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안 보충 자료 VII.
선교: 그리스도를 번역하기
(2007, 난곳 방언으로 (성경번역 소식지) 9/10월호에 기고)
우리가 신약성경의 기록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선교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기독교의 선교는 처음부터 “번역”의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1]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이 전달된 사건, 신약의 성경이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점,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민족의 개념을 또한 모든 언어(방언)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장차 계속해서 모든 이방 민족들에게 번역을 통하여 전파될 것을 처음부터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번역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미 모든 일반이 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필자가 본고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번역한다는 것이 기독론적으로 말하자면 계시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번역함과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 = 하나님의 자신의 번역
그리스도께서 유대교 문화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은 기독교 선교의 지축이 된다. 주님은 인간의 구속(redemption)을 위해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고,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는 어떤 한 문화권에 태어나셔야만 했다. 이러한 인간적 제한 때문에 예수의 성육신은 문화적 특수주의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초기의 유대 크리스천들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가졌던과 동일한 자민족 중심적(ethnocentric)인 사고를 갖기도 하였다. 이를 인하여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언급한대로 베드로는 바울에게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갈 2:11).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결론을 내린 내용을 보아도 성육신 사건은 유대 문화를 우월하게 해주는 종류의 특수주의(particularism)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오히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신적 차원을 인간적 차원으로 낮추어 주심으로써 (빌 2:5-8) 어떤 문화권에 있든지 인간들이 그분과 그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사건은 장차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수행하실 하나님의 선교의 다문화적인(multi-cultural) 인간접근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으로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유대인과 유대 문화를 우월하게 만들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유대 문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를 상대화시켜 준다. 즉, 성육신의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 문화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동일하게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성육신의 사건이 유대 문화 밖에서 경험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하는 수단을 사용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복음의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하여 전파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선교 대위임 명령이기도 하다 (마 28:19-20; 막 16:15; 눅 24:46-48).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이 약속대로 임하시어 사도들이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신약적 교회의 선교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교회의 선교가 이제 앞으로 어떠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인가를 시사해 주고 있다. 선교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각 문화권의 가슴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에 번역이라 함은 단순한 언어학적인 번역 이상을 뜻한다. 그것은 회심(conversion)을 일으킬 만한 그리스도의 소개이며, 따라서 가슴의 언어로만 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선교에서의 “확산 (diffusion)”의 문제
그러나 많은 경우에 불행히도 서구 선교의 역사는 번역이 아닌 획일적 전파 혹은 “확산 (diffusion)”인 경우가 많았던 것을 볼 수 있다.[2] 확산이라는 말은 전달하고자 하는 뜻만 전달되기보다는 뜻을 담고 있는 문화적 형식들까지도 전파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뜻을 전하기 위하여 사용된 문화적 형식들이 오히려 원래의 뜻을 혼돈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대표적인 확산의 현상으로 이슬람의 전파를 꼽을 수 있다. 대부분의 무슬림 사회들이 종교적으로 혼합주의를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러한 현상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슬람에서 꾸란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종교적 형식인 책 자체 역시 알라의 계시이다. 꾸란을 기록하고 있는 아랍어는 신적 언어이다. 따라서 꾸란은 번역될 수 없다. 번역이 되는 순간 꾸란은 꾸란이 아니다. 번역된 꾸란은 Tafsir라고 하여 꾸란의 해석(interpretation)일 뿐,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꾸란 뿐만 아니라 꾸란이 기록되는 데에 사용되었던 무함마드 당시의 아랍 문화 역시 신적 특수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꾸란과 꾸란의 계시를 전달하는 아랍의 특수한 문화적 형식들은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하며 결코 상황화 과정을 거친 번역 작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성격과 내용이다. 이슬람에서 신은 자신의 뜻을 계시하나 자신의 인격을 친히 나타내지 않는다. 이슬람에서의 신 개념은 초월성과 전능성이 그 핵심이다. 그가 인간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그가 전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꾸란에서의 신 계시는 인간들이 유일하신 신을 바로 알고 그의 뜻을 따라 바른 길을 찾아가도록 안내(guide)해 주는 목적을 갖는다. 이슬람에서는 신이 구태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아니, 초월하신 신은 결코 인간에게 나타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제한된 인간은 결코 신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꾸란에는 신의 인간을 향한 뜻만이 계시되며, 꾸란에 나타난 신의 뜻은 인간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무슬림들은 꾸란을 문화의 차별과 상관 없이 보편적 규범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선교는 번역이 아니라 “확산”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은 물론 자기 자신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인격으로 계시하신다. 그 계시의 절정은 바로 성육신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기초한 구속(redemption)을 위한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코뮤니케니션”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간접근 방식이라는 선교학적 의미도 깊다.