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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 | 내용 | 학자 |
유가(儒家) | 효제(孝悌)・인의(仁義)・예(禮))를 중심으로 한 도덕정치 | 공구(孔丘), 맹가(孟軻), 순황(荀況) |
도가(道家) | 정신적 자유와 자연과의 조화(無爲自然), 인위의 배격 | 노자(李耳, 李耼), 열어구(列御寇), 장주(莊周) |
음양가(陰陽家) | 음양이원(陰陽二元)과 5행(五行)을 조합하여 신비적인 종교철학을 주창 | 추연(鄒衍), 추석(鄒奭) |
법가(法家) | 군주의 권위를 존중하는 강력한 법치 주장하는 정치철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어 천하통일을 도모 | 관이오(管夷吾), 이회(李悝), 오기(吳起),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이사(李斯) |
명가(名家) | 논리학파이며 명(名)과 실(實), 즉 개념과 대상의 불일치를 교정하려는 데 목적 | 등석(鄧析), 혜시(惠施), 공손룡(公孫龍), 윤문(尹文), 별묵(別墨) |
묵가(墨家) | 차별 없는 사랑(兼愛) 강조, 평화 주장, 능력 중시, 존비친소(尊卑親疎)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를 주장한 유가의 형식주의와 계급제도를 타파, 사리사욕 타파, 절검(節儉)과 근로(勤勞) | 묵적(墨翟), 별묵(別墨) |
종횡가(縱橫家) | 열국(列國)을 돌아다니며 독특한 변설로 책략을 도모하는 사람들로 열국의 연합체를 조직시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해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사상가 | 귀곡자(鬼谷子), 소진(蘇秦) : 합종책, 장의(張儀) : 연형책 |
잡가(雜家) | 자신만의 창의적 사상이 있는 것이 아니며, 제자백가의 주장과 이론을 절충(雜)하고 해설하여 집대성(雜) | 여불위(呂不韋), 유안(劉安) |
농가(農家) | 농업생산 기술과 사회사상, 특권층의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를 주장 | 허행(許行) |
소설가(小說家) | 고사(故事, 세상의 사건, 설화 등)를 이야기로 전하고 서적남기는 학파 | 육자(鬻子, 초나라 대부), 청사(靑史) |
병가(兵家) | 강병책(强兵策), 병술(兵術)을 논하던 학파 | 손무(孫武), 오기(吳起), 손빈(孫臏), 범려(范蠡) |
영향 | 중국 학문과 사상의 뼈대 형성, 정치와 문화에 영향 |
도가 : 황로학(黃老學) 또는 노장학(老莊學)
孔門四科 十哲
1. 德行 : 顔淵(顔回. ), 閔子騫(閔損. BC536~), 冉伯牛(冉耕. BC548~). 仲弓(冉雍. BC522~)
2. 言語 : 宰我(宰予.BC522~). 子貢(端木賜. BC520~)
3. 政事 : 冉有(冉求. BC542~). 季路(子路, 㑖由. BC542~)
4. 文學 : 子游(言偃. BC506~). 子夏(卜商. BC504~)
李耳(李聃) | BC571~BC471추정 |
孔丘 | BC551~BC479 |
孔鯉 | BC532~BC482 |
曾參 | BC505~BC435 |
孔伋? | BC483~BC402 |
孟軻? | BC372~BC289 |
荀況? | BC298~BC238 |
Ⅱ. 焚書坑儒(분서갱유)
법가 중심으로 사상을 통일하고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이사(李斯)의 건의로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 의학, 복서(점술), 농업, 사서 등에 관한 것을 제외한 서적을 불사르고 수많은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① BC 213년 분서(焚書)
함양궁에서 큰 연회에서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고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사는 진나라 사서 외의 고전 문헌과 제자백가의 서적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② BC 212년 갱유(坑儒)
진 시황은 방사(方士)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약 460명의 유학자를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한 사건,
Ⅲ. 한 대의 유교주의 문화의 확립
1.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요소
漢字文化(한자문화)
儒敎主義文化(유교주의문화)
律令體制(율령체제)
佛敎文化(불교문화)
2. 한의 문화
가. 유교의 국교화
⑴ 유학 수용
고조때 육가(陸賈)와 숙손통(叔孫通)에이어 무제(武帝, 劉徹. BC 141~BC 87 54년간 재위)때의 동중서(董仲舒)와 공손홍(公孫弘)을 유학만으로 채용하고 동중서의 천인상응(天人相應)을 받아들여 유교(儒敎. Confucianism)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천인상응(天人相應) : 황제는 天의 명령을 받아 국가를 통치하므로 황제는 天意에 다라 仁政을 행하야야 한다. 하늘은 상서로운 기운을 보여 仁政에 응답한다. 황제가 무도하면 天災로 이를 징계하므로 천과 人間이 相應한다.
