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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하숙생 - 안유환
몰래 보던 음화를 들킨 것처럼 상수는 얼른 스마트폰을 껐다. 참으로 반가운 이름, 정다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흠칫했다. 큰 비밀이 탄로 난 것 같은 낭패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누구로부터 쫒기는 것처럼 상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금강공원 산책로 연못가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주먹을 쥔 장정의 팔뚝만한 돌부처에 남녀 구분 없이 절을 하고 조약돌을 한 개씩 올려놓기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날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이 사월초파일, 목욕재계를 하며 절에 갈 준비를 하거나 삼사순례를 떠났는지 모른다. 흠칫 하고 뛰던 가슴이 좀 진정되고 마음은 다시 안정을 회복했다.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되는 것인가?
아무도 모르는 까마득한 기억인데, 상수는 자위를 하며 스마트폰을 다시 켰다.
「백 선생님 아니세요? 진경입니다. 성진경, 기억하시죠. 선생님 책 잘 읽었습니다.」
상수의 첫 소설집이 인터넷에 소개된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오랜 공직을 떠나면서 뒤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기억 하고말고,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지.’
시간이 지나면 많은 일들이 잊히기도 하지만 누구나 자기 양심의 상처는 쉬 지워지지 않는다. 돌비에 새긴 것은 혹 다른 사람이 지울 수 있어도 가슴에 새겨진 것은 아무도 지울 수 없고 스스로도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지우려고 애쓰면 쓸수록 그 흔적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진경이 뿐만 아니라 유경이도 알지’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도 카톡에 답신을 올리지 않았다. 알은 채 문자를 보낸다면 까마득한 어느 날 끊어졌던 진경이의 편지가 다시 이어질 것 같은 엉뚱한 우려도 되었다. 어디에 사는지, 두 자매가 결혼은 했는지,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계시는지, 모두 궁금했지만 못 본 척 외면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는 혹 먼저 본 사람이 상대방을 외면하며 지나칠 수 있지만 스마트폰에 뜨는 문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다. 상대방에게 말을 했다면 그 소리는 곧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SNS에 올린 글은 허공에 새겨놓은 비문이다. 올린 사람이 스스로 삭제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혹 한순간 문자는 외면할 수 있지만 기억의 비문은 외면할 수 없다. 그토록 그를 따르며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던 진경의 문자를 외면했던 것은 물속 깊이 가라앉았던 죄책감을 휘젓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많은 화제를 뿌렸던 거가대교가 개통 된지 7개월이 지났다. ‘세계 최초 최대의 해저 침매터널!’ 부산에서 거제도 까지 140km를 60km로 단축하고 주행시간도 종전의 두 시간 반에서 50분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처음 다리를 개통하고는 거제도 까지 여전히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전국 각지에서 거가대교를 보려고 몰려온 사람들의 차량이 한꺼번에 북새통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상수도 모처럼 아내와 함께 신정 연휴를 기해 개통한지 20일이 가까운 거가대교를 구경하려고 차를 몰았으나 교통 혼잡으로 두 시간 넘게 기다리다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었었다. 상수는 한차례 씩 가보던 거제도지만 오늘은 그때 못 본 거가대교를 구경도 할 겸 새로운 작품 구상을 하기위해 혼자서 집을 나섰다. 아내의 약국에 들러 비타500 한 박스와 한방 파스도 챙겼다.
“여보, 언제쯤 돌아오나요?”
아내가 잘 다녀오라는 인사대신에 하는 말이었다. 혼자서 자주 여행을 떠나는 남편에게 언제나 목적지를 묻지는 않았다. 수시로 옮겨 다닐 수도 있는 것을 두고 구태여 목적지를 알고 싶지 않았고 언제 돌아오는 지가 궁금할 다름이었다.
“금방 올거야.”
