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항공
方 旻
카타르의 도하 국제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는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책에 눈을 박고 있다가 순간 겪은 일이지만 신선한 첫 경험이었다. 눈이 내려앉듯 부드럽게 착지했다. 처음 이용해 보는 카타르 항공사였지만 대단히 훌륭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장한지 얼마 안 된 공항이라 넓고 쾌적한 건물과 여러 시설물 역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국적 항공기의 불미스러운 일이 세계적 뉴스거리로 오르내리는 시점이어선지, 공항 구내 식수대에서 마신 물맛처럼 시원하고 상큼한 자극이었다.
아내와 동행하는 결혼 30주년 기념 여행이었다.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로 가는 길이라 환승하기 위해서 그곳에 내리게 되었다. 신생 항공사인데 기내의 손님 서비스도 나무랄 데 없어 보였다. 상징색인 보라의 은근하고 묵중한 느낌도 아울러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였다. 흘러간 서른 해 우리 결혼 생활을 돌아보는 여행에 잘 어울리는 듯하였다.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굴곡이 아주 심했던 것도 아닌 지난 시간이 보라색의 차분함과 콤비네이션 양복저고리처럼 그럴듯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최종 기착지인 베오그라드 공항에 가기 위해선 터키의 앙카라에 경유하는 노선이었다. 앙카라 공항에 도착해선 그곳이 목적지인 사람만 내리고 우리는 그대로 기내에 있었다. 한 시간 가량 머물다 이륙한다고 안내하였다. 그동안 무료를 달랠 심산으로 또 책을 펼치고 있었다. 정지 중인 기내라서 승무원이 오가고 손님들이 소곤거려 독서에 알맞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읽는 둥 마는 둥 책을 들고 있으며 시간을 죽였다. 자꾸 고갤 쳐드는 두더지와 한 판 땀 흘리는 게임 중이었다.
그렇게 흘려보내던 시간에 새 두더지가 등장했다. 승무원이 좌석 위의 선반에 실린 짐의 임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작은 가방은 책을 꺼내 읽느라고 발밑에 두었으나, 방한복은 비닐 팩에 넣어서 그 칸에 올려두었다. 승무원이 내 짐과 다른 사람의 짐을 확인하였다. 같은 짐인데도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여러 번 반복했다. 왜 같은 일을 반복하는지 슬슬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허나 내 짐은 두어 번 확인이 끝났기에 들고 있던 책을 다시 펼치고 있는데 좌석의 앞쪽에서 또 짐을 꺼내들고 재차 확인했다. 고갤 들어 보니 내 옷짐이었다.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쳐 확인하고 도로 제 칸에 넣게 했다. 여러 번에 걸쳐 확인한 것인데 또 하다니, 갑자기 빈속에 들이킨 독주마냥 얼굴로 뜨거운 기운이 확 올랐다. 열기가 전신으로 퍼지면서 이 항공사에 대한 호감이 싹 줄행랑쳤다. 그간 다듬어온 이성으로도 어찌 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다. 알프스의 눈보라가 온몸에 몰아쳐 갑작스레 골짜기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그러면 조금 전까지 품고 있었던 카타르 항공사에 대한 나의 첫인상과 호감은 폭풍처럼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딱 한 번만 경험하고 봄눈 녹듯 그리 쉬 결론을 내린 셈이 아닌가.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아 그 판단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닌가. 속단은 금물이라는 말이 그 순간 머리를 때렸다. 그래 옳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한 것이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내 문제다. 왜 단 한 번의 스침만으로 나머지 전부를 결정하려 했던 것일까?
돌이켜 생각하면 이 여행에서 속단한 경우는 또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동행하는 여행단의 인솔자가 나이도 얼마 들지 않아 보였다. 생김새도 반듯하니 예의가 바르고 안내를 차분히 잘 할 것으로 보았다. 이것도 얼마 안가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나이도 사십대 중반이라 하고, 인솔하는 여행손님들에 대한 그의 언행이나 태도는 일방적이거나 다른 입장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경우가 많았다. 몇몇 손님들이 모여서 그러한 의견을 나누고, 귀국하여 여행사에 문제 제기를 하자는 의논까지 하게 하였다.
