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709(토)
오늘은 원광산악회와 같이 지리산둘레길(남원부분)3구간을 간다. 일기예보는 험상궂다. 낮게, 검게 드리운 하늘구름이 무슨 일을 낼 것 같다. 그래도 갔다. 인월에서 마천 가는 찻길은 잘 안다. 지리산을 얼마나 찾았던가. A팀 내리고 B팀은 종점에서 역순으로 온다고 갔고 혼자서 실상사입구에 내렸다. 4시에 만납시다.
옛날 실상사에 건너기는 돌 징검다리였다. 오늘은 탁류가 악을 쓰며 흐른다. 등산용 센들, 배낭은 레인카바를 씌우고, 바지는 7부바지, 우산을 들고 간다. 나는 비맞을 준비를 확실히 했다.
먼저 실상사 석장생이 셋.(중요민속자료15호) 인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천왕문, 지국천왕, 다문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이 부릅뜨고 있으나 어쩐지 재밌고 무섭지가 않다.
실상사목탑지(址). 실상사삼층석탑(보물37호), 이 석탑은 상륜부를 갖추었다는 것이 다른 곳에서 본 탑과 달랐다. 석등(보물35호), 그리고 보광전(비로자나불), 해강스님을 만나다. 공동체운동 *인드라망(www.indramang.org)에 대하여 듣고 팜프렛을 구했다.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서로 의존적이다 고.
실상사동종(전북유형문화재137호), 약사전에 가 철제여래좌상(보물41호)은 실상사2대교조 수철화상이 만들었다. 그리고 정원에 잘 자란 반송을 보았다. 내가 경상도 청도 운문사에서 뛰어난 소나무를 본적 있는데...
그리고 극락전(유형문화재45호), 근처에 홍척국사부도탑(보물38호), 홍척국사탑비(보물39호), 수철화상부도탑(보물33호), 수철화상탑비(보물34호)를 보고 찻집(겸해서 佛도구, 서적)을 파는 곳에 가 간단한 기념품을 샀다.
나보고 *약수암을 아냐고 물었다. 가 보라고 한다. 약3키로 떨어진 곳이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그러나 지극히 조용한 나무사이 길이였다. 혼자서 청승맞게 비를 맞는다. 여기 보광전안에는 정조6년(1782)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木刻탱화가 있다. 특이 하다. 그리고 약수암인 것처럼 약수가 유명하다. 법진스님을 만났다. 감자를 삶아주신다. 광주에서 온 세 사람의 선착객이 있어 같이 대접을 받았다. 이 분들은 산을 왔다. 계곡물이 불어 포기하고 이 암자에 왔다는 것이다. 해발720m.
윤선생의 전화가 왔다. 모두 걷기를 마쳤는데 비가 이렇게 계속오니 ‘후렴’은 어디서 하면 좋겠는가?라고. 실상사입구 상가로 오라. 우리는 어느 상가를 빌려 국을 끓이고 술 한 잔씩 情盃를 나누고는 쏟아지는 비속을 뚫고 왔다.
비가 온다고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아 내 사진은 얻지 못했다. 아쉽다.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인월면~금계마을)
전북 남원시 인월면 인월리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의탄리를 잇는 19km의 지리산길.
인월면-중군마을-수성대-배너미재-장항마을-장항교-삼신암삼거리-등구재-창원마을-금계마을
O 인월
인월에서 월평마을 앞 1.5km의 제방길은 들판에서 지리산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듯, 저 멀리 언뜻 보이는 천왕봉 자락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중군마을에 들어선다.
O 중군마을
전투 군단 편성에 있어 전군(前軍), 중군(中軍), 후군(後軍)이 있고 따로이 선봉부대가 있는 것이니, 그중의 중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 마을에 중군(中軍)이 주둔한 연유로 인해 마을 이름을 중군리(中軍里) 또는 중군동(中軍洞이)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중군마을은 본업인 농사 외에도 잣과 송이 채취로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 하지를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동네 부인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에서 통곡을 하면서 무제를 지낸 풍습이 있던 마을이다.
