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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속의 검은 유혹, 뇌물
1. "검은 거래"뒤로 추락하는 사회
2.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깨끗한 결단
3. 뇌물먹고 함포고복 할까?
4. 뇌물없는 세상, "나"로 부터 시작하자
"검은 거래"뒤로 추락하는 사회
성경이 전하는 그 때 그 현장
#사건1-눈이 어두워진 발람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자기의 영토로 접근하는 것이 두려웠다. 군사적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발락은 영력이 있다는 발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뇌물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다(민22:5-7). 이때 발람은 이 부정한 뇌물에 눈이 어두워졌다가 부끄럽게도 말 못하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고 말았다(벧후2:15-16).
#사건2-떼돈을 번 군인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떼돈을 벌었다.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진 종교 지도자들이 군인들에게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마28:13)’고 부탁하면서 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건3-돈으로 성령을 사려한 시몬
사마리아 성에 엄청난 성령의 역사가 임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도 하고 병도 나음을 얻었다. 엄청난 광경에 충격을 받은 시몬은 욕심이 생겼다. 자기도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없을까 라는 생각에 은밀하게 베드로에게 로비를 했다. 그에게 돈을 쥐어주며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행8:19)’ 하며 부탁했던 것이다. 물론 그는 베드로에게 책망을 듣고 창피만 당하고 말았다.
#사건4-은근히 돈을 기대한 총독 벨릭스
가이사랴에서 로마의 총독으로 있던 벨릭스는 바울의 재판에 참여하게 되었다. 대제사장은 바울을 고소하고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긴 재판 과정을 끝낸 후 그는 바울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유도 주었고 때때로 바울의 강론도 들었다. 참 고마운 배려였다. 그러나 총독 벨릭스는 이 불쌍한 바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행24:26)’
흔히들 ‘뇌물’ 하면 현대 사회의 부조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오래전부터 뇌물이 존재해 온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뇌물이 사용된 목적도 다양함을 보여준다. 이렇듯 뇌물의 문제는 오늘 우리나라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 세계적인 문제이며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회의 모든 영역에 뿌리깊게 자라잡고 있는 문제이다. 정도나 미치는 영향의 심각성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죄악이 있는 어느 세상도 뇌물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뇌물’을 위한 필요 충분 조건
여기서 우리는 뇌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 병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온도든 습도든 적절한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뇌물이라는 사회악이 존재하는데도 필요한 조건이 있을 것이다. 그 조건을 성경을 통해서 한 번 찾아보자.
첫째, 기본 토양이 되는 이기적인 욕심
뇌물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들에게서 시작된다. 뇌물을 주는 사람도 그렇고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발락은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시몬은 신기한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 뇌물을 건넸다. 발람이나 로마 군인들은 자기 수중에 돈이 들어오니까 뇌물을 받았을 것이고, 총독도 자신의 물욕을 채우기 위해 뇌물을 기대했던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석방되어야겠다는 강한 욕심이 있었더라면 그도 뇌물을 주었을 것이고 베드로도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시몬의 뇌물을 넙죽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런 욕심이 없었기에 얼마든지 거절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뇌물 문제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신 것은(눅9:23) 이런 윤리적인 상황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진리도 공의도 법도 무시!
진리를 수호하고 법을 준수하려는 사람에게 뇌물은 있을 수가 없다. 빈 무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했다면 종교 지도자들이 뇌물을 쓸 필요가 없었다. 총독이 법을 지켰다면 법대로 시행하면 그뿐이었다. 바울에게 뇌물을 기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왜곡하거나 법을 무시하고 싶을 때 뇌물을 사용하게 된다.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바칠 세금을 그대로 바치도록 한 것(마22:21)이나바울이로마의 법을 지키도록 권한 것(롬13:1-7)은 우리 크리스천의 준법정신의 성경적인 근거가 된다.
