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안음현(安陰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1권 경상도(慶尙道) 안음현(安陰縣)
동쪽으로 거창군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쪽으로 전라도 장수현(長水縣) 경계까지 57리이며, 남쪽으로 함양군 경계까지 5리이고, 북쪽으로 거창군 경계까지 50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2리이다.
【건치연혁】 이안현(利安縣)은 본래 신라 마리현(馬利縣)이다. 경덕왕이 이안현이라 고쳐서 천령군(天嶺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는 합주에 이속시켰고, 공양왕 때에는 감음(感陰)에 이속시켰다. 감응현(感應縣)은 본래 신라 남내현(南內縣)이다. 경덕왕이 여선(餘善)이라 고쳐서 거창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감음이라 고쳤고, 현종 9년에는 합주에 이속시켰다. 의종(毅宗) 15년에 현 사람 자화(子和) 등이, 정서(鄭叙)의 아내가 현 아전 인량(仁梁)과 함께 임금과 대신을 저주한다는 것으로써 무고하였으므로, 자화는 강 복판에다 던지고 현은 강등시켜 부곡(部曲)으로 만들었다. 공양왕이 다시 감무를 두고 이안현을 내속시켰다. 본조 태종조에 관아를 이안에 옮기고,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이안(利安)ㆍ마리(馬利)ㆍ화림(花林)ㆍ감음(感陰)ㆍ남내(南內)ㆍ여선(餘善)
【성씨】 이안(利安) 조(曺)ㆍ임(林)ㆍ하(河)ㆍ김ㆍ표(表) 감음(感陰) 공(孔)ㆍ황ㆍ서문(西門)ㆍ서(徐)ㆍ최, 강(姜), 이(李) 내성(來姓)이다.가을산(加乙山) 고ㆍ윤ㆍ박ㆍ안ㆍ송.
【풍속】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였다 관풍안에, “억세고 사나우며 다투고 싸움하기를 좋아하였다.” 하였다.
【산천】 성산(城山)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지우산(智雨山)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황석산(黃石山) 현 서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천왕점(天王岾)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영취산(靈鷲山) 현 서쪽 50리 지점에 있다. 백운산(白雲山)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함양군 경계이다. 덕유산(德裕山) 현 서북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및 장수현(長水縣) 경계이다. 육십현(六十峴) 현 서쪽 60리 지점에 있으며 전라도 장수현 경계이다. 동천(東川) 객관 동쪽에 있다. 덕유ㆍ지우 두 산 물이 현 북쪽에서 합치며, 남쪽으로 흘러서 함양군 남계(藍溪)로 된다.
【토산】 호두[호도(胡桃)]ㆍ오미자ㆍ은어[銀口魚]ㆍ꿀[蜂蜜]ㆍ감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이버섯[石蕈]ㆍ대[竹]. 『신증』 사향ㆍ웅담ㆍ당귀.
【성곽】 황석산성(黃石山城) 석축이며 둘레는 2천 9백 24척이다. 성 안에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객관 북쪽에 있다. 『신증』 현감 정여창이 고쳐 짓고, 이름을 광풍(光風)이라 하였다.
『신증』 제월당(霽月堂) 관풍루와 연해 지었다.
【학교】 향교 현 북쪽 3리 지점에 있다. 현에 옛날에는 학교가 없었으므로 학생들이 관아에 우거하였는데, 성화(成化) 9년에 현감 최영(崔榮)이 후암사(厚巖寺) 옛 터에 지었다. 향교 남쪽에 점풍대(點風臺)가 있다. 두 가닥 물이 대 밑에서 합류하여 동천이 되는데 증점(曾點)이 무에서 바람 쏘인 뜻을 따서 이름하였다.
【역원】 임수역(臨水驛)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수원(藪院)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반락지원(半落只院)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장풍원(長風院)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신증』 【교량】 동천대교(東川大橋) 동천에 있다. 용문교(龍門橋) 향교 앞에 있다. 장풍교(長風橋) 감음현 하류에 있다.
【불우】 영각사(靈覺寺) 덕유산(德裕山)에 있다. 극락암(極樂庵)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장수사(長水寺) 지우산(智雨山)에 있다. 절 앞에 폭포가 있고, 그 밑에 용추(龍湫)가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가을산소(加乙山所) 현 서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딴 이름은 옥산(玉山)이다. 고려 때에는 함양 속현이었는데, 그 뒤에 내속되었다. 감음 폐현 현 북쪽 35리 지점에 있으며 군창이 있다.
『신증』 【명환】 본조 정여창(鄭汝昌)ㆍ문관(文瓘).
【인물】 고려 하천(河千) 고종 때 사람이다. 성품이 솔직하고 문장을 잘하여 당시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두 그의 솜씨에서 나왔다.
