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의 골이 깊어질수록 믿음의 둔덕은 높아졌다.
그 인생을 담은『땅 끝의 아이들』은 ‘간증집’이라기보다 ‘고백록’에 가까웠다.
그 고백을 들으러 평창동 고갯길을 숨 가쁘게 올랐다.
책을 낸 계기가 궁금한데요 3년 전부터 책을 내자는 얘기가 있었어요. 미국에 살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해외로 사역을 다니다 보니 엄두를 내지 못했죠. 올 2월에 한국에서 수술을 하고 한 달을 쉬면서 집에만 있었어요. 귀와 입으로 할 수 있는 일만 했죠. 좋아하는 책도 못 보고 아주 답답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디지털 녹음기를 주면서 지난 일이 떠오르는 대로 구술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출판사에 부탁해서 글로 풀어 정리해두면 책을 낼 때 편하다면서. 저는 3월 17일에 캘리포니아 집에 갔다가 5월에 다시 들어왔어요. 20일가량 부산에서 열리는 신앙 집회에 참석했죠. 그동안 출판사에서 제 말을 풀어서 편집 작업을 하셨나 봐요. 저는 나중에 알았죠.
2009년 말에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걸로 압니다. ‘간증집’인데도 종교적인 체험보다는 살아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더군요 재판정에서 증언을 하는 걸 두고 ‘테스티모니’(testimony)라고 해요. ‘간증집’이라는 말보다는 ‘증언집’이 맞는 것 같아요. 제가 겪은 일을 떠오르는 대로 말했어요. 누가 타이핑으로 풀어주면 나중에 원고를 손볼 생각이었죠. 그런데 출판사에서 서둘러 작업을 한 모양이에요. 편집에 참여한 분들의 노고로 책이 나왔다고 보시면 돼요. 예전 같으면 이런 식의 작업은 상상도 못 했을 거예요. 제가 프로 의식이 강하거든요. 아버지를 꼭 닮아서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디지 못하죠. 10년 넘게 LA에서 부장검사를 맡았고 이후에 변호사 일을 했어요. 그쪽에서는 나름대로 잘나가는 변호사였죠(웃음). 무슨 일이든 내가 책임을 지고 처리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출판사 분들을 믿고 갔어요. 이것도 저한테는 큰 변화예요. 덕분에 이런 인터뷰도 할 수 있게 됐고.
전남편인 김한길씨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으니까요. 저는 성령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정리된 부분이 있지만, 그 사람은 본의 아니게 내 책이 나오면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렸으니까요. 그 점을 미안하게 생각해요. (이민아는 거듭된 질문에 “내 첫사랑이었고, 첫아이의 좋은 아버지였다”고만 했다. 결국은 책에 실린 글을 참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민아는 1981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졸업하고, 당시『문학사상』에 중편 소설로 등단한 김한길과 결혼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아이를 낳아 기르고 공부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흑인들도 꺼리는 일자리를 얻어 밤에는 주유소에서,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최소 일당을 받으며 일했다. 남편은 자존심 때문에 이를 악물었고, 이민아는 친정에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벌어진 감정의 골을 메우지 못한 채 결혼 생활 5년 만에 이혼했다.)
‘믿음은 시련으로 단련되는가?’ 서울 평창동의 영인문학관 문을 나서며 든 생각이다. 그곳에서 이민아 목사를 만났다. 그는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큰딸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엄격한 이성주의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지난 2007년 7월 23일 개신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 배경에 큰딸의 역경이 있었다. 딸은 망막 손상으로 실명 위기에 처해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자식을 위해 기도했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기도가 통한 듯했다. 기적처럼 딸의 시력이 회복되었고, 아버지는 영성의 문지방을 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행복은 잠깐이었다. 아버지가 세례를 받고 정확히 3주 후에 큰아들 유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아들은 혼수상태에 빠져 19일 만에 황망히 세상을 떴다. 이민아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몸을 돌보지 않았고, 당뇨와 빈혈이 오면서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눈이 나빠졌다. 변호사 일도 그만두었다. 땅끝에 있는 아이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인문학관은 이어령, 강인숙 교수 부부가 2001년에 사재를 털어서 지었다. ‘영인’은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자씩 가져왔다. 부부는 서울대 국문과 동기 동창으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이민아는 장녀였다. 문학관 로비로 마중을 나온 것은 어머니 강인숙 관장이었다.
“딸이 건강이 안 좋아서 6월 말에 한국에 들어왔어요. 일주일 동안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이민아 목사가 로비로 내려왔다. 흰 바지에 검정 티셔츠 차림이었다. 서둘러 귀국한 탓에 변변한 옷가지가 없었다. 이민아는 친구가 사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정 옷을 좋아하는 친구의 취향을 고려하면서 꽃이 달린 디자인으로 우정의 뜻을 전한 듯했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네요. 인터뷰는 안에서 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올 2월 27일에 한국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망막에 이상이 있던 사람은 수술이 잘못되어 시력을 영영 잃을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수술을 꺼리는 의사가 많았다. 부모님은 의지를 꺾지 않고 의사를 수소문했고, 수술을 해보자는 신심 깊은 의사를 만나서 일이 풀렸다. 수술은 잘되어 눈에 띄게 시력이 좋아졌다.
