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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이승만, 그리고 이광수 / 이승하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는 이승하입니다.
제가 학교로 오기 전, 샐러리맨 시절이었을 때 쓴 글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기분으로 취재를 하여 발표했던 것입니다.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계속되고 있어 비통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글은『월간조선』에 있던 선배의 청탁을 받고 인천에 사시던 최태영 옹을 세 차례 찾아뵙고 인터뷰하여 1996년 12월호에 발표했던 것입니다. 1900년생 최태영 옹은 2005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백 세 이상을 사신 분이지요. 이 분을 찾아뵈면 건강 비결을 꼭 물어보라고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부탁했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 소개의 글>
올해 97세의 崔옹은 노구를 이끌고 우리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가 가르치는 역사는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다. 그는 소학교시절 金九 선생에게 배웠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영국법을 전공했다. 유진오·이광수·양주동과는 친구 사이였고, 한국 학자들이 자타가 공인하는 명저의 저자이기도 하다. 3·1운동에도 참가했고 친일 지식인들의 변절도 바라보았다.
< 97세에도 정정한 비결>
19세기의 마지막 해 3월 28일에 태어났으니 96년 9개월 동안의 삶이다. 국내 최고령자의 나이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崔泰永 옹(97)과의 인터뷰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우려는 전화 한 통화로 해소됐다.
"동인천역에 와서 인천기독병원을 찾으시오. 병원 맞은편에 있는 약국 앞에서 전화하면 나가리다."
조금도 떨림이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분명한 의사 전달, 20m 정도 걸어간 집까지의 안내도 약간 천천히 걷는다 싶을 뿐, 지팡이조차 의지하지 않았다. 살아온 이력과 학자로서의 경력 등 그 무엇에 앞서 건강의 비결부터 물어보았다.
"평생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소. 젊었을 때 요릿집에 가면 기생들도 내가 술 안 하는 걸 알고 차를 내주었지. 그리고 내 양심에 거리끼는 것은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아 늘 마음이 편한 상태로 살아왔소. 늙으면 할 일이 없고 외로운 것도 병이 되는데 나는 공부할 것이 많아 잡념이 생기질 않소이다. 이것이 내 건강 비결이오."
한국 근대사 1백년과 함께한 생애. 그 격랑의 세월을 살아온 한 어르신네의 경륜과 지혜가 들어 있는 말이다. 인터뷰 도중 한 가지 놀란 것은 뛰어난 기억력이다.
"내가 참 오래 살긴 오래 살았소. 日露전쟁(국사책에는 '노일전쟁'으로 나오는데, 1904년 2월 10일에 발발)에 관한 기억이 아직 나니까. 겨울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군대에 말꼴(馬草)을 해다 바쳤어요. 러시아 군인들이 쇠기름을 버터라고 부르며 맛있게 먹는 것을 본 기억도 납니다."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국내판에 소개되어 있는 崔泰永 옹의 경력 중 앞부분의 것만 몇 줄 인용해본다.
"1921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예과, 24년 동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영문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 강의를 시작했고, 8·15 해방 후 46년 부산대 교수에 취임했으며, 변호사 자격을 인정받았다. 47년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직을 인정받았다. 47년 서울대 법과대학장, 48년 대한민국 법전 편찬위원, 49년 중앙대 교수가 되었다."
다른 것은 다 맞는데 영문과 졸업은 잘못된 것이다. 영법과(英法科)의 오기이다. 그는 일본도 조선도 독일법을 공부하던 시절, 특이하게도 영국법을 전공하였다.
< 金九에게 배운 역사>
계속 이어지는 경력은 법률학자와 법학과 교수로서 자신의 생을 그 누구보다 성실히 살아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맨 끝에 주요 저서가 소개되어 있다. 『어음·수표법』『민법총칙』『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 외에 이채롭게도 『한국상고사』가 끼어 있다. 인천시 율목동의 최옹 자택을 다섯 차례나 방문한 이유가 바로 이 책에 있었다. 『한국상고사』는 1990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선생의 나이 아흔한 살에 펴낸 역사서인 것이다.
"내가 김구 선생한테 역사를 직접 배운 제자 중 살아 있는 마지막 사람이오. 장지영(張志暎) 선생한테 직접 배운 제자도 나 하나 남았을 거요. 내가 뒤늦게 우리 상고사를 공부하고 후학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이분들한테 배운 것을 전하려는 이유가 큽니다. 두 선생님이 말씀하신 우리 혼, 우리 정신을 말해주고 가고 싶소.."
