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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식 시인의 시세계_ 김준현>
시간의 물성을 감각하는 자리
김준현 문학평론가
수없이 많은 믿음은 “-하라”와 같은 능동적인 지향보다는 어떤 행위나 특정한 장소에의 진입을 금하고 거기에 신성성-부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형성된다. 일견 본능-욕망을 억압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금기에는 오랜 역사를 통해 증명된 것처럼 욕망을 추동하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고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금기禁忌는 대개 유한한 대상-곧 우리의 육체를 담보로 삼기 때문이다. 하여 그 힘이 임계치에 도달했을 때, 그 힘을 동력으로 삼는 시는 언제나 처음에는 불온의 누명을 쓰게 마련이고 이후에는 시간의 세례를 받아 추앙받거나, 못해도 특별한 사건으로서 기억되게 마련이다. 원구식 시인의 시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을 읽고 에두아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두 작품의 공통된 주요 오브제가 “풀”이라는 단순한 사실과 더불어 두 작품이 장르와 결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금기를 매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어서인 것 같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당대 미술계의 공통감각을 배반하는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명백히 기성에 반하는 태도로 일관된 작품이었다. 옷을 잘 차려입은 두 신사와 완전한 나체로 앉아 정면-관람자를 응시하는 여자, 원근의 무시,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빛과 어둠에 대한 해석 정도로 거칠게나마 요약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하면 “무장해제”를 요청하는-아니, 명령하는 작품인 것이다.
순간 시간이 정지되고, 어리석은 나는
벼락같이 깨닫는다,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소중한 기호임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이미 위대한 물질인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고
세상의 모든 별이 중심을 잃고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진다.
아, 이제 그만!
나는 소리친다.
하루아침에 진리의 오묘함을 깨닫는 일도
이제 그만!
금지된 물질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일도
이제 그만!
경고하건대 이런 것들은 모두
풀밭에선 금지된 것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계속 소리친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그것을 매우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 부문
원구식 시인이 말하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육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물의 소중한 기호”라는 인식의 발견은 왜 “풀밭”이라고 하는 금지된 공간을 매개하고 있을까. 여기서 김수영이 죽기 직전에 쓴 시인 <풀>과 함께 김수영의 대표적인 시론, 이른바 ‘온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시’가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도식적일 수 있다는 혐의를 무릅쓰고라도 한 번쯤 언급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무지의 존재라기보다는, 머리가 아니라 “몸”을 동력으로 삼아야만 금지된 영역으로 가닿을 수 있다는, 명명백백한 욕망을 거부할 수 없는 주체다. 그러므로 주체이지만 “몸”의 지배자라기보다는 “몸”에게 제 존재를 내준 자, 제 언어를 내준 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얼마간 자발적인 것으로 “내 몸은 이미/그것을 매우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데서 미약하나마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조는 금기를 어기는 순간에만 발생하는 어떤 리듬, 형체를 잃어버릴 만큼 빠른 속도로 흘러나오는 말 아니 소리, 저 숱한 “풀”처럼 단수-한 개체로서의 생명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을 일컫는 말로서의 “풀밭”이 ‘너’와 ‘나’의 경계 없이 무성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초록빛”에 의해 “무장해제”된다는 것은 세계를 의식하는 자로서의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철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록은 개개의 존재로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나뭇잎 하나, 나뭇잎 둘과 같이 수량이나 수치로 계산할 수도 없다. 그저 한 덩어리의 “초록빛”이다. “풀독”이라는 것은 그러니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일 뿐, “풀밭”을 제 영토로 삼은 자에게 “풀독”은 “금지된 물질의 영역”을 향유하는 자들의 특권일 것이다. 그 전환과 변주의 순간이 이 시가 포착하고 있는 ‘시’다. 다시 말해 시가 시를 지칭하는, 메타적 속성까지를 함의하고 있음이다.
복원이 끝나자
숙련된 시계수리공들이
때를 맞춰
침대에
4차원의 태엽을
감아 주었다.
그러자 제일 먼저 동네의 개들이
몰려나와 짖었다.
멍멍.
이것은 침대다.
그 다음, 그리스 철학자들이
틀릴까봐 매우 조심스럽게 따라 짖었다.
멍머―엉.
이것은 침―대―다.