⑵ 유학 교육
경사에 태학(太學), 지방에 군국학(郡國學)을 설치하고 오경(五經)의 교수를 두어 유학 교육을 전담케 하였다.
⑶ 관리 선발
유학의 수준으로 선발
⑷ 학문 발전
① 전한 : 금문경학(今文經學)
② 후한 : 고문경학(古文經學), 왕망때의 유흠(劉歆)
③ 금고문경에 두루 능통한 학자 : 후한의 가규(賈逵). 마융(馬融). 정현(鄭玄)
④ 훈고학(訓詁學) : 정학(鄭學)이라고도 하며 유교 경전에 대한 자구 해석에 주력하는 것으로 정현(鄭玄)이 완성했으나 유교의 철학적 해석이나 사상으로서의 발달을 가져 오지 못햇다.
전한 | 陸賈(육가) | 新語(신어) |
賈誼(가의) | 新書(신서) | |
董仲舒(동중서) | 對策(대책) | |
揚雄(양웅) | 法語(법어) | |
桓寬(환관) | 鹽鐵論(염철론) | |
후한 | 王充(왕충) | 論衡(논형) |
王符(왕부) | 潛夫論(잠부론) | |
應劭(응소) | 風俗通義(풍속통의) | |
仲長統(중장통) | 昌言(창언) |
도가사상(道家思想)
산둥(山東)지방에 유행하던 신선사상과 결합하여 도교로 발전
신선사상(神仙思想) | 방술(方術): 不老長生의 약(丹) | 천사도(天師道)[오두미도(五斗米道).정일도(正一道)]:장릉(張陵) | 태평도(太平道): 장각(張角) | 도교(道敎) : 북위 구겸지(寇謙之) |
민간신앙(民間信仰) | ||||
장생술(長生術) | ||||
| 참위사상(讖緯思想) |
다. 불교수용(佛敎受容)
불교는 후한 명제 8년 67년 서역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모시고와 뤼양에머물면서 42위경(四十二韋經)을 번역시칸 것을 불교전래의 시적으로 보고 있으나(후한서 명제본기) 위략의 서역전에는 이보다 69년전인 전한말 애제 원년인 BC 2년에 불교가 전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라. 역사서 편찬
사기(史記)(사마천), 漢書(한서)(반고)
마. 제지술 발달
전한말 관리 혁제(赫蹏)가 잔사(殘絲)를 가지고 박소지를 제작하였고 마 종유의 섬유로 만든 파지가 발견됙도 하여 이미 초보적 단계의 종이가 만들여 졌다. 후한 환관 채륜(蔡倫)이 105년 종이(蔡侯紙) 만드는 법 개량으로 학문과 사상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종이는 751년 동서 교통의 요지이며 톈산 북방의 주요 무역 시장인 탈라스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의 기술자에 의하여 서양에 전래되었다.
