다. 마찬가지로 금속활자나 이미 삼국시대부터 크게 발달했던 범종의 기술 뒤에 감추어진 금속에 대한 과학내용 역시 그 상세한 것을 알 방법이 없다. 겉으로 들어나지는 않지만, 이들 전통기술의 밑바닥에는 상당한 수준의 '잠재성' 과학이 깔려 있었음을 지적해둔다. 3. 조선시대의 한국과학사 전기세종 때 천문역산학의 발달은 조선 전기의 과학 발달상을 대변한다. 앞에서의 설명처럼 삼국시대의 과학을 대표하는 분야가 첨성대로 상징되는 천문학이었다면, 조선 초기의 천문학은 천문학 자체보다 역산학의 발달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특히 15세기 전반 동안 궁정에서는 세종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많은 천문역산 연구와 함께 수많은 기구들이 제작되고 밤마다 하늘을 관측했다. 이 시기의 천문기상학 연구는 간의를 비롯한 천문기구의 제작과 사용, 측우기와 수표 등, 그리고 1442년에 완성된 칠정산(七政算) 등으로 대표된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달상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는 〈농사직설 農事直說〉·〈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의방유취 醫方類聚〉·〈팔도지리지 八道地理志〉·〈총통등록 銃筒謄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기술에 관한 책이지만, 농업기술과 의약 지식, 박물학, 생물학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화기제조에 관한 기술은 여러 화학 분야의 지식을 전제한 것이며, 세종 때 발달한 인쇄기술 또한 화학 지식과 함께 물리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발달된 과학 분야 가운데 의학의 경우는 뒷날 허준에 의해 〈동의보감 東醫寶鑑〉으로 정리되었다. 후기1601년 중국 베이징에 서양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정착해 그리스도교와 함께 서양의 새로운 과학 지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그 영향은 바로 조선에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해마다 1번 이상 베이징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 지식이 전파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양 과학의 영향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이익은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서양 천문학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서양 과학의 새로운 지식을 인정했으며, 홍대용이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것도 사실은 서양 과학지식을 독창적으로 해석해 스스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서학). 18세기말부터는 박제가와 정약용 등이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일도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던 양반 지배층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에 불과했다.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기 시작한 일본과 중국에 비해 조선은 이미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국제 경쟁에서 뒤진 채 최한기 같은 극소수의 학자들은 중국에서 나온 과학기술서를 국내에 번안해 들여오고 있을 따름이었다. 중국에서의 아편전쟁과 그후의 참담한 실상, 그리고 미국에 의해 개국당한 일본의 경우는 조선의 지배층에게도 상당한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1860년대의 실권자 흥선대원군은 서양기술을 배워 서양을 물리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제대로 근대 과학기술의 습득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4. 개화기 이후 한국과학사 결국 1876년 개국과 함께 겨우 서양 과학을 배우려는 의식이 싹텄지만 국내적 혼란과 조선을 에워싼 국제 갈등의 틈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제대로 과학을 배울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지배층은 과학을 뿌리내리게 할 제도를 만들 여유를 얻지 못했다. 1883년 창간된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주로 서양 과학지식을 보도했고, 1890년대의 독립협회와 1900년대의 애국계몽운동이 모두 과학의 중요성을 구두선으로 외우고 있었지만, 막상 과학을 제대로 교육하고 보급할 기회는 전혀 얻지 못한 채 조선 왕조는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되었다. 개화기 이후 일부 지식층의 과제는 조선에도 과학을 심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일제강점기에서도 계속되어 1930년대에는 김용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과학대중화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의 문필가·언론인·법조인·교사 등이 참가해 벌인 이 운동은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정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고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내는 등, 그것은 과학기술 진흥을 통한 민족역량 향상운동이었다. 1933년 이래 이 민족운동은 일제에 의해 곧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청년 과학자 석주명(石宙明 : 1908~50)은 조선의 나비를 채집하고 분류하여 세계 학계에 소개함으로써 근대적 생물학의 시작을 보였고, 일본에서 태어난 우장춘(禹長春 : 1898~1958)은 농학을 연구해 해방 뒤에 농학개척에 한몫을 담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과학사는 실제로 8·15해방 이후에 시작된다. 1945년까지 한국인으로서 과학자로 지칭할 만한 사람은 10명 미만이었다. 게다가 1950년 6·25전쟁의 시작은 한국 근대과학의 시작을 1953년의 휴전 이후로 지연시켰다고 할 만하다. 결국 한국 근대과학의 시작은 1959년 원자력원이 실제적인 과학기술 행정 관서로 출발하고, 그에 전후해서 약 200명이나 되는 전례 없이 많은 국비 과학분야 유학생이 파견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66년 문을 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그후의 여러 과학기술 연구교육기관들은 당시 유학생들이 귀국, 활약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5. 