(그리곤 신화의 시대가 끝났다)
최초의 침대는 그보다 오래 되어서
공화국에서 추방된 시인들의 후손들이 얼빠진 과장법을 익힐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거대한 운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45억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지는 불덩어리로 타올랐다가, 얼음으로 뒤덮였다가,
물속에 잠겼다가, 마침내 솟구쳐 올랐다.
오, 풀이여,
나무여,
물과
화강암과
산소와
생명체여.
-<침대의 기원> 부문
‘잠’은 의식의 휴지休止 상태다. 무의식이 전유하는 육체-앞서의 시에서 등장한 “금지된 물질의 영역”은, 자연체로서의 ‘나’-이른바 ‘몸’을 통해서만 진입할 수 있는 세계다. 그 점에서 “침대”는 곧 “무장해제” 상태의 육체를 안온하게 보존하는 장소기도 하다. 이 시의 첫 구절 “어떤 침대는 무덤보다 오래 되어서”라는 말을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은, 얼마 전 읽은 안희연 시인의 산문에 나오는 “매일의 잠이 죽음을 연습하는 과정”이라는 인식과 동일선상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즉 원구식 시에서 등장하는 높임의 호격조사인 “-여”와 같은 어투나 “오”와 같은 영탄, 그리고 원형 상징들 “풀” “나무” “물” “화강암” “산소” “생명체”의 열거, 신화 속 존재들의 소환은, 모든 시제를 가로지르는, 매일의 잠이 지닌 영속성을 함의한 언술이다. “45억년”이라는 영겁의 시간도 “침대” 위에 누운, 어둠 속 한 인간의 잠과 동일한 표피와 두께를 가질 수밖에 없는 세계. 플라톤의 『국가』에서 “침대”는 이를테면 이런 식.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신은 그런 사정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침대를 만드는 어떤 특정한 제작자가 아니라, 정말로 있는 침대의 제작자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연에 있는 침대는 단 하나만을 만들어 내셨다네”가구 제작자가 이데아를 보면 어떤 이는 식탁을 만들고, 어떤 이는 침대를 만든다. 그러나 이데아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제작자는 없다는 데서 오는 불능不能을 ‘신’으로, 간명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로 대체해 해소하는 것은 온당한가. 이 질문을 기반으로 시는 ‘시간성’에 대한 사유에 도달한다. “시간의 연금술사”=“잠”이라는 은유는 <풀밭에서 금지된 것들>에 나온 “시간의 독재자”=“물”이라는 수사법과 닮아있다. “잠”과 “물” 모두 형태를 가늠할 수 없고 그 시작과 끝을 예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속성의 산물이며, 어쩌면 ‘신’의 파편화된 현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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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밤을 견디는 재료들」 (안희연,『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난다, 2023))
4. 플라톤 전집 Ⅳ 『국가』에서 (플라톤 저, 천병희 역, (숲,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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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여, 파동이여.
시간의 방부제가 첨가된
별의 찌꺼기여.
본질적으로 만만한 술안주여.
너는 약간 맛이 간
내 애인의 입술보다 짭짤하다.
심하게 녹이 슨 기타 줄을 뜯는
내 손톱보다 가늘고 길다.
한때 바다를 헤엄쳤을 부드러운 멸치여,
너는 지금 딱딱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잘게 부서져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중략)
멸치가 모자를 쓰지 않는 이유,
멸치가 담배를 피지 않는 이유,
멸치가 안경을 끼지 않는 이유,
멸치가 게임을 하지 않는 이유,
궁극적으로 죽은 멸치가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를
변증법적으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죽음의 키스로
내 입술을 봉인해버리는 것이었다, 파랗게!
-<멸치> 부문
서정시 발명가여, 청춘의 엘도라도를 노래하자.
그곳은 가난한 시인들이
납을 먹고 황금똥을 싸는 곳.
이제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부드러운 망치로 황금똥을 두드려
돈을 만들 수 있다면
조신하지 못한 애인의 바람기도
콧노래처럼 즐거우리.
서정시 발명가여, 청춘의 엘도라도를 노래하자.
그곳은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어린 아이들이 어른보다 먼저 늙는 곳.
