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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사랑
기도란 우리가 하느님께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이야기하면 ‘그분’은 들으십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되지요.
기도란 그런 것입니다.
양쪽이 다 듣는 것, 양쪽이 다 말하는 것.
.....우리는 나날이 하느님과
사랑에 빠져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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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소 성당에서 미켈란젤로를 만나면 바티칸이 전부 끝나는 줄 오해하는 분이 있지만 바티칸이 그리 만만한 데가 아니랍니다. 세계 인류문화 유산 중에 약 70%가 로마에 있다고 했나요? 바티칸 시국, 그래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지요. 잠실 종합운동장 전체 면적이 54만5천평방미터인데 바티칸 시국은 약 44만 평방미터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정신적인 크기로는 세상을 다 품어낼 수 있을만큼 큰 나라지요.
그럼 오늘은 시스티나 소성당을 나오면서 베드로 대성전(Basilica di San Pietro)에서 느낀 감회를 말해 보지요. 지난번에 말씀 드렸 듯이 박물관에서 시작한 관람이 미술관을 거쳐 시스티나 소성당, 파울리나 소성당을 둘러보면서 꼬불꼬불 아래로 펼쳐진 미로를 거쳐 비로소 대성전으로 들어가기에 순서가 어딘가 어색합니다. 참, 꼬불꼬불한 복도를 지나다 보면 복도 왼 편에 자리한 아주 조그만 성물가게가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어요. 여기가 바티칸 문장이 찍힌 성물을 사기에 최적의 찬스입니다. 노 수녀님들이 전자계산기를 들고 성물상담과 판매에 열중하시는데 가격이라든가 품질도 최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베드로 광장 바깥에 있는 성물 쇼핑센터는 품질과 가격에 있어 그만 못하지요. 성지 순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성물쇼핑은 대단한 스트레스랍니다.
그래도 몇 차례 온 제 소견은 성 베드로 성당 순례는 온 인류를 껴안으려는 몸짓의 성 베드로 대광장 앞에 난 시원스런 화해의 길에서 시작의 걸음을 떼면서 회개와 용서를 청하는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성당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본다면 축구장 크기의 타원형 광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타원형 광장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모양을 합하면 마치 열쇠 같은 모양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성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에게 받았다는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지요. 또는 팔을 벌려 모든 사람을 감싸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도 해요.
그리고 광장을 통해 베드로 성전을 정면으로 보면서 제일 오른 편에 있는 성문(聖門,Porta Santa)-거룩한 문이라고 합지요- 앞에서 잠시 멈춰 가톨릭의 대잔치인 성년에만 열리는 이 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곱씹으며 사도 베드로가 장열하게 순교하셨던 거룩한 성전을 겸손하게 들어가야 할 게 아닐까요? 물론 대성당을 거쳐 시스티나, 파울리나 소성당을 둘러 박물관으로 넘어가면서 베르니니, 라파엘,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등 그 시대의 대 천재들이 빚어낸 예술품을 감상하고 영혼 깊숙이 울려오는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은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신 자리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밀라노칙령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인정한 것인데 헤례나 모후의 기도에 힘 입은 바가 아니겠어요.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였고 중세 이후 그리스도교는 유럽 전역에서 강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 제일 처음 착수했던 사업이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사도를 기념하는 대성당을 건축하는 일이었어요.
당시 바티칸 언덕 중턱에 성당을 건축하면서 이곳이 베드로 사도가 묻힌 자리인지 확인되지 않았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믿음은 확고했다고 합니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성당 내 베드로의 무덤 자리는 상징적인 장소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1950년 성당 지하무덤에서 실제로 성 베드로의 묘가 발견됩니다. 붉은색 무덤에 베드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믿음이 기적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고 뭐겠어요.
하나 더 놀라운 일은 여기서 발견된 베드로 사도의 유골에는 발 부분이 없었어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사도의 시신을 거둘 때 발목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지요.
성당 돔에서 일직선을 그리고 내려 오면 바로 베드로 사도의 무덤으로 이어집니다. 신묘한 일이지요. 돔 지붕 바로 아래쪽에는 '너는 반석이며 이 반석 위에 나의 성당을 세우고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라' 는 문구가 세겨져 있습니다. 이 열쇠라는 문구가 바로 배드로 성전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지요.