한국과학사학사 한국인이 한국의 과학전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 과학이라는 인간활동이 어느 정도 독자적 분야로 인정되고 또 그 중요성에 눈뜨기 시작한 개화기 이후에서야 부분적이나마 한국과학사에 대해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880년대에 집필되어 1895년에 출판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西遊見聞〉에는 조선의 과학기술이 낳은 성과로 고려자기·거북선·금속활자를 들고 있다. 그는 만약 후손들이 이런 전통을 연구·발전시켰더라면 지금 세계의 영광이 조선에 돌려졌을 것이지만, 후손들이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후 애국계몽의 시대에서 일제강점기까지 한국과학사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2~3갈래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서양 선교사 등 서양 아마추어들에 의해 여러 부분의 한국 과학유물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경우였다. 부츠의 화포, 언더우드의 선박, 루퍼스의 천문학연구 등은 서울의 왕립학회 한국지부를 중심으로 발표되었다. 둘째,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호기심이나 한국의 행정 관여 속에 취미삼아 한국과학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경우였다. 인천측후소에 근무하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한국 역사에 많이 남아 있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을 주목하고, 첨성대와 측우기에 대해 간단한 논문을 쓴 경우가 이에 속한다. 셋째, 이 시대 한국인들의 활동을 들 수 있다. 학문적 접근에 미숙했던 한국인 관심자들이 제대로 구성된 논문으로 한국과학사를 다루는 일은 적었지만, 때로는 아주 강력하게 한국의 과학전통에 애착심을 보였고, 또 이를 드러냈다. 최남선이나 그밖의 조선 문화를 자랑하려던 당시의 한국인들은 대개 비슷한 경우였다. 단편적이던 한국과학사에 대한 이런 관심의 표현은 1944년 홍이섭의 〈조선과학사 朝鮮科學史〉로 정리되기에 이른다. 원래 일본어로 씌어졌던 이 책은 해방과 함께 1946년 한국어로 번역되어 정음사에서 간행되었다. 홍이섭은 백남운(白南雲)의 〈조선사회경제사 朝鮮社會經濟史〉를 인용하면서 삼국시대를 노예제사회라 설명하고 고려 이후를 봉건사회라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사회경제적 입장이 그의 과학기술사 서술에 그리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공헌은 주로 사료의 시대별 발굴과 정리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 나온 대표적 한국과학사의 저작으로는 전상운의 〈한국과학기술사 韓國科學技術史〉(1966)와 이를 보충해서 출판한 같은 이름의 책(1975)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그후 일본어 번역판이 나왔고, 1974년에는 미국에서 영어판이 나오기도 해 한국과학사의 국제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런데 홍이섭과는 대조적으로 전상운은 시대구분 없이 한국의 과학기술 전통을 몇 가지 영역으로 구분해 기술하고 있다. 역사적 개관보다는 과학기술의 유물 등을 소개하는 데 강점이 있다. 그 대신 전상운은 문고판으로 〈한국의 과학사〉(1977)를 출판해 그의 저술을 시대별로 요약, 재구성해냈다. 1982년 출간된 박성래의 〈한국과학사 韓國科學史〉는 첨성대, 세종대의 과학, 실학 속의 과학 등 한국과학사의 중요한 주제 10여 가지를 다루고 있다. 1982년 출간된 전병기 편저의 〈한국과학사〉도 홍이섭·전상운의 저서와 〈한국문화사대계 Ⅲ : 과학기술사편〉(1968)을 엮어낸 것이다. 이 책에는 농업기술·어업기술·생물학·체신·천문기상·지리·의학·조선·인쇄·수학 등이 들어 있어 한국과학사의 분야별 서술을 함께 모은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1977년 출판된 〈한국현대문화사대계 Ⅲ : 과학기술사편〉에는 과학교육·수학·물리학 등 모두 21개 분야에 결친 현대 과학기술사가 기술되어 있는데 주로 최근의 각 분야 전개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밖의 분야별 업적으로는 의학의 김두종과 삼목영, 조선의 김재근, 수학의 김용운, 천문학의 이은성과 유경로, 도량형의 박흥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과학사 연구는 아직도 아마추어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의 경우 과학기술을 대단히 중시해서 역사연구소의 〈조선문화사〉(1977)는 모든 장을 과학기술에 대한 서술로 시작해 미술·문학·음악·무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처럼 과학기술을 중시하면서도 실제로 과학기술사 연구에서 뚜렷한 학문적 성과를 낸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
*** 화학사(history of Chemisty) * 요약 : 화학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 화학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성질 및 그 반응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시시대부터 물질의 변화는 인간의 관심 대상이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며 야금기술이 발전하였고 고대문명에는 실용화학이 존재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자연현상을 단순화하여 순수한 물질의 현상으로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으며 막을 내린 그리스 고전시대 이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최초의 연금술이 탄생하였다. 이때부터 아리비아의 황금시대는 시작되었고 발전된 연금술은 서유럽으로 건너갔다. 서유럽으로 도입된 연금술은 르네상스 초기에 과학이 부흥하면서 한층 더 발전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화학은 과학으로 점차 인정받게 되었고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18세기에는 기체에 대한 연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근대화학의 아버지인 라부아지에는 화학 명명법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유기, 무기 화학 분야에서 발전해 오던 화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물리학의 발달과 함께 물리화학이 확립되었다. 20세기 초에는 생화학이 화학의 한 분야로 인정받았다. 1. 