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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시대의 문학 (2021년 문예연구)
서승현
1. 코로나19와 문학
전 세계는 2020년 부터 코로나19에 의한 팬데믹 상황에 처해 있다. 세계적인 제약회사에서 백신 개발에 성공하여 일부에서는 예방접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이미 24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누적 확진자 수는 1억 909만 명을 훨씬 넘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예방접종도 곧 시작될 예정으로 접종계획이 발표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게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차적으로 실시하여 하반기까지 계속 될 예정이라고 한다. 전 세계 인구의 60% 이상이 항체가 형성되어야 안심할 수준이며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몰까지 걱정되고 있는 현실이다 보니 참으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나날들이다.
세기적 전염병이 덮친 재난영화나 소설 속 장면들이 현실에서 거듭되고 있는 이 혼돈의 와중에서 우리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을 일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마스크가 제 2의 얼굴로 필수품이 되었고, 정치나 종교, 교육, 스포츠 현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모든 행사와 문화공연이 취소되었다. 명절마다 귀성객으로 붐비던 고속도로와 휴게소가 한산하고 식당과 카페, 계절 따라 국경을 넘나들며 붐비던 해외 여행지에는 인적이 끊기고, 교실과 강의실이 텅텅 비었다. 익숙한 일상에서 낯설고 생경한 예외상태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예외상태는 그에 적응하기 위한 예외상태를 부른다. 집의 현관문을 나서면서 챙겨야 할 필수 목록 우선순위에서 단연코 1순위는 마스크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 간의 근접을 최소화 시키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언택트(Untact)라는 새로운 언어가 예외상태 속에서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언택트(Untact)란 Contact(접촉하다)에 부정의 의미인 언(un)을 합성한 말로 비대면, 비접촉의 뜻을 가진 합성어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처음 명명한 이 말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가 무인주문기를 언택트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무인주문기에서는 살 물건을 선택하지만 코로나19가 세상을 점령한 팬데믹 상황에서는 언택트가 선택의 여지없이 필수인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염병으로 인해 비대면의 일상화가 앞당겨졌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과학의 발달과 전염병이 동인이 되어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혼돈의 상태에서 언택트(Untact) 문학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본다.
문학의 창작과정은 근본적으로 비대면이었다. 드물게 합동창작이 있기도 하겠지만 내밀한 개인의식과 상상력의 산물인 까닭이다. 문학이 개인의 창작물로써 창작과정의 언택트를 논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 하겠으나 소재나 주제의식, 창작 방법, 표현과 새로운 언어 등은 그 시대와 삶을 반영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문학 창작이나 독서에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속성을 언택트 문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서 말하는 언택트의 의미와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언택트 문학이라고 했을 때 코로나 시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문학이라는 귀결에 다다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언택트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언택트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기술에 대해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2. 디지털로 비대면
디지털 미디어는 언택트(Untact)시대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매체이자 사유의 방식이다. 과학의 발전은 거리와 공간을 극복하고 편리와 혜택을 누리게 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이끈다. 그동안 각계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으나, 추진 동기 부족으로 일상생활에 대한 적용은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준비된 기술의 적용으로 우리 삶의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다.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예외상황에서 생활과 접목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이 실현됨으로써 언택트를 일상화하는 삶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실생활과 통신 네트워크를 연결해 주는 장비와 센서,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만 알면 되는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모르면 디지털문맹이라는 말이 나오고, 디지털문맹에서 탈출하기 위해 학교를 중심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상당기간에 걸쳐 일반화되어 있는 상황이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원하는 작업을 실행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춘 디지털 리터러시들이 많을수록 언택트 세상은 더욱 순조롭게 앞당겨지게 된다.