베드로성당은 공인 2년 후인 315년에 시공되어 349년에 이르러 완공되어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습니다. 베드로 성당은 1,100 여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외적의 침략과 여러 차례의 수리로 붕괴될 지경에 이릅니다. 15세기중엽 율리오 2세 교황이 1506년 기존의 오래된 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대성당을 건축하는 공사를 일으킵니다.
새 성전 건축은 본의 아니게 저 유명한 면죄부 사건이라는 치욕스러운 오해를 받으며 결국 교회는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어 나가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되지요. 아마도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에 높이 올려 쌓아둔 받침대에 서서 천지창조를 그릴 때 창문으로는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공사 현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웠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이 당시 설계를 맡았던 브라만테는 그리스 십자가 평면, 즉 가로와 세로축의 길이가 같은 길이로 설계하였으나 상갈로, 라파엘, 미켈란젤로를 거쳐 교황 바오로5세 때 마데르노가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더 긴 라틴십자가 평면으로 바꿉니다. 우여곡절 끝에 1626년, 착공 후 120년이 걸린 대공사가 끝납니다. 하지만 광장이 있는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50여년이 더 걸려서 도합 176년의 세월이 소요되고 말았습니다.
그럼 대성당 앞 광장을 거쳐서 안으로 들어 가볼까요.
대성전 제일 오른편에 있는 "성문(거룩한 문)"은 성년에 교항님이 개봉하기 전에는 닫혀 있기에 그 다음의 오른 편 문인 "성사의 문"( 칠성사의 내용을 부조해 놓은 문)을 통해 대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참,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이야기를 해볼까요, 제일 오른쪽부터 "거룩한 성문", 그리고 "성사의 문"이 있지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모습의 성모님과 성경과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 사도와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부조 되어있는 "중앙 정문"이 제일 중간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그 왼편으로는 "선과 악의 문"과 맨 왼편으로는 "죽음의 문" 모두 다섯 개의 문이 있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들어선 성당 내부는 원형의 붉은 대리석이 제일 먼저 맞이합니다.
9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유럽의 왕들이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수여 받던 곳으로 유명한데, 당시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대리석으로 빚어낸 아름다운 조각품,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을 볼 수 있답니다. 피렌체의 "다비드"와 로마의 성 베드로의 쇠사슬 성당의 "모세상"과 더불어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품이라 하지요.
미술사에 보면 미켈란젤로가 지닌 예술적 영감의 근원은 그에게 결핍돼 있었던 두 가지에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모성애에 대한 그리움과 미(美)와 위대성에 대한 향수 그것을. 미켈란젤로는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지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냉정했고 그는 계모의 냉대를 견뎌야만 하는 가엾은 고아였다 합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성(聖) 모자(母子)상에 매달린 까닭을 어머니의 정(情)이 그리웠기 때문이라고. 미켈란젤로는 살아있을 때 전기가 출판된 서구 최초의 미술가입니다. 그의 재능을 신성한 것으로 추앙했기에. 현재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조각상 '피에타(Pieta)는 1499년 완성 당시 겨우 24세 였던 미켈란젤로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피에타'는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매장하기 전,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죽은 아들을 당신 무릎 위에 안아 본다.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뜻하여 피에타라고 칭해지는 이 주제는 복음서 구절이나 외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실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들의 시신을 무릎 위에 눕힌 마리아가 조용히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습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예수의 얼굴은 고통을 받고 죽었다기보다는 곤히 잠든 아기처럼 해맑고 평화롭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보는 피에타는 정면, 성모님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을 피에타의 전부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인간의 시각으로 보는 장면이다. 하긴 피에타 상과 우리의 눈 높이가 비슷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볼 필요는 없는가. 피에타상을 미켈란젤로는 어떤 생각으로 조각 했을가? 다시 말해보자.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누구에게 봉헌했을까?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인류 최고의 봉헌이신 예수님을 봉헌을 받으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봐야 하는 게 순리가 아닐까?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늘에 계신다고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듯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땅은 내려다 보는 각도이다. 그러면 우리가 위에서 피에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베드로 성전에 피에타 앞에 사다리를 세워 순례자들이 사다리를 올라가서 내려다 보게 해 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대성전의 전체 모양을 우습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어떨까?
오래 전에 딸아이가 순례 다녀와 피에타 사진첩을 선물했다.