과학 이전의 실용화학 화학이 과학으로서 인정받게 된 것은 16세기였지만, 화학의 주요문제는 이미 원시시대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초기의 인간들은 물질의 변화에 주목하여 물질의 자연적 변화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바가 있음을 알았다. 불의 발견에 이어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도구를 연구했다. 또한 원시시대에도 금속의 이용은 매우 중요해 구리·청동·철기의 각 시대에 야금기술이 발전했으며,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고대문명에서는 이미 고도의 실용화학이 존재했었다. 물론 그들의 기술은 화학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들은 금속·염료·향료·약품을 다루는 노동자에 불과했으며, 사원에서 일하기도 했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값싼 모조품이나 숙녀나 귀족을 위해 사치스런 물건을 만들었다. 제조방법은 대부분 상업상의 비밀로 다루어져 대대로 전수되었으며 향료의 제조기술과 금·은 등 여러 금속의 분석기술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고고학상의 발굴물 가운데 발견되는 장치의 일부분이나 유적에서 발굴된 화학물질의 분석결과를 종합해보면, 고대인이 이용한 많은 기술이 밝혀진다. 그들이 사용한 증류·온침(溫浸)·추출법 중에는 나중에 연금술사나 화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이나 착상을 발전시키는 토대가 된 것이 많다. 이들 고대문명에서 화학은 본래 실용적인 것이었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은 대부분 신화적·마술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념 중 어떤 것은 후세의 보다 합리적인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세계는 남과 여, 온(溫)과 냉(冷), 습(濕)과 건(乾) 등의 많은 대립물로 성립된다는 메소포타미아인의 사상을 계승했다. 즉 태양·달·별 등 커다란 세계의 사상(事象)인 대우주는 소우주, 즉 작은 인간세계의 사상과 유사하다는 생각도 중요한 것이었다. 이 생각은 원래 점성술에서 나온 것인데, 많은 그리스 사상가들의 생물학적 편향과 잘 맞아 여러 화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2. 그리스의 고전학자 (개요) 그리스인은 고대문명의 사상과 기술을 이오니아의 밀레토스를 통해서 습득했으며, BC 6세기 이오니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이를 계통화했다.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우주론자로서, 모든 자연작용을 극히 단순화하여 논리적, 즉 순수한 물질의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하나의 기본물질을 찾아내면 그 변화에 의해 모든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장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상태의 변화였다. 물질은 고체·액체·기체의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들 상태는 흙·물·공기에 해당하며 각 상태간의 변화는 열(불)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기본물질을 이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이 물질을 물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일정하지 않은 덩어리로부터 물질이 만들어진다고 상상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을 기본물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이 가운데 어떤 물질이라도 적당한 조건에서 다른 물질로 변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는 사상을 제창했으며, 대립물의 결합이 실제 물질을 만든다는 고전적인 개념으로 이 사상을 확대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이들 사상을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시켜 모든 물질은 종(種)이라고 하는 불멸불생의 무한하고 작은 입자로 이루어지며, 이들의 혼합과 분리에 의해 운동과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사상을 일반화하여 무한한 종을 흙·공기·물·불의 4원자로 줄였다. 이 사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여 2,000년 동안 과학사상의 주류가 된 4원소설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설은 레우키포스와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되었다. 특히 데모크리토스는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의 속도에 대해 고찰했는데, 4종류 원자의 여러 형태로 원소의 다양한 성질을 해석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설은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의 기초가 되어 후세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신비주의적인 색채가 짙었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소크라테스와 특히 플라톤의 지도하에 있던 그리스 철학사상 속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 철학자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1) 플라톤 플라톤은 본래 물리학설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철학자로서 세계의 본질을 밝혀내고자 했으며 〈대화편 Timaeos〉에서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다. 플라톤이 생각한 우주 체계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개연적'인 것이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토스의 4원소를 받아들였는데 그가 말한 원자는 기하학적 추상 개념이었다. 즉 불은 그 날카로운 끝부분이 관통력을 갖는 4면체, 흙은 입방체, 물은 24면체, 공기는 8면체라고 했다. 