지난 삶을 꼽아보니 살아오면서 비슷한 경험이 한 둘이 아니다. 버스 타고 고향에 가던 길인데 어떤 외판원이 올라와서 카메라를 소개했다. 아주 좋은 품질에 싸게 판다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필요하던 차였기에 그 말을 믿고 덜컥 구매 계약을 하였다. 몇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이걸 갚느라 허덕였다. 여행하던 버스에서 파는 약을 또 사서 복용하기도 했다. 그 효과는 알 수 없는 채 할부 약값을 갚느라 바빴다. 전철 칸에서 혹해서 물건을 산 것까지 헤아리자면 적지 않다. 매 번 그런 식으로 속단하여 일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살아왔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말이 있다. 또 있다. 첫인상이 좋아서 계속 그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어느 시인의 싯구에는 첫 키스의 추억이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았다고도 하였다. 이것들은 한 번의 접촉으로 어떠한 것을 결정하거나 판단한 대표적인 것들이다. 과연 이들이 첫 판단처럼 기대하는 맛나고 향기로운 열매를 땄을까? 첫사랑은 거의 대부분 실연의 고통을 남기고 언덕 아래로 쏜살 같이 사라진다. 첫 키스의 달콤함은 뒷걸음쳐 사라지고 임은 침묵한 채 하얀 밤을 지새우게 할 뿐이다.
사람은 지내봐야 알고, 물건도 얼마간 사용해봐야 안다는 말이 그냥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말을 지금껏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늘 속단하여 그걸 뒤치다꺼리하느라 부대끼며 살아 왔다. 인생이란 속고 속이며 산다고 하면 이런 불편한 속이 해소될 것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성급한 판단으로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야 하는가. 성격이 급한 것도 하나의 유전적 소인일 터이지만 어쩌면 침착하고 차분하지 못한 본래 성향도 한몫했을 거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하지 않던가.
술이 향기롭게 익기 위해서, 장이 제 맛을 내려면 충분한 숙성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조금 더 세상을 진득하게 바라보고 더욱 오랜 기간의 경험적 축적을 기다려야겠다. 그 뒤에 판단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실수를 한 뼘이라도 줄인다. 이것이 특별한 여행길에서 깨우친 하나의 교훈은 아닐는지. 수십 년 세월이 그냥 흐른 게 아니란 걸, ‘천사의 머릿결’이라 불리는 크로아티아 라스토케 마을에서 보았다. 집집이 감돌아 흐르는 물길이 쏟아지며 우렁찬 폭포를 만들었다. 세차게 뻗쳐 나오는 물줄기는 귓속을 파고들어 가슴 깊이 나를 흔들며 깨우쳤다.
첫댓글 의미있는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에서 또 깨우침 하나 얻어 오셨네요.
속단은 금물이라고 하지만 살면서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 없을 것 같아요.
사람이니까요. ㅎㅎㅎ
그나저나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움은 매체를 통해 많이 보며 감탄했는데
즐거우셨겠어요. 축하드립니다.^^
축하 글 감사합니다. 때가 겨울이라 생각만큼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지요. 계절에 큰 영향 안 받는 두브로니크 성은 그런대로 볼만했고요. 플로트비치 공원은 눈이 내려 설경만 실컷 구경해서 조금 아쉬웠어요. 봄에 가야 녹색과 폭포 호수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것 같더군요. 좋은 계절에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하고 돌아왔어요.
아이구, 아쉬워라...
플리트비체? 그곳의 폭포수가 다 얼었으니 얼마나 아까워요.
흐르다 또 몇 갈래로 떨어져 내리고 또 흐르다 쏟아지는 그 폭포수는
영상으로 보면서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라스토케 마을은 동화의 나라처럼 보이더군요.
아름다운 계절에 다시 다녀오세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