본조 임정(林整) 벼슬이 서경 도순문 찰리사(西京都巡問察理使)에 이르렀다. 임득정(林得禎) 정의 손자이다. 무예로써 현달하여 벼슬이 절도부사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반전(潘腆) 홍무 무진년에 왜적이 현에 침입하여 아비 숙(淑)을 잡아 갔다. 전이 은띠와 은덩이를 가지고 왜적에게 가서 아비와 바꾸기를 청하니, 왜적이 의롭게 여겨서 허락하였다.
본조 박인손(朴仁孫) 11세 때에 그의 아비가 악질에 걸렸는데, 의원이 무명지의 뼈가 매우 좋다 하였다. 인손은 곧 손가락을 끊어 술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병이 나았다. 조귀천(趙貴千) 아비가 악질에 걸렸다. 무명지를 끊어서 국에 타서 먹게 하였더니, 아비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하고 복호(復戶)하였다.
【열녀】 본조 옥금(玉今) 17세 때에 남편이 죽고 시부모를 따라 살았다. 길에서 마을 사람을 만났는데, 욕보이고자 하므로 거절하고 복종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이 핍박하여 문까지 오니, 옥금은 피할 수 없음을 알고 목매어 죽었다.
【제영】 수성촌적격전림(數聲村笛隔前林) 배둔(裵屯)의 시에, “아침에 산음을 떠나 저물녁에 안음에 와서, 홀로 동헌에 기대니 가을 밤이 깊어 온다. 한 점 등잔불은 벽을 반쯤 밝히는 데, 두어 마디 피리 소리 앞 숲에서 들려오네. 만고의 흥망 속에 산은 옛날 그대로이고, 천 가지 영욕속에 머리가 눈 빛일세. 성은을 보답하지 못하고 늙음이 슬퍼라. 삼각산과 한수가 그리워 길게 읊조리네.” 하였다. 십리계산위고현(十里溪山圍古縣)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10리에 뻗은 시내와 산은 옛고을을 둘렀고, 두어 집 울타리는 성긴 숲에 보이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영종 4년에 혁폐하고, 역적 정희량(鄭希亮)이 역모하여 혁폐하고, 현의 땅을 함양과 거창에 분속시켰다. 12년에 다시 두고 43년에 안의(安義)라 고쳤다.
【고읍】 감음(感陰) 북쪽 35리. 본래는 신라의 남내(南內)이다. 경덕왕(景德王) 36년에 여선(餘善)으로 고치고, 거창군의 속현으로 하였는데 고려 태조 23년에 감음으로 고쳤고, 현종 9년에 합천에 속하게 하였다. 의종 15년에 무고(誣告)한 옥사로 인해 부곡으로 강등되었는데, 공민왕 2년에 다시 감무를 두고 이안(利安)을 내속시켰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황곡(黃谷) 동남쪽 끝이 20리이다. 초참(草站) 동쪽 끝이 20리이다. 대대(大代) 위와 같다. 지대(知代) 북쪽 끝이 20리이다. 남리(南里) 북쪽 끝이 30리이다. 고현(古縣) 북쪽 끝이 10리이다. 동리(東里) 위와 같다. 북상동(北上洞) 북쪽으로 끝이 60리이다. 북하동 북쪽으로 끝이 50리이다. 서상동(西上洞) 서북쪽으로 끝이 70리이다. 서하동 서쪽 끝이 40리이다. 위의 6면은 감음의 옛 현 땅이다. ○ 가을산소(加乙山所) 지금은 옥산(玉山)이라 부르며 서쪽으로 4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서쪽으로 3리이다. 성산(城山)이라 부르며 유적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고현창(古縣倉) 감음 땅이다. 옥산창(玉山倉) 서쪽으로 40리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동천(東川). 용문교(龍門橋) 향교 앞. 장풍교(長風橋) 북쪽으로 40리, 감음현의 하류이다.
【토산】 닥종이[楮]ㆍ호두[胡桃].
【누정】 광풍루(光風樓)ㆍ화학루(花鶴樓) 모두 읍내에 있다.
【사원】 용문서원(龍門書院) 숙종 계미년에 세웠고 현종 임인년에 사액했다. 정여창(鄭汝昌) 문묘 편을 보라. 정온(鄭薀) 광주(廣州) 편을 보라. 황암사(黃巖祠) 숙종 을미년에 세우고 정미년에 사액하였다. 곽준(郭䞭) 호는 존재(存齋)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벼슬은 안음현감이었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조종도(趙宗道) 호는 대소헌(大笑軒)이며 본관은 함안이다. 벼슬은 함양 군수(咸陽郡守)였는데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용(鄭庸) 자는 자상(子常)이며 본관은 진주이다. 임진왜란 때에 문경(聞慶)의 가쉬(假倅)였는데 진주에서 죽었다. 유명개(劉名蓋) 자는 현보(顯普)이며 본관은 거창이다. 정유년 난리 때에 거창 좌수(座首)로 이 읍에서 순절하였다. 위의 두 사람은 숙종 을미년에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