상수는 습관처럼 대답하고 승용차에 올랐다. 그는 나름대로 불만에 차있었다. 아내와 오붓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도 좀처럼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차라리 아내가 광복동 대형 약국의 관리약사로 근무할 때가 좋았다. 적당한 때에 휴가를 얻을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해외여행에도 시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국을 직접 경영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상당한 월세와 관리약사의 월급과 기타 비용을 제하고 나면 수지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다. 차츰 아내는 약국의 붙박이가 되었고 상수는 나름대로 자유로운 시간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아이들도 집에 없는데 밥만 먹고 집을 나서는 상수는 늘 하숙생 같았다. 그러다보니 함께 여행하는 것은 언제나 아내의 의중과 약국의 형편에 따라 좌우되었다. 방학에 아이들이 내려오고 아내가 일정을 잡으면 목적지는 상수가 탐색을 하고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는 것이었다.
상수는 이번 목적지를 칠천도(七川島)로 잡았다. 거가대교가 개통되기 전에는 마산을 거쳐 통영 쪽으로 돌아 거제대교를 건너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러나 그처럼 붐비던 거가대교가 오늘은 오히려 한산한 편이었다. 상수는 대교를 통과하고 10여분을 더 달려 그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년 전 새천년이 되는 첫날 칠천 연육교가 개통되었기에 섬이란 옛말이 되었다. 칠천도는 임진왜란 때 세 차례나 일본 수군에게 패한 뼈아픈 기록을 갖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순신을 모함했던 원균이 전사했던 곳이기도 하다. 거제도는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가장 큰 섬이며 이 섬에 따른 섬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섬이 칠천도이다.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지배적인 것은 글자 그대로 7개의 하천이 흘렀다는 것. 하지만 수목이 울창하고 아담한 섬 어디에 그런 큰 하천들이 있었는지 의아할 뿐이다.
친구가 운영하는 펜션은 옥녀봉 산자락 어온리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2층 베란다에 나서면 왼쪽으로 칠천 연육교가 눈에 들어오고 아래로 펼쳐진 바다는 사면이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호수처럼 잔잔하다. 방에 앉아있어도 바다호수는 그대로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거가대교가 개통되고부터 얼마동안은 거제도가 온통 외부차량의 물결이 넘쳐났지만 7월초순인 지금은 마치 태풍전야처럼 펜션도 도로사정도 한가한 편이다. 조용한 펜션에서 하룻밤을 지내고나도 생각은 한곳으로 모아지지 않았다. 오래도록 구상했던 장편의 골격을 마무리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제 오후에는 섬 일주도로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찾은 섬은 칠천량 해전공원을 조성하는 등 구석구석까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이따금 펜션과 찻집들도 눈에 띄었다.
한편의 소설을 쓰려면 거기에 올인 해야 한다. 장편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30여년이 지나 뜻밖에 받게 된 진경의 문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문자를 받은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모처럼 호젓한 곳을 찾아오니 지난날의 생각이 되살아났다. 잊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진경의 소식을 접한 뒤로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옛날로 치닫고 있었다. 마치 요나의 박넝쿨이 밤 새 크게 자라듯 진경이네 생각은 펜션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더욱 무성해졌다. 상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스마트폰 깊숙이 묻혀있는 진경의 문자를 찾아내고 뒤늦은 답신을 보냈다.
「경아, 처음에는 누군지 잘 몰랐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살아나는 기억 있지-. 너무 늦었다 싶어 그만 두려했지만 진경이의 말이 자꾸 귀에 울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상수는 썼던 문자를 지우고 다시 찍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아, 그동안 잘 있었니? 낯선 남자가 혹 문자를 보내는 것이 어떨까 싶어 잠잠하고 있었지.^^ 유경이도 어머니도 잘 계시겠지? 안부가 궁금하구나. 안녕!」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지만 전송버튼을 눌렀다. 거짓말은 어디에서도 이가 맞지 않는 법이다. 상수는 다만 과거의 생각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한 달이나 머뭇거린 것이다. 여전히 구체적인 안부를 묻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잊지 않으셨군요. 유경이는 독일에 살아요. 엄마는 여든 세살이구요. 아직도 정정하시고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계세요.」
진경이의 답신은 금방 날아왔다. 결혼해서 따로 사는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와 둘이서 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느낌으로는 지난날처럼 그렇게 어려운 형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는 어머니가 혼자서 두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처음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가장 쉬운 것이 먹는장사인 것처럼 진경이 어머니도 음식점과 다를 바 없는 하숙을 치고 있었다.