O 황매암 삼신암 갈림길
황매암쪽의 숲길 또는 삼신암쪽의 임도 길을 선택해서 걸을 수 있다.
O 황매암
중군마을 농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황매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나 숲길을 걸어 수성대에 이른다. 수성대 계곡의 물은 현재 인근의 중군마을과 장항마을의 식수원으로 음용될 만큼 맑고 깨끗한 물이다.
O 수성대
식수로 이용이 가능하고 비가 많이 올 경우에는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렵다.
O 배너미재
배너미재(개서어나무) 수성대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은 전설에 운봉이 호수일 때 배가 넘나들었다는 배너미재이다. 배너미재는 운봉의 배마을(주촌리), 배를 묶어두었다는 고리봉과 함께 연결되는 지리산 깊은 산속에 있는 배와 관계된 지명이다.
O 장항당산
(노루목 당산 소나무) 장항마을에서 만나는 당산 소나무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신성한 장소로 천왕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어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O 장항마을
마을 뒤 덕두산에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1600년 경 수양하러 왔던 장성 이(李)씨가 처음 정착하여 개척을 하였다. 이후 각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산세의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노루 장(障)자를 써 '장항'이라 했다. 중군마을에서 배너미재를 넘어 도착하는 장항마을은 수려한 풍모의 소나무 당산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장항마을에서는 지금도 매년 신성하게 당산제를 지낼 만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마을이다.
O 매동마을
고려 말과 조선 초, 중기에 걸쳐 네 개의 성씨(서, 김, 박, 오) 일가들이 들어와 일군 씨족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梅洞)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마을은, 각 성씨의 오래된 가문과 가력을 말해주듯 네 개의 재각과 각 문중 소유의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변에는 조선 후기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川) 박치기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은 퇴수정과 그 후손이 지은 밀양박씨 시제를 모시는 관선재가 있는데, 우거진 소나무들을 뒤로 두르고 앞으로는 만수천이 흐르며 발밑에는 흰 너럭바위들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박치기의 생존 당대에는 정기적으로 일년에 한 번씩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 밑 너럭바위, 세진대에 모여 풍유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족히 일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불과 삼사십 년 전만해도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맑은 물 위에 달이 떴다 지도록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산내면의 대표적인 생태농촌 시범마을로 지정돼 전통과 개발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마을이다.
O 상황소류지쉼터
상황마을의 다랑논이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주능선을 볼 수 있다.
O 창원마을
넉넉한 곳간 마을. 창원. 조선시대 마천면내의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창말(창고 마을)’이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져 현재 창원이 되었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현재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마을이다. 다랑이 논과 장작 담, 마을 골목, 집집마다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아직도 닥종이 뜨는 집이 있다. 함양으로 가는 오도재 길목마을로 마을 어귀 당산에는 300여 년 수령의 너덧 그루의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둥그렇고 널찍한 당산 터를 이루어 재 넘어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고 쉼터를 제공하는 풍요롭고 넉넉한 농심의 지리산촌마을이다.
O 금계마을
금계(金鷄)마을로 개명되기 전 마을 이름은 ‘노디목’이었다. 노디는 징검다리라는 이 지방 사투리로 칠선계곡에 있는 마을(추성, 의중, 의탄, 의평)사람들이 엄천강 징검다리(노디)를 건너는 물목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촌사람들의 정을 징검징검 날랐을 노디가 세월에 씻겨 나가고 지금은 그 위에 의탄교가 들어서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 하산주 끊일 장소를 마련해주셔서요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감사님 벌써 글을 올려놓으셨네요
시리우스 김광웅선생님 최동희(도전)입니다. 장마철우중에 회원님들 배려와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는 뜻을 장년의 지혜와 완숙함을 배웠읍니다.선생님은 우리산악회의 희망입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