이어령 교수가『지성에서 영성으로』란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그전에는 지성이 강했다는 뜻인가요 그 말을 들으니 그리스 사람 ‘도마’의 사례가 떠오르는군요.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어요.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서 못 자국을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죠. 부활한 예수께서 도마를 찾아 “네 손가락을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죠(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인 카라바조는 이 대목을 소재로 ‘의심하는 도마’란 그림을 그렸다). 저도 처음에는 도마와 다르지 않았어요. “그 사랑이 무엇인지 제 눈앞에 보여주세요”라고 했죠. 그 사랑의 실체를 봐야 믿는 유물론자였어요. 그런 제가 이혼, 암, 실명, 아들의 죽음… 이런 힘든 일을 겪고 실패와 단절을 경험하면서 사랑이라는 기적의 통로를 접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하는 성령을 받은 거죠. 그것은 아주 행복한 감정이에요.
하나님이나 예수가 아닌 현실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군요. 이어령 교수와는 어떻게 화해를 했나요 두 가지 일이 떠올라요. 30대 중반에 미국에서 둘째 동생과 어릴 때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동생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달랐어요. 아버지가 참 가정적이세요. 술도 거의 안 드시고, 집에 일찍 들어와서 저녁을 늘 함께했죠. 동생은 아버지가 바쁜 와중에도 우리를 데리고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녀서 너무 좋았다고 했어요. 저랑 다르게 좋은 기억만 있는 거죠. 또 기억나는 일이 2, 3년 전에 제가 아주 힘들 때 친구가『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란 책을 읽어줬어요. ‘사람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죠. 저는 사랑한다는 말과 따뜻한 접촉을 원했지만, 아버지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어요. 아버지가 주는 선물을 저는 너무나 당연시한 거죠. 선물을 고르면서 제 생각을 하셨다는 걸 이제야 안 거예요.
당신이 자폐에 걸린 둘째 아들을 위해 기도했듯, 이어령 교수 또한 시력을 잃어가는 당신을 위해 기도한 걸로 압니다. 그 사랑이 다르지 않은데요 맞아요. 다르지 않아요. 2005년 9월에 아이들을 데리고 하와이로 갔어요. 9월이면 개학인데 진성이가 돌아갈 학교가 없었어요. 너무 힘들었죠. 애 장래를 놓고 고민하다 캘리포니아를 떠나 하와이로 가기로 했어요. 그런데 하와이에서는 변호사 일을 할 수 없었어요. 시간당 300달러를 벌다가 애가 다니는 학교에서 시간당 10달러를 받으며 보조 교사로 있었어요. 힘들었지만 소중한 경험을 했죠. 그때 작은 교회에 다녔는데, 대형 교회와는 또 다른 작은 공동체만의 따뜻함이 있더군요. 사람들과 부대꼈지만 그 안에서 심정적인 나눔을 주고받을 수 있었어요.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을 부어주세요”란 기도를 많이 하면서 아이보다 내가 먼저 바뀌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내 비전을 바꾸면 생각이 바뀌고, 그렇게 되면 언어가 달라져요. ‘금방 나을 거야’ ‘친구를 더 사귈 수 있어’ 같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죠. 그러자 애가 정말 바뀌더군요. 리더십을 타고난 진성이가 친구 하나 못 사귀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다 보니 더 주눅이 든 것이었죠. 진성이 병은 1년 만에 회복되었어요. 올해 열아홉이 됐는데, 이제 운전도 하고 친구들 연애 상담을 해줄 정도로 의젓해졌죠.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유복하게 자란 걸로 압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나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도근시가 있었어요. 굴절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왜곡된 상이 내 안에 굳은 확신으로 남아버린 것이죠. 저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고, 아빠 품에 안기고 싶었어요. 제가 터치에 아주 민감하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유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분이어서 사랑의 표현에 익숙지 않았어요. 작가, 교수, 논설위원이란 직함을 달고 늘 바쁘게 사셨죠. 한날은 제가 떼를 쓰며 매달리자 너무 시장하고 피곤하셨는지 “저리 가. 아빠 밥 좀 먹고!” 하면서 소리친 적이 있어요. 아버지 목소리가 워낙 크시거든요. 저는 그 말에 너무 상처를 받아서 앞으로 아빠한테 매달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고.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가 위스키를 훔쳐 마시기도 했다면서요 겉으로 보면 친구도 많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어요. 그런데 속은 달랐죠. 약함을 숨기고 싶어 하는 예민한 성격이었어요. 실수를 안 하려고 엄청 노력했고. 실수를 하면 아버지 체면에 누가 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가 절 사랑해 주지 않을 것 같았어요. 청소년기에 특히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아버지 몰래 서재에 들어가 술을 훔쳐 먹은 적이 있어요.
