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섬들에 비해
서검도, 미법도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요.
친구들이 이번 취재 때
두 눈을 부릅뜨고! 귀를 쫑긋해야
취재거리를 잘 얻을 수 있겠죠?
우선 기본적인 서검도&미법도 자료 올려요.
꼭 읽어오세요!!
(첨부파일도 함께 올려요.)
서검도&미법도 정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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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검도, 미법도 등 민통선 안의 섬들은 외부와의 왕래에 제약이 많다. 섬에 민간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불과 5-6년 전부터. 그 전에는 섬에 친인척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 있었다. 북한의 황해도 연백과 인접한 강화의 섬들은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군사 요충지다.
강화 본섬에서 바로 이어진 직항로는 없다. 외포리에서 석모도로 건너간 뒤 다시 하리 포구까지 이동해야 한다. 아침, 저녁 한 번씩 정기 여객선이 뜰 뿐, 군의 허가 없이는 대절선도 다니지 못한다. 하리 포구에는 달랑 여객선 매표소뿐, 주변에는 인가 한 채 없다.
서검도 [ 西檢島 ]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서검리
-강화에서 서쪽으로 10.2㎞ 떨어져 있으며, 석모도 서쪽 2㎞ 지점에 있다. 동경 126°15′, 북위 37°42′에 위치하며, 면적 1.44㎢, 해안선길이 5.7㎞, 인구 104명(1995년 현재)이다. 섬은 대체로 삼각형 모양이며 대부분 저평(최고높이 56m)하다.
1월평균기온 -3.9℃, 8월평균기온 25℃, 연강수량 1,490㎜, 연강설량 220㎜이다. 넓은 간척평야가 있어 주민의 65%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경지면적은 논 39.5㏊, 밭 12.2㏊, 임야 31.9㏊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고추·마늘 등이다.
-서검리 본도와 솔책(率冊)섬 사이의 내해(內海)를 제방으로 막아 넓은 간척지를 만들어, 그곳에 대양염전(大洋鹽田)이 들어서 있다. 농업이 주산업이나 부근 해역에서 수산·양식도 성행한다. 중국에서 한강상류를 거쳐 서울로 입국하는 중국인들을 감시, 통제하는 기관이 있었으며, 강화도 서쪽에 있는 섬이라 하여 서검도라 불렀다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검도 이장님 말씀 들어보니, 지형상 서검도, 미법도가 기착지 역할을 하는 것이지 특별한 검문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하심.)
-면적 1.443㎢, 해안선길이 5.7㎞이다. 1999년 12월 말 현재 36세대에 8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삼산면의 주도(主島)인 석모도(席毛島)에서 서쪽으로 8km 해상에 위치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중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한양에 가려면 거쳐야 하는 서쪽의 검문소 역할을 한 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어업 전진기지로 해상교통의 중심지이다.
-남해안에 약간의 구릉이 발달하였고, 취락이 형성되었다. 서검리 본섬과 솔책(率冊)섬 사이의 내해(內海)를 방제(防堤)로 막아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상수리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솔책에는 수령 10∼15년의 소나무가 무성하다. 쌀·콩·고추·마늘 등이 생산되며, 기존에 있던 염전을 없애고 15만여 평의 대규모 대하 양식장을 설치하였다. 강화군 내가면 외포항에서 1일 1회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두산백과>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삼산면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황해도 연백군을 마주한다. 『해동지도』와 『1872년지방지도』 「강도(江都)」 편에 지명이 확인되며, 『대동지지』에도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강화도 동남쪽에 석모로도(席毛老島)와 주문도(注文島)가 큰 섬으로 묘사되어 있고 두 섬 사이에 서검도가 위치하고 있다. 『조선지지자료』에서 검도라는 지명이 보이고 섬 안에 검도산(檢島山)이 소재한다고 되어 있다. 이 산에 대해서는 우리말로 '검뫼산'이라 적고 있다. 옛날 중국 사신이나 상인들이 황해로부터 한강 입구로 진입할 때 선박을 검문하던 섬이라는 유래로부터 지명이 나왔다고 한다. 강화도 남동쪽에 위치한 동검도와 대비를 이루는 지명이다. 섬의 서북쪽에 서검저수지가 소재한다.<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2008.12,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삼산면의 서쪽 끝에 위치해있다. 면적은 1.4㎢이고, 해안선의 길이는 5.7km로 미법도 보다 약간 크다. 취락은 겨울철 북서 계절풍을 최소화하기 위해 섬 양 끝의 구릉지 사이의 안쪽 오목한 곳에 입지하였다. 섬 서쪽에 무인도 납섬이 있고, 북쪽의 솔책섬 사이의 간석지는 양쪽에 제방을 쌓고 염전으로 개발하였다.