로버트 후프카(robert hupka)가 피에타를 찍은 사진 150매를 묶은 책이다. 온전히 피에타를 각도를 달리하여 찍은 피에타 작품집입니다. 밑에서 위로, 위에서 밑으로, 옆에서 뒤에서 등 아주 작정을 하고 찍은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봉헌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자고.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각으로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다. 분명 이 사진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은 슬픔을 뛰어넘어 내 표정을 보라고 재촉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달리하자는 제 의견은 틀린 걸까?
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우리는 인간의 시각에서 피에타를 보면 성모님의 슬픔을 느끼고 만다. 피에타, '자비를 베푸소서.'는 바로 거기서, 고작 성모님의 슬픔에서 머물고 말 것인가?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을 완성시킨 예수님은 고통스럽기보다 하느님이 주신 사명을 마침내 다 이루어서 만족해보이고 지극히 평화로워 보인다. 이 사진첩을 보게 된 것은 놀라운 환희와 깨달음을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성모님의 슬픔에 머물고말 것이 아니라 한 걸음을 떼어보자 딱 한 걸음을 더.
이 책은 영어본이다.
그렇다. 모든 사건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이 다 같을 수야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좁은 시야를 더 넓은 시야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은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피에타를 찍은 사진 150장은 전부 시각을 달리했다).
사진 작가는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을 빚으면서 의도했던 걸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자는 듯 편안하게 하느님을 향해 올려집니다. 당신이 세상에서 하실 모든 사명을 완수한, 그야말로 미소를 띈 편한 모습입니다. 그대는 달릴 길을 다 달려 온 자의 편한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피에타는 눈물겹도록 거룩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어떤 이들은 중년의 마리아가 지나치게 젊고 아름답다며 조각가를 비난했다지요. 이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순수한 영혼이 완벽한 육체를 영원히 지켜주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몸은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임으로, 영혼이 아름답다면 몸 또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신봉하던 신(新)플라톤주의의 믿음이었거든요. 피렌체에서 성장한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家)의 후원을 통해 학자들과 교류하며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해 있었던 것이기에 그리 말했을 테지요.
결국 미켈란젤로의 신플라톤주의적 외모론은 "마음이 고와서 얼굴도 예쁘다", 다시 말해 "예쁜 게 착한 거다"랄까. 평범한 외모를 가진 대다수 사람들은 신플라톤주의보다는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가수 남진의 노랫말이 진리이기를 바라겠지만.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시신을 당신의 무릎에 끌어안으신 성모님의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비탄에 빠져 있는 성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애절한 한 여인의 일생을 돌아봅니다. 열두 사도들과 달리 성경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으시고 늘 아드님 곁에서 마음 졸이며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셨던 여인. 일찍이 어머니를 여위었던 미켈란젤로의 눈에 비친 성모님은 이리도 아름답고 나이를 먹지 않은 영원한 성 처녀로 묘사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네요. 미켈란젤로에게 당신의 작품에 싸인을 하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도 내가 지었다고 서명을 하지 않으신데....." 미켈란젤로는 작품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답니다.
위대한 걸작, 피에타를 미켈란젤로, 네가 만든 거 맞아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대요. 그럴 수밖에, 그때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던 청년이었으니... 자기의 재능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항변하면서 흡사 미스 코리아들이 어깨에서 비스듬히 아래로 "미스 경북"하는 띠를 두르듯이 미켈란젤로라고 뚜렷이 이름을 새겨둔 띠를 매고 있네요.
이 작품을 제작하던 24살, 젊은 날의 미켈란젤로의 치기를 보는 듯해서 웃음을 배어물었답니다.
참, 피에타는 유리 상자 안에서 우리를 맞이하는데 이는 한 정신병자가 휘두른 망치에 피에타상의 발이 손상된 사건이 벌어졌대요. 이후 피에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유리 상자 안에 가두었답니다.
딱한 일이지요! 너무 예쁜 성모님과 자기 어머니를 비교하고 심술이 났나 봐요.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거룩한 성전은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찬란한 예술품들이 웅장한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에 순례자는 무릎을 꿇고 맙니다.
뭐니뭐니 해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쿠폴라(돔)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성 베드로 대 성당하면 우선 떠오르는 쿠폴라를 성전 안에서 올려 보면 높이 119 미터에, 꼭대기 까지는 132.5 미터가 되는 돔을 통해 하얗게 햇빛이 부서져 들어옵니다.