김구와 장지영으로부터 역사를 배웠다는 것은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라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김구 선생은 합방 몇 해 전에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양산학교의 선생이 되어 교육운동을 폈소.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이자 국권회복운동이지요. 안악에 인접한 은율군 장연에 내가 나온 광진(光進)학교가 세워지자 우리 학교에도 와서 강의를 했어요."
장연예수교회에서 운영하던 광진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리자 기선회사를 경영한 崔옹의 할아버지가 돈을 대 되살려냈다. 명목상의 이사장은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는 김구 선생으로부터 받은 수업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교수법이 아주 특이했소. 그 당시에 환등기를 들고 다니며 역사를 가르쳤으니까. 밤에 학교 마당에서 환등기를 보여주며 우리한테 역사 얘기를 해주셨어요. 중국에 가서 찍어온 풍물 사진도 보여주고, 화성돈(워싱턴)이니 나파륜(나폴레옹)이니 비사맥(비스마르크)이니 소격라철소(소크라테스) 같은 이름도 김구 선생한테서 처음 들었소. 어린 학동들한테 역사의식을 심어주려고 고구려 얘기를 많이 하셨지. 개화당 사건도 김구 선생한테 들어서 알았고. 그 무렵에는 '金九'라고 쓰지 않고 '金龜'라고 써 우리는 거북이 선생님이라고 불렀소."
장지영 선생은 사학자가 아니라 국어학자라고 알고 있어 의문을 제기했다.
"당시에 국어학자는 사학자였소. 둘 다 한국학 속에 포함되는 것 아니오. 광진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와 미션계 경신(儆新)학교에 갔더니 장선생이 계셨소. 국어와 수학을 주로 가르치셨는데, 역사도 이분한테 배웠습니다. 내가 중학을 마칠 때까지는 역사 하면 우리나라 역사하고 세계사지, 일본 역사는 전혀 배우지 않았어요. 일본사 공부는 고대사 연구하면서 뒤늦게 했지. 그만큼 식민사관·황도사관에 오염이 안 되었다고 할까."
< 메이지大에서 영법학 전공>
광진학교 시절에 다른 일화는 없었느냐는 질문에 崔옹은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1967년에 작고한 은사 백남훈(白南薰)이 쓴 『나의 一生』이란 책이었다.
"이 책에 보면 내 얘기가 몇 군데 나옵니다. 내가 어릴 때는 대중연설에 재능이 있었나봐요. 칠팔 세 어린 나이에 국책(國責) 갚기 위한 전국민 모금운동 연설단을 따라다니며 연설을 해 가는 곳마다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는 문약(文弱)에 허덕이던 때라 상무정신을 불어넣고자 학교마다 군대식 체조가 유행했고, 학교 대항·지방 대항 운동회가 성했습니다. 운동회 때는 내가 먼저 앞에 나가 연설을 했어요. 그래서 한평생 접장 노릇을 했고, 이 나이 되도록 강의를 하고 있소."
아흔일곱의 나이에 강의를 하고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아 확인차 물어보았다.
"인천대학에서 요청이 있어 93년 9월부터 몇 학기 시간강사로 나갔지요. 그 학교 한국학연구소에 있으면서 한국학 연구를 위한 기반 조성과 희귀 자료 수집운동을 펼 계획을 갖고 있었소. 학교가 재단분규에 휩싸이는 바람에 나를 밀어주겠다던 사람들도 물러나고 강의도 중단하게 되었소. 2년만 더 머물러 있었더라면 결과가 나왔을 텐데……. 5월부터는 다시 방배동에 나가 강의를 할 요량으로 있는데, 아마도 이번이 내 생애 마지막 강좌가 될 것 같소."
정릉에서 하다가 방배동의 한 빌딩으로 옮겨와 행하는 한국상고사 강좌는 1985년부터 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매 강좌당 20∼30명의 수료생을 배출하고 있고, 여러 해째 계속 나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최옹의 정력과 의욕은 불가사의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듯.
얘기는 자연스럽게 일본 유학 시절로 옮겨갔다. 메이지대학 전문부 예과에 입학한 것은 1918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1년 뒤였다. 경신학교는 성경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고등보통학교의 자격을 주지 않아 그는 일본에서 검정시험을 쳐야 했다. 그래서 한 해 늦게 다른 한국인 학생 한 사람과 함께 입학시험에 합격, 메이지대학 법학과 유학생 제1기를 형성한다.