Ⅳ. 당(唐) 공영달(孔穎達. 574~648)의 五經正義(오경정의.6.42)
오경에 대한 통일된 해석과 남북조시대 이래 다양하게 전개된 동아시아 문화가 유교주의로 재정립
| 魏(220~265) | 西晉(265~316) | 五胡十六國(304~439) | 北魏(386`534) | 東魏(534~550) | 北齊(550~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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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 蜀(221~263) | 西魏(535~557) | 北周(557~581) | 隋(581~618) | |||
| 吳(229~280) |
| 東晋(317~420) | 宋(420~479) | 齊(479~502) | 梁(502~557) | 陳(557~589) |
| 三國時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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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北朝時代 | |||
魏晉南北朝時代 |
Ⅴ 宋
1. 출발
당대의 韓愈의 原道. 原性 및 그 제자 李翶(이고)의 復性書(복성서)가 출현하여 불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儒敎의 人性論을 바탕으로 유교의 우위성 제기
2, 복송 4대 인종(仁宗.1022 ~ 1063)때 正學運動
范仲淹, 胡瑗. 孫復. 歐陽修 등
范仲淹 : 인간형성의 이념을 유학에서 구하고 주역과 중용을 통해서 이를 추구
胡瑗 : 교육을 통한 유교 보급에 공헌
孫復 : 불교, 도교 및 제자백가에 대하여 유교의 우위성 강조
歐陽修 : 공자의 뜻을 직접 전하지 않는 모든 경전은 僞書로서 排斥
3. 북송 중기의 周敦頤(주돈이. 1017~1073)
太極圖說(태극도설)을 지어 道家의 사상과 한 대 유학자의 陰陽五行說을 조화시켜 송대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태극에서 음양이 생기고 음양에서 다사오행으로 진행한다. 無極=太極(우주의 절대적 경지는 理)
4. 張載(장재)의 氣一元論
先天의 性(인간의 본성)과 氣質의 性(구체적 인간성) 구별
5. 程顥(정호) 程頤(정이) 형제의 理一元論
性卽理(성즉리)
6. 朱熹(주희)의 이기이원론
가. 孟軻의 性善說과 荀況의 性惡說 부정
나. 張載(장재)의 氣一元論+程顥(정호) 程頤(정이) 형제의 理一元論
身의 주체가 心이고 心의 본체가 性이며 그 用이 情이다.
다. 7情
心은 性과 情을 동일한 것으로 하여 性이 변하면 情이 생기는데 7情(喜怒哀樂愛惡欲)이 그것이다.
Ⅵ. 성리학의 발달
성리학의 수용 성리학이란 ‘성명의리(性命義理)의 학’의 준말이다. 중국송대 주자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종래의 훈고학에 비해 불교, 도교의 영향으로 우주, 자연 및 인성(人性)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가 깊어졌고 심성수양이 철저해진 유학이다.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많은 《논어》《맹자》《대학》《중용》의 4서를 가장 중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하였다. 성리학은 고려후기 안향, 백이정이 들여온 후, 고려 말기 권문세족과 대립된 성격을 지녔던 신진사대부들이 학문적, 사상적 토대로 수용하였다. 특히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했던 정도전, 권근 등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을 성리학에 입각하여 합리화하였으며, 이후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 성리학의 두 흐름
| 연원 | 학풍 | 정치형태 | 경제적 기반 | 역사의식 | 비고 |
관학파 | 역성 혁명 참가 | 사장 중심 | 중앙집권,부국강병 | 대농장 소유 | 자주적 민족의식 | 15세기 |
사학파 | 조선 건국 반대 | 경학 중심 | 향촌자치,왕도정치 | 중소지주 | 존화주의 | 16세기 |
가. 관학파(훈구파)
⑴ 고려말 개혁에 적극적인 혁명파(정도전, 권근) 계승
⑵ 왕권강화, 중앙집권체제 옹호, 부국강병 중시
⑶ 사장 중시, 도교, 풍수지리, 민간신앙 포용→ 수준높은 근세문화 창조
나. 사학파(사림파)
⑴ 고려말 개혁에 소극적인 온건파(정몽주) 계승
⑵ 유교적 의리와 명분 중시
⑶ 경학 중시, 성리학 이외 학문 배척
⑷ 성종 전후 정계 진출→ 훈구세력과의 갈등으로 사화 발생
2 성리학의 융성
가. 주기론 : 경험적 세계 중시, 서경덕, 이이가 대성
나. 주리론 : 원리적 문제 중시, 이언적, 이황이 대성. 향촌에서 중소지주적 기반 가진 들이 승
다. 이황(李滉, 1501~1570) : 주자의 이기이원론에서 발전, 이언적(李彦迪)의 철학을 발전시켜 주리론(主理論)을 확립하고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창하고 이는 착하고 보편적이지만 기는 착한 것과 악한 것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생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4단은 좋은 것으로 7정은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황의 학설은 류성룡, 김성일, 정구, 장현광 등 영남학파에 계승되고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다.영남학파 형성. 주자서절요, 성학십도(聖學十圖)