인간은 그동안 실생활에서 서로 접촉하는 생활, 즉 컨택트 행동을 하며 살아왔다.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유의 삶이 보편적인 삶의 형태였다. 통신망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기술은 보조적인 수단으로써 비대면이 필요한 방면에 한정적으로 쓰여 왔다. 서서히 확대되던 디지털 기술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비대면이 필수가 되자 급격하게 삶과 일상 속으로 전면화 되고 확대되었다. 무인주문기가 설치된 카페나 마트는 물론 온라인 쇼핑몰,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 북, 유 튜브 등 SNS를 통한 온라인에서의 비대면 만남은 대중화 되었고, Zoom, 밴드나 카카오톡 라이브 등 각종 통신망을 통한 실시간 화상회의나 강의시청, 동영상 강의 등도 일반화 되고 있다. 이 같은 디지털 기술의 보편화는 모바일 또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 익숙한 대중들에게 수긍되기 쉬운 신기술이다. 핸드폰만 작동시킬 줄 알면 대부분 해결되지만 언택트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교육이 적정한 루트를 따라 그때그때 시행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문명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팬데믹에 맞서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단체들은 디지털 기술과 AI를 활용해 효과적으로 대응 중인 가운데 비대면 상황의 지속이 디지털 문화를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있다. KT경제경영연구소와 디지털렙 DMC미디어의 '소셜미디어 현황 및 전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소셜미디어(SNS) 이용률이 세계 평균의 2배에 이르고 국가별 순위로는 3위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닐슨 코리안클릭 조사 결과에서는 올해 3월 기준 국내 소셜미디어 이용자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5.2% 증가한 3천550만명이었다. 닐슨 코리안클릭이 1분기 국내 소셜미디어의 월평균 이용자를 연령별로 조사한 결과 10대는 페이스북(221만명), 인스타그램(191만명), 트위터(86만명) 순으로 선호도가 높았다. 20대는 인스타그램(493만명), 페이스북(386만명), 밴드(178만명) 순이었고, 30대는 인스타그램(440만명), 밴드(319만명), 페이스북(268만명) 순으로 조사됐다. 40대와 50대는 밴드와 카카오스토리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는 페이스북으로 이용자가 25억명에 육박했다. 국내의 경우 가장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는 네이버의 ‘밴드’로 특히 40~50대 이용자가 많았다. (닐슨 코리안 클릭, 2020년 1분기 포털&SNS보고서,DMC미디어 재가공)
보다시피 코로나19로 인한 소셜 미디어의 활용도는 잠재적인 현상에서 현실적인 대응책으로 전면적으로 급부상 하고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개별화된 통신 기기가 있고, 그 기기들을 사용할 수 있는 시공간적 활용 능력만 있으면 실현되는 디지털의 생활화는 통신이 가능한 지구촌 어디에서나 실현될 수 있으며, 장소와 경계를 초월하는 시간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방면에서 이 같은 가속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문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문학의 속성상 작가의 창작에서 독자의 독서행위까지 비대면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만 디지털 시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본다면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종이에 필기구를 활용하여 창작하고, 인쇄로 활자화된 종이책의 독서가 전부였던 일방향적인 방법에서 컴퓨터 자판기로 글을 쓰고, 미디어를 통한 각종 플랫폼에 글을 올리고 서로 소통하며, 독서하는 동안 하이퍼 링크를 통해 검색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며, 공동제작이나 영상, 타 장르와의 융합도 가능한 시대이다. 디지털 공간에서 책 읽기를 한다는 것은 가상의 공간과 매체를 넘나드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읽기로 독서의 이동이 자유롭고 폭넓게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원적이다. 인터넷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웹사이트, web-book, e-book 등 출판사도 웹기반을 토대로 운영되면서, 종이책과 전자책이 동시에 출판되는 다원형이고 쌍방향적인 시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문학의 씨앗에 확장과 깊이를 더해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사유를 옮기는 전통적인 매체가 종이와 필기구였다면 컴퓨터에서는 자판기가 대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쓰여지는 즉시 독자에게 읽혀지기도 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사라짐에 대하여』,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12.) 에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혹하게 이동하면서 사라지는 것들- 제도, 가치, 금기, 이데올로기, 신념-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 삶에 미세하게 스며 있기에 정신적 영역 속에서 더 잘 내재화되기 위한 것이며, 어떤 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이것들은 이미지가 잘게 쪼개어져서 다른 이미지로 이동하는데 마치 개인이 네트워크들의 정신적 디아스포라 속에서 해체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정적 환영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대로라면 이미지뿐만 아니라 문학이 디지털 문명으로 옮겨 가는 동안 종이책이 외면 받으면서 인터넷 세상으로 그 지평을 옮기며 수없이 확장되고 널리 편재된 모습으로 이행되고 있는 것이다.