"도일할 때는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해 낙후된 우리나라의 산업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소. 그런데 검정시험을 준비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법학을 하라고 권유하는 게 아니겠소. 그때야 아버지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니 따라야지요. 예과를 마치고 전공을 정할 때는 또 영법학을 하라고 권유합디다. 일본서 유학하고 온 백남훈 선생이 아버지한테 적극 권한 것인데, 내 운명이 정해지는 순간이었소."
법학이라면 대개 독일법이나 일본법을 공부할 때였을 텐데 일본에서의 영법학 공부는 무척 이채롭게 들렸다.
"내가 영어를 잘했는데, 그건 남보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다닌 학교가 미션계라 그랬어요. 영어를 선교사들한테 배웠으니 잘하는 게 당연하지 않소. 일본인들은 영어 발음이 엉망이거든. 내가 영어를 잘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백남훈 선생이 장차 영국과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갈 날이 올 거라면서 영법학을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요."
일본 유학시절에 다른 기억날 만한 일이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존경하는 한 일본인 스승의 얘기를 했다.
"당시 명치대학은 정년퇴직한 대법원 판사들이 주로 강의해 강사진이 아주 좋았소. 1920년에 대학령 공포로 정규대학 인가가 나니까 실력으로 동경대를 이기자고 다들 열심히 했지요. 거기 이데다카(出隆)라는 젊은 교수가 있었소. 내가 알기로는 교회당에서 설교도 하던 기독교인인데 반전론자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아 감옥에 집어넣었소이다. 태평양전쟁 도중에 그만 옥사했지요. 동족이라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면 그런 식으로 탄압했는데,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특히 많이 죽었소."
< 고향에서 참가한 3·1운동>
3·1운동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대부분의 학생은 조선독립단 동맹휴학촉진부를 결성, 동맹휴학에 참가해 1년 유급을 감수한다. 일제의 통제에 따르면 기미년 2월 8일부터 5월 15일까지 재일유학생 3백59명이 귀국했다고 되어 있다. 대다수 유학생이 1년 유급을 감수하며 고국을 찾았을 때, 최태영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아버지가 고종황제 국장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소문을 듣고 2월 그믐에 서울에 가서 3·1운동에 참가하고 왔습니다. 독립선언서 한 부를 숨겨 가지고 왔더군요. 그걸 베껴 밤을 새워 면사무소 등사기계를 이용해 등사했지요. 태극기는 커다란 나무 재떨이 뒤에다 새겨 먹을 묻혀 찍어냈고."
ㅡ목판화처럼 말이지요.
"맞습니다. 은율장이 서는 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른다고 각 면에 독립선언서를 돌리면서 연락했더니 3천 명이 모였습니다. 시골 순사들은 우리 기세에 눌려 코빼기도 안 비쳤어요. 시장 가운데 냇물이 흐르고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 위에서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동네방네 돌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날 밤에 집에 와 잠을 자는데 순사가 총을 들고 와 나를 압송해 갑디다."
최태영 옹이 일제시대 때만 22년간 보성전문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또 한동안 경신학교의 초대 한국인 교장을 겸하는 동안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은 김구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 무렵의 고생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서의 조선인 순사는 네가 앞으로 어디에 끌려가더라도 소학교만 나온 무식한 놈으로 행세하고, 묻는 말에 '예' '아니오' '모릅니다'란 말만 하지 다른 말은 일체 하지 말라고 충고합디다. 나이도 스물이라 하지 말고 열여덟이라 해야 된다고 했는데, 결국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형은 안 살고 나왔지요.
헌병대에 끌려가서 맞고 지청에 끌려가서 맞고……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조선인 순사들은 낮에는 무섭게 해도 밤에는 들여다보고는 어린것이 장하다는 말도 해주고 먹을 것도 주고 그럽디다."