이 형태들의 경계면을 다시 배열하면 원자는 서로 변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의 상호 변환성이라는 개념은 후세의 연금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2)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추상적인 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더욱 현실에 가까워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분야의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그는 원래 과학자로서 생물학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물질의 조성과 변화에 대한 그의 설명은 17세기까지의 과학사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오니아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본물질을 가정했는데, 물질의 여러 가지 상태를 상정하고, 실재하는 물질들간의 차이를 기본물질에 상정된 여러 가지 형태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든 실재하는 물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선대의 과학자들보다도 훨씬 구체적인 구상을 펼쳤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시한 대립사상에 주목하여 온·냉·습·건의 4가지 속성을 상정했으며, 그것들이 결합해 물리 세계의 원자를 만든다고 가정했다. 온과 냉, 습과 건은 서로 상쇄하므로 결합하지 않지만 온과 건은 결합해 불의 원자를, 온과 습은 공기의 원자를, 냉과 습은 물의 원자를, 냉과 건은 흙의 원자를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본물질에 여러 가지 속성의 변화를 상정하면 물질은 변화를 낳고, 속성의 변화가 형태의 변화를 낳는다고 생각했다. 4원자를 조합시키면 제2의 변화가 일어나 돌[石]·피[血]·살[肉]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을 만들며, 나아가 이들을 조합시키면 얼굴·손 등을 만드는 제3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현상과 생물현상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해석했다. 3. 연금술의 출현 1) 알렉산드리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으로 그리스 철학의 고전시대는 끝나고, 과학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당시 사원은 위대한 연구소였는데, 이곳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과학이 개화하고, 그밖의 여러 요인과 결합해 화학은 급속히 진보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많은 문화가 교류한 장소였다. 그무렵까지 그리스 철학은 대단히 추상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몇 백 년에 걸쳐 고도로 발전해온 실제적인 오리엔트의 기술과 만나 오리엔트적 신비종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성행했다. 그결과 그리스 철학, 오리엔트의 기술, 오리엔트의 종교적 신비주의로부터 최초의 연금술이 탄생했다. 초기의 연금술사는 장인에 불과했으나 철학적 이론을 기초로 기술과정의 성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철학자들에게 자극을 받았다. 그들은 철학자의 물질 상호 변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가난한 고객을 위해 만들었던 금 모조품이 진짜 금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들은 금속을 변화시켜 겉보기에 금과 비슷한 것을 만드는 동안 조작과 시약의 조제를 통해 참된 화학을 익혔다. 알렉산드리아의 연금술사들은 화학장치를 대폭 개량하고 무기물질에 관한 많은 새로운 반응을 익혔다. 그러나 오리엔트의 종교로부터 연금술사상에 흘러 들어와 있던 신비사상이 알렉산드리아의 연금술에서 지배적 사상이 되고, 금의 완성은 인간 정신의 완성을 상징하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험실에서의 실제적인 작업의 흥미는 쇠퇴해 화학상의 발견은 4~5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거의 종식되었다. 2) 아라비아의 황금시대 이 시기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종교논쟁으로 정교회에서 네스토리우스 교단이 분리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교도는 소아시아로 쫓겨나 그곳에서 많은 중요한 학파를 확립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법을 가르쳤다. 그들은 대부분의 그리스어 서적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여 서유럽이 암흑기에 있었을 때도 많은 귀중한 그리스 문헌을 보존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또 신흥 아라비아 제국과 접촉해 바그다드의 지식인인 칼리프(마호메트의 후계자)의 장려로 그리스 저서들을 다시 아라비아어로 번역했다. 8~11세기에 많은 의사와 연금술사는 실제적인 실험실 작업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자연법칙을 계승해 화학 변화와 아리스토텔레스의 4가지 속성을 조합시켜 원소들을 설명했으며, 이를 약간 수정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소가 제2의 대립물인 황과 수은을 형성한다고 가정했다. 당시에 황과 수은은 금속을 구성하는 물질이라고 생각했는데, 황과 수은은 물리적 물질이 아니라 토성(土性)과 연소성(황), 광택과 유동성(수은)의 속성을 의미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계통의 사상은 존재의 개념으로 바뀌고, 실체가 없는 '요소'는 유형물질에 존재하는 물리적 성질을 부여하게 되었다. 아비체나, 라지 등 아라비아의 의사와 화학자들은 가성 알칼리, 염화암모늄을 비롯해 많은 중요한 물질을 도입했다. 3) 서유럽으로의 도입 11세기 이후 아라비아의 연금술은 이전의 그리스인의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성격을 잃기 시작했다. 한편 당시 서유럽 사람들은 일찍이 로마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오랜 동안의 과학적 암흑기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아라비아 과학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있었다. 스페인과 시칠리아 섬에도 학교가 설립되어 고대 아라비아의 사본이 번역되었다. 그 대부분은 그리스어로부터 고대 시리아어를 거쳐온 것이었다. 그당시에 많은 연금술 사본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과학 저작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저작들은 서유럽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연금술의 실용화가 성행했다. 연금술은 중세를 통해 실용기술로 자리잡은 금속 공작기술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장인들은 실제적인 관찰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밝혀냈지만 그당시에도 금속의 조성으로 황-수은설을 취하고 있었다. 