-지명 : 고려 때 금음북도(今音北島)라 했고, 조선 중기 이후 서검도라 했다. 고려말이나 조선조에 이르러 중국상인이나 사신들이 해상으로 입국하려면 이곳을 지나가야 했다. 이때는 석모도와 서검도 사이의 갯골을 통과해야 했기에 출입을 통제하였을 것이다. 즉 서편의 검문소 역할을 했다고 해서 서검도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검(檢)이 신(神)을 의미하는 ‘ [검,감,곰,굼,고마, 개마]’과 통용되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과도 연계 시킬수 있다.< 인천의 섬/김종혁(외 저), 128-129쪽>
2) 지형과 갯벌 개요
...중앙에 대규모의 간척 사업으로 만들어진 염전이 있고, 솔책 주변의 해안은 소규모의 해식에와 자갈밭이 형성되어 있다. 남쪽은 60m 미만의 구릉이 동서로 뻗고 수로를 막고 있으며 , 남쪽 해안에 소규모 해식에와 파식대가 형성되었고, 파식대에는 바윗덩어리가 기둥을 이루고 있다. 파식대 바깥쪽으로는 폭 3km, 길이 5km의 대규모 갯벌 조간대가 발달되고 있어 좋은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서검도 서쪽 500m 지점에 위치한 무인도인 남도에는 해안 절벽이 발달되어 있다 <강화갯벌 및 저어새 번식지 갯벌 분포 및 실태조사 /문화재청, 24쪽>
3) 생물상
서도에서 관찰된 야생조류는 5목 6과 6종이다. 그 가운데 해양성 야생조류는 황새목 백로과 왜가리, 기러기목 오리과 흰빰검둥오리, 도요목 갈매기과 재갈매기 등이 관찰되었으며, 육상 야생 조류인 참새와 까치가 우점종인 것으로 나타났다. 섬의 남쪽에 발달한 갯벌에는 가무락, 동죽 등의 이매패류와 민칭이, 갯고둥 등의 복족류, 갯지렁이 등이 발견되었다. 해안 암반에는 총알고등, 따개비, 굴등이 부착하고 있다. <강화갯벌 및 저어새 번식지 갯벌 분포 및 실태조사 /문화재청, 24쪽>
○ 여객선은 솔책도(松柵島) 선착장으로 입항한다. 서검도와 솔책도는 썰물 때만 건널 수 있는 별개의 섬이었으나 지금은 간척으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두 섬 사이의 갯벌은 15만 평의 논으로 바뀌었다. 주민들은 서검도를 안동네, 솔책도를 솔착이라 부른다.
○ 군사분계선 상의 바다에서 고기잡이가 자유롭지 못해 교동도나 석모도 주민들처럼 쌀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
○ 서검 저수지에 낚시터가 개장된 것은 10년 남짓. 가기 어려운 탓에 저수지에는 지금도 물고기들이 제법 많다. 외지에서 들어와 정착한 낚시터 관리인은 북한에서 떠내려 온 ‘떼목’을 수집 중이다.
○ 나무 절구통과 소구유통, 벌통 등으로 언젠가 전시장을 만들 계획.
○ 섬에는 고라니가 많다.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밭에는 모두 울타리가 처져 있다. 주민들은 한 해 한 번씩 고라니 사냥을 통해 개체수를 줄이지만 무용. 금세 번식하여 섬을 뒤덮는다. 북한이나 강화 본섬 등지에서 헤엄쳐 오는 것을 막아낼 도리가 없는 탓이다.
○ 최근(2009년) 서검도의 땅값이 많이 올랐다. 김포 매립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서검도에 특수 폐기물 매립장이 들어설 거라는 소문 때문.