상수가 군복무를 마치고 구한 직장은 시청에 근무하는 5급 을 지방공무원이었다. 처음 밀양에서 부산으로 유학을 온 상수는 가까운 친구와 남산동에서 자취생활을 했었다. 그때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 가운데 그런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먹는 것보다 굶을 때가 많다고 할 정도로 제때 밥을 챙겨먹지 못했다. 어떤 때는 삼시세끼를 라면으로 때울 때도 있었다. 상수가 아직도 건강이 썩 좋지 않는 것은 한창 때 제대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대학졸업 후 입대하고 나서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은 몸이 오히려 좋아졌다. 일정한 시간에 먹고 자는 일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상수는 체중이 늘어났다. 당시의 삶은 모두가 어려웠고 자취란 너무나 지긋지긋한 기억이었다.
상수가 이리저리 하숙집을 찾아다니다가 자리를 잡은 것이 초량동이었다. 대학촌이 아니면서도 교통편의와 함께 몇 개의 남녀고등학교가 가까이 있었기에 하숙집이 많았다. 상수는 처음에는 고등학생과 함께 방을 썼으나 그 학생이 졸업을 하고 서울로 진학을 하면서 독방을 쓰게 되었다. 물론 하숙비는 좀 더 올려주어야 했다. 그때 그 집이 진경이네 집이었다. 하숙생은 모두 10명. 고등학생 7명, 상수와 함께 직장인 3명이었다. 진경은 그때 대학 1학년이 되었고 두 살 아래인 유경은 여고 2학년이었다. 진경이 어머니는 상수와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하숙집은 ㄱ자형 적산가옥으로 비교적 넓은 마당이 딸려 있었다. 몇 그루 오래된 정원수가 담장 옆으로 둘러있고 넓은 화단도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화단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잡초로 우거지고 여기저기 허물어진 곳도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처지에 하숙을 치는 사람에게 화초를 돌볼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서울에 사는 주인이 진경이네가 관리인을 겸하도록 싼값에 전세로 내어준 것이었다.
처음 하숙생이 된 상수는 주인아줌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개인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는 달리 일찍 퇴근을 하면 잡초를 뽑고 허물어진 화단을 정리했다. 풀을 뽑은 텅 빈 화단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상수는 주말이면 꽃나무를 사다 심었다. 이때 진경이가 거들어 주기도 했고, 집안이 아름답게 가꾸어지는 것이 식구들 모두에게 좋은 기분을 선사했다. 상수가 땀 흘려 일할 때 하숙집 아줌마는 남은 밥으로 만들었다는 시원한 식혜를 가져와 목마름을 축여주었다. 상수는 때로 한 번씩 넓은 마당을 쓸며 청소를 하기도 했다. 누구에게 보이기보다는 상수는 집안을 깨끗이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봄에는 마당 한구석에 텃밭을 만들고 상추씨앗을 뿌렸다. 잘 자란 상추는 하숙생들의 신선한 반찬이 되었다. 몇 포기 고추모종을 심었는데 온 식구들이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풋고추가 열렸다. 아줌마도 시장에서 파를 사다 심어 국을 끓일 때 사용했다. 밥만 먹고 출근하는 하숙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수의 부지런함은 가족 같은 친밀감을 더했다. 아줌마는 고교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직장인에게는 존댓말을 썼으나 상수에게는 때로 반말도 할 만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침에는 모두가 큰 방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만 직장인의 저녁식사는 따로 차려지는 때가 많았다. 상수에게 하숙집 밥은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취를 했던 기억과는 엄청나게 다른 분위기였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는 진경은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가정형편이 조금만 좋았다면 아예 회화과를 선택했을 것이다. 진경은 어쩌다 한차례 씩 4B연필로 스케치한 그림에 몇 줄씩 글을 적어 하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그림을 보여주는 일종의 솜씨 자랑이었다. 그래도 상수는 예쁜 그림이 들어있는 편지를 받는 것이 즐거웠다. 상수는 자기를 대하는 진경이와 아줌마의 각별한 친절을 보면서 딸 가진 엄마의 심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상수는 진경이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은 유경이에게 있었다. 유경이는 큰 눈에 쌍꺼풀이 뚜렷하고 코가 오뚝했다. 얼굴이 작으면서 약간 갸름한 전형적인 미녀스타일이었다. 유경이는 어머니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아줌마에게서 이십 오년 정도의 연륜을 덜어내면 그 모습은 유경이와 흡사할 것이었다. 