게베르가 쓴 책에는 연금술에 대한 새로운 지침이 요약되어 있는데, 1310년경의 저작은 당시 실험실 작업이 기술적으로 상당히 진보했음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금속 분석실험 방법과 시약 조제, 정제 방법 등의 내용이 아주 정확히 기술되어 있다. 당시에는 또한 알코올의 증류 등 증류기술이 상당히 진보해 있었다. 4) 실용적 연금술의 지배 르네상스 초기에 과학이 부흥함으로써 연금술도 한층 발전했다. 16세기에는 H. 브런츠윅의 증류에 관한 저서와 V. 비링구초, G. 아그리콜라, L. 에커의 채광 연금술에 관한 명저들이 나왔다. 이 출판물에는 새로운 금속과 그 화합물들이 기재되어 있다. 의학에 있어서는 P. A. 파라켈수스가 화학요법을 이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의학에 화학요법을 도입하는 시도로 의약화학 학교를 설립해 약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미 방대해진 새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 학설의 틀 속에서는 적합하지 않게 되어 완전히 새로운 이론이 요구되었다. 당시 파라켈수스는 금속 조성에 관한 황-수은설을 수정하고 금속의 제3성분으로서 소금을 덧붙였다. 그는 이것을 금속의 안정성[土性]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황은 단순히 연소성의 요소에 불과하게 되었고, 수은은 여전히 금속성 광택과 유동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파라켈수스의 이 주장은 '3원소설'로 알려지게 되었다. 4. 1597~1700년의 화학 발전 (개요) 이 시기의 화학은 과학으로서 점차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 화학의 방식은 최초의 화학교과서로서 자주 언급되는 A. 리바비우스의 〈연금술 Alchymia〉(1597)에 논술되어 있다. 그는 "알케미(화학)는 마지스테리스(시약과 그 사용법)를 만들어 혼합물에서 주요부분을 분리해 순수한 물질을 추출하는 기술이다" 라고 주장했다. 17세기에 화학은 급속히 발전해 산·염기·염 등이 연구되었고, 천칭을 사용함으로써 반응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의약화학자는 새로운 화학요법을 발전시키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프랑스에는 약학자가 많이 나왔는데 C. 글라제르와 N. 레메리는 화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또한 동·식물성 물질을 증류하고 많은 약제를 조제하여 증류에 의해 휘발성 액체, 가연성 기름, 무거운 액체, 수용성 물질 및 고체 잔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증류가 물질을 '기본성분'으로 분해한다는 것을 확신한 그들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5원소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에 활동했던 화학자들은 각각 1~5개의 기본원소가 존재한다고 믿는 학설을 고수했다. 1) 신구사상 이 시기 화학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천문학설과 물리학설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파의 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De rerum natura〉 속에 씌어 있는 고대 그리스의 원자설이 여러 형태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부흥하는 데는 피에르 가생디와 데카르트가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보일은 이들 사상을 화학에 적용했는데, 그는 '입자설'에서 화학으로부터 모든 신비적인 영향을 배제하고 오로지 물리학적 방법에 기초해 화학반응의 해석을 시도했다. 그는 〈회의적인 화학자 The Sceptical Chymist〉(1661)에서 4원소설을 제창한 아리스토텔레스 학설과 파라켈수스의 3원소설, 그리고 증류에 의해 물질의 기본원소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그가 내린 원소에 관한 정의는 근대적인 성격도 갖고 있었다. 그는 연구실에서 화학에 관해 많은 사실과 현상들을 발견했다. 보일은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후에 그 사상에 의해 화학이 크게 진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일이 활동했던 거의 같은 시기에 3원소설은 새로운 중요한 형태를 취했다. 독일에서는 J. J. 베커가 파라켈수스의 3원소의 이름을 유리 형상의 흙, 유성의 흙, 액체 형상의 흙으로 바꾸어 불렀다. 이들은 물질에 가연성과 금속광택을 갖게 하는 조밀성을 부여한다. 이 시기에 주목할 점은 물질 성분으로서 공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 이미 모든 화학자에게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공기를 항상 존재하지만 물리적 작용체로서 움직일 뿐 반응하지 않는 액체라고 생각했다. 벨기에의 물리학자이며 화학자인 J. B. 반 헬몬트는 17세기 중엽 이산화탄소를 발견해 '가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마저도 이 기체가 물리적인 성질 외에 다른 어떠한 성질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또한 베허는 물질의 유일한 성분으로서 고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2) 플로지스톤설(연소설) 베허의 제자인 게오르크 에른스트 슈탈은 베허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스승이 말한 유성의 흙을 '플로지스톤'(연소)이라 하고 이에 기초해 처음으로 화학을 총정리했다. 플로지스톤은 연소의 요소이고 물체의 연소는 플로지스톤을 소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불꽃을 바라보면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해왔다. 이 생각은 연소체가 유기물인 경우에는 미량의 재만 남음으로써 이치에 잘 맞았다. 슈탈은 금속이 녹스는 것도 연소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주로 금속에 적용했다. 금속은 금속재(산화물)로 전환되어 플로지스톤을 잃는다고 믿었다. 