미법도(彌法島)
1) 일반현황
지명 ; 예 문헌에 나타난 이름들을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매잉도 (賣仍島 :『고려사』, 미법도 (彌法島: 『세종실록』), 며법도 (㫆法島: 『호구총사』)이다. 물[水]이 음차로 매(賣)와 미(彌)로 표기되는데 이는 미나리=물나리, 미더덕=물더덕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잉(仍)은 내야(乃也)로 내(乃)와 통하는 글자로 내(內), 노(奴 ), 뇌(惱), 곧 ‘땅’의 의미로 사용됐다. 법(法)은 ‘산이나 산줄기가 길게 뻗어나간 곳’으로 쓰였기에 매잉도(賣仍島)는 ‘물많은 땅’이고 미법도(彌法島)는 ‘물과 산줄기가 길게 뻗은 섬’인 것이다. 면적 0.95㎢, 해안선 길이 4.8km의 작은 섬이다. <인천의 섬/김종혁(외 저), 129쪽 >
옛날 미법도는 서검도와 함께 외국에서 온 배를 검문했다.(서검도 이장님 말씀 들어보니, 지형상 서검도, 미법도가 기착지 역할을 하는 것이지 특별한 검문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하심.) 외래 선박들이 항해 중 사망한 이들을 매장하고 떠난 까닭에 섬에는 후손 없는 묘지가 많다. 인근의 섬들처럼 본래 어업이 주업이었으나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고 남북관계 악화로 갯벌 출입이 제한되면서 농업이 주업이 됐다. 2년 전만 해도 낙지, 가무락, 백합, 숭어 등을 잡아 가구당 년 간 1천만 원 이상의 소득을 올렸었다.
미법도에는 미법사라는 절이 있는데, 과거 신비의 보물섬으로 불렸다. 미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미법사를 찾으면 보물이 나온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있었다. 과거의 미법사 자리는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똑같은 이름의 신축절이 있다.
대부분의 섬주민들은 개신교나 천주교의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절이 존재하는 섬은 찾기가 힘든데, 그 작은 섬에 절이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오신 보살님이 매일 치성을 드리고 있다. 인구도 많지 않은 섬이건만 예부터 법없이도 사는 섬이라는 이름처럼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저녁 마을분들과의 이야기 속에서 100년 넘은 상여가 존재한다는 말에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서검도. 비록 100년된 상여는 찾지 못했지만 대신 공동묘지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했다.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는 묘지에는 당시 꽤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 묻혔는지 상석과 문인석등이 반쯤 파묻힌채로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육지사람이 트럭을 몰고 들어와 마구 실어갔다고 하는데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것들을 정리하다보면 서검도의 또다른 역사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삼산면에서 가장 작은 섬으로, 주민은 3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 면적은 0.98㎢, 해안선도 5㎞가 되지 않는다. 미법도는 서도의 독도로,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심리가 양순하고 법 없어도 산다는 뜻에서 미법(未法)이라 칭했다. 마을 입구에 ‘1996년도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지만 과거 ‘간첩죄’라는 무서운 죄목으로 정부가 주민 대부분을 ‘빨갱이’로 몰아세우기도 했다.
1965년 10월 29일, 미법도 주민 109명이 비무장지대에 있는 황해도 은점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던 중 납북됐다가 11월 20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비극의 시작. 1976년, 납북됐던 어민들은 고정간첩 혐의로 줄줄이 감옥에 갔다. 마을의 민방위 소대장이었던 한 어민은 ‘인천제철 폭파 공작’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미법도 주민 정씨는 1982년, 가혹한 고문 끝에 ‘북한에서 포섭돼 간첩활동을 했다’는 취지의 자백을 한다. 아내와 동생도 고문 끝에 ‘정씨가 간첩 행위를 했다’고 허위 진술하고 만다.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기소된 정씨는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 복역 후 199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 후에도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의 하나인 ‘미법도 간첩사건’의 전말. 2012년 9월 대법원은 피해자와 가족에게 국가가 25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참고자료]
1.『섬을 걷다』, 강제윤 지음, 홍익출판사, 2009.
2. 『바다 그리고 섬을 품다』, 노형래 지음, 이너스, 2012.
3. 바다에서 인천의 미래를 보다, 인천녹색연합&인천의제&인천일보,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