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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8):이광사와 송시열과 우리 산하(下)]
동인, 서인은 조선 초 분화됐지만 연원은 고려 말기로 넘어갑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선비들은 고려에 절의를 지킨 사림파(士林派)와 새 나라 건국에 협조한 훈구파(勳舊派)로 나뉩니다. 당연히 조선 초는 요직을 장악한 훈구파의 것이었지요.
정몽주를 흠모해온 사림파는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인재를 축적합니다. 그러다 선조 대에 들어 훈구파를 제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사림파가 갈라진 것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 때문인데 선조 초기에 이 벼슬을 놓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 “김효원은 훈구파였던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반대하지요. 이때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인 동대문, 심효원의 집이 한양 서쪽인 서대문쪽이어서 양쪽을 동인-서인으로 불렀습니다.
소쇄원 부근에 있는 환벽당은 우리 정자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동인은 선조 22년, 즉 1598년 일어난 정여립의 난으로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립니다. 동인에 속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정여립의 난 후 처형됐는데 당시 그를 구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유성룡이 외면했다는 이유지요. 이발의 죽음에 동정적인 인물들은 북인, 유성룡을 따른 인물들은 남인으로 분파되는데 이는 이발의 집이 한양 북악(北岳)에, 유성룡의 집이 경북 안동에 있었기에 남인으로 불려진 겁니다. 이후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남인은 갑술환국으로 몰락합니다.
갑술환국은 1694년의 사건을 말합니다. 중앙 정계에서 수세에 몰려있는 남인은 1689년이 기사환국(장희빈을 둘러싼 서인과 숙종의 갈등)으로 기사회생했는데 불과 5년이 안돼 다시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유는 역시 장희빈의 자식 때문이었습니다. 남인들은 서인들이 숙종으로부터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키려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에게 의존하던 남인은 서인들의 민씨 복위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기고 뿌리부터 끊어놓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권력의 정점이던 숙종이 이미 장희빈에 대해 염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남인의 영수 민암이 사사되고 중심 인물들은 유배를 떠납니다. 여기서 요약하자면 동인에서 나뉘어진 북인은 남명학파(조식), 남인은 퇴계학파(이황)로 불립니다.
소쇄원 제월당의 글씨도 우암의 작품이다. 우암은 조광조를 존경했으며 학포 양팽손을 통해 양산보 일가와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서인은 숙종 때의 경신환국(1680년) 때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는데 경신환국은 남인의 영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 잔치에 왕만이 쓸 수 있는 용봉차일, 즉 기름을 먹여 비가 새지않는 천막을 임금의 허락없이 냉큼 가져다 쓴데서 비롯되지요. 비가 오는 것을 알고 허적의 집에 용봉차일을 보내려던 숙종은 허적이 벌써 가져간 것을 알고 남인을 실각시키고 서인을 중용합니다. 몰락한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파(노론-송시열), 온건파(소론-윤증, 윤휴)로 갈리며 서인도 분화한거지요. 소론은 이인좌의 난으로 몰락하고 노론은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동정적인 시파와 비판적인 벽파로 나뉘었으니 한국사회는 서인의 나라, 그중에서도 노론의 나라였던 셈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 보수의 맥도 상당히 그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암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파싸움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인물입니다. 본디 서인이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뉠 때 노론의 영수(領袖)격인 인물이 그이기 때문입니다. 우암은 효종, 현종 두 임금이 세자시절에 스승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같은 명칭으로 격상됐지요. 그는 1633년 경릉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행판중추부사 등의 요직을 지냈습니다.
낙화암이라고 쓰여진 붉은 글씨가 우암 송시열의 작품이다.
우암이 유명하게된 것은 조선시대의 각종 논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송논쟁, 즉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숨졌을 때 효종이 몇년 상을 치러야하는 지를 놓고 격론이 붙었을 때 1년동안만 상복을 입어도 된다는 ‘기년설’을 주장했지요.
우암은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에 반대하다고 숙종의 미움과 남인의 사주로 전북 정읍에서 사사(賜死)됐습니다. 하지만 1756년(영조 32년) 영의정에 추증됐고 평소 그를 존경하던 정조는 우암을 송자(宋子)로 격상시켰습니다. 공자-맹자-순자-묵자와 같은 반열이 된 거지요. 그가 남긴 유고(遺稿)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됐는데 조선 유학자가운데 도통(道統)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인물은 우암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만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지요.
우암의 글씨 가운데 제가 눈으로 확인한 것은 충남 부여 낙화암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巖)’, 전남 담양 소쇄원에 있는 제월당(霽月堂),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소쇄원 근처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정암 조광조선생 유허비 등입니다.
전남 승주에 있는 조광조 선생 유허비문도 송시열이 직접 쓴 것이다. 글씨가 모범생의 것처럼 보인다.
우암은 서예도 도학(道學)의 한 갈래로 생각했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글씨를 아름다움보다는 심획(心劃)이자 덕성(德性)의 표출로 보면서 마음을 수련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자세는 퇴계의 글씨를 평한데서 잘 나타납니다. 우암은 퇴계의 서첩을 보고 이렇게 평했지요. “따뜻하고 도타우며 편안하면서도 화목한 뜻이 뚜렷이 필묵의 테두리 밖에 나타나 있으니 옛 사람들의 덕성이 어찌 오직 언행이나 사업에서만 볼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것이 조선일보 이한우 선임기자의 평입니다. 이 기자는 “우암은 평소 길이 정해지면 옆을 쳐다보지않은 인물이었다. 글씨를 봐도 그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일체의 기교가 없는 정법(正法), 마치 모범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은 필체다.” 저도 그의 견해에 상당부분 동감했습니다.
우암의 글씨는 충북 괴산의 화양동 계곡에 집중적으로 남아있다고 하니 그곳도 나중에 돌아볼 생각입니다. 저는 서예에 대한 지식이 깊지는 않지만 전국의 유적을 다니다 때때로 발견하는 옛 선인들이 남긴 글씨도 훌륭한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