따라서 금속재는 간단한 물체이며 금속은 금속재와 플로지스톤으로 된 화합물이라고 생각했고, 공기는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단지 플로지스톤이 떨어질 때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플로지스톤은 현재 인정되고 있는 산화·환원과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지만, 당시에는 현재 산화·환원으로 설명하는 대부분의 반응을 이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플로지스톤설에서 큰 장해인 금속재가 원래 금속보다 무겁다는 사실이 슈탈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플로지스톤이 실체가 없는 요소(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학이 발달하고 화학자들이 더욱 빈번하게 정량적인 수단을 적용함에 따라 이같은 견해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중에 플로지스톤 신봉자에게 있어서 플로지스톤은 실험실에서 다루는 다른 물질과 같은 것이 되었고 반응에 관여하는 물질의 질량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헛된 연구가 이루어졌다. 때로는 플로지스톤이 마이너스 질량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 화학자도 있었고, 수소가 발견되었을 때 이것을 플로지스톤이라고 생각한 화학자도 있었다. 3) 연소의 이해 18세기에는 잇달은 화학적 발견으로 연소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연소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식물학자 스티븐 헤일스는 대부분의 물질은 가열하면 공기를 방출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공기를 모으기 위한 용기를 고안했다. 네덜란드의 화학교사인 H. 브루하베는 대기가 화학반응에 관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실을 실증한 사람은 J. 블랙으로 1756년 산화칼슘이 이산화탄소를 흡입하면 탄산칼슘을 만들고 탄산칼슘을 가열하면 그 반대과정이 일어남을 증명했다. 고체 중에 기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상은 아주 새로운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산화탄소를 '고정공기'라고 불렀다. 많은 화학자들이 열심히 그의 연구를 계승해 많은 새로운 기체를 발견했다. 이같은 연구는 K. W. 셸레(1772)와 J. 프리스틀리(1774)가 거의 동시에 산소를 발견했을 무렵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플로지스톤설을 타도하고 연소의 본질을 확립한 사람은 근대화학의 아버지인 A. L. 라부아지에이다. 라부아지에는 주석·납·인·황이 산화 또는 환원 반응을 일으킬 때의 무게 변화를 정량적으로 연구해 산소가 이 모든 반응에 관여하고 있음을 밝혔다. 이리하여 그는 반응과정의 실제 조직을 이해하게 되었고, 연소 또는 금속과 그 산화물의 조성에 관해서 명확히 설명했다. 따라서 황-수은설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라부아지에의 원소에 관한 정의는 근대적이며 그 정의에 따라 오랜 동안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원소의 갯수에 관한 생각이 통합되었다. 라부아지에는 또한 몇몇 화학자들과 함께 화학 명명법의 근대적 체계를 확립했으며 동물의 호흡작용이 산화의 특수 형태임을 증명해보였다. 그는 호흡작용의 연구로 진정한 의미의 생화학 실험을 행한 과학자이다. 프리스틀리 등의 여러 고전 화학자들은 플로지스톤설을 완강히 고수하려고 했으나 급속히 그 근거를 잃어 1800년경에는 라부아지에의 산소설이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5. 19세기 화학조성 연구 (개요) 18세기에 정량적인 방법이 보급되어 다수의 광물이 분석되고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었다. 친화력 문제에 특히 주의가 집중되었는데, 친화력이란 화합물을 결합시키는 힘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원소 집단의 친화력은 화합물 속에 있는 어느 원소와 다른 원소의 치환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T. 베르크만은 상대적 친화력표를 작성했는데 그 힘의 본성에 대해 만족할 만큼 설명하지는 못했다. 1808년에는 화합물은 고정된 조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졌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 돌턴은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화학적인 원자설을 내놓았다. 그는 각 원소는 특유의 크기와 무게를 지닌 고유한 형태의 원자로 성립된다고 가정하고 원자량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돌턴은 진정한 원자량과 화합물의 원자수를 산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화합물의 조성이 일정한 것은 그 속에 일정한 수의 원자가 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그는 여러 엄밀한 가정을 세웠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그의 법칙의 보편성이 큰 제약을 받았다. 이 제약의 대부분은 게이뤼삭의 기체 결합비에 대한 연구로 제거되었다. 그는 원소가 당량 단위로 서로 결합한다고 증명했지만, 원자와 분자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자량과 분자량의 차이도 알지 못했다. 1811년 아보가드로가 기체의 부피가 일정하다면 그 안에 포함된 분자의 수도 같고 이에 따라 원자와 분자를 구별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50년 동안이나 무시되었다. 스웨덴의 위대한 화학자 J. J. 베르셀리우스는 많은 광물에 관한 분석연구로 원자량과 비열과의 곱은 일정하다는 뒤롱-프티 법칙에 기초해 거의 정확한 원자량표를 작성했다. 베르셀리우스는 촉매와 화학 이성(異性)현상을 기술, 명명하고 화학기호를 근대적으로 체계화하는 등 화학이론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의 주된 이론적 공헌은 원자결합에 관한 양성설(兩性說), 즉 전기화학이론으로 이 이론에 의하여 친화력의 본질에 관한 종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새로 발견된 전기분해과정과 볼타 전지의 전극에서 기체와 금속이 분리되는 과정에 강한 흥미를 가졌다. 베르셀리우스는 모든 원자는 '+'와 '-'의 2가지 전하를 띠고 있으나 어떤 것은 '+'가, 다른 것은 '-'가 우세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전하를 띤 원자는 정전기력에 의해 '+'전하를 띤 원자와 결합한다고 생각했다. 이 화학친화력의 법칙은 무기염류에는 잘 맞았다. 무기염류는 그 시대에 가장 많이 연구된 물질이며, 그의 학설은 화학자들 사이에 널리 인정되었다. 19세기 전반 유기화학을 연구하여 수많은 탄소화합물이 밝혀짐에 따라 양성설의 불충분함이 밝혀졌다. 