어린 최태영의 독립운동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3·1운동 1주년 기념 시위에 대한 추억을 미소 가득한 얼굴로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바로 1년 후 3월 1일의 새벽이었습니다. 훗날 YMCA 총무를 한 최승만(崔承萬)과 함께 일본 왕궁 앞 히비야 공원에서 만세를 하자고 결의했지요. 학생들 수십 명이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하려고 학생복 위에다 일본옷을 입고 모였습니다. 일본옷을 벗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지요. 다들 목숨을 걸고 한 시위였습니다. 시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일본 경찰이 까맣게 몰려와 우리를 잡아갑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일경은 학생들을 몽땅 그 다음날 새벽에 훈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뒷날 알고 보니 3·1운동 때 학생들한테 데여 이번 일은 대수롭지 않은 걸로 처리하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하고는 언론에 보도되지 않도록 하고서 전부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 춘원 이광수와의 추억>
최옹이 이광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18년 12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였다. 이광수는 중매로 만난 첫 아내 백혜순(白惠順)과 이혼에 합의한 뒤 허영숙(許英肅)과 함께 북경으로 사랑의 도피여행을 떠났다가 동경으로 막 귀환한 때였다. 당시 조선학교연합교회에서는 개신교의 여러 교파를 초월한 교회와 청년회관을 운영하면서 유학중인 기독청년들을 결집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교회에서 만난 이광수는 이미 장편소설 「무정」과 「개척자」로 일약 조선 문단의 총아가 되어 있었음에도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타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불교도인 줄 알았는데 예배당엘 나옵디다. 그래서 거의 매주 한번은 만났지요. 그는 동경에 온 이듬해 1월에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를 썼습니다. 그 선언서는 일제와 결사항전하겠다는 의지가 철철 넘칩니다. 그런데도 춘원은 마음의 안정을 못 찾고 늘 불안해 하는 것이었소."
일명 2·8독립선언서라고도 하는 조선청년독립단 선언서는 1919년 1월에 이광수가 쓴 것으로서, 그해 2월 8일에 백관수(白寬洙)에 의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4백여 명 유학생들 앞에서 낭독된다. 이 거사일을 며칠 앞두고 이광수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상해로 망명한다.
"평소 타협적 개량론을 부르짖던 그가 그런 글을 자의로 쓰지는 않았을 거요. 유학생들이 「무정」을 쓴 춘원이 왔다고 부추기자 한껏 고무되어 썼겠지요. 허영숙과 한창 교제중이었고, 어디에서도 안정된 생활을 못해 불안해 하던 터라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예배당엘 매주 나왔고, 그 덕에 그걸 쓰게 된 게 아닌가 싶소."
사진첩을 뒤적이던 중 금강산 비로봉에 이광수와 같이 올라가 찍은 사진이 나왔다.
"이광수는 나보다 나이는 여덟 살이 많았는데, 일본서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무렵에 몇 번 만났소. 한국에 와 그 양반이 신문사에 있을 때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지요. 전공은 달랐지만 그분도 오산학교 교사를 한 적이 있어 친하게 지냈소."
금강산에는 어떻게 같이 올라가게 되었을까.
"학생들 데리고 여행을 갔었는데, 이광수가 그때 바람을 피워 부인인 허영숙이 보기 미안해 금강산으로 피신해 와 있습디다."
당연히, 바람을 피운 사람이 누구였는지 물어보았다.
"김일엽(金一葉)이었던가, 모윤숙(毛允淑)이던가…… 아, 모윤숙이오. 허영숙이 위자료를 주고 둘 사이를 뗐지. 장안사 근처 마사연에선가 만났는데 심심하니까 나와 같이 가겠다고 나서더군요. 폐가 안 좋은 이라 돌계단 30리를 내가 끌다시피 해서 올라갔소. 비로봉에 올라가서는 반쯤 죽었는데 그래도 그 몸으로 올라온 게 장한지 무척 좋아합디다. 마의태자 묘 근처에서 하룻밤 묵는데 장안사까지 쫓아온 허영숙이 보행꾼을 거기로 보내지 않았겠소."
작품을 통해서밖에 만날 수 없던 이광수가 아니었던가. 젊은 날의 비사(秘事)를 반신반의하며 계속 들었다.
"보행꾼한테 우린 볼 거 보면서 온정리로 갈 거라고, 그렇게 알라고 편지를 전했소. 허영숙은 이번에는 온정리로 사람을 보냈소. 여관에서 자는데 이종수(李鐘洙)의 말소리가 들리더라고. 동행한 나한테 마누라가 불러서 간다고 말하기가 창피하니까 짐을 챙겨 이종수와 함께 몰래 나가는 걸 모른 척했지. 뒷날 만났더니 되게 쑥스러워하더구만. 춘원이 나 아니었으면 「금강산유기」도 「마의태자」도 절대 못 썼을 거요."
이종수는 이광수를 따르던 문학도 겸 기자였다고. 허영숙의 치맛바람 때문에 바람도 제대로 못 피운 이광수의 소심함을 떠올리며 최옹은 밝게 웃었다.
"이광수 그 사람 마음이 그만큼 약해요. 말을 해보면 꼭 어린애 같소. 조실부모하고 열 몇 살에 폐병에 걸려 고생하고……. 그래서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저항할 힘이 없었을 거요. 수양동우회사건 때 허영숙이 총독부에 가서 담판을 짓지 않았소. 내가 이 사람 보장할 테니까 징역일랑 안 시킬 수 있겠느냐, 총독부가 그래 두고보마고 해서 불기소 처분으로 나왔고, 그때 그만 변절하지 않았소.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것이 일제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이오."