이제 성스러운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청춘의 연금술> 부문
“멸치여/ 파동이여/ 시간의 방부제가 첨가된/ 별의 찌꺼기여/ 본질적으로 만만한 술안주여” “멸치”를 놓고 확장되는 이 다양한 호명과 더불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 어린 아이들이 어른보다 먼저 늙는 곳”이라는 공간에 이르기까지, 넓게는 이번 특집의 모든 시편들이 일관되게 시간의 비선형성을 암시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별”은 수없이 많은 시간을 통과해 오는 ‘빛’이기에, 실상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과거의 ‘별’이며, 그들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재하는 대상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체와 대상 간의, 무한에 가까운 거리다. 그건 “나”와 “멸치” 사이의 거리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바다를 헤엄쳤을 부드러운 멸치”가 주체의 시선에 닿기 위해서는 “지금 딱딱하”게 죽은 상태 여야 한다. 생명체가 지녀야 할 부드러움을 상실한 이후에야 주체와 닿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상’의 생명력이 시 안에서 어떻게 자리하고 사라지는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것이 신神의 속성-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속성이다. 이처럼 원구식 시인의 시는 유한한 몸으로 무한을 사유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대상을 경유한다. 그리고 대상을 마주할 때마다 안으로 옹골차지는 게 아니라 해체를 거듭하며 재구성된다. 이를테면 “멸치”가 인간의 행위-여기서는 “~않는 이유”라는 반복으로 강조된 인간의 행위를 할 수 없음을 “변증법적으로 말”한다. 일견 당위를 설명하는 것만 같은 이 반복을 끝내는 것은 말이 아니라 육체가 어떤 선을 넘는 순간이다.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관념을 소환해야 하는 이 기나긴 끝말잇기의 끝은 그리하여 다시 “즐기는 구조”로 되어 있는 나의 육체 “입술”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죽음의 키스”에서 정말 죽는 것은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지 모를 말일지도 모른다. 말이 영속할 수 있다는 믿음에 내리는 일종의 선고宣告인 셈이다.
금기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긴 했지만, “청춘” “연금술” 등 한때 후기 낭만주의의 한 이상향을 노래했던 시의 본질이 연상되는 이 언술은 관념과 감각의 조화로운 어울림 이전에 오히려 “청춘!”하고 세 번 소리치며 부르는 자의 영탄에 가깝다. 익숙하지만, 그게 지금-여기의 한국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서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저 영미나 유럽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게 빠를지도 모를, 그리하여 종래는 무국적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짚고 싶다. 지면의 한계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삼겹살을 뒤집는다는 것은>에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혁명” 그리고 “세상을 뒤집는다는 것”이 지닌 역동성 또한 지금 우리의 오늘을 다시 사유하게 만드는 낯선 기운이다. 한국 서정시의 낮고 서늘한 감각보다는 리드미컬한 음유시인의 시를 읽고 난 듯한 착란은 단순히 언어를 조율해 긴장을 발생시키는 기성의 서정과는 확연히 다른 보폭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원구식 시인은 도약을 두려워하지 않고, 관념어라고 해서 검열하고 파기하지 않는다. 전자가 익숙한 서정의 문법이라면, 후자는 그간의 서정시가 경계해왔던 대상을 오히려 힘껏 품는다는 점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낯선 스타일이다. 물론 몇 안 되는 시편만으로 시인의 긴 시력詩歷을 담보할 수는 없을뿐더러, 시인의 축적해온 언어의 정신사적 단면을 파악하는 데도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현실의 여러 감정과 마음을 사유하는 여타의 시들이 발 빠르게 확보하고 있는 물성과는 달리, 원구식 시인의 시는 ‘시간성’이라는 건 거칠고 거대한 관념을 물성으로 바꾸는 현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말놀이 같지만) 시간을 사유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그럼에도 시인의 시를 굳이 과거·현재·미래의 시제로 경계를 짓지 않고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적인 방대함에 선행하는, 한 편 한 편의 사유가 저마다 다른 높낮이로 형성되어 있어 만들어지는 이 리듬. 아마도 그 리듬 위에서라면 쾌락과 허무, 신성과 유혹, 절대와 상대를 관통하며 숨가쁘게 나아가는, 숨찬 읽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경험자의 입장에서 말하면, 좋은 의미에서 벅찰 것이다.
김준현 평론가
2013년 《서울신문》(시),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
2020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평론) 등단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 『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토마토 기준』, 『나는 법』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2023년 제24회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