특히 유기화합물 속의 수소가 염소와 같은 원소로 치환되는 것은 베르셀리우스의 설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염소 원자는 수소와 반대의 전하를 띠고 있기 때문에 정전기력에 의해 결합하는 화합물과 같이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기화학자들은 관능기(반응할 때 작용하는 원자집단)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들 기가 간단한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속에서 결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원소와 결합하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화학식을 쓰는 경우 분자량·원자량·당량을 일치시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혼란이 가중되어 한때는 아세트산에 대해 여러 개의 다른 화학식을 제시하기도 했다. 1) 유기화합물(1858~1900) 1858년 F. 케쿨레와 A. S. 쿠퍼는 탄소 원자는 4가로 다른 탄소 원자와 결합해 긴 사슬을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구조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1860년대에 A. M. 부틀레로프가 발전시켰다. 1865년 케쿨레는 방향족 화합물의 성질이 환상 구조에 기인한다고 해명했다. 유기화합물의 구조를 알게 되자 표면적인 화학식을 3차원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논리에 맞게 되었다. 반트 호프와 J. A. 르 벨은 1874년 동시에 4면체 탄소 원자를 가정했으며, 이로써 입체화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사상에 의해 유기화합물의 명확하지 않은 많은 성질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후 30년에 걸쳐 많은 연구자들이 이 사상을 발전시켰다. 19세기말 A. 베르너는 백금 또는 그와 유사한 금속 무기착화물에 입체화학을 적용해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많은 화합물의 성질을 다시 설명했다. 2) 원자량과 주기율 1860년 독일의 카를스루에에서 최초의 국제화학회의가 개최되어 화학법칙, 특히 원자량에 관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의에서는 이탈리아 화학자 S. 칸니차로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부활시켜 원자와 분자를 서로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생각은 즉시 받아들여져 원자량과 분자량이 인식되었다. 이로써 원자량으로 원소의 성질을 분류하려고 했던 초기의 시험적 연구가 완성되었다. 1869~71년에 D. I. 멘델레예프와 L. 마이어가 각각 주기율표에 관해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했다. 멘델레예프는 자신이 작성한 주기율표에 기초해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3개의 원소(갈륨·스칸듐·게르마늄)의 존재와 성질을 예상했다. 이들 원소가 발견되고 그 성질이 멘델레예프의 예상과 일치했을 때 주기율이 승인되었다. 6. 물리화학의 확립 1875년까지 화학은 주로 무기·유기 분야에서 발전했다. 물리학은 화학과 함께 급속히 진보했으나 두 분야 사이에 접촉이 적었으며, 물리학자와 화학자 사이에는 간혹 대립의식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관련분야에서는 빠른 발전을 이루어 친화력과 반응속도의 연구를 하던 화학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해 물리화학이 과학으로 확립되었다. 1850년 L. 빌헬미는 저당의 가수분해 속도를 방정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것은 수식을 사용해 화학과정을 나타낸 최초의 예이다. 빌헬미의 연구에 이어 평형이 따르는 화학반응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1863년에는 C. M. 굴베르그와 P. 보게가 질량작용의 법칙을 정식화했다. 이 법칙에 따라 반응계에 포함되는 반응물의 농도로 가역반응의 진행방향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법칙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 밝혀져 화학자들은 원자를 운동성의 면에서 생각하고 그같은 견지에서 화학반응 기구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와 거의 같은 무렵에는 물리학자들이 S. 카르노 시대로부터 발전시킨 열역학적인 사고가 화학분야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G. H. 헤스, P. E. 베르텔로, J. 톰슨 등의 반응열 연구에 의해 그 길이 열렸다. 1869년 A. F. 호르스트만은 최초로 엔트로피의 원리를 화학에 적용했다. 1876~78년에 J. W. 깁스는 여러 상평형과 상률 취급에 수학적 기초를 도입했다. 1800년 볼트 전지가 발명된 이후 전기분해로 금속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화학자들은 용액의 전기전도도를 연구하던 중 염이 용해상태에서는 예상하지 않은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F. 콜라우슈와 J. W. 히토르프의 연구에 의해 전기장 내에서 염은 전하를 가진 이온으로 나뉜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1884년에 S. 아레니우스가 발표한 전리설에서 이온은 전기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항상 용액 중에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용액 이론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들 모든 연구는 화합물의 물리적 성질과 작용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W. 오스트발트에 의해 처음으로 조직화되었다. 오스트발트는 물리화학의 총괄적인 교과서를 썼으며(1885~88), 반트호프와 아레니우스의 도움을 받아 1887년에 이 분야의 전문잡지를 만들었다. 이후 물리화학은 화학의 한 전문분야가 되었다. 7. 1895년 이후 화학의 발전 화학의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결과, 19세기말에는 원소와 화합물의 작용을 각 원자의 성질에 따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유기화학자는 원자는 정4면체를 이루며 원자가 결합은 그 구석에 돌출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리화학자는 원자를 모든 방향으로 튀어나온 구이며 때로는 전하를 띠고 그것이 성질과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발트 같은 지도적인 화학자 중에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원자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원자 내 구조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화학자는 없었다. 