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고싶고 듣고싶고 그리고 간절히 찾고싶은것은 뭘까. 사람은 아는만끔 산다고도 한다. 내가 아는 만끔은 어느정도나 될까도 궁금하다. 아니, 평범한 일상, 무탈한 일상이 기적이라고 말하고는 있다, 무위도식하는 일상이 최고의 평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아닌가. 그런 내게도 뭔가 모르겠지만 진보라는 것이 있어보긴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419, 516, 518을 지나온 세대다. 인생의 모든 굴곡도 내 곁에 있었다. 의기소침하고 우울하고 열등했던 나는 정말이지 지식이란 것도 미미했다. 그럼에도 78세 나이가 되도록 살앗다.이제는 갈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날이 얼만일지 몰라서 초조하다. 오래 사는게 축복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게된 오늘날, 내가 할수있는 최선은 뭐가 있을까. 그걸 알고싶어서 TV체널을 돌리고 소설책을 두적이고 인터넷을 클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뭐가 복음일가. 기쁜소식이 뭘까. 내가 간절히 기다리는 소식은 뭐지? 보고싶은게 있기는 한것이고? 내가 만나고 싶은게 16의 나였을까. 어머니는 잊었나? 사실 내가 알고있는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내 얼굴, 내 목소리마저 생소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있으니 말이다. 밤중에 어둠속에서 헨드폰 카메라에서 보았던 내 얼굴은 결코 익숙한 내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동화속에 나오는 숲속의 마귀할멈, 딱 이얼굴이 아닐까 싶었다. 목소리는 또 어떻고? 세되고 갈라진 목소리는 어차피 모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평생을 살면서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살아온게 아닌지 싶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할수 없다는 말도 맞는 말이고, 자신에게 인색한 사람은 남들에게도 인색할수밖에 없다는 말도 맞는것 같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다고, 내 자신을 최우선으로 알고 있는듯 싶지만, 실상은 나 자신에대해서도 결코 알지못하고 있다는게 맞지싶다. 나는 내가 뭘 원하며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결코 배려하거나 양보하거나 희생적인 삶과는 무관하지 싶다. 인색하기 그지없는 나는 결코 손해보는 것은 못참았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양보해길, 배려해주길 열심히 바랐다. 길을 가면서도 내 앞을 막아서는 것들에 대해 발끈한다. 구르는 재주하나 주시지 않았다고 불평하면서도 지금껏 살아온것에 대해서는 별로 감사하게 생각도 안하는 무례함을 일삼아왔다.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이 재앙을 피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모처럼 주신 평강을 재데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아닌가. 빈둥대는 일상, 무위도식할수 있는 여유, 돈돈거리지 않아도 되는 현제가 행복이라면 행복인데 말이다. 젊어서는 불안 초조 절망감이 나를 옥죄였다. 삶이 얼마나 나를 무겁게 짖누르고 있었던지,,, TV체널이나 소설책이나 뒤적이며 일상을 소모할날이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하지 않으면 밥이 입에 안들어 온다는 생각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참 다행이다. 그분의 은혜던, 아들딸 등에 빨대를 꽂은거던 어쨌던 나로서는 다행아닌가. ㅎㅎㅎ 극단적인 이기심이다. 주여, 용서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