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억수로) - ‘억수(億水)’인가, ‘억수(億數)’인가, ‘악수(惡水)’인가(희망찾기)
경상도 친구들을 만나면 '억수로'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합니다. '매우, 많이' 라는 뜻의 부사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어디에서 온 말일까요? 정말 궁금한 우리말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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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비’ 이름이 유난히 많다. ‘가랑비, 겨울비, 궂은비, 단비, 모종비, 목비, 못비, 실비, 여우비, 웃비, 작달비, 장맛비, 찬비’ 등 40여 개를 헤아린다. 이렇듯 우리말에 ‘비’와 관련된 이름이 많은 것은 우리가 ‘비’에 의존하는 농경 민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 ‘비’ 이름을 보면 대부분이 ‘비’ 자로 끝난다. 물론 ‘개부심, 는개, 소나기’ 등과 같이 ‘비’를 포함하지 않는 이름도 있다. ‘억수’도 그와 같은 단어 중의 하나이다.
‘비’ 자를 포함하는 비 이름은 대체로 그 모양, 상태, 역할, 시기 등에 기초해서 만들어진다. 이렇듯 명명(命名)의 관점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이름의 유래를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다. 가령, 빗줄기가 ‘실’과 같아서 ‘실비’, 오랫동안 끄느름하게 내린다고 해서 ‘궂은비’, 필요할 때 알맞게 온다고 해서 ‘단비’인 것이다.
그런데 ‘비’ 자를 포함하지 않는 ‘비’ 이름의 경우는 그 이름의 유래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억수’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그럼 ‘억수’는 어떤 비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부터 그 어원의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억수’는 ‘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리킨다. ‘비’는 ‘비’이되 물동이로 물을 내리붓듯 세차게 오는 비가 ‘억수’이다. 기상 용어로 표현하면 ‘집중호우(集中豪雨)’ 정도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억수’는 ‘퍼붓다’와 주로 어울려 ‘억수가 퍼붓다’와 같은 형식으로 많이 쓰인다.
‘억수’라는 단어를 통해 우선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한자 ‘水’가 아닐까 한다. ‘비’가 ‘물’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억수’가 물을 퍼붓듯 많이 오는 비라는 점에서 많은 수를 대변하는 ‘억(億)’이 아닐까 한다.
‘억(億)’은 ‘억년(億年, 매우 오래고 긴 세월)’, ‘억대(億代, 아주 멀고 오랜 세대)’, ‘억장(億丈, 썩 높은 것)’, ‘억재(億載, 끝없는 햇수)’ 등에서 보듯 ‘오래고’, ‘길고’, ‘높은’ 것을 가리키는 데 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억(億)’이 ‘년(年), 대(代), 장(丈), 재(載)’ 등과 같이 셀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대상과 주로 어울린다는 점에서, 이들과 성격이 다른 ‘수(水)’라는 단어와도 결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수’를 한자 ‘億水’로 본다면, ‘억수’는 ‘수억 개 빗줄기의 물’로 해석된다. ‘억수’라는 비가 엄청난 양의 빗물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설이나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억’이 주로 셀 수 있는 단위와 결합한다는 점에서 ‘억수’의 ‘수’를 한자 ‘數’로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억수(億數)’는 ‘많은 수’로 해석된다. 그러나 ‘많은 수’는 ‘많은 양의 빗물’보다 지시 의미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億數’ 설은 ‘億水’ 설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진다.
‘억수’의 어원을 한자에서 구하려는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억수’를 ‘악수(惡水)’에서 변한 말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오는 비는 생활에 이로움을 주기보다는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비를 ‘악수(惡水)’라 했고, 이것이 변하여 ‘억수’가 되었다는 해석이다. ‘억수’와 ‘악수’가 함께 쓰이기 때문에 쉽게 ‘억수’를 ‘악수’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고, 또 그 ‘악수’를 한자 ‘惡水’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억수’가 ‘악수’에서 온 것이라도 이 ‘악수’가 ‘惡水’라고 볼 뚜렷한 근거는 없다. 다만 우리말에서 ‘ㅏ’와 ‘ㅓ’의 교체가 아주 자연스러워서 ‘억수’와 ‘악수’는 모음 교체 관계로 설명할 수 있는 정도이다. ‘억머구리’와 ‘악머구리’, ‘억지’와 ‘악지’가 공존하듯 ‘억수’와 ‘악수’가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렇게 보면 ‘억수’를 한자로 보는 설은 모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억수’의 어원을 달리 구하기도 어렵다. 다만 ‘억수’가 ‘억병’이라는 단어에 쓰인 ‘억’과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억병’은 ‘술을 한량없이 마시는 모양이나 그런 상태’를 뜻하는데, ‘억병’의 ‘억’이 ‘양이 많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억수’의 ‘억’과 의미가 통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억’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억(億)’일 가능성은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 ‘억수’에 조사 ‘-로’를 붙인 ‘억수로’라는 말을 많이 쓴다. “야, 사람이 억수로 많다”, “그 여자, 억수로 예쁘다” 등에 쓰인 ‘억수로’가 바로 그것이다. ‘억수로’는 문맥상 ‘매우’, ‘아주’, ‘엄청’ 등의 부사적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억수로’는 표준어가 아니라 경상도 방언이다.
< 출처 : 정말 궁금한 우리말 100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