이당시 물리학자들이 행했던 원자구조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ㄹ방사능의 발견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분야가 열려 원자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희박 가스 중의 방전에 의해 생기는 방사선 성질을 연구해왔다. 방사선에서 음극선의 경우에는 '-', 양극선의 경우에는 '+'하전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명한 학자도 있었다. 아레니우스가 이온설을 발표한 후 음극선과 양극선은 당연하게 입자로 구성되고 그 성질은 이온성을 나타낸다고 가정했다. 음극선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 1897년 J. J. 톰슨은 전자를 발견했으며, 1911년에 R. A. 밀리컨은 그 전하를 결정했다. 전자는 어느 원소로부터 얻어졌든지 간에 같으며 '-'전기 단위라고 생각했다. 톰슨(Joseph John Thomson)영국의 물리학자이며, 전자와 동위원소를 발견하였고 질량 분석계를 발명하였다. 양극선은 여러 종류의 원소 이온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원자는 전자와 이온으로 구성되며 베르셀리우스의 양성설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를 가졌다. 또한 1896년 A. H.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한 후 퀴리 부부의 우라늄광의 광범위한 연구에 따라 화학자들은 이들에 대한 연구에도 힘써 19세기말까지 폴로늄과 라듐이 발견되었다. 20세기초 E. 러더퍼드와 그 제자들은 방사성 붕괴 중에 새로운 원소가 생기며 그 과정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에는 헬륨 이온, 전자, X선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 발견을 기초로 F. 소디는 방사성 붕괴구조와 경로를 연구했다. 그는 화학적 성질이 동일하며 질량수가 다른 원소가 존재함을 밝히고 이들을 동위체라고 명명했다. T. W. 리처드와 O. 페니히슈미트는 동위체가 실제로 존재함을 화학적으로 증명했다. 그들은 다른 방사선원으로부터 얻은 납 시료를 고전적인 정량방법으로 조사해도 다른 원자량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냈다. 1919년에 F. W. 애스턴이 고안한 질량분석기에 의해 거의 모든 원소에 동위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1913년 H. G. J. 모즐리는 X선 분광사진에 기초해 각 원소는 원자핵의 '+'전하를 나타내는 고유의 원자번호를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번호는 주기율표의 원소 위치와 일치하며 이론적으로 훨씬 정확한 것이었다. 이들 모든 발견은 20세기초의 15년간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학자는 그 이론을 기초부터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자 내 구조의 친화력과 원자가의 문제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1916~20년 G. N. 루이스, W. 코셀, I. 랭뮤어 등은 새로운 사고를 화학결합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 베르셀리우스의 오래된 양성설이 아레니우스의 전리설에 따라 수정되었듯이 다시 유기화학자의 친화력 단위의 개념과 조화되도록 바뀌었다. 태양계의 형태를 한 원자모형은 1913~14년에 닐스 보어가 제기했다. 원자는 중심의 무거운 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원자의 결합력이 가장 바깥쪽 전자수에 의존한다는 것을 근거로 생각해보면 이 설명과 상당히 일치했다. C. K. 인골드 등은 복잡한 유기화합물 중의 전자 위치와 그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알아냈다. 이들의 초기 연구는 전자구조론적으로 유기반응 구조를 설명하려 한 많은 화학자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양자론에 따라 원자가 결합은 수학적으로 논의되어 공명 개념이 도출되었다. L. 폴링이 달성한 이 분야 연구는 화학결합력의 성질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리학자는 원자구조 연구에 유효한 사이클로트론 등의 기기를 개발했다. 이들 기기에 의해 화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를 발견해 주기율표의 빈 곳을 채웠고, 또한 가장 무거운 원소라고 알려졌던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원소도 얻었다. 1930년대 후기에 원자핵분열을 통해 새로운 원소수가 늘어나 안정한 방사성 동위원소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들 새 물질이 일반에 이용됨에 따라 방사성 동위원소는 화학과 생물 반응경로를 추적하는, 이른바 추적자(tracer)로 응용되는 등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다. 8. 생화학의 발전 생화학은 20세기초에 화학의 한 전문분야로서 인정받았다. 라부아지에 시대부터 생리학자는 생물현상을 해명하는 데 화학적 방법과 사고방식을 이용해왔다. J. 리비히는 1840년경 많은 농업문제를 연구했으며, 19세기 후반 L. 파스퇴르, W. 퀴네 등은 산소의 작용에 대해 연구했다. 1897년에는 E. 부흐너가 산소는 생세포와 관계없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화학물질일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생체조직의 화학에는 그러한 진보가 없었다. 1890~1910년에 비로소 E. 피셔의 지도하에 눈부신 연구가 이루어져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같은 중요한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의 기본적인 화학구조가 밝혀졌다. 1910년 이후에는 이같은 연구가 보급되어 생화학의 새로운 전문분야가 화학의 오래 된 분야와 맞서게 되어 그 자리를 넘겨 받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화학의 모든 분야의 방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생화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결과 1930년대에는 비타민과 호르몬의 화학적 성질에 관한 지식이 급속히 증대했다. 에너지 대사작용 연구에 따라 생세포 가운데 탄수화물 대사작용이 복잡하다는 것과 동식물 체내에서 인산에스테르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들 지식을 응용해 광합성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개개 단백질의 분리와 연구가 급속히 이루어져 이들 필수불가결한 화합물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이론이 등장할 것으로 전망되며, 핵단백질 연구는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