셋째, 돈의 위력을 인정
그런 사회가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돈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뇌물은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그런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뇌물이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베드로에게 시몬의 뇌물은 무의미했으며 사도바울에게 총독의 은근한 요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물 문제를 다루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의 문제를 좀더 심각하게 보아야 한다. ‘탐욕은 곧 우상숭배(골3:5)’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이제 우리 사회를 돌아보자. 점점 이기적인 욕심이 커가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한다. 법은 점점 더 많아지지만 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법을 지키면 손해가 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이면 안되는 일이 없으며 돈은 만능의 신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사회에서 뇌물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으며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뇌물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타리라
성경은 뇌물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21:14).’ 그러나 결코 이것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하나의 표현으로써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출23:8).’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5)’
‘사곡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욥15:3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잠29:4)’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사느니라(잠15:2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전7:7)’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사33:15-16)’
이렇듯 성경은 뇌물에 대해서 분명히 금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뇌물이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다. 흔히 사용되는 용어만 해도 커미션, 로비와 같은 거창한 용어가 있는가 하면 떡고물과 같은 희화적인 표현도 있고 촌지, 사례금, 급행료 등의 일상적인 표현도 있다. 어떤 용어를 사용했든지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공의를 무시하고 돈의 힘에 의지한 것은 다 뇌물이다. 크리스천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말씀이 명하는대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극복하는 깨끗한 결단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현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정사협)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공동으로 집필한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 (「움직이는 책」 간)”은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뇌물의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뇌물의 액수가 가장 크며 모든 뇌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정치계의 뇌물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행정기관과 이에 속한 공무원들에게서 발견되는 뇌물이다. 공무원들에게는 가장 심한 것이 역시 세무 공무원이며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깨끗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법조계나 교육계, 그리고 언론계, 의료계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돈을 버는 기업계는 주로 뇌물을 주는 위치에 있지만 기업계 안에서도 뒷거래가 없는 사업이 없다고할만큼 철저하게 부패해 있다. 특히 최근에 문제된 건설업계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수준이 되어있다. 금융계나 유통업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종교계 역시 예외가 아니며 교회의 안팎에서 통용되는 뇌물은 세상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탄식의 소리가 높다. 굳이 이 책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뇌물은 정말 현실적이다. 어딜 가서 무슨 일을 하나 하려고 해도 내미는 손을 의식하게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롬12:2)”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책임이다.
깨끗하고 분명한 결단
이런 현실 속에서 크리스천이 윤리적인 결단을 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회개의 열매의 구체적인 예를 묻는 사람들에게 준 세례요한의 대답을 생각하게 된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12-14)”
세리나 군인들은 그 당시에 뇌물을 받기 쉬운 직업이었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이 회개의 열매로 요구한 것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일하는 그 곳에서 뇌물을 받지 말고 깨끗하게 일하는 것이었다.
크리스천 직장인은 바로 이들에게 했던 요한의 명령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명령으로 받아서 뇌물을 주고 받는 일에서 깨끗하도록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물질 문제에 자족하는 것이다(빌4:11-12). 자족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뇌물은 유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좁게는 사회의 법, 넓게는 공의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뇌물이 스며들 토양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 두 가지만 결단해도 뇌물 문제에서 깨끗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결단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조직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한 자세이다. 개인적으로는 마땅히 거절을 해야하겠지만 거대한 기업조직 속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냥 끌려가기만 해도 안되며 그렇다고 뛰쳐나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는 다윗의 심정으로 투쟁을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뇌물의 문제를 너무 경직되게 해석해서는 안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감정이 우선되는 문화 속에서는 뇌물에 대한 견해가 합리적인 문화에서의 이해와 다를 수 있다. 지나치게 경직되게 이해한 나머지 사람사이의 오가는 정을 무시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 정부가 관리들을 위해 뇌물의 액수를 50불 이상으로 정한 것은 이런 혼동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업무와 관련해서 구체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안전할 수 있다.
뇌물의 문제는 다른 생활의 문제가 그렇듯이 애매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직장인들이 현실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며 연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결단은 역시 필요하다.
뇌물먹고 함포고복 할까?