돔의 직경은 42 미터라지요. 그 밑에 자리한 중앙제단 앞에 그 빛이 펼치는 신비를 어떻게 설명해얄까요? 이후 수많은 고딕양식 교회가 지어지면서 돔은 화려한 장미창으로 바뀌게 됩니다. 돔과 장미창의 의미는 그 곳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제단 위에 하얗게 부서지면서 신자들의 시선을 오로지 제단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랍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이 이리로 들어오고 우리는 그 빛을 통해 경외하는 ‘그 분’을 만나고 또한 은총을 받아 모신다는 깊은 뜻이 여기에 있답니다.
사실 성당의 돔 이야기를 한다면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돔을 빠뜨릴 수 없겠지요. 성당을 다 짓고서 돔으로 완성해야 하는데 그 어려운 걸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베드로 성당의 쿠폴라를 보고서 브루넬레스키가 완성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중앙 제단 위에 있는 발다키노( baldacchino) 하늘 덮개, 차례입니다.
미캘란젤로의 건축미학을 정확하게 이해했던 후배 베르니니가 선배에게 보내는 역동적인 오마주 (hommage)라 할 것이라면. 사도의 무덤을 장렬하게 장식하기 위해 4개의 청동기둥과 천개(발다키노, 天蓋, 관의 뚜껑 [건축] (장식적인) 닫집 모양의 차양)를 제작했는데 흡사 청동기둥이 용틀임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궁궐에 쓰이던 용의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고 보시면 될 걸요. 사실 베르니니는 예루살렘 성전의 기둥을 모방했답니다. 베르니니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말했지요.
정말 대단합니다. 발다키노 꼭대기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지요.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과 복음서를 들고 있는데 삼중관과 열쇠는 베드로 사도를, 칼과 복음서는 사도 바오로를 상징한답니다. 발다키노의 장중한 모습에서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무어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서 말예요.
그 뒤, 성전의 평면을 놓고 보면 십자가의 머리 부분인 가장 깊숙한 곳에는 성 베드로의 교황좌가 보이는데 역시 베르니니가 제작한 것이지요. 심판의 날, 사도 베드로가 이 청동으로 제작된 거대한 교황좌 다시 말해 성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순례자들에게 말하는 듯 웅장합니다.
예로부터 로마의 신자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의 조각들을 모아 5세기경 상아로 장식한 의자를 만들었다지요. 그 후, 알렉산데르 7세 교황(1,655~1,667)이 베르니니를 시켜 그 의자 위를 청동으로 입히고 장식을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답니다.
이 교황좌의 네 다리를 잡고 있는 네 분의 청동상 중 앞쪽으로 주교관을 쓰고 있는 분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들 중,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암부로시오이며. 뒤쪽에는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4대 교부들 중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성 아타나시오이지요. 사도의 성좌를 치켜들고 있는 네 명의 교회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한테서 직접 가르침을 받고 깨우친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교부학 이론은, 교파가 다르다 해도 불변의 진리라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황좌 위쪽을 보면 천연 대리석을 얇게 깎아 유리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창 안에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새겨져 있는데 이 창을 잘 살펴보면 열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를 뜻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서면 정면에 마주 보이는 중앙 제단 뒤쪽 윗부분에 자리한 교황좌와 성령을 상징 하는 비둘기가 새겨진 창이 매우 작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답니다. 교부들이 쓰고 있는 주교관의 높이만도 1.8미터이며 교부들의 동상 높이는 4.5미터에서 5.5 미터, 동상 하나의 무게가 39 톤이고 비둘기 날개의 폭은 1.7 미터, 교황좌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된 청동의 무게가 약 75 톤이랍니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 눈에는 작게 보이는데, 이 점이 대성당 내부 설계의 비결 이라고 하네요. 현장에서 직접 들으면서 유심히 보아도 혼란스럽더이다.
발다키노 조금 못 미쳐 오른편에는 사도 베드로의 청동 좌상(坐像)이 있는데 오른손은 검지를 위로 펴고 있고 왼손은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 작품이지요. 1,857년 3월 15일 비오 9세 교황이 특별회칙을 통해 이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십니다. 이 기간 동안 성 베드로 성당의 순례와 베드로 사도의 청동좌상의 발에 입맞춤을 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는 회칙을 발표하지요.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전대사를 받기 위해 사도의 청동상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을 하는 바람에 그만 발가락이 심하게 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사도의 대축일인 6월 29일에는 이 청동상에 금실로 수놓은 제의를 입히고 머리에는 화려한 삼중관을 씌우고 대축일 미사를 드린다지요.