< 민족의 스승, 안창호>
ㅡ선생님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겠습니다.
"시골 아버지가 협박에 못 이겨 자식들 이름을 임의로 다 고쳐놓았습니다. 그때 오히려 이완용 같은 골수 친일파들은 창씨를 하지 않았지요. 안 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으니까."
민족의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인물로 최옹은 김구와 더불어 안창호를 꼽았다.
"춘원은 상해로 망명해 가서 도산을 처음 만납니다. 거기서 흥사단에 입단하고 귀국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지요."
그런데 결혼한 다음해인 1922년 이광수는 그 유명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상당한 물의를 일으킨다.
"이광수가 변절해도 안창호 선생이 끝끝내 감싸안는 것을 보고 내가 감복하였소. 남들이 친일파라고 아무리 욕을 해도 안창호 선생은 여전히 춘원을 아꼈고 찾아오면 만나주었지요."
도산은 1932년 6월에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온다. 가출옥으로 석방된 것이 1935년 2월, 최옹은 그제서야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안창호 선생이 삼각지에 있는 여관에서 기거하실 때 춘원하고 같이 종종 찾아뵈었소. 춘원을 앞세우고 가면 총독부에서도 의심을 안 하거든. 두 사람은 상해에서 함께 했던 시절도 있고 북경에서 만난 일도 있어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한번은 김홍량(金鴻亮) 선생을 모시고 갔더니 안창호 선생이 '우리 지나간 일은 얘기하지 맙시다. 내 선생이 해오신 일은 다 알고 있소. 이제는 힘을 모아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 딱 세 마디로 사람을 휘어잡습디다. 안창호 선생은 그만큼 포용력이 있었어요."
김홍량이 세우고 김구가 이끌어가던 안악의 양산학교는 안창호가 합방 전 "우리 삼천리 강산 13도마다 양산학교 같은 학교가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다"란 말을 한 명문사학이다. 김홍량은 일제가 조작한 '안악사건'으로 7년을, 김구는 4년을 복역한다. 춘원과 최옹이 안창호와 김홍량 두 분 스승을 모시고 명월관에 간혹 가 요리를 대접하는 사은(謝恩)의 자리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된 안창호가 병보석으로 나왔지만 이미 병이 깊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우리 경신학교 제2 운동장에서 했지요. 경성제대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그 병원 앞마당이 우리 학교 운동장과 붙어 있어 장례식을 내가 주선해 모셨습니다. 일제는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해 조사하고 난리를 쳤지요."
이번에는 독도 관련 망언이 화제에 올랐다. 최옹은 당장 눈에 불을 켜고 '망언의 뿌리'를 자르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의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급선무라면서 열변을 토한다.
"그간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을 유심히 들어봤다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을 거요. 하나는 학교도 변변히 없는 미개한 조선에 우리가 가서 구석구석에 학교를 세워주고 동경제대 체제를 그대로 본뜬 경성제대로 세워주어 근대식 교육을 했다는 것입니다. 철도도 놓아주고 농사법도 개량해주었다고 자랑하지요. 또 하나는 한국이 원래 일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나라라는 겁니다. 일제시대의 내선일체사상이란 것이나 독도 망언도 여기에 관련된 것이오."
최옹의 설명에 의하면 한일합방 당시 우리나라에는 사립학교가 3천 개가 있었다고 한다. 강화군에만 해도 이동휘(李東輝)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합일(合一)학교를 비롯해 70개가 있었고, 유명한 전도사 강시복 할머니가 세운 학교 수가 여섯 개였다고.
"국사(國事)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구한말에 애국사상을 품은 사람은 교회에 몸을 많이 담았소이다. 가르쳐야 한다는 여론도 대단해서 개신교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예배당은 평일 낮에는 빈 교실 아닙니까. 그래서 예배당 부설학교가 많이 생겨 사립학교 3천 개 돌파 기념식도 가졌어요.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이거 나올 거외다."
< 양주동과의 추억>
학생과 교사(校舍)가 있더라도 가르치는 선생이 있어야 학교가 되지 않을까.