아버지와의 화해, 사람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
이민아는 이혼 후 3년을 미국에서 혼자 살다 1989년에 재혼했다. “스물여섯에 싱글 맘이 되어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재혼을 하고 아이 셋을 더 낳아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듯 보였다. 그러다 1992년에 갑상샘암 판정을 받았다. 이후 1996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암이 재발하면서 이민아의 심신을 힘들게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을 가장 괴롭힌 것은 둘째 아들의 발병이었다. 유치원에 들어간 진성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판정을 받은 것.
‘칵테일’이라고 해서 한 번에 7~9개의 약을 먹여도 낫지 않았다. 도리어 우울증이 생기면서 증세가 더 나빠졌다. ADHD가 아니라 ‘아스퍼거’라는 특수 자폐란 걸 훗날 알게 되었다. 지능과 언어 발달은 정상이지만,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증상을 보였다. 진성은 한 학교에서 1년 버티기가 힘들었다. 초등학교만도 다섯 번을 옮겨 다녔다.
2002년을 영성이 깊어진 해로 꼽았는데요 가장 캄캄했던 시기에 예수님이 빛으로 저에게 들어오셨거든요. 진성이 일로 씨름하듯 기도하고 병원을 들락거릴 때였어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죠. 1992년에 정식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10년간 소극적인 신앙 생활을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2002년 2월에 교회에서 설교를 듣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셔서 부활하심을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입으로 시인하고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죠. 그전에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했어요. 주님이 아니라.
큰아들의 묘비명을 바꾸다
이민아는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 얘기를 했다. 하 목사는 지난 8월 2일에 소천했고, 이민아는 그의 영결식장을 찾은 바 있다. 하 목사와는 인연이 깊었다. 1996년에 하 목사가 LA의 한 교회에 왔을 때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이민아는 갑상샘암의 재발로 괴로워하고 있었고, 마침 아픈 몸을 이끌고 강대상에 기대어 설교하는 하 목사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2007년에 아버지와 함께 하용조 목사님과 식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날도 하 목사님은 투석을 받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오셨죠. 표정은 언제나처럼 온화하셨어요. 목사님이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에 ‘눈을 감기 전에 이 선생님이 세례 받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다음 날 제가 새벽 기도를 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딸아, 아빠가 세례를 받아야겠다!’ 아버지가 영성의 문지방을 넘도록 하신 분은 제가 아니라 하 목사님이세요.”
두 달 전부터 아버지와 카카오톡으로 문자를 주고받는 얘기도 했다. 이민아는 늘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면서 싹싹하게 구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답신으로 이런 문자가 왔다. “사랑한다, 내 딸아.” 아버지에게 이런 말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사랑’이라는 말에 담긴 진심의 울림이 깊었다.
큰아들의 죽음 후에 묘비명을 바꾼 걸로 압니다. 밀알이 죽어 열매를 맺는다는 말도 와 닿았고요 유진이는 나이 스물여섯에 버클리대를 나온 밝고 명랑한 아이였어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들이었죠. 애가 감기에 걸린 것 같더니 그대로 쓰러져서 19일 동안 혼수상태에 있다 세상을 떴어요.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아이를 묻고 묘비에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글을 새겼어요. 그러다 꿈속에서 “이 아이가 지금 아버지 집에서 편히 쉬고 있으니 슬퍼하지 마라. 기뻐하며 잘 쉬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죠. 그래서 묘비명을 바꾸었어요. ‘내 아버지 집에서 편히 쉬고 있습니다’(Resting in his Father’s house)로. 요한복음에 이런 말이 나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저는 “유진이는 죽었지만, 유진이 같은 아들 30명을 얻었다”고 말해요.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상담 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안에 있었거든요. 유진이가 죽은 뒤에 그 벽이 사라졌어요.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군요.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갔어요. 30명의 아이들이 저를 ‘마마’라고 불렀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이 목사님에게 기적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기적이 되어서는 곤란해요. 저는 기적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주변에는 기적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에게는 대단한 인생의 드라마가 없어도 돼요. 제가 아는 존경하는 많은 집사님들 중에는 고요하고 평탄하게 주님을 사랑하면서 열정적으로 사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저는 그분들께 이렇게 말해요. “기적은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 필요한 거지, 집사님한테는 필요 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게 그런 기적을 행해 주셨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저의 이성이 깨어질 수 있었던 거예요. 저는 기적이 하나님이 바라는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취재_성재경(객원기자) 사진_하지영(studio lamp), 중앙포토
첫댓글 '인간의 고뇌를 그대로 지고 그 많은 의문들을 그대로 가지고 매일 매일 에고와 씨름하는 예배자들, 중보자들, 마르다와 마리아를 예수님이 사랑하십니다.'
나는 책 속에서 그녀의 이 말이 참 좋다. 나를 위해 하는 말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