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호질(虎叱)과 과농소초(課農小抄) 이야기
星軒 李鎔奎
금년은 경인년(庚寅年) 호랑이해 이다. 호랑이는 영검한 동물로 풍자되고 있다.
실학의 선구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영조 13)~1805(순조 5)의 호질(虎叱) 이라는 소설과 농서(農書)인 과농소초(課農小抄)가 있다.
호질은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호랑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그 시대의 대표인 양반과 열녀 등을 풍자한 소설이다.
그 내용을 보면 작가인 박지원은 이 소설을 통해서 당시의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인 양반이나 열녀 등이 가지고 있는 위선적(僞善的)이고 가식적(假飾的)인 모습을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세 부류의 인물이 등장하는 데 양반을 대표하는 주인공인'북곽'선생 열녀(烈女)를 대표하는'동리자'그리고 이들의 위선(僞善)을 낱낱이 파헤치는'호랑이'가 바로 그 세 인물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큰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의사 고기는 의심이 나고 무당 고기는 불결해서 먹을 수가 없고 결국 청렴한 선비 고기를 먹기로 결정하고 마을로 내려온다. 이 때 고을에는 도학(道學)으로 이름난'북곽'선생이라는 선비가'동리자'라는 청상과부 집에 들러 밀회를 나누고 있었다. 이를 엿들은 과부의 성이 다른 아들 다섯 명(성이 다른 5명의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열녀로서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은 서로 말하기를
“〈예기(禮記)〉에는 ‘과부 집 문 안에는 들어가지도 말라’고 했지. 북곽 선생은 어진 선비시라 그런 짓을 안 할 거야.” 라고 말하자,
다른 아들이 “내가 듣기로는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사람의 모양으로 변할 수 있다는데, 이놈이 반드시'북곽'선생의 모양으로 변했을 거야.” 라고 말 하면서, 다섯 아들이 함께 포위하고 들이치자'북곽'선생이 깜짝 놀라서 도망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봐 한쪽 다리를 들어 목덜미에 걸친 채 귀신의 춤을 추고, 귀신의 웃음소리를 내며 문 밖으로 나가 달음박질치다가, 들판의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 안에는 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허우적거리며 기어올라 머리를 내밀고 바라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편 호랑이는 이마를 찡그리고 구역질을 하며, 코를 싸쥐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내뱉기를, “선비라는 놈들 더럽기도 하구나!” 하자 북곽 선생은 머리를 조아리고 앞으로 기어 나와 세 번 절한 후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말하기를, “호랑이님의 덕이야말로 얼마나 지극하신지!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 제왕(帝王)은 그 걸음걸이를 배우고, 아들들은 그 효성을 본받고, 장수(將帥)는 그 위세를 본받고, 그 이름을 신룡(神龍)과 나란히 하시니, 한 분은 바람을 일으키시고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셨습니다. 저 같은 궁벽한 땅의 천한 신민(臣民)은 감히 하풍(下風)에만 있을 따름이옵니다.” 라고 하자 호랑이가 꾸짖기를, “가까이 오지 마라! 구린내 난다! 내 들으니, 유(儒)란 족속은 유(諛; 아첨할 유)하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너는 평소에는 세상의 나쁜 이름은 모두 모아 망령되이 내게 씌웠다.........대충 이런 내용이다.