진경이는 아마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경이는 외모보다는 마음이 아름다웠고 유경이는 예쁘기는 했으나 버릇없는 선머슴아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바삐 신발을 벗을 때는 신발짝이 뒤집어지기도 했기에 엄마가 잔소리를 하며 정돈해주었다. 언니와 덩치가 비슷하기 때문에 외출할 때는 언니 옷이라도 맞는 것이 있으면 제 맘대로 입고나가 나들이하려는 언니를 난처하게 할 때도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야할 고3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꾸미고 치장하는 일에 신경을 더 쓰는 것이었다. 아줌마의 부탁으로 주말에는 상수가 영어와 수학을 한 두 시간씩 지도해주었지만 유경은 장난기로 딴전을 피울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수는 진경이 보다는 언제나 유경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저러다가 대학에 붙지 못할까 싶었는데 독일에서 살고 있다니 남편을 잘 만났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시간이 나는 주말이면 상수는 하숙집 두 딸을 데리고 남포동으로 나가 저녁을 먹고 함께 영화구경도 했다. 상수는 외출에서 바가지를 쓰는 것이 오히려 즐거웠다. 유경이는 상수를 베껴먹는 일을 잘했다. 얄미우면서도 그 애교가 밉지 않았다. 유경이는 자기 용돈도 헤프게 쓰는 편이었다. 엄마가 주는 용돈은 언제나 모자랐고 저축성이 있는 언니의 돈을 이자를 붙여 갚겠다고 빌려 쓰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유경이는 어머니와 비슷한 성정이 엿보였다. 아줌마는 지난날 한때는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는 것이 든든한 보험에 드는 것이야.”라고 딸들에게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담이 들어있었다. 여자는 자기를 예쁘게 가꾸고 남편만 잘 만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아줌마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치맛바람을 날리며 아이들도 그렇게 길렀다. 남편은 대형 트럭을 세 대나 소유하고 직접 부산에서 서울까지 화물차를 운행하며 여유 있는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졸음운전으로 김천 구간에서 사고를 당하고 사망한 뒤부터는 진경이네 가정은 삶의 패턴이 완전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아줌마의 마음이 중심을 잡았다. 딸들이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 보다는 스스로 정숙한 여자, 신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교훈했다. 진경이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유경이는 읽지도 않는 시집이나 소설책을 끼고 다니는 쪽이었다. 옛날에는 그런 것이 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상수는 유경이의 그런 자세가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상수는 진경이 보다 유경이를 더욱 좋아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상수는 사흘 동안 펜션에 머물면서도 원고지 한 장 쓰지 못했다. 썼다가 찢고 다시 썼다가 찢기를 반복하다 쓰기를 접었다. 어떤 땐 달음박질 하는 것처럼,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상수는 어두워진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칠천량의 경치는 밤에도 일품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비치는 보름달은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하고 그 은가루를 휘저으며 뱃놀이를 하고 싶었다. 상수는 아침에도 일찍 잠이 깨었다. 스마트폰으로 아침햇살이 막 수면에 내려앉는 바다를 촬영하고, 칠천교 아래로 빠져나오는 통통선도 찍어 아내에게 전송했다. 아침식사는 펜션 옆 박꽃다원(茶園)에서 연잎밥을 먹었다. 진한 풀잎향과 함께 담백 구수한 맛을 지닌 석죽차를 마시며 아내를 떠올렸다. 스피커에서 은은히 흐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데니보이 노래가 감미로웠다. 글을 쓰려 왔음에도 이런 낭만적 분위기 속에서 아내와 함께 하지 못하는 자신이 오늘은 적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튿날은 아침도 거른 채 펜션을 나와 옥녀봉에 오르는 길을 찾아보았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사면을 둘러싼 섬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펜션 오른 쪽 칠천량 해전공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등산로를 찾아보았다. 아스팔트로 산뜻하게 포장된 2차선도로를 10분쯤 걸었을 때 ‘옥녀봉(등산로)→정상1.3km’ 표지판이 마을입구에 세워져있었다. 