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자 표기법에 대한 바른 인식(김세중)
김세중(金世中) / 국립국어연구원
작년 7월 고시된 새 로마자 표기법의 이모저모를 2000년 9월호부터 지금까지 12회에 걸쳐 살펴보았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성씨 표기 외에는 모두 설명한 셈이다. 이번 호에서는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몇 가지 점에 대해 강조하고자 한다.
우선 로마자 표기법을 왜 지켜야 하는지, 로마자 표기법을 지키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로마자 표기법을 지키면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인터넷에는 엄청난 양의 문헌이 계속 쌓이고 있다. 만일 '독립문'에 대해 서술된 문헌을 찾는다고 가정하자. '독립문'의 표기가 Dongnimmun, Dogribmun, Dokripmun, Dongnipmun, Tongnimmun 등으로 문헌마다 달리 표기되어 있다면 Dongnimmun으로 찾는 사람에게는 Dongnimmun으로 기록된 문헌만 찾아질 것이다. 그러니 '독립문'에 관한 모든 자료를 찾기 위해서 일일이 여러 가지 표기를 다 넣어서 검색을 해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그리고 표기법과 달리 아주 특이하게 적어 놓은 자료는 영영 찾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문헌이 많아도 찾지 못하고 이용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인터넷의 편리함은 표기가 통일되어 있을 때에 누릴 수 있지 표기가 뒤죽박죽이 되어 있다면 편리함을 누릴 수가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겪는 일이 있다. 한 단체의 일행이 외국에 가서 호텔에 투숙하였다. 동료의 방 번호를 알기 위해 접수대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 사람의 이름을 묻는다. 이때 동료의 이름이 로마자로 어떻게 되는지 몰라 당황하게 된다. 이것저것 대어 봐서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끝까지 그런 사람은 없다는 대답만 들을 뿐 방 번호를 알지 못하는 어이없는 경우까지 생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표기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로마자 표기를 하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생기는 일이다. 표기법대로 표기한다면 이런 일은 안 생긴다.
다음에, 로마자 표기와 발음을 지나치게 연관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자 표기법대로 표기된 것을 외국인들은 아주 엉뚱하게 발음하니 그 표기는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표기를 비웃기도 한다. 여기에는 사대주의와 자기 비하 의식이 깔려 있다. 누가 영어 knife를 '크니페'라 읽는다면 비웃을 것이다. 영어로는 '나이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북선'을 Geobukson이라 적으면 '지오북선'이라 읽는 외국인이 반드시 있는데 그 외국인을 비웃기보다는 Geobukseon이라는 표기를 비웃는다. 영어 knife에 대해서는 철자를 탓하지 않고 '크니페'라 발음하는 사람을 탓하면서 한국어 Geobukseon에 대해서는 '지오북선'이라 발음하는 외국인을 탓하지 않고 Geobukseon이라는 표기를 탓하는 것이 바로 자기 비하 의식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로마자는 언어마다 음가가 다르다. Geobukseon의 발음이 '지오북선'이 아니라 '거북선'임은 외국인이 배워야 한다. 외국인이 전혀 배울 필요가 없는 표기법이란 있을 수가 없다.
작년에 새 로마자 표기법을 고시할 무렵 표기법이 왜 이렇게 자주 바뀌느냐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1948년에 처음 공포된 것을 1959년과 1984년에 각각 개정했고 2000년에 다시 개정하였다. 즉 네 번째 표기법인 셈이다. 그런데 이번 표기법은 종전의 표기법과는 다르다. 1948년과 1984년의 표기법은 표음법을 원칙으로 하면서 국어의 'ㄱ, ㄷ, ㅂ, ㅈ'을 k, t, p, ch로 적는 방식이었고 1959년의 표기법은 국어의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하면서 한글 글자대로 적는 전자법이었다. 표음법과 전자법이라는 극단적인 두 표기법은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새 표기법은 국어의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하면서 표음법 방식을 택하였다. 로마자 표기는 외국인을 전제하고 하는 만큼 국어의 발음을 대상으로 해야 하고, 또 국어의 'ㄱ, ㄷ, ㅂ, ㅈ'과 'ㅋ, ㅌ, ㅍ, ㅊ'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므로 'ㄱ, ㄷ, ㅂ, ㅈ'을 g, d, b, j로 하게 된 것이다. 새 표기법은 표음법이면서도 국어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한 것으로서 또 해볼 다른 방법이 없다. 즉, 다시는 고칠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법규는 사회 구성원들이 잘 지키면 지킬수록 구성원들에게 편리함을 돌려준다. 아무리 좋은 표기법이라도 따르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오랜 진통 끝에 찾아낸 최대 공약수라 할 새 로마자 표기법을 널리 사용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편리해짐은 물론 후손들에게 혼란 대신에 질서와 편익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