3. 시대와 문학
시대가 문학을 만든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격랑의 근현대사를 통과하는 동안 문학이 가야 할 길, 문학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고 실천해 왔다. 그것은 문학의 진정성이며, 옳지 않는 길에 대한 저항이자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다. 방현석은 “문학은 끊임없이 인생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어리석음, 저열함,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숭고함을 다루어 왔다. 문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본질에서 비켜서지 않게 만들고 죽음에 맞서게 해왔다.”고 말한다. 또한 김동수는 『시적 발상과 창작』에서 문학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이나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편에 서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 인간이 인간 그 자체를 사랑하는 천진한 마음을 지키고자 한다. 문학은 현실적 이해관계와 논리를 초월한 진정한 인간의 편, 거기에 우리의 문학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세상이 간과하기 쉬운 인간 그 자체의 존엄과 자유, 그것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연민, 도전 이것이 문학이 추구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대가 문학을 만든다는 이 오래된 명제를 언택트 시대에도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코로나19로 인한디지털 시대의 문학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반성하고 확장하고 상승할 수 있는지 그 여지를 살펴봐야 한다.각종 디지털 미디어를 발판 삼아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비대면의 정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소재 면에서도 환경의 변화로 문학이 다룰 수 있는 정서로 변화되겠지만 디지털 도덕과 윤리, 제도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 문학의 진정성 또한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를 키워내는 교육에 문학 본연의 정신이 포함된다면 개인화 되어가는 언택트 시대에서도 연대와 참여가 가능하고,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살아나리라고 본다.
2020년 상반기 언택트 시대에 우리나라의 소셜미디어(SNS) 이용률이 세계 평균의 2배에 이른다는 사실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보고, 읽고, 쓰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디지털 독자 또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날 작가들은 작가들보다 더 뛰어난 정보력과 미디어 활용 능력을 갖춘 디지털 독자들과 마주하고 있다. 이들이 활동하는 디지털 공간에서는 직선적인 독서에서 벗어나 횡단과 도약이 자유로운 하이퍼텍스트적인 독서가 가능하다. 수동적이며 순차적 읽기에서 벗어나 독자가 선택하는 하이퍼텍스트적 읽기에서 독자는 텍스트와 상호작용하며 텍스트의 구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인 미디어를 소유한 독자들은 완제품을 소비하던 수용자의 입장에서 벗어나 디지털 매체 활용 능력을 바탕으로 작가와 독자라는 경계를 허물고 있다. 디지털 매체 환경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디지털 원주민으로서 지니고 있는 본능적 감각과 교육된 리터러시, 이미지와 결합하는 형상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여 텍스트를 재구성하는가 하면 텍스트를 생산하고 비평하며 배포하는 작가이자 독자, 배급자로 활약한다. 그들에게 디지털 문학은 수동적 읽기의 대상보다는 적극적 참여와 유희의 대상이 된다. 문학의 형태와 질적 변화는 물론 작가의 권위를 해체하는 수평적 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적 상상력의 위축이라기보다는 확장 가능성으로서 디지털 시대에 부합하는 문학의 개념과 위상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디지털이 일상화 되자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쓰는 새로운 인류를 일컫는 포노 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의 표준 인류가 되었다고도 한다. 