침구하였나고요?
물론 성인의 발치에 고개 숙이고 흔들리고 모자라는 저의 믿음을 잘 잡아 주십사고 기도하며 뜨겁게 입맞춤을 했고말고요.
그리고 중앙제단 밑의 지하에는 베드로 성인의 무덤이 있지요.
많은 순례자들이 지하에서 위대한 "삐에뜨르" 초대 교황을 뵙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성인에게 예수님은 베드로, 반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지요. 베드로 성인을 반석으로 하는 교회가 탄생하면서 지상에서 묶인 것을 풀어주는 고해성사의 은총과 천국의 열쇠를 맡겨주신 ‘그분’의 하해와 같은 사랑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무한정 부어 주시는 사랑과 은총을 한 번쯤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이 우리는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을 잊고 살아가고 있어요. 어쩜, 자연스레 당신이 거저 주시는 사랑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시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계시는 주님이 눈에 보이는 듯하네요.
그래도 이 모든 것을 이루게 하시는 현장에서 ‘그분’의 마음에 흡족하게, 더러는 실망시키기도 하면서 함께 하셨던 베드로 성인의 무덤 앞에서 깊고도 깊은 반성을 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후계자이며 교회의 반석인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위치한 이곳은 대성당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교회가 시작한 이래 그 역사가 2000여 년이 흘러도 사도의 무덤은 바로 이 자리에 온전하게 보전되어 왔답니다. 참,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장례미사 때 교황님의 운구도 이리로 모시더군요. 교황님들의 무덤 성지입니다.
한편 이 곳은 전통적으로 새로 성성된 주교 또는 로마를 정기적으로 방문(사도좌방문이라고 주교님들은 매 5년 마다)하는 세계 각국의 주교단들이 사도의 대리자로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선한 목자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며 아울러 교계제도에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나 갱신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서울대교구에서 10여년 전에 사도좌방문을 하고 돌아오신 주교님이 그러시더군요. 이 손으로 베네딕도 교황님 손을 잡았다고 제가 청하는 악수를 사양하시며 웃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제가 얼마나 어렵게 시작한 베드로 대성당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살펴보면서 풀어나가도 만분의 일이라도 설명을 했나요? 어림없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는 아득한 현기증이 저를 괴롭히네요.
너무나 웅장한 대성전 안에는 벽을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아 소성당, 성체 소성당, 피에타 소성당 등 많은 소성당이 있습니다. 북적이는 대성전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피해 규모는 비할 수 없이 작으나 격조 있는 소성당에서 촛불을 봉헌하며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또박 또박 힘주어 가며 바칩니다.
이런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성인들의 힘 있는 통공에 의지하며, 또한 비범한 재능을 주님을 위해 고스란히 바친 위대한 천재들 베르니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 브라만테와 몬타나 이름을 한 분 한 분 불러봅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분’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저를 이렇게 엄청난 곳으로 불러 주시다니요!!
오, 주님! 감사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게 초대 해주신 이 크고도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몇 차례 왔었다고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고난 뒤 대성전 문을 나섭니다.
시야에 펼쳐진 광장과 내리 시원하게 뚫린 화해의 길이 엄청난 규모로 저를 압도하는군요.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성 베드로 대 광장은 1656년부터 1667년 까지 11년 동안 바로크 예술의 천재, 잔 로랜조 베르니니의 설계로 세워졌다고 합니다. 설계자 베르니니는 단순한 균형미를 설계의 중심 테마로 했다지요.
대 광장에 들어서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 양 쪽에 서 있는 타원형의 대 회랑이지요.
모두 284개의 원주형 대리석 기둥이 각각 네 줄로 양편에 당당히 줄지어 서 있는데, 기둥 한 개의 높이가 16미터나 되어요. 그 위에 성인 성녀 그리고 교황의 모습들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서 있는데, 모두 14개이며 대리석상 하나의 높이는 3.24미터의 거대한 석상이지만 순례자의 눈에는 조그마한 모습으로 한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광장과 성당의 웅장한 규모 때문이겠지요.
