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이 시집 ‘엄마의 흰 펜’-
산허리에 잠깐
갓 붉은 뺨 가신 그 꽃
서른이 훨씬 지나서야
처음으로 보았네
-「구면」전문 -
그는 헌신적 스승이자 난관 많은 페미니스트다. 국밥과 희망 그리고 넉넉한 둥근 밥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많은 날 아득하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눈꺼풀 비비고 사구체 격론의 일과를 보내다가 저물녘엔 수확의 밧줄 당기는 공동체를 끌어안지만 일상의 벽은 높고 험하다. 그렇다. 이상은 구체성 앞에서 수시로 곤혹스럽다. 그게 유목과 노마니즘을 지향하는 디지털 시대 현모양처 진보주의자의 실상이다. 동시에 에너지다. 기실 지금도 그는 ‘루카치의 별’을 향해 울컥 독설을 날리고 싶은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을 먹고 사는 중이다.
매트리스여! 나와 그대 언젠가는
삐걱거리고 낡고 닳아 더 이상 무엇이 아닐지니
나무의 네 귀퉁이여, 아귀다툼이여, 목관의 몸이여
그때까지는 내게 자장가를 불러다오
-「목관표」부분 -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아내는 그리고 갓난아이의 어머니는 진보의 필력에 앞서 피붙이 아이를 재워야 한다. 매트리스에 푹신 몸을 삭혔다가 기지개 펴고 일어나 젖내 나는 글을 써야 하는 야망이 잦아지지 않는데 일상의 쳇바퀴는 그렇게 가없이 돌아간다. 언제부터였나, 스크린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질곡의 일상을 필름으로 추억하려는 의도다. 그래서 연륜의 굴곡이란 자칫 주체적 갈망의 빗나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초조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타자에 대한 배려가 장맛비처럼 지루할 즈음 시인은 격정 진한 실루엣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로는 길에서 울었다
꽃을 자꾸 돌아보았다
알면서 가고 모르면서 가는
길 위에서
-「꽃이 질 때」부분 -
밭고랑에서 아이 속살로 남은 꽃잎을 본다.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고 소리 없이 잦아지는 흔한 장삼이사 꽃잎을 유독 시인의 감성으로 만나는 것이다.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눈물지으니 시인의 눈엔 모든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중년의 그는 신산고초를 편안하게 껴안지는 못하지만 시나브로 몸에 익었음을 체득한다. 애오라지 하얗게 부서지는 밤바다나 ‘잠깐만’ 하는 사이에 사라지는 ‘가는 사랑’들을 낚아챈다. 그래서 어둡고 각박할 때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기교가 너에겐 없다
그렇게 가늘지 못하다
그렇게 약삭빠르지 않다
물방울, 온 몸으로
천만 년 받아낼 뿐
천지(天地)간에 천치같이
- 「바위」전문
캠퍼스 문청 시절의 한때.
‘진솔한 글을 쓰겠다’는 습작 청년은 민족문학논쟁의 회오리 상처 과정을 거쳐 신경림을 접하면서 알토란처럼 무르익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난세의 밧줄이 놓아주지 않는다. 격동의 세월 90년대 초 교단에 서면서 겁도 없이 전교조에 가입하고 착한 사내 성황진과 짝을 맺는다. 일단 가장 적절한 짝을 만난 것이다. 참교육 일꾼들의 둥지, 그게 행복이요 동시에 늪이 되는 것이다.
반지하 10평에서 미혼의 삶을 정리하며 시를 쓰듯 청첩장 문구를 다듬는다. 다리미질 날 세운 바짓날로 식솔들 무장시키며 양 손톱 세우고 검은 천에 정교한 방점을 찍는다. 거리에 뒹구는 푸른 기호들 읽을 틈없이 더듬더듬 살림을 장만하고 아이를 키우며 학교와 집안 그리고 전교조 사무실을 전전한다. 가끔 ‘아차, 문학은’ 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여전히 진보 집단 속의 착한 여성동지 역할에 충실하려 한다.
먹으려면 한참
살구꽃 한 점 지고 있다
언제 열리나
사과꽃 한 다라 피었다
- 「입덧」부분-
아직은 멀다. 열매를 따야 숨을 돌릴 것 같은데 풋것들은 꽃 파편 청춘에 취해 있다. 안타깝게 기다려야 하는 시인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컴퓨터와 분필을 끌고 와 엘리베이터에 비춰진 자화상을 마주치며 ‘걱정 마’ 가슴을 쓸어안는다. 현관을 열면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노동량들, 그 속에서 가없이 파헤치는 기다림의 화두는 무엇일까. 이 도약의 자본주의 시대에 ‘함께 걷는 길’의 화두는 제발 무엇일까.
그게 이순이 시인의 몫이다. 그는 주저앉고 싶을 때 열 손가락이 가슴을 쓰다듬으며 일으켜 세우려 한다.(손) 짜잘한 가시 한 개에 온 신경 곤두세우다 또 금세 잊는다.(불편한 동거) 그러나 세월이 만사를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다행이랄까, 중년이 되면서 조금씩 여유와 틈새가 생긴 것 같다.
근 한 달
석 등 옆 천 년 묵은 백일홍 붉다
내가 석등이라면 기진맥진할 거다
-「지긋지긋한 사랑」부분 -
그의 이상적 로망은 무엇일까. 붉은 여자애와 취한 사내 비틀거리는 미량포구를 관조하는 눈일까. 아니면 어울리는 옷 한 벌 찾지 못한 채 갈구하는 사념 덩어리일까. 바다로 떨어지는 나뭇잎 스냅을 낚아채는 까마중 눈빛이나 비에 젖은 벗들 빈 어깨 쓰다듬는 시인의 초점일지도 모른다.