인류의 생활공간이 포노 사피엔스들이 스마트 폰으로 접속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의 공간으로 재편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의 공간을 지도에는 없지만 웹 주소는 있는 디지털 플랫폼으로 옮겨가는 것이 ‘정해진 미래’라면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언택트 문학은 사람이 만들고 이루는 사회와 그들이 만든 문화와 문명에 불어 닥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개하고 있는가가 화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언택트 시대를 앞당긴 현 시점에서 언택트 문학이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코로나19의 감염과 그에 대한 경각심, 대응하는 군중의 모습을 통한 성찰과 반성 등이다. 이 글에서는 네이버 블로그, 다음 카페, 네이버 밴드, 인터넷 신문 등에 게재된 코로나 관련 시들을 중심으로 언택트 문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4. 언택트 문학
언택트 문학, 사람은 맞대면하지 않지만 문학을 통해 대면한다. 언택트의 장점 중 하나가 거리 극복이다. 지방에 있으면서 문학행사나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온라인 강의 방식이 활성화 되면서 쉽게 활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고 있다. 비대면 강의의 환경 또한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장소를 불문하고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에 강의 시간에 맞춰 접속할 수 있으면 어디에서나 화면상 만남과 수업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정후 시인은 이와 관련된 산문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공교롭게도 많은 일감을 얻었다. 누군가는 직장을 잃고 누군가는 가게를 폐업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의 시 쓰는 삶에 있어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세상은 어떤 슬픔을 듣고 싶어 한다. 슬픔을 요청하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시인이나 소설가가 일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나날이 잃어가는 것들 속에서 나의 글이 살찌는 것이 나는 의아했다. 2년 동안 수업을 해 오던 외부 강의도 중단되었던 봄, 그곳에서 다시 수업을 요청 해왔다. 비대면 수업이었다. 하나는 화상회의 앱으로 사람들을 만나 시에 대해 말하는 수업이 열렸다. 다른 하나는 이 메일을 통해 서로 레터를 보내며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는 수업, 생각보다 성황리에 모객이 되었고, 나는 그 수업을 마무리 해 가는 중이다. 만난 적 없지만,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신비로움을 몇 십 년 뒤에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략) 그래도 나는 약속이 있으니까 (중략) 잘 충전된 테블릿 pc를 켜고 입장한다. 가만히 있어도 우리가 닿을 수 있다는 것. 언어를 기만하지 않고, 언어의 목줄을 따라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것,(중략) 만나지 않고 있어도 약속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최소한의 공간으로 입장한다. 그것이 불편하였으나 이제는 약속을 통해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해 졌다. (중략)
이 시대에 내가 잃은 너무 많은 것들이 언어로 보상받는다는 이 사실이 처연하면서도 내심 용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화면을 켜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의 일그러짐을 편다. 아주 작은 버퍼링이 생기는 말들 사이 속에서 우리는 최대한 끄덕인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만날 수 없어도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자꾸만 어디로 가는 것이다.
- 「만날 수는 없어도 약속이 있으니까」 부분, 서윤후, 네이버 블로그 +From Silence+
시인은 코로나19로 인한 언택트 시대, 모든 것이 끊긴 슬픔의 자리에서 자신의 글쓰기가 부흥기를 맞이하고 살찌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인간적인 친밀감이나 소소함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이 끊긴 자리는 슬픔의 자리이다. 면대면 강의가 끊긴 자리, 텅 빈 자리를 대신하여 화상 강의 앱으로 진행하는 언택트 수업이 들어서고, 그 수업에 생각보다 많은 수의 수강생이 몰려들거나 이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하는 수업이 성황을 이루게 된다. 이 같은 비대면 강의를 시인은‘만날 수는 없어도 약속이 있으니까’라는 시적 진술로 맞대면을 할 수 없으나 비대면으로 정해진 강의시간에 접속해야 하는 약속된 상황을 진술하고 있다. 비대면 시대의 문학창작이나 문학수업이 약속시간에 맞춰 이루어지는 현장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다.