부정부패, 그 끝은 어디
문민정부 출범 초기에 불었던 사정한파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연일 언론에 보도되는 사실 앞에서 국민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나라의 모든 공무원과 정치인이 부정부패 속에 젖어 있는 듯 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TV나 신문을 통해서 돈과 얽힌 여러가지 범죄를 보아왔다. 그러나 당시에 우리들이 목격한 것은 바로 이 나라 이 민족을 이끌어가는 지도층 인사들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들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갖가지 부정부패를 선도했다. 그들 대부분이 땅투기를 통해서 재산을 축적했으며 자신들의 신분을 이용하여 갖가지 명목의 뇌물을 거두어들였고 각종 세금을 포탈(逋脫)하여 재산을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언론에 보도된 그들의 재산 규모는 일반 국민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는데 그마저도 빙산의 일각이라고하니 실제 규모는 추측하기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부정을 저질렀을까? 애초부터 부정부패를 저지를 만한 사람들만이 고위직에 오른 것인가 아니면 그런 범죄성을 개발해야만 고위공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인가? 그도저도 아니면 부정부패를 저지르도록 만드는 구조적 걸림돌이 공직사회에 장치되어 있는 것일까?
1993년 12월 30일 감사원이 발표한 「’93감사원 백서」에 따르면 국가기관, 자치단체, 투자기관 등의 감사에서 총 3천53건의 부정 사례를 적발하고 그 중 47명을 고발 조치하였는데 고발 조치된 비리 유형 중에서 뇌물 수수가 23명으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부패의 수단을 기준으로 분류해 볼 때 하위직 공무원들이 저지르는 생계형 부패와 고위직 공무원들이 저지르는 권력형 부패로 나누어진다. 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속칭 ‘담배값’, ‘떡값’이다. 후자에 관계되는 것은 중요한 국가 시책의 입안, 결정과 특정인 허가, 인사 등이다. 예를 들어 골프장이나 관광업소 등의 허가, 아파트 등의 건설과 정부 공사 계약, 국유지 매각, 도시 계획 등 국가 건설 계획, 투자 도입 등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경제 발전과 자본 축적이라는 구실로 기업인과 유착하여 특정인의 재벌화를 돕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자료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재물 때문에 공직자가 자신의 양심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직 사회 구조가 부패를 조장한 결과라기 보다는 공직자의 윤리의식에 더 많은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더 잘 알 수 있는 것은 공직 사회 이외에도 널리 만연되어 있는 부정을 살펴보는 일이다.
무관의 제왕, 제4부, 정의의 파수꾼, 사회의 목탁, 소금 등의 화려한 수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언론은 어떤 모습인가. 혹자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해서 언론을 ‘영원한 집권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 정도로 언론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에 앞서 그동안 언론이 가지고 있었던 행태는 분명히 권력의 그늘에서 공생하였다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촌지이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모두 언론을 무서워 한다. 언론 보도의 양태에 따라서 그들의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은 언론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데 기업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기업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주는 촌지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제발 좀 내 달라’는 것으로 자기 실력으로 공정한 경쟁을 하기보다 무언가 특혜를 보려는 꿍꿍이에서 주는 경우이다. 영화사에서 언론사 문화 담당에게 ‘먹이는’ 촌지가 그런 경우의 하나이다. 또 하나는 ‘제발 좀 보도하지 말라’는 경우이다. 지난 90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수서사건이 터지기 전에 서울시청 출입기자부터 데스크 간부까지 두루두루 먹인 촌지가 바로 그것이다(최근에는 촌지가 많이 없어져서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95년에는 그 어느 해보다도 대형 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그 중에서도 부실 시공으로 인한 사고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우리 건설업계의 고질적 부패의 대표적인 결과이다. 사고 이후 그 원인 조사에서는 항상 콘크리트에 바다모래가 섞였다느니, 규정된 강도 이하의 철근을 사용했다느니 하는 상식 밖의 분석 결과가 나왔다.
