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나면 추워지는게 순서다. 간밤엔 22도가 되더니 다시 23도다. 뽁뽀기며 은박 봉지며 이불 호청까지 최선을 다해서 창문을 가려도 소용없는 헛수고인가보다. 하긴 절기가 그런걸 나의 허접한 노력으로 어떤 결과가 성취되길 기대한다는 것 부터가 어리섞음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짓도 안하고 가스값 폭탄을 기다리고 있을수는 없지 않는가. 보일라 희망 온도도 18도로 낮추어 놓았다. 딸이 온다니까 딸이오면 새로 구입한 뽁뽁이를 창문에 본격적으로 가림막을 치고나면 난방준비는 끝인데, 글쎄 효과는 어떨까 싶다. 겨울 가스값 폭탄이 뽁뽀기로 해결될거라면 누가 걱정을 하겠는가. 그게 아니니 문제다. TV에서 어떤 프로그렘에서 보았는데 방안 구돌이 탈 정도였고 이불속 온도가 68도라고 했다. 그리고 선풍기 십수대가 돌고 있었다. 물론 정신질환자 일수도 있지만 내가 걱정한 것은 가스값이었다. 냉골에 패딩을 입고 지내면서도 10만원에 육박한 요금에 경기를 이르킬 지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집엔 가스요금이 얼마나 나올가? 생활보호 대상자라도 되어서 가스값을 면제받는 사람이어서 이런 만용을 부릴수가 있는 것인가? 남의 걱정을 왜 내가 이렇게 골돌하게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 선의는 아닌것 같지만,,,.
도서관엘 갈까 말까 한다. 안읽은 책이 있는데, 미루고 싶기도하고 포기하고 싶기도 하고,,, 말장난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책을 선택하는게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한다는 표현을 들었다. 정말일까? 내가 성경을 읽는게 아니고, 성경이 나를 읽는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그럴수도 있어? 하며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두렵고 떨리는 기분도 들었다.내가 읽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게 성경이다. 어쩌면 성경이 내게 이해할수 있도록, 나를 해아리고 있는다게 맞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적이 있기때문지도 모르겠다. 소름이다. 성경이 나를 부르고 있는데도 나는 언제까지 소설책에 머물고 있는지 ,,, 즐기고 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할수있는 일은 소설읽는것 말고는 없는것도 사실이다. 사실 나는 가끔 내 한끼 식사값을 계산해보곤 한다. 아침으로는 식빵 한쪽에 달걀하나, 그리고 믹스커피 한잔, 점심으로는 냉동해놓은 밥 삼분의 일공기쯤에 돼지고기와 김치를 넣고 볶은것 적당량과 배추김치, 저녁엔 좀 다양하다. 국수일때도, 라면일때도, 떡이나 빵, 냉장고 안에 있는것 아무거나다. 어제는 호빵하나와 묵 삼분의 일이었다. 간식도 있다. 과자나 과일이나 뭐 다양하다. 돈을 주고 직접 구매하는 경우보다는 딸이 가저다 주거나 아들집에서 집어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정도면 빈약한가. 약소한가. 배곺으게 먹는것은 아니다. 좀 적게 먹으려고 마음먹어보기는 했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더라. 첫째는 밤에 잠이 안온다. 결국엔 늦게라도 먹어야 했으니까. 지금 나는 어떤가 하고 살펴보면, 외로운 것도 맞다.누군가 소식이 없으면 조금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 혹 아픈것은 아닌지, 가버린것은 아닌지, 가버렸다면 축하해야할 일이긴 하다. 다들 언제가도 좋을만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질병으로 고생안하고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것 같은데, 혹 오래 살고싶은 사람이라면 회복을 기원해주는게 맞겠지만, 나 역시 입에발린 말로 속히 갔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오래 사는게 복은 아니라는 생각은 틀림이 없지만, 그 오래라는 기준은 각자가 다르니까. 90을 넘으신 고모님들, 소통이 어렵다는 핑개로 전화도 안해본다. 소통이 되는 이모님과는 왜 통화를 안하고 있는데?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늘 시간을 놓친다는게 핑개가 될까. 아니, 나 역시 더는 유창하지 못하고 버벅거린다. 말이 막히고, 순간적으로 언어의 결핍일지 선택이 순조롭지가 않는걸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도 혼자인게 좋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 함께, 배려가 불편하다. 동행도 어렵다. 누군가에게 걸음의 속도를 맞춘다는게 사랑이란 생각도 든다. 내가 잘 못하는게 당연하다. 이런 내가 이 힘든 세상을 어찌 살았을까. 남편탓만 할게 아니다. 아니, 남편은 이해못한다.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게 된게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