"강습소에 가서 유길준의 『大韓文典』이나 주시경의 『國語文典』을 한두 달 배우면 부설학교에 가서 한 1년은 가르칠 수 있어 교사 수급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장덕수(張德秀)의 형 장덕준(張德俊)은 2학년 때 1학년을 가르쳤는데요 뭘. 1908년엔가 개신교 1백만 명 신도 돌파 운동과 병행해 학교 인가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한자를 가르치는 서당만 있었지 변변한 학교가 없는 조선의 면마다 일제가 근대식 학교를 세워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오."
일제가 자랑하는 경성제대의 설립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성제대, 이름이 좋았지 처음 가보니 교수도 책걸상이 없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으로부터 일본의 조선 식민지 통치가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이 빗발치자 마지못해 만들어준 학교였소. 일제시대 때 사립 공업학교와 공업전문대학은 없었습니다. 일본은 연필 한 자루도 우리 손으로 만들지 못하게 했어요. 심부름꾼으로 부려먹기 위해 법대·상대·의대·농대·사범대만 만들었지."
최옹은 1924년 3월, 7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칠 때 졸업장과 함께 학교에서 내준 영어교사 자격증을 가슴에 품고 귀국한다. 귀국 후 여러 학교에서 초빙 제의가 들어오지만 오전에는 경신학교에 가서 영어를, 오후에는 보성전문학교에 가서 법학을 강의한다. 몇 년 뒤 보전의 교수를 하면서 어떻게 경신학교 교장을 겸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경신이 38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일제는 미국 선교부를 경영일선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양산학교를 설립한 김홍량 선생이 인수하고서 나를 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내가 신사 참배도 않고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 읽는 것도 딴 선생한테 맡기고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도 읽지 않으니까 일본인 교장서리를 임명하고는 나더러 학교엔 나오지 말라고 합디다. 그래서 일제 말기에는 명목상의 교장이었지 학교에는 나가지도 못했지요."
그는 왜 선교사 내쫓기듯 경신학교에서 내쫓기지 않았을까.
"그런 교장이 있다는 소문이 나는 걸 두려워했지 싶소. 서양 선교사들이 지지해줘서 명줄은 붙어 있었지만 교장 사직도 못하고 학교에도 못 나가는 이상한 교장이었소. 나 대신 양주동 선생이 욕을 많이 봤지."
ㅡ양주동 선생이 경신학교에 계셨던가요.
"내가 교장 할 때 교무주임이었소. 와세다大 영문과 출신이지만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아 한문을 맡겼어요.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있다 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되어 직장을 잃자 우리 학교에 와 몇 해 교편을 잡았지요."
양주동이 서울 경신학교 교사로 오게 된 경위가 무척 흥미롭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고 폐교를 감수하기로 결정하는 날, 평양에 장로교파 원로들과 선교사들이 대거 모여 대책회의를 했지요. 내가 그 회의에 옵서버로 참가한 것은 숭실의 경영권자가 저한테 교장을 맡길 의사를 타진하려고 저를 초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회의한 날이 6월 27일입니다. 내가 왜 이 날짜를 기억하느냐 하면, 처가 딸을 낳을 예정일이었기 때문이오. 보전과 경신 두 군데 일자리를 다 그만두고 낯선 평양에 오는 것은 무리라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학교를 넘기지 않고 폐교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날 숭실학교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 가서 들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양주동이었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
"폐교로 결정이 났다면서요?"
"그렇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숭실학교가 신사참배에 응하느니 학교 문을 닫는 게 낫다고 최종결론을 내렸소."
"그럼 날 제발 서울로 데려가 주시오."
< 해방정국의 서울대 법과대학장>
첫 대면의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취직을 부탁하는 양주동의 표정은 아주 절박했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에서의 활약상이 자화자찬으로 펼쳐지자 최옹은 그의 재주를 인정, 경신학교 교사로 채용했고, 양주동은 해방 전까지 경신에서 최옹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은혜를 갚는다.
양주동이 시인 겸 평론가 겸 영문학자에서 이 무렵에 느닷없이 고시가(古詩歌) 연구자로 탈바꿈하게 된 데는 자신의 충고가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교무실에서 우리 옛 노래에 대한 얘기를 자주 주고받았어요. 내 어릴 때 머슴이 부르던 노래가 아무래도 신라의 향가에서 유래된 것 같다고 했더니만 솔깃해서 듣더군. '저 건너 갈모봉에 비가 묻어 들어온다. 누덕을 허리에 두르고 기신 매러 갈 거다.' 이거 내가 양주동이한테 불러준 향가요."