왜 그런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입찰에서 준공까지 비리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모 주간지에 실린 한 종합건설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인\허가 관청이나 감독관들에게 주는 돈이 다 공사비에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손해를 안보기 위해서는 자재값과 인건비에 손댈 수밖에 없다. 건설 현장에서는 이것을 돈대기나 푼떼기라고 부른다. 적은 양의 자재로 최대한 빨리 공사를 마쳐 자재비와 인건비를 크게 줄이는 방법이다.” 덤핑 입찰에서부터 시작된 비리와 이렇게 저렇게 떼는 뇌물성 비용이 합쳐져서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다. 공사 계획으로부터 하자 보수까지 9단계에 걸친 철저한 뇌물의 사슬을 풀지 못하는 한 안전 건설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모든 문제는 비뚤어진 의식에 있다
중국을 다녀온 어떤 목사님의 말이 기억난다. 중국에서 일이 잘되게 하려면 절차보다는 사람과 친해야 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서류 구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무원의 기분을 흡족하게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바로 뇌물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한국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 각 분야가 뇌물성 비리로 가득차 있다. 어떻게 하면 공정한 절차를 따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건지느냐에 혈안이 되어있다. 자본주의 본래의 공정한 경쟁의 질서와 윤리 의식은 실종된지 오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정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매우 이기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들은 윤리를 상실했다. 타인 존중 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곧 자기 손해라는 이상한 등식이 성립된지 이미 오래다. 이러한 사회 의식을 이용한 범죄도 늘어가고 있다. 고위 기관을 사칭하여 돈을 뜯어내는 범죄 사건을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사기친 범인도 나쁘지만 돈 몇푼 들이면 더 많은 액수를 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피해자들의 비뚤어진 의식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
결국 사회적인 차원에서의 표피적인 정의가 각 개인의 의식에 스며들지 않는다면 이땅의 ‘부정의 상징’이 근절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의식 전환이 절실히 필요한데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오랜기간 쌓여온 잘못된 의식을 한 순간에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선 잘못된 관행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서 개인으로하여금 공정한 절차대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한다. 잘못된 관행이 설 자리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 다음으로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인 분위기 조성이 일과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두 말 할 것 없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일을 자기가 속한 직장에서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먹을 것이 많아서 좋아하고 즐기는 모양’을 이르는 말.
위의 글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정사협/경실련 공저)과 「공직윤리론」(김 일) 그리고 시사저널(299호)을 참고하여 편집부가 정리하였다.
뇌물없는 세상, "나"로 부터 시작하자
‘뇌물’과 ‘선물’의 차이는? 나는 ‘뇌물’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 즉 어떤 은근한 기대를 하고 건네는 것이라면 뇌물이다. 특별한 기대치나 의도가 없다면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물에는 오가는 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뇌물에는 욕심이 담겨있다. 물론 욕심이라는 것도 기준이 애매하지만.
금액의 차이로도 뇌물과 선물을 얼마간은 구분할 수 있다. 마음에 부담이 될만큼 큰 액수라면 틀림없이 뇌물일테고 적은 액수라면 정성을 표시한 선물로 간주할 수 있다.
부담이 되면 뇌물이고 부담이 되지 않으면 선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의 부담이라는 것도 각 개인의 양심의 두께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주는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도 다른것 같다. 나는 교사인데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의 부모에게선 아주 작은 선물도 부담이 된다.
교사에게 주는 촌지는 무조건 뇌물이라고 생각한다. 촌지라는 것이 자기 아이만 잘 봐달라고 주는 것 아닌가? 그런 이기적인 동기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외국에서의 경험이 생각난다. 외국에선 학기 초에는 교사에게 선물을 주는 경우가 없다. 대신 학기가 끝났을 때 감사의 표시로 아주 작은 선물을 한다. 그것은 명백히 뇌물과 구분되는 선물이다.
사심이 없는 것은 선물, 사심이 있다면 뇌물?
높은 사람이나, 권력,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선물이고 그 반대의 경우는 뇌물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이 성사된 후에 주면 선물이고 일이 성사되기 전에 주면 뇌물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성사된 후에 준다고 해도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 뇌물일 수 있다.
솔직히 뇌물인지 선물인지는 당사자들이 잘 안다. 주는 쪽도, 받는 쪽도 모두 안다.
으레 주어야 할 상황인 것 같아 형식적으로 건네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뇌물이다. 진정한 마음이 담겨있다기보다 계산이 담겨있다면 말이다.
어떤 건설 업체가 있다고 하자. 한 공사의 수주가 있을 때 관련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관련 기관 사람들과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야 한다.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긴 하지만 이것이 정당한 것인지, 뇌물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인지 명확히 모르겠다.
그런 것을 두고 로비 활동이라고 하지 않나. 안해도 된다면 안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다.
무언가 받은 후,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감정이 개입되거나 주관적인 판단으로 결정 짓는다면 틀림없이 뇌물을 받은 것이다.