비가 오거나 낙엽이 떨어지는 그런 날은 추사고택을 찾는다. 화순옹주 홍문(紅門) 앞에서 침잠하다가 갈참나무 숲에서 저녁 풀벌레 소리와 아주 잠깐 합체한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제재’처럼 나무와의 소통으로 삭이는 것이다. 흐벅진 군살을 견딜 수 없으므로 책과 승부를 벌이기도 한다. 베냐민이나 박태원, 전태일, 김훈의 ‘언니의 폐경’이나 고미숙의 ‘연애와 호모 에로스’에서 이맛살 맞댄다. 지금도 벗들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광택을 문지른다. 숱한 사랑들 하얗게 부서진다.(그대는) 그래서 그의 시는 문장의 장치보다 주제가 더 진하다.
저는 먼 나라 여인처럼 강가에 서서 가끔씩 생각합니다. 조선조
허난설헌이라는 의심많던 여자를 간단하게 묘사할 수 없었던
우기의 날들을, 갯벌 진흙속 수만 마리 게들의 속살을,
꽃게탕에 이르러서 찢겨지고 벗겨지는 사지를
-「그 여자의 노래 1」 부분 -
진보 진영 사내들이 그렇듯.
바깥에서 헌신적 일상을 뿌리다가 집안에서는 소파에 묻혀 ‘쿵’ 쓰러지기도 한다. 사내가 종이에 얌전하게 싸가지고 온 담배꽁초 처리는 결국 아내의 몫이 된다. 시인은 집안에서 무심한 사내를 안쓰러워한다. 몸과 이상이 함께 움직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시인의 천성 탓이다. 한 천년쯤 남자가 차려놓은 밥상으로 왕후처럼 앉은 채 얻어먹고 싶지만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는 것이다. 둥지 튼 선남선녀의 의사소통과 질곡 그게 ‘여자의 노래’ 시리즈다.
강물처럼 순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한 뙤기 밭 곁에 해마다 돋는
쇠뜨기 풀같은 어머니의 노동과
순한 아이들 먹빛 눈빛 두 팔로 안으며
- 「괜찮지요」부분 -
어머니는.
사춘기 때부터 홀로 그를 키워낸 한국의 여인이다. 그니는 지금도 밥 굶지 말고 아이들 잘 가르치라는 팔순의 노심초사다. 그래서 장독대나 아궁이, 빨래터에서 불쑥불쑥 후광을 받아 감자알 스승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래봤자 시인은 그니에게만큼은 표현이 박하다. 핸드폰 메시지로 딱 한번 ‘사랑한다’를 전할 뿐.
계단 오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먼 산 바라보며 어디
선가 소쩍새 울고 실업계 아이들처럼 바스락 바스락 누렇게
말라가고
-「유고 시집」부분 -
시집이란 게 자칫 그렇다. 전화 받침대로 써먹거나 기우는 장롱 균형 세워주는 틈새 메우기 물건으로 잦아지기도 한다. 하필 수업 종소리에 마시던 녹차 컵 덮을 것을 찾다가 빼낸 게 망자 이규황 시집이다.(유고 시집) 대학 시절 시화전이나 졸업 후 전교조 집회에서 잠깐씩 만나고 씨익 철인 미소를 짓던 청년 시인이 어느 날 간이 시커멓게 썩으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프다. 시대의 변혁을 꿈꾸던 벗들이 수도 없이 철새처럼 작별했다. 그게 이순덕이요, 정영상이요, 신용길, 남광균, 배주영 동지다. 참교육의 벗들에겐 왜 그렇게 위암이나 췌장암, 담낭암들이 시도 때도 없이 가까이 다가오려 했을까.
우리는 갈퀴 같이 뻗은 어둠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 그 대단한 껍질을 모른다
눅눅한 우기(雨期)가 심심하면 우리 곁에 찾아왔으나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었을 뿐 너는 우산을 받도 돌아섰다
- 「우기」부분 -
그러나 교실 풍경은.
마땅치 못하다. 아이들이 먼저 자본에 익숙해졌다. 흘러간 흑백 사진과 함께 아이들과 어우러지려던 감회는 당연히 빗나간다. 인터넷과 스피드에 익숙한 제자들은 흑백의 추억보다는 차라리 수업이 낫다고 아우성이다.(무지개) 싸우고 토라지고 번뇌에 빠진다. 그러나 가정 방문 때 라면 그릇 옆에 놓고 퍼질러 자기도 하며 (병천이) 우리 아이들은 우쑥불쑥 커간다. 당연히 감싸야 할 일이다. 그게 선희샘과 다독이는 필연이요 몇 년째 독서 모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은아샘, 고운샘, 리나, 용순 그리고 착한 청일점 신경섭과 토로하는 이유다.
이순이 시인.
그가 감히 늦깎이 시집을 던져 놓았다. 녹록치 않을 수 있다. 사교계와 영토 확장의 역학관계 리얼한 문학 동네에 적응하지 못한 결벽증 탓이다. 오히려 구경꾼들이 조마조마하지만 정작 시인은 쓰뭉하므로 간신히 한 마디 묻는다. 벗이여, 여전히 세상의 변혁에 몸을 던질텐가. 밧줄을 쌍둥 자르고 창작에 몰입하는 이기적 문학판에서 한판 붙어볼 텐가. 흥부 시인이여, 미안하다. 사랑의 날을 어떻게 벼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