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없이 무등산에 가다 - 금주 일지 20일(2022.10.3.)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이어서 휴일이다
무등산 등산에 나서기로 마음먹고 아침부터 준비를 했다.
무등산 등산뿐만 아니라 대부분 한나절 이상 산나들이를 갈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무등산 막걸리를 1~2병 준비해갔다. 산행 중 정상이나 정상 언저리에서 준비해 간 막걸리를 한 잔 마시는 일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술집에서와는 판이한 맛과 느낌이 있다. 박지원의 ‘통곡할만한 자리’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툭 트인 산속에서 나무향과 흙냄새와 어우러지는 막걸리맛이란 안 마셔 본 사람, 못 느껴 본 사람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으리라.
그런데 오늘은 무등산 막걸리를 준비하지 않고 그냥 길을 나선다. 이렇게 무등산 없이 무등산 나들이에 나선 것도 참 특별한 경우이다. 남들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다.
무등산장에서 출발하여 꼬막재를 지나 누에봉에 올랐을 땐 딱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그 다음 행선지로 향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막걸리 생각도 안 한 채 군부대 삼거리를 지나 목교 쉼터에서 간단한 요기를 했다.
보통 때 같으면 막걸리 타임이기도 했을 텐데.
다행스럽게(?) 거의 막걸리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등산 서석대를 향하고 있었다.
이어서 입석대를 지나 장불재, 그리고 오랜만에 중머리재를 지나게 되었다. 그 언젠가 중머재에서도 막걸리를 마셨건만 오늘은 그것도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이었다. 거의 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증심사를 지나 남광주 시장을 거쳐 거의 7시간 만에 집에 돌아왔다. 무등산에 무등산 없이, 무등산을 별로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다녀왔다.
저녁엔 품자주자시민들의 임원 회의가 있어 참석했다.
회의를 마친 후 식사 자리에서 전직 구청장님이 말씀하셨다.
”이계양 이사장님은 막걸리 한 잔 하셔야지요?“
”아뇨, 사실은 제가 1년 동안 금주하기로 하고 오늘이 20일째입니다“
”아니, 술도 별로 안 드시지 않나요? 뭔, 술을 끊어요?“
”아니, 그냥 한 1년 끊어 볼라구요. 그동안 시간으로도 길게, 양으로도 많이 마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냥 한 번 술을 끊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요, 아니 그럼 우리 모임에서 같이 술 한 잔 하실 분이 없네요?“
”그래도 청장님은 한 잔 하세요.“
”아니, 이사장님이 안 드신다니까 나도 안 먹을랍니다.“
”제가 술 따라드릴 테니 한잔 하시지요.“하며 술을 따라드렸다.
한 잔 술을 드신 후에도 술맛이 안 난다며 못내 아쉬워하셨다.
술을 안 마시다 보니 식사 자리가 일찍 끝나서 귀갓길을 서둘렀다.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강하주 씨가 오랜 지인들과 함께 모여서 술자리를 가지고 있던 터라 끝났나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자리가 계속 중이라하여 합류하였다.
방에 들어서니 함께 한 지인들에게서 약간의 술기가 느껴졌다.
이미 나의 금주 소식을 알고 있던 지인들인지라 술을 권하진 않았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맥주잔에 물을 따라 함께 건배를 하면서 술자리의 대화를 경청하였다.
점점 올라가는 술기운들을 느끼면서 주고받는 얘기들을 귀담아들었다.
속정 깊은 절절한 애정으로 하는 얘기들이 알콜에 취해 가고 있었다.
아, 사람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취한 사람의 이야기도 취하는구나.
평소 맘속에 가두어두었던 해묵은 그리움들이 한 켜씩 허공을 날아 서로의 마음자리에 차곡차곡 똬리를 틀어 앉았다.
이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는데도 술이 마렵지 않음은 함께 한 사람들에 취하고 그들의 사랑과 우정과 그리움에 취해 가고 있어서 이리라.
이렇게 오늘도 내 금주는 곳곳에서 음주의 고비고비를 넘어 스무날을 가득 채우고 있다.
첫댓글 누에봉 높은곳에서 누런 들판을 내려다보며 마시는 한잔의 막걸리가 얼마나 청량할지 알고 있기에 마음이 그저 쓸쓸하네요.
자신과의 시험에 응원을 할지언정 초는 치고싶지않아 잠잠히 바라만 보자니 마음 한켠이 스산합니다.
그러나 겸손해진 배를 보며 금주가 주는 변화를 지켜보는것도 즐겁습니다.
꼬막재에서 서석대, 장불재를 거쳐 중머리재 하산를 하셨다니 많이 걸으셨네요.
언제 시간 맞춰 올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