내가 준 뇌물, 내가 받은 뇌물
회사에서 사고로 직원이 죽은 경우가 있었다. 그때 수사처리 과정이 오래 걸렸다. 유가족 입장을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일이 처리되야할 상황이었다. 그때 수사 기관에 돈을 좀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행히도 일이 잘 풀려 돈을 쓰지 않고도 처리가 되었지만, 그때 돈을 썼다면 그것이 유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었다하여도 뇌물이 된다고 생각한다.
회사 일로 수원에 내려갔다가 야간에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속도 제한에 걸렸다. 딱지를 떼는 것이 무서워 그만 교통경찰에게 돈을 주고 말았다.
사실 조직원의 한사람으로서 피하기 힘든 뇌물 수수가 있다. 관행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뇌물 수수에 일개인이 대항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렵게 느껴진다.
추석이나 구정 등의 명절 때가 되면 거래처에서 상품권이나 기타 선물이 많이 들어온다. 나는 그런 경우 성의로 생각해서 일단은 받는다. 대신 받은 만큼 나도 그쪽에 갚는다.
뇌물 문제에 너무 민감하게 행동하다가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거래처와 함께 식사하게 되면 틀림없이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아 가급적 식사시간을 피해 만나고, 식사 제안을 해올 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다. 그랬더니 관계가 점점 서먹해지고 사소한 오해들이 생겨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히 ‘정’이라는 것을 중시해서 그렇다. 아무리 업무상 만난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정을 나누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뇌물인지 그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업무 특성상 공항에서의 통관 절차가 항상 문제가 되곤 한다. 통관 절차가 매우 까다롭지만 세관들에게 급행료를 주면 아주 쉽게 처리된다. 급행료는 공공연한 뇌물이라 어느샌가 그것에는 무감각해져있다. 일이 되게 하려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줄 뻔히 알면서도 하게되는 경우가 많다. 회사 입장을 생각할 때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대학 졸업 후 한 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실험을 위해 엄청나게 비싼 외제 기계들을 에이전트를 통해 구입했다. 말단 사원인 나로서는 에이전트와 연구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알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그 에이전트로부터 연구소 모든 직원이 아주 거창하게 식사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벤트 업체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협력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래처를 선정하는 과정에 뒷돈의 여지가 충분하다.
신입사원 때의 일이다. 부서의 상사로부터 회사와 관계있는 몇몇 고위층에게 갈비를 갖다주라는 지시를 받아 수행하던 중 ‘정화 운동’으로 단속 나온 공무원에게 걸렸다. 조직의 일원으로서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한 사건이었다.
뇌물에 이렇게 처신하라
뇌물이란 정당하지 않은 결과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것, 즉 공정한 판단을 흐리게 하여 정직하지 못한 사태를 유발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뇌물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독력은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알면서도 주고 한편으론 받는다. 이 모든 까닭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
사실 뇌물이라면 좀 거창한 사건을 떠올리고 마치 먼데 이야기인양 한다. 그러나 사실 뇌물의 다른 모양인 급행료라든가 촌지는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에 있다. 먼저 각 개인이 자신이 빠져있는 뇌물이라는 이름의 덫을 인식함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거절이 해결책은 아니다. 내가 받은만큼 상대방에게 되돌려주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문제가 있을 때 뇌물로 해결하려 들지 말고 평소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떨까?
당장엔 어렵더라도 작은 것부터 노력하고, 또 우리의 위치가 높아졌을 때 양심의 부대낌없이 일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신분을, 크리스천이라는 신분을 분명하게 밝혀야한다. 내가 아는 한 분은 거래처로부터 뇌물을 받게된 상황에서, ‘일이 잘 되게 하려거든 뇌물을 주는 대신 시편 23편을 외우고 오라’고 했단다. 거래처의 입장에선 좀 당황했겠지만 어쨌든 신선한 충격이었을 게다. 우리 가운데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그런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사례가 도전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뇌물을 받게 된 경우라면 그것을 불우이웃돕기나 헌금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뇌물을 안 받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좋을것 같다.
기도하고 모든 일을 여호와께 맡겨야 한다.
크리스천은 교회에서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법에 짓눌려 살아가면 안 된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 문득 뇌물을 지혜롭게 거절했던 다니엘이 생각난다.
조직에 속한 개인의 힘으로 대응하기엔 좀 큰 문제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함께 마음을 모아 우리에게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허락하시도록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