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들과 코뮤니케이션을 해 오셨다. 이 마직 날에는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도 히브리 사회에서 히브리 문화 형식을 통하여 하늘의 일들을 말씀하셨다. 즉, 인간의 문화 형식을 빌어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에서는 문화의 형식과 의미라는 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성육신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히브리 사회 안에서 히브리 문화를 사용하셨는가를 세밀히 관찰해 보면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교의 내용과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이 언어이든, 가시적인 문화적 소산이든 (의식주와 같은 문화 산물들), 아니면 비가시적인 관습이나 가치 등이든 간에, 문화적 형식들이 각각 그 자체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4대째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해 보자. 여러 세대를 거쳐 기독교를 유산으로 받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건한 문화가 곧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복음적 문화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오랜 세월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 기독교화된 그들의 문화적 양식들이 곧 궁극적으로 성경적 문화라고 믿는다. 이러한 경우, 그렇게 믿음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문화적 형식은 마치 성경적으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인 양 전파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어느 특정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선교는 Lamin Sanneh의 주장을 빌린다면 일종의 “확산 (diffusion)”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특정 문화권에서 온 기독교가 (또는 기독교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선교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들 중심의 선교는 그리스도를 각 문화권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번역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심상(心像)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뿌리를 내리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독교 선교가 우리들에게 익숙한 것들의 확산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선교의 핵심으로서의 번역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를 번역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슬람과 달리 기독교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각각 자신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번역을 추구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슬람에서와는 달리 각자의 말로 번역되어야 하며, 번역된 성경은 원문 성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됨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번역”이라는 말은 단순히 언어의 통역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듣는이의 가슴에 정확히 소개하는 과정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듣는이들의 심상에 성경의 계시대로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심(conversion)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피하고 싶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을 것이다 (cf. 갈 1:6-9). 따라서 선교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계시대로 [faithful to the Bible text], 그리고 동시에 듣는이들이 이해하도록 [appropriate to the context],[3] 번역해 주는 작업이며, 이러한 그리스도를 번역하는 작업은 언어학적 기술 뿐만 아니라, 각 언어의 환경인 특정 문화를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문화인류학적 기술 역시 요구된다.
만일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회의 문화가—즉, 그들의 문화 구조 및 문화적 양식들/형식들이—복음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지 못하고 그 문화권 밖에서 복음의 개념을 차용할 경우에는, 문화적 심층구조에서의 회심이 일어나기 보다는 그 문화의 표층구조에 또하나의 종교적 층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할 경우에는 그 어떤 심오한 내적 변혁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심층구조에서의 변혁을 추구한다면, 선교는 복음의 문화적 번역을 그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각 문화권에서 제대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문화적 차이가 성경의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항상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이 중요한만큼 그 본문이 번역되는 문화권의 언어와 모든 문화적 요소들 역시 중요하고, 선교사들은 수용자 문화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은 이제 수용자 문화의 언어와 문화적 양식들로 알려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맺는말
구약에서도 이슬람의 확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한 특수주의가 보인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히브리의 신정정치적 사회에 들어가서 그들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갈렙이나 룻과 같은 이들이 그러한 경우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특수주의의 성격은 사라지게 된다. 이제 예수의 제자들의 선교는 그들이 만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에게 번역해 줄 것을 그들의 주님으로부터 명받는다. 모든 족속들로 제자를 삼아야 할 것이며,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 전파라 함은 단순한 선포의 개념이 아니라 의미 전달의 개념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제자들과 몸된 교회들을 통해서 모든 족속, 곧 모든 문화권에 번역되심으로써 성육신의 의미는 복음을 듣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 사회에 성육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다른 이방인들의 문화권에서도 번역을 통하여 성육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선교는 곧 그리스도를 번역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1] Lamin Sanneh의 책 Translating the Message, 42쪽 참조 (Orbis, 1989). 본고에서 필자는 Lamin Sanneh가 주장한 성경의 번역성(translatability)에 기초하여 선교의 핵심이 그리스도를 번역하는 데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2] “확산(diffusion)”이라는 용어는 20세기 초반 미국을 중심한 문화인류학자들이 진화론에 기초한 사회진화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사용한 말이다. Sanneh는 이 용어를 번역(translation)의 대조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3] Charles Kraft가 편집한 Appropriate Christianity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20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