1943년에 펴낸 『조선고가연구』는 신라의 향가 5수를 처음으로 풀이한 명저. 양주동은 이미 1936년 조선일보에 「鄕歌의 解讀에 대하여」란 글을 발표한 바 있어 최옹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양주동은 술을 너무 좋아했어요. 수업할 때도 학생들한테는 물이라고 하고는 품에서 납작한 술병을 꺼내 마실 정도였으니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손을 떠는 수전증이 있었는데 뒤에 술을 끊었는지 일흔을 넘기고 죽더군."
해방이 되었다. 미군정은 최옹에게 변호사 자격 인증서를 준다. 해방공간에 그는 서울대 교수 및 법과대학장을 역임하고 법전편찬위원과 고시위원으로 선임되어 고시령(考試令)을 거의 혼자서 초안한다.
"고시에 국사 과목을 집어넣은 게 나요. 내가 그때 역사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고시에 국사를 넣어놓으면 공직에 몸담으려는 사람들이 다 우리 역사를 공부할 거란 생각을 했소. 그래서 끝까지 우겨서 넣었지."
보성전문 교수로 오래 재직했고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兪鎭午)와 교분이 없었는지 물어보았다. 자기에 비해 까마득한 후배라는 말로 시작하더니 비난 일색이다.
"그 사람은 내가 전문학교 선생 할 때 예과에 입학한 사람이오. 김성수(金性洙)는 만나면 늘 우리 조국의 앞날과 민족의 운명을 걱정했는데 유진오는 그런 말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 사람 별명이 '만년 조교'였는데 조교만 10년 하다가 보전 강사가 되었지. 학병 지원 권유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그처럼 열심히 외치고 다닌 사람도 없지요. 한일회담의 필요성을 제일 먼저 역설한 사람이기도 하고."
최옹은 변호사 자격증이 있었음에도 변호사 생활은 한 바가 없다고 한다.
"변호사고 뭐고 55년 동안 학생들 가르치는 일 이외에는 한 것이 없소."
해방 후 많은 사람이 월북해서 인물이 모자랄 때인데 정계 진출을 권유받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한다.
< 金九와 재회하다>
"이승만이 구성한 새 정부의 각료와 경찰, 특히 총경·경감 등 경찰 간부는 90%가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로 구성되었소. 어제까지 독립운동 하던 사람 잡아 고문하던 인물이 장관이 되고 재판관이 되고 경찰 간부가 되는데 무슨 흥이 나서 그들과 장단을 맞추겠소. 백남훈 선생이 한민당을 만들면서 발기인 명단에 내 이름을 넣어놓았기에 빼달라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빼냈지요. 나는 교수 하다가 총리니 장관이니 시켜주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나가는 사람은 사명감도 지조도 없이 교수노릇 했다고 생각하오. 정치인이 당을 계속 옮겨다니는 것도 꼴불견이지만 교수가 입각하는 것도 하숙 옮겨다니는 꼴이니 한심하지 않소."
해방정국에 대학사회는 반탁·찬탁이니 국대안파동이니 하면서 좌우익간의 싸움으로 많은 상처를 입게 된다. 서울대 법과대학장이었다면 더더욱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했을 법한데 이 당시에 어떻게 처신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내 주변에 숱하게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간 적이 한번도 없었소. 생래적으로 공산주의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영법학과 법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공산주의 이론을 옳다 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요. 우리 다같이 잘살자, 이론 자체야 참 그럴듯한 것이오. 그러나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상태에서 ' 같이 잘살아 보자'고 해야 성공하지, 무산자혁명으로 국가를 세우면 다같이 못살게 되는 것은 정한 이치요. 대학이 이념 문제로 한창 시끄러울 때 어음·수표법을 가르쳤는데 어음·수표에 무슨 좌익이 있소 우익이 있소. 수업시간 중에 좌익이 옳으니 우익이 옳으니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소."
서울법대 학장으로서 한 일을 덧붙여 말한다.
"법대학장으로 임명돼서 갔더니 법문학부는 문리대 부속이라, 강의실은 을지로에 있는 창고를 이용하고 있었고, 학과 사무실도 학장실도 교수 연구실도 따로 없습디다. 병원 수위실 한켠을 학장실이라고 쓰고 있었소.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우리도 일부 쓰겠다고 문리대 연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점령했지요. 군정관이 와서 이 방법밖에 없었느냐고 묻기에 내가 학생들이 옳다고 했더니 그냥 갑디다. 대학본부에다 학장실 만들라고 요구해서 이것도 관철시켰지요."