‘호질’에서 가장 주된 주장은 썩은 위학자(僞學者)들에 대한 공격이다. 인륜(人倫)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아부(阿附)에만 눈이 먼 세 마리 창귀(倀鬼)들의 행실, 나라의 이름 높은 선비로서 과부'동리자'와 간통하고 달아나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온갖 아첨(阿諂)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한'북곽'선생의 행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연암은 호랑이의 입을 빌려 ‘유(儒)’는 ‘유(諛)’라고 잘라 말하며 이들 위학자(僞學者)들에게 가슴이 후련해지는 질타(叱咤)를 퍼부은 것이다............지금의 우리사회에 만연된 위선자들도 새겨야할 연암의 가르침이다.(筆者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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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선생의 가계(家系)를 살펴보면,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그의 가문은 노론의 명문세신(名門世臣)이었지만, 그가 자랄 때는 재산이 변변치 못해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의 조상은 여말의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박상충(朴尙衷)이었고, 조선조의 좌참찬이고『기재사초(寄齋史草)』의 저자인 박동량(朴東亮)은 6대조로서 그 아들인 5대조 박미(朴瀰)는 선조의 부마 금양위(錦陽尉)였으며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지돈녕부사로 역대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평탄하지를 못하여 시종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야 했으며 부친 박사유는 일찍 세상을 떠나 박지원은 청렴(淸廉)했던 조부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다가 16세 되던 해에 조부마저 여의게 되었으며, 이 해에 그는 변안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의 조부인 박필균은 외롭고 어린 박지원을 불쌍히 여겨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16세까지는 글공부를 전혀 못한 채 세월을 보냈다. 어린 박지원에게 글을 가르친 사람은 그의 처삼촌이며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던 이양천(李亮天)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양천은 당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있었는데, 그는 박지원의 출중한 재질에 놀라 그에게 학문 전반을 가르치면서 총애하였다. 박지원 역시 학문에 대한 정열이 강렬했고 재능도 뛰어났기 때문에 공부를 시작한지 3년 만에 놀라울 정도로 학문의 진전을 보였다고 한다. 3년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공부에 전념한 박지원은 경학· 병학· 농학 등 모든 경세실용의 학문을 연구했다. 특히 문재(文才)를 타고나 이미 18세 무렵에《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었다.
그리하여 연암은 유교경전(儒敎經典), 제자백가(諸子百家), 병농전곡(兵農錢穀)을 비롯하여 서양의 자연과학인 천문학, 지리학까지도 섭렵하여 20대에는 이미 탁월한 문인이며, 진보적 사상가(思想家)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20세에서 30세 사이에는⌈양반전⌋을 비롯한 9편의 소설을 짓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의 불합리한 측면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30대에는 스승으로 활약하여 박제가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암은 아정 이덕무, 냉재 유득공, 강산 이서구, 서상수 등 사가시인(四家詩人)과 친하여 낙원동 일대를 중심으로 밤낮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고 당시 세도를 잡고 있던 사람들과 위학자(僞學者)들을 야유, 비판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이 성장하고 활동하던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의 시기는 성리학적 이상국가(理想國家) 이념과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관에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하던 때였다. 박지원은 노론 낙학파(洛學派)의 명문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권력층에서 소외된 힘없고 가난한 지식인들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중간적 위치에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를 즐겼는데 이를 통해 활발하게 변화해가는 서울의 개방적 흐름을 소화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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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농소초》라는 책명은 농학개론(農學槪論)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중국과 한국 역대의 농서를 두루 인용하면서 요소요소에 <臣趾源曰...>하고 자신의 견해를 넣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제가총론(諸家總論)에서 중국의 8대(大) 농학자의 설을 풀이하고 전가월령(田家月令)을 소개한 뒤 끝에 부언하기를 농사는 때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는 관리도 농민의 농시(農時)를 빼앗지 말아야 한다고 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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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연암은 초정 박제가와 같이 모범농장을 설치하여 농업 경영방식을 교육하되, 각지에서 힘써 농사짓는 젊은이를 모범농장에 종사케 한 후 돌아가 각 지방의 농업지도자가 되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치 80년대 우리가 정책적으로 시행했던 영농후계자 교육과 같은 시스템을 생각했던 선구자였다. 농림부는 1980년대부터 농업인력 육성의 필요에 따라 농업인 후계자, 전업농 육성, 신지식 농업인 육성 등의 사업을 시행하여 왔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선생은 이미 암울했던 210년 전에 이를 생각하고 실시하고자 했던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