삶의 양식이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질 거라고들 예측한다. 위의 예문에서 보듯 그동안 우리가 행하고 느끼고 즐거움을 얻던 일상 속 삶의 소소한 모습들마저 ‘끊긴’ 채 비대면 상태가 지속된다면 비대면이 예외상태가 아니라 대면이 예외상태로 뒤바뀌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고 두려워진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단절이 또 다른 새로움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낯설지만 되풀이하다보면 곧 익숙해지고 가까워지겠지만, 그것이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역병으로 인한 대응차원에서 이루어지다보니 즐거움과 행복감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는 필수적인 상황 아래서의 실현이다 보니 ‘끊어진’ 것이 된다. ‘끊어진’ 자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필수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언택트의 이면에는 익숙한 것으로부터 단절이라는 심리적 두려움과 소외감이 뒤따르는 것이다.
예외적인 언택트 상황 아래에서도 사람들을 모객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의 대면에서 쌓아 올려진 전경화 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의 문학 활동은 단절의 빈자리를 메꾸고자 하는 대체일 수 있다. 사라지고 끊긴 자리에서 파편화된 감정들이 언어로 재탄생하는 것. 그러나 만남이 대체된 자리에서 생성되는 감정이나 경험이 대면 상황과 똑같은 느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예외상태 속에서 전개되던 비대면 상태가 일반적인 현상으로 공유되고 정착된다면 비대면의 질서나 방식, 느낌이나 감동의 전달이 코로나 이전과는 다르게 새롭게 경험될 것이고 그에 뒤따르는 새로운 말들이 쓰여질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문명의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팬데믹급 전염병과 디지털 문명은 문학에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영역이 없으나 모여야 하고, 경계가 없으나 경계 안에 들어가야 하며, 만남이 없으나 만나야 하는 것이 그렇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인간이 너무 많은 권력을 주고, 그 권력에 순응하는 동안 인간이 얼마나 어떻게 변화해 나갈 것인가는 경계할 부분이다. 디지털 시대가 정해진 미래라 하지만 아직까지 완벽하게 정해진 미래는 없었다. 언제 어떻게 또 변화될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고 맞출 수 없는 게 새로운 미래다.
5. ‘새로운 옛날’과 ‘정해진 미래’
코로나19의 추적 경로를 살펴보면 무분별한 자연파괴가 그 중심에 있다. 인간의 잣대와 계획으로 인해 자연이 개발되고 파괴되는 동안 서식지를 잃은 개체들이 도심까지 오가며 그 경계가 무너지게 되자 발생하는 바이러스의 전파가 잦아지고 있는 점이다. 동식물에게는 해악이 되지 않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가 그렇다. 코로나19의 바이러스가 박쥐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천산갑 등으로 전파되고, 인간에게로 옮겨와 빠르게 확산되는 이동경로는 남벌과 남획으로 인해 자연 속에 있어야 할 개체들이 인간의 식탁에 오르내리기 쉬운 장소로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참담한 현상이다. 바이러스19의 이동은 곧 자연 속에 있어야할 서식처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위적 현상이므로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영역에 대한 자연의 경고이기도 하다.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인해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의 대유행이 다시 창궐한다면 그것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일상이 비대면, 온라인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은 ‘정해진 미래’이거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확장으로 도시를 등지는 ‘새로운 옛날’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 양 갈래의 시각에서 선택과 필수가 컨택트와 언택트를 넘나든다.
(가)
이젠 고향도 지웠다.
그리운 사람도 지웠다
오가는 인정도 사라지고
독거만 남았다.
악수도 친목도 공유도 사라지고
방역만 남았다
이제 시공을 지웠다.
광장의 환호도 지웠다.
지난날은 아스라이 사라지고
프레임만 남았다.
기차도 비행기도 도보도 사라지고
자판만 남았다.
동대문도 남대문도 에펠탑도 사라지고
스크린만 남았다.
오늘의 스토리가 사라졌다.
오늘의 노동도 서비스도 사라졌다.
스크린만 남았다.
사각의 프레임만 남았다.
영화관도 경기장도 수영장도 사라지고
놀이방도 피시방도 카페도 사라지고
새로운 말들이 뜬다.
