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00807
길 위의 집
글 이상희, 그림 원재길
보슬비 사이로 잠깐 나온 해가 반가워 급히 빨래 널러 나가던 참이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다리에 잇닿은 그 시커먼 띠가 눈으로 뛰어드는데,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거예요. 애써 감나무며 잣나무의 높다란 초록 덩이한테 눈길을 돌리고서야 빨래 널기에 마음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대문도 없이 뜰에서 다리를 건너면 곧장 바깥으로 이어지는 길이, 그렇게 초록빛 아니면 황토빛 풍경을 이물스레 동강내며 아스팔트로 포장된 게 벌써 여러 날 전인데도 그렇습니다. 저렇게 포장해 놓으면 먼지도 안 나고, 겨울에도 눈 안 쌓이고, 여름 장마 때에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 여러모로 수월하긴 하겠다고 마음을 달래어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숲골짜기 오두막집’이랄 수도 없겠네… 아스팔트 도로변에 집 있는 거 볼 때마다 산만하고 번잡스러워 어찌 사나… 무슨 마음으로 도로에다 대고 그리 대문을 바투 냈나… 그랬는데… 다 이렇게 된 거였네. 붙박혀 사는 사람한테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책상 위에서 줄 좍좍 그어갖고 와서는 어느 날 한순간에 그냥 쫙 깔고 가버린 거지.”
답답하고 외롭고 힘없는 노인이 투덜대듯, 옆구리 터진 자루에서 알곡 새어 흐르듯, 나도 모르게 혼잣말만 자꾸 쏟아집니다.
“그 날 밤에 몇 시간째 발이 묶였더랬나… 열 시에 학원 끝난 아이 싣고, 이제 집에 가서 둘 다 편히 잘 생각만 하며 달려왔는데, 딱 길이 막혔잖아… 난데없이 트럭이며 장비들이 가로막고는 ‘못 갑니다’ 하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더라니까… 자정도 훨씬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지, 아마.”
남편은 아침부터 공사하는 걸 봐서, 식구들이 들어올 시각엔 틀림없이 공사가 다 끝났으리라 생각했답니다. 길이 막혀 못 올라가고 있다는 딸아이 전화에 깜짝 놀라 내려와 보고서는 차창 너머 내가 축 늘어져 있는 거며 딸아이가 졸고 있는 것을 그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할 뿐이었지요. 한밤중의 공사가 어서 끝나기만 기다리면서요.
“한 해 전 여름에 저 아래 큰길에서부터 중간 지점까지 공사해 올라올 때에도 고생께나 했지… 아무 연락도 못 받은 채 학원 갈 시각 맞춰 아이 데리고 나가다가… 느닷없이 길이 가로막혔으니까.”
채소밭 돌보고 수돗가로 가던 남편도 중얼중얼, 말을 보탭니다.
“논밭 가에 자동차 세워놓고… 세 식구가, 이제 막 깔아서 발이 쑥쑥 빠지는 아스팔트 수렁을 걸었지… 병구네 집까지 가서야 트럭을 얻어 타고 숲골짜기를 빠져나갔잖아.”
그 때엔 ‘어쩌면 길 공사 한다고 연락해 주는 사람 하나 없냐’고 서운해 하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그건 시골살이 초보다운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오두막집은 마을회관 스피커 소리도 닿지 않는 꼬불꼬불 구절양장 저 위쪽에 있고, 농부들은 새벽부터 논밭에 나가 일하느라 길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도무지 참견할 새가 없으니까요. 마침 길에 올랐다가 자기 발이 묶여도 터벅터벅 걷거나 자전거 타고 둑길로 넘어가면 그뿐이니까요. 애초에 구두 신고 자동차 타는 습관 들인 것이 재앙일 따름입니다.
사통팔달, 이리저리 이어지는 도시의 길하고 달리 오직 한 길로 드나들며 살아야 한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시골 살이 새내기들은 이 외길 탓에 마음을 다치고 전원생활의 꿈을 접기도 합니다. 시골 땅을 구하러 다니다가 길로 이어지지 않는 맹지(盲地)를 잘못 계약하기도 하고, 어찌어찌 한적한 곳을 구해 집을 지었다가도 토박이들한테 미움을 사면 출근길 등교길을 경운기로 가로막힌 채 홧김에 짐을 싸기도 한다는 거지요.
어쨌거나 저 시커멓고 반들반들한 길이 필경 사악한 일을 몰고 오리라는 근심이 가슴에 얹혀 내 마음은 장마 구름에 갇힌 듯 어둑합니다.
“이 길이 산 너머로 이어지는 도로가 될 수도 있지. 오래 전부터 산 너머 면 소재지로 길이 난다는 소문이 있었다니까… 눈앞의 이 길이 지금보다 더 넓어져서 편도 2차선 도로가 되고, 트럭이니 승용차가 온종일 왕왕대며 이 앞으로 지나다니게 될지도 몰라.”
하긴 저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짧은 소견으로 마구잡이 숲을 파헤치는 시행착오나 삶터를 빼앗길까 두려운 근심조차 한 치 앞일을 모르는 인생의 일이겠지요.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초록을 알뜰히 누리고 그득히 사랑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