대광장은 폭이 246미터이며 대광장 입구에서 대성당의 입구까지 길이만도 무려 300미터나 됩니다.
거대한 회랑을 대광장 양 옆에 쌍둥이 모습으로 나란히 세운 까닭은 이렇다지요.
주님의 집인 대성당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양쪽 회랑은 그리스도의 양팔을 상징한 것이랍니다. 이는 양팔을 벌리고 내 집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와 종족, 언어와 풍습을 초월해 하느님의 집에 초대함으로써 이웃에 대한 형제적 사랑과 만남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용서와 화해를 통해 세계 평화를 이룩하자는 설계자 베르니니의 신앙심과 세계관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합니다.
대광장 중앙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 탑에서 좌우 10여 미터 되는 지점에 원형의 흰 대리석판이 각각 깔려 있는데 이곳에서 회랑을 보면 좌우에 각각 44줄로 나열되어 있으며 한 줄에 4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대리석 기둥이 의장대가 도열해 있듯이 44줄의 나열된 앞 기둥만 보이고 뒷기둥들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이 시대 로마인들의 기하학적인 센스와 예술 감각이 어우러져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세계 가톨릭의 총본산인 베드로 대광장에 이교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가 왠말이람.
높이가 무려 40미터에 달하는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원래 37년부터 네로황제의 경기장에 세워져 있었대요. 이 거대한 대리석이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 오벨리스크를 "목격자"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 베드로 성전을 두고 '브라만테의 다리, 미켈란제로의 머리, 베르니니의 벌린 팔'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김상근의 '나의 로망, 로마'에서 일부 발췌)
사실 로마와 프랑스등 유럽의 고적들을 둘러보면서 감탄하다 못해, 심한 열등감에 빠졌거든요.
오밀조밀하면서도 지극히 감각적인 조각 솜씨, 화려한 무늬의 코린트식 건축, 살아 꿈틀거리는 인물과 조각상이 멀리 동양에서 온 저를 팍 기죽였거든요.
이태리는 대리석이 유명하답니다. 우리나라 빌딩이나 고급 가정에서는 이태리 대리석을 수입해서 건축자재로 사용하잖아요. 이태리 대리석의 특징은 땅을 파면 그대로 들어나는 석재를 캐내어 규격에 맞게 절단하여 그냥 사용하면 된답니다. 돌의 질은 맨 처음 캐냈을 때는 연하기 짝이 없어 흡사 비누에 조각하는 듯 쉬운가 봐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는 주로 화강암이라서 일일이 망치와 끌로 쪼아내고 다듬고 해야 한답니다. 물론 돌의 재질은 엄청 단단하잖겠어요? 석굴암을 생각해보세요. 그 느낌은 완만한 곡선이 주는 따뜻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유럽의 입체감과는 다른 평면, 그래요 우리나라의 돌로 만든 불상이든지 건축물들 모두가 지나치지 않은 온화함, 부드러움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다고 봐요. 이러한 것은 실제 돌로 조각할 때 비누처럼 쉽게 다룰 수 없는 한계가 이러한 조각품을 낳았지 않겠어요.
우리 나라 불상이 가지고 있는 기품, 은은하고도 너그러운 부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성이 또한 그것을 닮아 온화함, 은은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봤습니다.
제 말에 공감하시나요?
※ 올해 초에 평창동 가나미술관에 성 김대건 신부님의 입상이 바티칸 성당 외부 벽감에 설치된 것을 기념하며 건축 과정을 전시했더군요. 신문을 통해 보고는 얼릉 가보았지요. 김대건신부님을 조각한 대리석이 바로 이태리의 비앙코 카라라 대리석이라합니다. 이태리 토스카나 지역에 위치한 카라라 대리석은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나서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헨리 무어는 이곳 대리석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다. 위대한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들이 즐겨 이용했던 대리석으로 우리의 성 김대건 신부님의 입상이 제작됐다고 해서 가슴이 뭉클했답니다. 성상은 높이 3.7 미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으로 제작했으며 두 팔을 벌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한 나라의 예술은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원과 자연에 달려 있다고 봐요.