새로운 도시가 아스라이 뜬다.
-「마스크2」 부분, 최기종, 다음 카페 목포작가회의, https://cafe.daum.net/mpjg/
(나)
모두 죄수처럼 얼굴을 가렸다
몰라볼 뻔 했다
삼분의 일 등교 날
수업시간도, 쉬는 시간도, 점심시간도
아이들 소리가 사라졌다
삼분의 이 등교 날
운동장 농구대에도 벚꽃 아래 벤치와 복도에도
아이들이 없다
친구들과 멀리하기, 마스크 쓰기
수업시간 질문하지 않기
음악실 노래하지 않기
봉사활동, 동아리활동 하지 않기
학교는 못된 것만 가르친다
- 「못된 학교」 전문, 이경은, 네이버밴드, 시와사람시학회.
최기종 시인은 (가) 에서 코로나19 시대의 비대면, 언택트 현상을 시화하고 있다.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거리두기를 실시하면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고향에도 못 가고, 만날 수 없기에 그리운 사람도 못 만나고, 가깝게 지내며 살갑게 오가던 이웃 간의 인정도 사라지고 오직 홀로 지내야 하는 독거만 남았다. 만나면 반갑게 손 맞잡고 인사하던 악수와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담소도 사라지고 방역만 남은 세상, 방역과 자판과 스크린과 사각의 프레임만 남은 세상은 곧 비대면으로 살아가는 세상이다. ‘오늘의 스토리’가 사라진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온기 있고 생명력 넘치는 곳이 아니다. 그동안 행해왔고 당연시 했던 일들이 부정되고 사라진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할 세상은 ‘새로운 말’과 ‘새로운 도시’로 세워지는 세상이다. ‘새로운 말’과 ‘새로운 도시’는 ‘자판기’와 ‘스크린’과 ‘프레임’으로 세우는 세상으로 이미 당도해 있었으나 미처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가까워 지지 않던, ‘정해진 미래’를 말한다. 디지털과학문명, 인공지능이 본격화되는 미래의 도시는 그동안 상상 속에서 향유되고 있었다. 가끔씩 TV나 과학 박람회 같은데서 선보이는 미래의 과학은 그저 낯설고 신비한 볼거리나 놀잇감으로 경험할 뿐이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이 맞이하는 팬데믹 상황 아래에서의 앞당겨진 미래는 일상에서 친숙한 것들의 갑작스러운 단절로부터 시작되어서 더욱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행복과 즐거움과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적이고 본받아야 할 미덕으로 여겨지고 당연시 되던 일상 속 행동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의 행동으로 금지되는 변화는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힘들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는 시간차를 두고 차츰차츰 바꿔지는 게 아니라 삶을 담보로 한순간에 변화되고 짧은 시간 안에 새롭게 학습되고 가치화되어야 하는 변화의 와중에 있는 것이다. 가히 코로나 혁명이라는 말이 와 닿는 나날이다. 우리는 코로나19 이후에 우리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야기할 것으로 어느 정도 추측하고 있지만, 변화의 방향을 아직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불안하고 두렵다. 시인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자판기와 스크린과 프레임만 남은 코로나 시대의 불안하고 두려운 현실적 상황과 ‘자판기’와 ‘스크린’과 ‘프레임’만으로 맞이해야 할 ‘정해진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어렴풋하고 불명확한 기대감을 ‘새로운 말’과 ‘새로운 도시’가 안개 속에서처럼 ‘아스라이’ 뜨는 것으로 이미지화 시키고 있다. ‘정해진 미래’를 맞이하는 시인은 ‘새로운’ 이라는 부사로 비대면의 미래가 절망적으로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 볼 수 있게 한다.