李滉의 사상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한 이황(1501∼1570)은 주자의 학설을 준봉하여 이를 대성시킴으로써 ‘동방의 주자’라 일컬어 졌다. 그는 주자의 주장과 같이 우주의 현상계를 이기이원론으로 설명하여,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학적 존재로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이원론을 주장하면서도 보다 근원적인 면에서는 주리적 경향을 추구하였다.
라. 이이(李珥, 1536~1584) : 관념적 도덕세계 중시, 현실문제의 개혁 주장, 이와 기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이기이원적일원론(理氣一元的二元論)을 주장하고 형이하학의 기가 먼저 발동하면 이에 기에 올라탄다는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내세웠다. 4단과7정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4단에도 기가 들어 있고 7정에도 이가 들어 있다고 하였다. 기호학파 형성.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李珥의 사상
이이(1536∼1584)는 서경덕의 학설을 이어받아 주기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의 존재의 근원은 기에 있으며, 모든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데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이러한 기의 작용에 내재하는 보편적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현상의 변화, 발전을 기의 작용으로 이해하고, 이념적 윤리보다는 실천적 윤리를, 인간 본연의 성보다는 기질의 성을 더 중요시 하였다. 이황이 인의예지신 등의 덕목을 인간의 순수 이성에 따른 절대 선이라고 믿은 데 대하여, 이이는 그것을 인간의 선한 심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기를 모든 삼라만상의 총화로 보고, 이를 기에 내재하면서 기를 주재하는 기본원리로 파악하였다.
마. 영향 : 이기 철학 성립, 정치 활성화에 공헌 지나친 도덕주의로 현실적인 부국강병 소홀
이기론(理氣論)의 발달
우주만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하늘의 이치(天理)를 사회에 구현하려는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 운동을 이(理)와 기(氣)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주나 인간 심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인 이와,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인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우주만물과 인간이 생성되고 움직인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언적과 이황으로 이어지는 주리론은 송나라 주자의 주장과 같이 우주의 현상계를 이, 기의 이원적으로 보고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법칙이고 기는 형질을 갖춘 존재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따라서 근원적인 법칙인 이의 우위를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에 반하여 서경덕, 이이로 이어진 주기론은 만물의 근원은 기에 있고, 모든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데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 이러한 기의 작용에 내재하는 보편적 원리라고 본다. 즉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파악하고 기의 작용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이황이 기대승과 시작한 4단7정(四端七情)의 논의가 성리학 이론의 핵심문제로 등장하여 오랜 시기에 걸쳐 논쟁이 진행되면 주기파와 주리파의 학파가 나뉘어졌다.
주기론과 주리론
구분 | 학문성향 | 선구자 | 대표자 | 계승자 | 학파 | 붕당 |
주리론 | 도덕적 원리 중시 | 이언적 | 이황 | 김성일,유성룡 | 영남학파 형성 | 동인 |
주기론 | 경험적 현실 중시 | 서경덕 | 이이 | 조헌,김장생 | 기호학파 형성 | 서인 |
영남학파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학파로 특히 퇴계 이황의 학문을 따르는 학문계열이다. 이황의 주리론적 학문은 유성룡, 김성일, 기대승 등이 그 학풍을 따랐고, 조선후기에 이익, 이항로 등으로 이어졌다.
