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인듯 아닌 오이도(烏耳島)
오이도역은 전철 4호선으로 당고개역과 연결되어 있는 종점역입니다. 2호선 강변역에서 출발하여 사당역에서 4호선으로 환승하여 오이도역까지는 한시간 십여분 정도가 소요 됩니다. 오늘은 백년지기들인 위짜추 무벼대 또파파 서류바 씨모우 패노우 조단스 까토나 여덟명이 오이도역에서 시화방조제(始華防潮堤)를 건너서 걸을 예정입니다. 오이도역에서 오이도 선착장까지의 거리는 6.2 Km 정도이며 시화방조제를 건너서 대부도 관광안내소 까지는 약 22 Km 거리입니다.
오이도(烏耳島)는 경기도 시흥시에서 서해안으로 4Km 정도의 위치에 있는 남북으로 긴 섬이었습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갯벌에서 염전을 이루면서 육지화가 진행이 되어 1980년대 말(末)에 시화공단이 조성되면서 완전히 육지화(陸地化)가 됩니다. 안산시 대부도(大阜島) 방아머리와 시흥시 정왕동을 연결하는 시화방조제가 1987년에 착공하여 1994년도에 완성이 됩니다. 길이는 12.7Km에 달하며 애초 계획은 담수호(淡水湖)로 농업용수와 산업용수로 사용할 목적이었습니다. 주위로 부터 생활오수(生活汚水)와 공단폐수(工團廢水)등의 유입으로 오염이 되어 종국에는 해수(海水)를 유입하게 된 것입니다. 방조제 위로는 2차선 도로와 조력발전소도 건설되어 있는 곳입니다. 기원전 1만여년 전에 구석기 시대의 빙하기(氷河期)가 사라지고 기후가 온난한 신석기(新石器)로 접어듭니다. 오이도에도 이 때부터 풍부한 천혜의 자원과 푸른환경이 도래되면서 사람을 비롯한 동식물들의 군락이 생성되기 시작합니다. 신석기인들은 바닷가를 중심으로 움막도 짓고 나뭇닢이나 동물들의 가죽으로 옷도 만들어 입기 시작합니다. 조와 수수를 경작하기도 하며 바다에서 물고기와 조개를 채취하여 식량으로 자급자족을 합니다. 돌을 갈아서 만든 마제석기(磨製石器)들로서 돌칼 돌도끼 빗살무늬관 토기관등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합니다. 먹고 버린 조개껍질과 동물뼈 석기 토기등으로 무덤을 이루게 됩니다. 조개더미 조개무덤 패총(貝塚)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생활쓰레기 더미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조개껍질 성분인 칼슘등이 토양(土壤)을 알카리성으로 유지하여 타 유적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동물뼈 식물 토기(土器)등 유물들이 산화되어 부패하지 않고 원형에 가깝게 보존이 된 것입니다. 오이도의 높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한 야산의 낮은 기슭에서 많은 유적들이 발견이 됩니다. 오이도라는 이름은 주변에 있는 옥귀도(鈺貴島)와 옥구도(鈺玖度)를 합쳐서 오질애도(烏叱哀島) 오질이도(烏叱耳島)라고 하던 이름을 오이도(烏耳島)로 불리게 됩니다. 이름 자체로 유추하여 보면 까마귀를 닮거나 수 많은 까마귀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섬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 당시에 태여나지도 않은 태여날 꿈도 못 꾸던 이 노객(老客)만의 유추론(類推論)일 뿐입니다. 옥귀도(鈺貴島)는 오이도 선착장 근처에서 바라보면 망망대해에 외롭게 떠 있는 귀한 보석 같은 섬입니다. 마치 검독수리 한 마리가 고등어(鯖魚)를 낚아채고 날개를 쭉 편채로 바다에서 막 솟아 오르고 있는 모습입니다. 배다리로 연결해 놓은 오이도 황새바윗길이라는 전망대로 들어서면 흰갈매기 떼들이 반가움의 고성(高聲)으로 노객들을 반기고 있습니다. 꺼어역 끼이익 깨에액 서글피 울어대는 갈매기를 바라보노라면 왠지 모를 지난 날의 향수(鄕愁)에 젖어 버리곤 합니다. 한 때는 날으는 갈매기도 잡을 수 있다는 기백으로 청운(靑雲)의 꿈과 희망과 사랑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지금은 부셔져 버리는 파도처럼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젊음의 조각들이 가슴을 조이고 있을 뿐 입니다. 옥구도(鈺玖島)는 주변에 돌이 많다고 하여 석도(石島) 석출도(石出島)등으로도 불리었습니다. 