(나)는 학교에서는 올바른 것들만 가르쳐야 한다는 진리가 배반되고 새로운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혼란을 담고 있다. 교사이자 시인은 그동안 옳다고 가르치던 평범한 것들이 정신없이 부정되는 학교를 ‘못된 것만 가르친다’고 힐난한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학교의 모습이 아니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하고 재잘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침묵만 남은 학교, 함께 어울려 농구공을 던지고 뛰고 달리던 운동장에서건 삼삼오오 모여 거닐던 벚꽃나무 아래서건 아이들을 볼 수 없는 학교, 교실에서는 친구와 멀리하고 질문과 노래와 모여서 하는 모든 활동을 금지시키는 학교는 그래서 아이들에게 못된 것만 가르치는 못된 학교라는 것이다. 방역만 남은 시대의 단면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마스큰 쓴 아이들의 침묵 속에 쌓이는 단어들이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말’로 ‘새로운 도시’를 구축하고 확장해 나가는 미래는 결코 상상속의 허구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최기종 시인이 도시에서의 비대면 현실을 담담하게 담아내는 반면에 김정원 시인은 자본주의적 경제논리로 병든 현실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멀찍이 떨어져 자급자족하며 살련다
천민자본주의와 신종 바이러스가 가장 무서워하는 삶
지구다운 기후와 인간다운 삶
마침내 자연과 사회가 제자리 잡는 삶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는 이 모든 삶의 혁명을 일구러
돈이 자갈보다 쓸모없는 작은 오지마을로 가련다
- 「가장 어려운 혁명을 위하여」 부분, 김정원, 다음 카페, 광주전남 작가회의.
김정원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천민자본주의’와 사람과 사람 간에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신종바이러스’가 ‘가장 무서워하는 삶’을 ‘돈이 자갈보다 쓸모없는 작은 오지마을’에서 찾고자 한다.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삶을 사는 것, 그것만이 ‘지구다운 기후와 인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이며, ‘마침내 자연과 사회가 제자리’를 찾아 삶이 회복되는 길이라는 성찰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이때 ‘오지마을’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삶으로 글로벌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가 판치는 시대에서 인간의 천박한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말미암은 팬데믹을 피해 다시 택하게 되는 ‘새로운 옛날’이 될 수 있다.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난 시장 주체들이 범지구적 시장을 대상으로 한 자유로운 축적활동을 경쟁적으로 추구한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산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풍요를 ‘강탈에 의한 축적’으로 부른다. 양극화로 표현되는 한 계층에 의한 다른 계층의 강탈, 선진국에 의한 개도국의 강탈, 현 세대에 의한 미래 세대의 강탈 등에 의한 세계적 성장은 그 이면에는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법칙이 작동한다고 한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는 성장자원과 과실이 특정 국가, 지역, 계층 등에 집중되며 한편으로는 계층 양극화를 가져오고,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 왔다. 신자유주의 세상은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경제권은 물론 신경제권에 속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경제적으로 활용할 가치와 자본이 있는 세계 각지에 공장을 세우고 국경을 넘는 이주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흡수하는 한편, 열대우림과 숲을 파괴하는 남벌과 남획은 물론 만물, 만사의 상품화와 상품화된 모든 것들에 대해 금융적인 관점에서 가치를 평가하는 세상이다.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결혼은 물론, 스펙으로 무장한 자기 자신의 가치까지 금융으로 평가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세상, 합리성을 가장한 비합리성이 판치는 세상, 이러한 세상을 김정원은 ‘천민자본주의’로 규정하고 ‘멀찍이 떨어져’ ‘오지마을에서’ ‘자급자족하며’ 살고자 한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19 시대에 해야 할 것으로 행동백신과 생태백신을 주장한다.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행동백신이며 바이러스가 숲속에서 인간세상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게 생태백신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인류가 쌓아온 경제발전이 과잉경제이고 거품은 아닌지 성찰해 보고, 이제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서우리 삶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새롭게 찾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시인은 문명세계에 길들여지고 자본주의적 일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오지마을’로 간다는 것은 혁명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혁명’이라고 선언한다. 돈이 자갈보다 쓸모없으니 돈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며, 경제 논리를 앞세워 자연파괴가 일어나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인간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 천민자본주의가 무서워하는 삶이 되며, 사회적 거리두기가 충분하니 ‘신종바이러스’가 가장 무서워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이 회복되니 지구다운 기후와 인간다운 삶이 마침내 자연과 사회가 제자리 잡는 삶,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는 이 모든 삶’이 자연을 과도하게 침범하지 않고,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간의 품격과 가치를 찾을 수 있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 오지마을에서의 삶에서 ‘새로운 옛날’ 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김정원 시인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야기된 전 지구적인 불행 앞에서 그동안 무분별하게 행해 온 ‘천민자본주의’에 대해 성찰하며, 코로나 시대 거리두기와 비대면을 가장 원론적인 측면에서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에서 최영철 시인은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가치로 가족 간의 결속과 사랑을 강조한다. 시인은 「코로나 코로나」 에서 코로나19를 지구인이 아닌 외계인의 해악질로 상상한다.