기호학파
율곡 이이의 학문을 따르는 학자를 총칭하는 것으로, 경기도를 비롯한 황해도, 충청도 지방의 학자들이 그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황의 영남학파에 구별하여 일컬은 것이다. 조헌, 김장생 등을 이어 송시열로 이어졌다.
3 예학과 보학
가. 예학 : 상장제례에 관한 학문
⑴ 도덕 윤리의 형식 논리를 중시하고 명분 중심의 가치 강조
⑵ 기능 : 상장제례의 의식 정립, 유교적 가족제도 확립,
⑶ 지나친 형식주의로 정쟁의 구실이 됨
나. 보학 : 종족의 내력을 기록하는 족보학에 관한 학문
⑴ 사림의 문벌형성과 신분적 우위성 유지의 필요에 따라 발달
⑵ 종족의 내력 기록, 종적인 내력과 횡적인 관계 확인 → 종족 내부의 결속 강화, 문벌의 권위 과시
⑶ 양반문벌제도 강화에 기여
다. 의미: 예학은 종족의 의례를 규제,
라. 의이 :보학은 종족의 종적내력과 횡적 관계 확인하여 종족의 결속 강화
보학과 예학
조선 사회는 사림 중심의 양반사회로서 동성동본의 혈족집단인 종족이나 그 분파인 가계는 중요한 사회적 세력의 단위였다. 이 종족이나 가계안에서의 유대관계를 밝혀 종으로는 혈통관계를 밝히고, 횡으로는 동족관계를 기록한 족보가 조선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족보가 이 때에 널리 만들어지게 된 것은 그것이 여러 가지 사회적 특권을 누리는 양반의 신분을 밝혀 줄 뿐 아니라 또 동족인사와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족보에 의해서 자기 동족 중의 유명인사를 알아 두는 것이 필요로 했다. 이리하여 족보를 외우는 소위 보학은 양반이 지녀야 할 하나의 필수적 지식이 되어, 보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동족관계에 대한 지식이 보학이라면, 동족 관계에 따르는 상장제례에 관한 지식이 예학이었다. 가례는 성리학이 들어온 이래 주자가례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었으며, 양반들에게 일종의 강제성을 띠고 무의식적으로 행해져 왔다. 그러다가 김장생이 가례집람을 저술함에 미쳐 예학은 이론적인 학문으로 성립하게 되었다. 김자생은 무의식적으로 규정된 절차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으로 몸소 실천하는 데에 예학의 근본 취지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는데, 이 후 예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성립하였고, 이에 관한 많은 저술들이 나타났다.
Ⅶ. 성리학의 변화
가. 성리학의 절대화
양란 이후의 위기와 조선사회의 모순을 성리학을 통해 극복하려 하여 성리학은 다른 학문에 대해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보였다. 특히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은 인조반정의 정당화를 위해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화했다(송시열)
나. 성리학에 대한 비판
서인 노론이 집권하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주자성리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데 주자의 설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학자들이 나나났다. 속종 때 윤휴(尹鑴)는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학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다 송시열과 기해해송(1차에송, 1659)에서 패하여 처형되고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에서 주자의 주해에 따르지 않고 노자, 장자의 도가사상에 접근하면서 현실과 거리가 있는 성리학을 비판하며 실천적인 학문을 추구했다. 윤휴와 박세당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유학의 반역자)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다. 사상논쟁
⑴ 16세기 사림의 발달배경
16세기 후반 이(理)와 기(氣)를 둘러싸고 이황 학파와 이이 학파에서 발생하여 이기론 논쟁 이 있었다. 16세시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인간심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⑵ 이기론 선구자
① 서경덕(徐敬德)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에 대해 개방적이었다(唯氣論).