돌이 많은 나라는 돌로 만든 예술품과 석재 건축물. 숲이 울창한 나라는 아무래도 목조 건물과 목공예가 발달하지 않겠어요. 확실히 이태리는 돌로 만든 조각과 건축물이 많고 또 화려한 이유는 대리석이 맨 처음에는 비누같이 부드러워서 온갖 솜씨를 동원하여 조각하기 쉬어도 시간이 지나면 돌이 가지는 고유의 단단한 자재로 돌아온다네요. 그러니까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유럽의 대리석 조각물에 열등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답니다.
제 느낌을 이야기 해볼까요? 노래를 가지고 이야기해보지요.
독일 리트(lied)는 슈베르트와 슈만 등이 발전시킨, 음악과 시가 융합된 독일의 가곡을 이르는 말인데, 우수에 젖은 단조로운 운율을 듣게 되지요. 슈베르트의 가곡을 떠올리면 지극히 절제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사무쳐 와요. 반주도 피아노 한 대면 그만입니다. 그래선가요? 독일 사람들은 무척 소박하고 견고한 심성을 가졌다 하잖아요.
프랑스의 샹송(chanson)은 어떠하구요? 화려하고도 유려한 노래가 로만틱하지 않나요? 다들 인생을 노래하는 가인(歌人)이라면 지나친 비유일까요? 중세 유럽, 정처 없이 마을과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인생과 사랑을 노래하던 음유시인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줄리에트 그레꼬, 모리스 슈발리에, 에디뜨 삐아쁘와 이브 몽땅...
이에 비해 이태리의 칸쏘네(canzone)는 어때요? 이태리를 예로부터 노래의 나라로 부르고 있듯이, 이태리 사람만큼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인종도 없을 것입니다. 이태리의 뜨거운 태양이 길러낸 활달하고 솔직한 밝음이 있지요. 그리고 노래를 사랑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대중음악이라 해도 매우 우수한 음악성을 갖추고 발전해 왔지요.
오폐라의 유명한 아리아는 대개 이태리 말로 되어 있지요. 화려한 음의 높낮이, 호탕하게 쏟아내는 노래의 폭포, 인간의 희로애락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호방함. 그 어느 것을 살펴보아도 거칠 게 없는 이태리 사람들의 심성은 우선 남유럽 특유의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해바라기, 올리브 밭 등 자연이 주는 무한한 혜택에 있다고 봅니다. 더불어 그들의 선조들이 빚어낸 화려한 예술작품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요.
칸초네의 테마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으뜸이지만, 미국의 팝송과 같이 단순한 것은 볼 수 없고 어느 것이나 내용이 풍부하지요. 또 실연을 테마로한 곡이라도 절망적 어두움이 없고, 어딘지 환한 뒷맛이 좋은 분위기는 역시 그 민족성에 연유한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것에서 보는 사랑의 허무함, 자포자기적인 기분이 칸초네에는 없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칸초네와 친해지기 쉽지요. 가톨릭 신앙 안에서 커온 이태리 사람들이어서, 칸초네에도 가톨릭은 크게 영향을 주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예요, 이렇게 예술적 토양이 풍부한 이태리에는 왜 소매치기와 사기꾼이 많은가요? 그리고 미국에 가면 유럽 사람들 중에 이태리 사람들을 가장 천시 여기는가 모르겠어요. 유산을 많이 남겨주면 자식이 형편 없는 망나니가 된다는 만고불변의 원칙이 여기에 합당한 비유가 될른지 모르겠네요.
이태리는 참 복 받은 나라예요. 이러한 자연이 준 혜택과 그 자연을 마음껏 활용하여 솜씨를 부린 천 재들 덕분에 관광 수입만 해도 어마어마하다지요.
참, 이태리 대리석의 단점은 세월이 흐르면 대리석이 시커멓게 변색이 된답니다. 베네치아의 산 마르꼬 성당에 가보시면 그앞 광장에는 시커멓게 변색된 대리석 건물과 기둥이 흡사 큰 불이 나서 타다가 남은 건물 같아 눈을 찌푸리게 되지요.