군사보호구역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되었으나 2,000년에 환경친화적인 공원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옥구공원으로 탈바꿈 되어 있습니다. 해변가에는 해양생태공원이 있으며 정상에서는 대부도 시화방조제와 인천 앞바다까지 한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습니다. 계속 내리는 빗방울을 피하여 패노우 사모께서 장만해 준 잣 영양밥과 뜨끈한 율무견과차로 요기를 달랩니다. 어느새 차가운 겨울빗발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걸음을 재촉합니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거리에는 활어횟집들이 성시(盛市)를 이루며 객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세찬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방파제 위를 걷습니다. 생명의 나무 전망대와 빨간등대를 지나서 오이도 함상전망대도 지나갑니다. 등대와 함상전망대는 출입금지 팻말만이 휘몰아치는 진눈깨비 만큼이나 울씨년 스럽습니다. 군사보호지역으로 통제되었던 지역을 시민들에게 개방한 살막길로 올라갑니다. 나즈막한 야산으로 오이도 모래사장의 정취를 느끼게끔 조성한곳입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던 또파파가 왼쪽다리에 경련으로 주저 앉고 맙니다. 한참을 응급처치를 하고 배낭에 준비하고 다니던 약을 복용케 합니다. 더 이상의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시화방조제를 건너 대부도 관광안내소 까지는 택시 두대의 탑승으로 대신합니다. 또파파의 컨디션이 회복이 되어 대부도 해솔길을 한 시간 정도를 걷습니다. 오이도 회센터로 다시 돌아가려고 버스에 오릅니다. 수산물센터에서 겨울의 별미(別味)인 큼직한 방어를 구입하여 2층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습기로 얼룩진 창밖으로는 바다는 보이지를 않고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싱싱하고 쫄깃한 방어의 고소함이 쐬주와 권주가의 어우러짐으로 노객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립니다. 시화방조제를 걸으며 조력발전소(潮力發電所)에서의 바다를 조망(照望)하려던 계획은 틀어져 버리고 오이도 유적지에도 발걸음을 옮겨 보지도 못 했습니다. 바닷가로 가보고 싶다던 대바기는 무릎연골 수술로 함께 하지도 못 했습니다. 백년지기들의 이런 아쉬움을 뒤로 미루고 전철(電鐵)에 몸을 싣습니다. 따뜻해 지는 봄 날이 오고 대바기의 무릎이 완치(完治)가 되는 그 날에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옥 귀 도(鈺貴島)
섬인듯 아닌 섬 오질애도(烏叱哀島)이자 오이도(烏耳島) 앞 망망대해(茫茫大海) 위로 외로이 떠 있는 섬 하나
옥귀도(鈺貴島)가 있습니다. 옥석(鈺石)을 깍아 세운듯 보배 같은 귀한 섬입니다. 오질애도(烏叱哀島)에는 까마귀들의 까악 까악 울음소리가 섬 사람들의 서글픈 사연을 토해내고 있는 섬인가 합니다.
수평선 너머 아스라히 사라져 버린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가슴 속에는 멍울만이 적시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님의 소식은 까마득한데 속절없는 파도소리만이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등에 업힌 아이는 배고파서 우는데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눈물보라가 됩니다. 옥귀도를 빼어 닮은 검독수리 한마리가 바다물을 박차고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외로운 섬 옥귀도 지금은 등대석(燈臺石)으로 애끓는 님을 비춰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2017년 2월 16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