② 조식(曺植)
노장사상에 대해 포용적이었으며 학문의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③ 이언적(李彦迪)
기(氣)보다는 이(理)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⑶ 이기론(성리학)의 정착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뿌리를 내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구분 | 이황(李滉, 1501~1570) | 이이(李珥, 1536~1583) | 서경덕(서경덕, 徐敬德, 1489~ 1546) |
배경 | 훈척투쟁기 | 사림집권기 | 이기논쟁기 |
대표적 표현 | 이존기비(理尊基卑) | 이통기국(理通氣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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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관계(理氣關係) | 이(理) 강조=주리론(主理論)
| 기(氣) 강조=주기론(主氣論)) | 태허지기(太虛之氣)의 유기론(唯氣論) |
특징 | 근본주의적・이상주의적 성격이 강함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 | 현실적이며 개방적인 성격이 강함 | 무형•유형간에 기의 취산(聚散)이 있을 뿐 기의 증멸(增滅)은 없다 |
붕당 | 남인 | 서인 | 동인(북인) |
저술 | 주자서절요, 성학십도(聖學十圖), 송계원명이학통론, 도산12곡, 심경후론, 역학계몽전의, 학인심방, 예안향약, 자성록,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동호문답, 성학집요, 소학집주, 만언봉사, 격몽요결, 기자실기, 고산구곡가 | 화담집(花潭集) |
영향 | 영남학파 형성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기여 | 기호학파 형성 조선후기 집권세력과 연계 사회개혁론(수미법) | 개화사상 철학적 바탕 |
발전 | 김성일, 류성룡, 이현일, 이재, 이상정, 류치명→19세기 김흥락, 이우너조, 이진상, 곽종석 이일원론(理一元論) | 송시열, 호론(湖論), 낙론(洛論), 이일원론(理一元論) : 기정지느 이항로 | 18세기 임성주(任聖周), 철종~고종때 최한기(崔漢綺) |
라. 호락논쟁
18세기 노론 학계 사이에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호락논쟁이 벌어졌다. 권상하(權尙夏, 遂菴)의 제자 가운데 한원진(韓元震, 南塘)이 이론을 주장하고 이간(李柬, 巍巖)은 동론을 주장하였는데 이간의 동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서울 지방에 많아 낙론(洛論)이라 하고 한원진의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호서(湖西) 지역에 많아 호론(湖論)이라 하였다.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하는 충청도 노론(湖論)과 인간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하는 서울, 경기 노론(洛論)사이에서 시작하여 소론은 절충적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양명학과 노장사상 수용하여 성리학 이해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이론 | 호론(湖論) | 낙론(洛論) |
지역적 기반 | 충청도 | 서울・기호지방 |
주장 |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
강조 | 기(氣)의 중요성 강조 | 이(理)의 중요성 강조 |
학자 | 한원진, 윤봉구 | 이간, 김창협, 어유봉, 이재. 박주필, 김원행 |
영향 | 위정척사 운동 | 북학파 및 개화파, 위정척사운동 |
2. 양명학의 수용
가. 양명학의 전래
양명학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 본명 王守仁, 1472~1529)이 남송의 육구연(陸九淵, 陸象山)을 계승하여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주장한 것으로 주관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나. 양명학의 수용
정권에서 소외된 경기지역 소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다. 양명학의 발달
정몽주의 11대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에 의해서 체계화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는 주자로부터 손을 끊고 강화(서울, 안산 41・6, 강화 61~87)에 옮겨 살며 반관적(半官的)인 일민(逸民)으로서 살며 일반민을 도덕 실천 주체로 인정하고 양반 신분제 폐지 주장하며 강화 학파 형성하고 실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정제두의 대표적인 저서는 존언(存言)에서 양명학 체계를 나타내 주고 있고 하곡집(霞谷集)이 있다.
라. 계승
집안의 후손과 인척을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를 형성하고 이후 역사학, 국어학, 서화, 문학 등 새로운 경지 개척하고 실학자들과 영향을 주었으며 일제시대 박은식, 정인보 등이 계승하여 국학운동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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