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일. 가을 초입. 종일 비가 구질구질하게 내림.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에 기세 좋게 서 있던 느티나무와 벚나무 무리들이 요즈음 들어 왠지 풀이 죽은 느낌이 든다. 아직도 푸른 잎이 무성하나 넘쳐흐르던 푸르름 안으로 불그레한 빛이 배어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올해는 단풍도 곱다했거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하다. 자꾸 내 나이와 견주어 보는 것은 요사이 생긴 버릇이라 어쩔 수 없다.
쉼 없이 우산을 두드리는 가을비가 처연하여 결국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 가슴 깊숙이 들이마신 담배연기가 푸른 한숨이 되어 가죽나무 칙칙한 검은 가지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오늘은 하고 끊으려던 담배는 매양 이런 식으로 하루를 더 연장한다. 금연을 하겠다는 게 무망한 일인 것을 뭣하러 오늘은 하고 금연을 벼르는가.
아파트 정문을 건너 아파트를 돌아가는 모퉁이에 와서 빠져나온 집을 향해 돌아본다. 아내가 나와 주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따금 돌아보는 것은 치매노인이 돌아온 기억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짓일까.
그래, 번듯한 직장에 출근할 때는 후다닥 아침을 서둘러 먹고 아내가 골라주는 넥타이를 매고 행커치프를 쑤셔 넣으며 집을 나서는 건 바로 전장터로 나가는 장수의 출전식을 방불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차를 끌고 아파트 주차장을 나설 때까지도 아내는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감기 걸리면 어쩌라고.... 사양을 해도 아내는 '내가 좋아서 하는데 뭐...' 한사코 부수수한 옷차림을 아랑곳하지 않고 먼 전장터로 나가는 장군을 오래오래 배웅해 주었다. 한 사람의 부하도 없이 나서는 외로운 장군을.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 힘차게 땅을 박차고 하얀 갈기를 날리며 내 애마는 험하고 포연소리 가득한 전장터로 나를 데려갔어. 붉은 머플러를 날리며 알프스를 넘던 나폴레온처럼 그때 나는 어떤 전장터도 두렵지 않던 용맹무쌍한 무인이었어. 마상에서 붉은 술이 달린 창을 한번 들어 보이는 것이 아내의 배웅에 대한 답장이었어.
날이 갈수록 전장터는 멀어갔고 전투는 치열해갔어. 숨 가쁘게 달리는 마상에서 나는 멀미를 하지 않았어. 금수강산 내 조국과 푸르게 숨을 쉬는 산하를 내가 지켜야했으니.
처음부터 내가 이리 용맹했던 건 아니었지.
학교를 나오고 제대로 된 직장을 잡고서 채 길들지 않은 전장터를 달리다 보면 마상에서 늘 멀미를 심하게 앓았어. 종일토록 딩굴은 전장에서 돌아오는 길 위에서 구토를 심하게 했지. 먹은 것 다 게워내다 보면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맺혔지. 세상은, 눈물에 젖은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평화로웠어. 종일토록 싸우고 돌아온 군인을 어리둥절하게 했어. '여기가 전장터 맞아'
내가 죽인 적이 붉은 피를 낭자하게 뿌리며 쓰러져 가던 환영이 못내 괴로운데 여기는 너무도 평화로웠어. 전장이란 그런 거 아니겠어. 내가 숱하게 죽인 적들이 뿌리던 핏덩이가 엉킨 내 칼에서는 피비린내가 쉴 사이 없이 풍겨왔고 나는 똥물까지 뽑아 올리며 토했어. 그래서 나는 늘 배가 고팠어. 흰 갈기를 날리는 애마와 전장터를 달릴 때는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어. 하루의 전장을 끝내고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서 돌아올 때는 창 하나도 쥘 수 없으리만큼 나는 피곤했고 죽음보다 깊은 허망함이 밀려들 때면 무척 힘들어했어. 그것도 잠시, 구토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어.
가르마를 단정히 빗은 부장이 '전투를 즐겨야 한대'나.
나는 늘 서툴렀고 내가 죽인 적이 밤이면 귀신이 되어 내 꿈자리에 나타났어. 피로 칠갑을 한 내 칼이 번득일 때마다 적군은 수도 없이 짚단처럼 베어갔고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나는 몇 번이고 잠에서 깨어났어. 칼로 머리를 벤 내가 이긴 건지, 봉두난발을 하고 혀를 빼어 문 적이 이긴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내가 하루하루 치른 전장은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어. 전쟁은 원래 그렇다나.
우리는 이렇게 미쳐가는 전장에서 맺어졌어. 아니 전장터가 아니라 전쟁터를 드나들던 때라고 해야겠지.
서양의 전쟁 영화 보았는가?
중세 구라파의 기사가 개선하는 장면은 으레 그랬지. 은빛투구를 쓴 개선장군이 마상에서 길고 긴 창을 세워들고 개선하는 장면 말이야. 갈리아 방면 사령관 케사르 장군이 보무도 당당한 보병을 이끌고 행진하는 개선 행렬 말이야. 성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과 아가씨들이 장군을 환영하는 꽃을 뿌리겠지.
늠름한 개선장군이 환영인파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다. 그는 숱한 전투를 겪으며 생사를 같이한 창을 내밀겠지. 홍조를 띈 아름다운 아가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기의 스카프를 벗어 장군이 내민 창끝에 매어 주는 로맨틱한 장면을. 온 성이 떠나가도록 두 젊은이를 축하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을 게야.
어쩜 내가 백마를 타고 다가간 기사라고 착각했는지 몰라.
내가 창을 내밀자 그녀는 자주 빛에 황금빛 빗살 무늬가 참 아름다운 스카프를 매어주었겠다. 나는 그때 세상을 다 얻은 듯 기쁘기 짝이 없었어.
모처럼 전장을 하루 쉬는 날은 어김없이 산책을 했어. 그녀의 마음에 들려고 나는 늘 노래를 불렀어. 슈베르트 가곡이 주 레퍼토리였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열정을 안으로 삭이는 티 없이 맑고 푸른 슈베르트의 '숭어'든가 '홍수'가, 때로는 토셀리의 세레나데가 아내를 무척 기쁘게 했어. 내일이면 전장터로 떠나는 군인의 비장함은 찾아볼 수가 없어. 그리고 그녀도 청아한 목소리로 우리의 내일과 꿈을 이야기했어. 군인의 아내 같은 흔적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지.
내가 멀미를 그친 것이 아마 그때였을 거야.
금수강산 내 조국과 푸르게 숨을 쉬는 산하도 산하지만 보라 빛 도라지 문양을 새긴 내 가문을 상징하는 순백의 깃발을 지켜야 하는 것이 더 중요했으니까말야.
모든 것이 허물어진 것이 어느 때였을까?
전장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하던 내가 필살의 창에 찔려 낙마하던 그날 하늘은 참으로 푸르렀어. 초겨울의 하늘이 얼마나 높고 푸르던지 내 창으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어.
문득, 쉬고 싶었어. 쉴사이 없이 베고 찌르고 말을 달리던 나는 애마와 함께 무척 지쳤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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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터에서 부러진 창을 질질 끌고 돌아온 패장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속절없이 살아온 내 주변 이야기, 별 쓸모없는 소시민에 불과할지라도 각각의 삶에는 피가 끓고 밤을 지새우며 가슴앓이를 하던 나만의 소중한 역사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다하시지 않는다면 더듬거리며 올릴까합니다. 너그럽게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