그 뒤쪽에는 옥계마을회관 2층 슬라브 집. 화살표 방향 정상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승용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오르막 시멘트 포장길 오른쪽으로는 높은 축대가 세워져 있고, 빨강 노랑 파랑 원색을 칠한 펜션도 보였다. 그러나 등산로는 보이지 않았다. 활처럼 왼쪽으로 굽어진 길을 따라 계속 걸으니 다시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길로 연결되었다. 차도에는 옥계마을 노선버스 정류소 표지판이 보였다. 채마밭에서 깨 모종을 옮겨 심고 있는 할머니에게 옥녀봉 정상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할머니는 멀리 원색 펜션 오른쪽의 조그만 정자를 가리켰다. 갈림길 입구에 분명히 표지판이 있었을 것이지만 상수는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꼭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한 시간 가까이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수는 오래전 하숙집에 대한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그때는 가을기운이 돌기 시작하는 10월초순의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상수는 퇴근길에 직장 동료들과 따분한 말단 공무원 생활을 안주 삼아 씹으며 밤10시가 지나도록 술을 마셨다. 직장인 두 사람을 비롯한 하숙생들은 모두 여행을 떠나거나 고향을 찾아갔다. 진경이도 클래스메이트들과 지리산 쪽으로 산행을 떠났고 유경이는 마산의 외갓집에 가고 없었다. 상수가 택시에 실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밤11시가 넘었다. 집에는 아줌마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상수는 대문을 열어주는 아줌마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몸을 가누기 어려웠지만 윗저고리를 벗어 벽에 걸었다. 목이 말라 물주전자를 흔들어보았으나 비어있었다. 세면장으로 가서 수도꼭지라도 빨고 싶어 몇 차례나 일어서려했으나 넘어지고 말았다. 이때 똑, 똑, 똑, 노크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렸다. 아줌마가 글라스에 꿀물을 타서 들고 온 것이다. 목이 마렵던 차에 따뜻한 꿀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니 취기는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상수는 그대로 방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아줌마가 바로 누워 자도록 어깨를 흔들었지만 상수는 가물가물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줌마는 요를 펴주고 덩치 큰 상수의 몸을 굴려 바로 눕혔다. 미래의 사윗감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양말을 벗겨주고 발가락 사이를 쓸어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옷을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혀주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방셔츠 단추를 몇 개 더 풀어주고 꽉 조인 허리띠를 헐렁하게 늦춰주었다. 상수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잡으며 눈을 떠보았다. 그의 초점은 흐려져 있었다. 거기에는 유경이가 환하게 웃으면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상수를 베껴먹기는 잘 하면서도 언제나 버릇없고 얄밉던 유경이가 상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백씨, 옷을 벗고 자야지―.” 라고 말하며 아줌마는 계속 허리춤을 잡고 흔들었다. 그것은 유경이가 빵집이나 극장에 가자고 조를 때 하던 동작이었다. 상수는 유경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상수는 어렴풋이 정신이 돌아왔지만 유경이를 껴안던 동작을 멈출 수는 없었다. 이튿날 아침 늦잠을 깨었을 때 머리맡 주전자에는 물이 가득 들어있었다. 물을 두 컵이나 잇달아 들이켰다. 상수는 지난 밤 유경이를 힘차게 껴안았던 생각을 떠올렸으나 그 뒤의 필름은 완전히 끊겨 있었다. 아줌마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사흘간의 연휴가 끝나고 하숙생들이 다 돌아왔다. 한 학생은 시골집에서 고구마와 단감을 한보따리 들고 왔다. 하숙생들은 여니 때처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을 했고 학생들도 등교를 했다. 그러나 아줌마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대신 어두운 그림자가 구름처럼 끼어있었다. 그 그림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오직 상수만이 짐작할 뿐이었다. 상수는 집안의 분위기가 처음 하숙집을 찾아들어왔을 때와 같은 서먹한 느낌을 받았다. 진경이와 유경이가 어쩌다 상수에게 스스럼없이 행동하는 것도 아줌마가 심하게 꾸중을 했다.
