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는 부모의 체면용?(박만제) - 문일지십(聞一知十)
/박만제 부산용인고등학교 교장
박목월의 시 중에 '개안(開眼)'이라는 작품이 있다. '나이 60에 겨우/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신(神)이 지으신 오묘한/그것을 그것으로/볼 수 있는/흐리지 않은 눈/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채색하지 않고/있는 그대로의 꽃/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눈이 열렸다.'
이 시를 읽는 순간 다시 한 번 개안을 했다. 아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아들에게 너무 기대를 많이 했고 알게 모르게 부담을 많이 주었다. 지금 보니 아들은 다행히 평범할 정도의 능력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태어날 때에는 사주(四柱)를 잡고, 작명(作名)을 하고, 양질의 이유식과 위생적인 보살핌과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일만 하기를 바라고 남다르기를 원했다. 마치 영국의 '로열 베이비'처럼.
그리고 아들에게 기대한 것은 문일지십(聞一知十)이었다. 남보다 빨리 한글을 깨치기를 원하고 수학문제는 암산으로 풀어도 틀리지 않기를 바라고, 영어는 원어민, 농구는 허재, 축구는 차범근, 야구는 이만수, 음악은 정경화 정도 되기를 바랐으며, 성격은 성인군자 반열을 기대했다.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쓴 일기를 보고 감탄을 했다. 고사성어(故事成語) 한 마디에 온 가족이 희열을 맛보았다. 그리고 소망했다. 대학은 최소한 S대학 법학과, 직업은 검사나 판사, 교수 정도는 가뿐하리라 했다.
기대는 중학교에서 막히기 시작했다. 외워야 할 영어단어는 하루하루 쌓이고, 수학문제는 빨간 줄이 늘어나고, 전체 성적은 들쭉날쭉에 하향곡선을 그렸다. 아들의 귀여운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엄마는 아들과 아빠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상황이다. 집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썰렁이다.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정은 불안의 장소이고, 학교에서는 비주류가 되어 눈치만 보게 된다. 아들이 도피할 곳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공부를 하지 말라고 해도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다. 노래를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가수 못지않은 실력의 아이가 있다. 타고난 손재주가 돋보이는 아이가 있다. 효도를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어른을 잘 섬기는 아이가 있다. 한 마디만 해도 열을 알아차리는 아이가 있다.
반면에 챙겨야 할 아이들이 있다. 부모의 조언이나 선생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는 아이가 있다.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가 있다. 핑계를 잘 대는 아이가 있다.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가 있다.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행동을 하는 아이도 있다.
어른들이 욕심을 버려야 아이들이 건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자.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감사하고 무사히 군대라도 마치면 감사하고 시집, 장가라도 가면 감사하고 밥벌이라도 하면 감사하다고 생각하자. 비싼 외식을 하지 않아도, 고급승용차를 타지 않아도, 결혼식장에 화환이 적어도 행복해 질 수 있도록 생활하자. 부모의 체면 때문에 아이들이 방향을 잃을 수 있다. 아빠도 평범하고 엄마도 평범하면서 자녀가 무한 능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은 착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