이천이십 년의 불청객 코로나는 인간 하나하나를 뚝뚝 떨어뜨려 놓으라는 긴급지령을 받고 급파된 나쁜 놈들의 해악질이 분명하다. 지구의 힘은 틈만 나면 모여 궁리하고 작당하고 뭉치는 데서 비롯된 것이므로 어떻게든 인간 하나하나를 뚝뚝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모인 인간은 소곤소곤 쑥덕쑥덕거리다가 뚝딱 후다닥 뭔가를 만들어내지만 뚝뚝 한명씩 떨어뜨려 놓은 인간은 아무것도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연구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2020코로나는 어떻게든 인간을 갈갈이 떨어뜨려 놓으려는 다른 별의 음흉한 술책이며 이 공작을 통해 인간을 완전히 멸종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얻은 바 있다.
이런 와중에 얼굴 마주치치 마라 손 잡지 마라 했지만
어젯밤 꿈에 아버지가 오셔서 내 손을 잡고 당부하셨다
애야 무슨 일 없니, 코로나 꼬임에 빠지지 말고
니 엄마 잘 보살피고 형제들 손 잘 잡고 잘 살아라
떨어지면 안 된다 그놈들 농간에 넘어가면 안 된다
-「코로나 코로나」 전문, 최영철, http://www.busan.com
시인은 ‘지구의 힘’의 원천을인간이 ‘틈만 나면 모여 궁리하고 작당하고 뭉치는 데서 비롯된 것’에서 찾는다. 코로나19를 ‘인간 하나하나를 뚝뚝 떨어뜨려 놓으라는 긴급지령을 받고 급파된 나쁜 놈들의 해악질’로 정의하고, ‘인간을 갈갈이 떨어뜨려 놓으려는 다른 별의 음흉한 술책이며, 이 공작을 통해 인간을 완전히 멸종시킬 수 있다는 연구결과’라는 외계의 음모론으로 시적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대부분의 음모론은 사회의 위기 상황이나 인간의 한계 상황, 혹은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많이 유포되며, 상상력에 의존한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사건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려 하거나 또는 부정확한 정보들이 난무할 때,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전 세계를 혼란과 패닉 상태에 빠트린 전염병의 창궐을 부정적 감정보다 외계인의 음모라는 유머로 지친 마음을 달래준다. 시인은 또 돌아가신 아버지의 당부 말씀을 통해 어려울 때일수록 놓치지 말아야 할 가족 간의 결속과 사랑을 강조하고 당부한다. 가족 간의 사랑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그 무엇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맞대면하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고 공감과 연대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이 문학 작품이다. 아마존 정글에서도 핸드폰은 터지고 인터넷 연결이 된다. ‘새로운 옛날’ 속에서도 ‘정해진 미래’를 함께 하는 시대가 언택트 시대라 할 수 있다. 개인화가 더욱 심화되고 기계화될지언정 사람 사이에서 서로 연대감을 느끼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문학은 지켜가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촘촘한 사각의 그물망 안으로 자리를 옮겨 사라지고 끊긴 자리를 새롭게 메꾸면서다시 인연을 맺고 꽃피우며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언택트 시대의 문학이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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