“다 큰 딸아이들이 버릇없이-.”
엄마는 딸들에게 늘 경계의 시선을 늦추지 않았다. 자식 같은 상수에게 때로 반말을 하며 친근하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줌마는 어쩌다 상수와 눈이 마주쳐도 서로가 데면데면 했다. 상수는 퇴근 후 되도록 저녁식사 시간에 늦지 않게 일찍 들어왔다. 술을 마시던 일도 삼갔다. 상수는 몸가짐을 조심하며 최대한 예절을 지키려 노력했다. 할 수 있으면 그전 분위기를 되살려내고 싶었으나 하숙집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아줌마에게 사과를 할 수도 없고 당시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열흘쯤 지난 토요일 아침 하숙생들은 아줌마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월말 까지는 하숙생들이 모두 다른 하숙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줌마는 애써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상수는 아줌마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한 하숙생들은 처음에는 아무도 그 이유를 물어보지 못했다. 아줌마의 태도가 너무도 단호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하숙생들의 의견을 아줌마에게 전달하고 중재역할을 하며 분위기를 잘 조성하던 상수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아줌마, 겨울방학 때까지만 더 계속하시면 안 될까요?”
수능시험이 코앞에 닥친 고3학생 두 명이 입을 모았다. 학기말이 끝나거나 연말이 되기 전에 하숙집을 옮기는 일은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이동이 없을 때 새로운 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결국 상수의 술 취한 하룻밤 때문에 하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다 쫓겨났다. 아줌마는 동래 쪽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을 함께 하숙했던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그 후로 상수는 진경이네 식구를 만날 수도 없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 진경이의 문자를 받았던 것이다.
상수는 그때 아줌마의 나이보다 열 살이나 더 먹었고 벌써 이순에 접어들었다. 상수에 대한 진경이의 미련은 아직도 그림처럼 남아있는 것 같았다. 누구를 한번 사랑하는 마음은 세월이 가도 쉬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상처를 건드리면 덧나는 것처럼 어떤 계기만 되면 자꾸 그 아픔은 되살아난다. 상수는 진경이의 사랑을 받아주지 못했다. 아줌마가 딸을 생각하며 베풀었던 친절은 상수에 대한 기대감을 되레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상수는 그때그때 답신을 보내지 않아도 진경이는 한차례 씩 넋두리 같은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카톡에 첨부한 진경이의 연필화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참새, 광주리, 사과 같은 소재로 정물화를 하나씩 보내왔었다. 몇 차례 카톡을 주고받으면서 마침내 엄마의 근황을 물었을 때는 아줌마의 인물화를 보내왔다. 곱게 늙은 모습이었다. 얼마 전에는 상수의 인물화를 보내왔다. 30여년이 지나기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상수를 앉혀놓고 그린 것처럼 그것은 사진 같은 모습이었다. 상수는 사진이 늙어가는 모습을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주름살이 늘어나거나 머리칼이 희어질 수가 없다. 단지 누렇게 빛이 바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경이는 사진을 찍듯이 현재의 상수의 모습, 웃을 때 눈꼬리의 잔주름이며 가지런한 앞니도 잘 그렸다.
몇 자씩 의례적으로 적는 문자보다 연필화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연필 하나로 그린 그림인데도 색감이 드러나는 것 같고 유화나 수채화에서 볼 수 없는 내면의 소리, 영혼의 소리 같은 것이 울려나는 것 같았다.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스칼 키냐르의 말이다. 상수에 대한 진경이의 마음이 아직도 그 흔적이 뚜렷한 것을 보면 결혼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상수는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을 묻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진경이의 문자는 상수를 자꾸 옛날로 이끌어갔다. 서글픈 강을 건너온 여든 세 살 아줌마의 모습은 어떠할까? 이제는 맨 정신으로 다시 한 번 그녀를 꼭 껴안아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