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우주의 율동을 따르거라"[가족에게 보내는 편지-한승원]
2005.5.17 (화) 17:29
불타오르는 듯한 산의 진달래와 토굴 주위의 난만하던 철쭉들이 지고 나니 연못의 자색 수련 꽃이 하루 30여 송이씩 벌어진다.
수련은 우주의 생체 시계이다. 아침 해가 뜨고 훈훈한 기운이 돌면 꽃잎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가 한낮에 만개한다. 2시 반쯤부터 오므라지기 시작하여 5시가 가까워지면 꽃잎을 볼 수 없도록 겉껍질을 닫아버린다. 날이 어두워지면 깊이 잠들었다가 이튿날 아침 7시쯤부터 겉껍질을 벌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잠잘 수(睡)자 수련이다.
간밤 내내 휘파람새와 소쩍새가 경연이라도 하듯이 노래하여댔는데 치자꽃 색의 아침 햇살에 물든 마당으로 나서니 아카시아향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황달이 들기 시작하는 보리밭 옆의 못자리논과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합창을 한다. 찔레꽃들이 흐드러져 있는 산언덕 아래에 있는 독거노인의 닭우리에서는 암탉이 알을 낳았다고 호들갑을 떨어대고, 수탉이 두 날개를 치면서 하늘을 향해 목청 높여 자기 존재를 선언하고 대밭에서는 황소뿔 같은 죽순들이 올라온다.
5월이다. 앞산에 뒷산에 싱그러운 신록들이 꿈틀거린다.
좋은 음식을 보면 부모님과 아들딸이 생각나고 술을 보면 벗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나는 자연의 새 얼굴 새 몸짓 새 소리 새 향기를 대하면 도시에 사는 아들딸들이 떠오른다. 새로 나타난 그 세상을 나 혼자 보기 아깝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주의 율동이다. 비가시적인 파도인 그 율동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것은 자연이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도시와 제도 속에 갇혀 살기에 길들어 있어서 우주의 율동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지난해 이른 봄에 문안 인사차 들른 한 친지가 네 할머니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하고 여쭙자 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요즘 마른나무에 물오르는 소리를 들어요.”90대 초반인 네 할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말씀은 당신이 우주의 율동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 우주의 율동대로 사는 것이 90세 넘도록 오래 살고 계시는 이유 아닐까.
이후 나는 자연의 몸짓이나 숨결에 동화되어 살려고 노력한다. 우주 율동의 단초를 늘 네 할머니에게서 찾곤 한다. 가령, 네 할머니께서 식후에 신 김치 국물을 몇 모금씩 마시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대로 따라 했다. 그랬더니 식체가 없어졌다.
나는 지네에게서도 배운다. 보통 때는 한밤중에 출몰하던 지네가 초저녁이나 아침에 갑자기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그 무엄한 놈을 잡아 유리병 속에 가두고 난 얼마쯤 뒤에는 비가 오기 마련이다. 물을 싫어하는 그놈들은 기상 예보를 듣지 않고도 비가 올 것임을 예감하고 내 토굴 안으로 대피하는 것이다.
남아시아 지진 해일 때에 쥐나 원숭이나 벌레들은 모두 미리 산으로 대피했으므로 무사했다고 하지 않더냐. 소설가는 우주의 율동에 민감해야 한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우주의 율동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의 율동은 질서인 것이고 순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주의 결이고 무늬이다.
선승들은 이 말을 두고 쓴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착되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 삶이 우주의 율동에 따라야 한다면 우리가 쓰는 소설 문장 하나하나도 그 율동에 따라야 한다.
소설가 한승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