피랜체의 두오모 성당에 가면 시커멓게 변색되고 훼손된 성당을 복구하는데 일본 NHK 방송국이 맡아 하더군요. 물론 그 대가로 방송의 독점권을 얻었다지요. 이렇게 귀중한 유물을 복원하는데 하이타이를 가지고 세척해서는 안 되겠지요. 함부로 화학 세제를 가지고 했다가는 인류문명의 귀중한 유산을 망쳐버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예술작품을 복원하는 전문가를 길러내는 학과가 대학교에 개설되어 있답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대작을 손댈 때는 세계가 떠들썩하잖아요. 시작하기 전부터 복원하는 방법에 대해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고 작업이 끝나고서는 복원이 잘 됐네, 못 됐네 난리를 피우는 걸 보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더라구요. 이것이 다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휴머니즘이라고 여겨요. 동의하시나요?
세상사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점도 꼭 따라와요. 그래서 하느님은 공평하시고말고요.
물론 그보다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이태리 사람들의 드높은 신앙심이 후세에 걸쳐 오래 오래 남을 걸작을 만들게 했고. 한편 이를 보려고 오는 세상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를 지극히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준다고 봐요.
처음에는 문화적으로 심한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담담하게 바라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답니다. 누가 잘나고 못난 게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라는 걸.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 탓일 거예요. 다들 순례길에 오르세요. 얻어오는 게 이렇게 많다니까요.
이렇게 풀어 놓고 이야기 하면 쉬운 것을 제가 무척 겁먹었지 않았겠어요.
제가 바라본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이야기, 제대로 보긴 본 건 가요? 인류 최고의 유산임에는 틀림없는 거 같아요.
이번 유럽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언제인가 다시 오리라.
그 때는 단체로 오지 말고 아내와 배낭 하나 메고서 느긋하게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를 즐기리라 하는 욕심을 가져봅니다. 스페인광장에서 분홍빛 철쭉을 즐기며 서투른 스케치라도 하고 말예요. 트레비 분수에서는 본잴라또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며 깔깔거리던 오드리 햅번의 웃음을 다시 한번 들어보리라. 진실의 입에 손을 넣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까? 평생 아내를 속인 일이 한 둘이라야지...
참, 두고두고 후회했던 성 안젤로성의 꼭대기 태라스에 꼭 올라가리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려는 운명 앞에서 사랑하는 토스카와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먼동이 트는 로마의 하늘을 배경으로 부르던 애절한 사랑의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내가 카바라도시가 되어,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인양 눈물을 흘리며 부르리라...
"....별은 빛난다. 흙의 향기도 그윽한 저녁, 문소리 나며 모래 밟는 발소리, 달려가는 나, 뜨거운 마음에 손을 잡으면, 별빛에 떠오르는, 꽃과 같은 그 모양, 영원히 사라진 꿈이여!..."
어때요 제가 멋진 파바로티, 아니 도밍고를 닮지 않았나요? 후 후~
1980년 중반 바티칸에서는 아시아 지역 주교들이 모여 시노드를 하고 있었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한 달간의 일정의 마지막 날 회의장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참석하여 그 동안 논의한 의제에 관해 결론을 내리고 있었답니다. 갑자기 인도에서 온 대주교가 교황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교황 성하, 이제 회의도 다 끝나 가는데 내일부터는 로마를 좀 보려고 합니다. 얼마 동안이면 로마를 다 볼 수 있겠습니까?" 아시아 교회 문제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관광일정에 대해 물어보는 인도의 대주교를 잠시 쳐다본 후 이렇게 답변했다지요. "주교님께서 3년을 보시면 로마를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30일을 보시면 로마를 반 정도 보실 겁니 다. 그런데 3일을 보시면 로마를 다 보실 수 있지요." 순간 회의장은 폭소가 터져 나왔답니다. 한 달간 계속된 마라톤 회의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일순간에 다 풀렸다고 후일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가 말했다지요.
사실 로마는 볼 것이 너무 많은 도시지요.
전 세계 인류문화 유산의 70퍼센트 정도가 로마에 몰려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을 보더라도 로마는 단연 세계 최고의 문화유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지요. 로마를 자세히 보려면 한도 끝도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로마 3일 일정은 매우 의미 있는 말이었으며 당시 로마 장안에서 큰 화제가 되었답니다. 그럼, 다음에 와서는 로마 순례기를 쓸 엄두도 못 내겠네요.
어쨓든 길 떠나 새로운 곳의 풍물과 낯선 음식과 사람을 만나 교류를 하는 여행이란 참 좋은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분’의 말씀 하나 믿고 살고 있던 정든 곳을 떠난 아브라함 성조야 말로 여행자의 선조가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