최옹은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광진학교 은사이며 해방 후 정치가의 길을 걸어간 백남훈과, 그와 함께 한민당을 만든 장덕수(張德秀)의 부름을 받고 신설동의 한 민가에 간 적이 있었다. 키가 훤칠한 미남 한 명이 같이 부름을 받아 동석했는데 그가 바로 허정(許政)이었다. 허정은 미국에서 장덕수와 함께 교포신문 <三一申報>를 창간한 적이 있는 오랜 지기요 동지였다. 백남훈은 두 사람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구와 이승만이 곧 귀국할 텐데 과연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할지 걱정이오. 김구에게 기탄 없이 이야기할 사람은 최태영이고, 이승만에게 기탄 없이 이야기할 사람은 허정이라고 생각하여 두 사람을 불렀소. 김구는 별 야심이 없는 사람이고 이승만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두 사람이 나라를 끌고 가면 계속 분란이 일어날 거요. 그러니 두 지도자가 싸우지 않도록 늘 곁에 있으면서 잘 조정해주시오."
백남훈의 안목이 정확한 것이었음은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의 행보가 잘 말해준다. 처음 만났지만 이날 이후 허정과는 아주 친해졌다고 한다.
최옹은 1945년 12월, 그 전 달에 임정(臨政) 요인들과 함께 돌아온 김구 선생과 재회한다.
"경복궁으로 모시려는 것을 내가 결사적으로 반대해서 경교장(京橋莊)에다가 짐을 풀게 했소. 경복궁이든 어디든 '궁'이란 데에 들어가면 민심이 이반된다고 내가 말렸어요."
근 30년 만의 만남이었음에도 김구는 최옹의 아명 '요셉'을 잊지 않고 부르며 부둥켜안는다.
"백남훈 선생이 내 얘기를 자주 해서 기억하고 계십디다. 암살 직전까지도 자주 만나뵈었지요."
백남훈은 귀국한 김구를 찾아가 자신의 복안대로 최태영을 중용할 것을 건의한다. 최옹도 스승이나 장덕수와 함께, 혹은 혼자서 경교장의 김구를 자주 찾아가 황해도에서의 추억도 더듬고 어지러운 시국에 대해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한번은 임정 사람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냐고 여쭤봤더니만 쓸쓸히 웃으시면서 '가재처럼 뒤로 걷는 놈, 게처럼 옆으로 기는 놈, 벼룩처럼 위로 뛰는 놈, 두더지처럼 땅 밑으로 기어드는 놈 등 오색잡놈이 다 있지. 나는 보자기 하나 들고 이것들을 다 싸서 들어왔다'고 합디다. 당시 임정 세력에 대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다 불신하고 공산당은 협력하지 않고 이박사(이승만)는 노골적으로 견제하니 괴로움이 많아 자조적인 말을 했을 거요."
그러던 어느 날 최옹은 김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나한테 건의할 것이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편지로 써서 내 처소 보료 밑에 넣어 놓고 가게"라는 말이었다. 최옹은 김구로부터 이런 말을 듣자 무척 섭섭함을 느꼈다고 한다.
"알고 보니 내가 바른 소리 잘한다는 걸 엄항섭(嚴恒燮)이가 알고는 '상해에 있을 때는 기호(畿湖)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더니 고국에 돌아와서는 황해도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다'고 모함을 한 거요."
< 언더우드 동상 제막식의 추억>
바른 소리란 "밖에서 테러하던 방법으로 국가 건설사업 하려 들면 안 된다." "바깥에서 독립운동 하다 들어온 사람만이 애국자가 아니다." "안에서 오히려 더 달달 볶였다." "임정 사람들 말만 듣지 말고 국내 실정을 잘 아는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고언이었다.
"이시영(李始榮) 씨 같은 분은 내가 바른 소릴 했다고 하더라고. 언젠가 한번은 김구 선생과 독대했을 때 내가 떼어내야 할 사람은 떼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타국에서 호떡으로 허기를 달래며 같이 고생했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떼어낼 수 있겠냐고 하시면서 쓸쓸하게 웃습디다."
ㅡ그런 말씀하신 걸 알았다면 엄항섭 아닌 그 누구라도 선생님을 미워했겠습니다. 더구나 엄항섭은 임정의 선전부장이었고, 귀국해서는 김구의 비서로 일한 심복 같은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최옹은 다시 옛날 일 하나를 기억해낸다. 연희전문과 경신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의 동상 제막식 날 이승만과 김구, 최태영 세 사람이 언더우드 2세의 초대를 받아 연세대학 교정 단상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승만이 먼저 연설을 했다.
"오늘 이 동상 제막식을 시작으로 언더우드의 손길이 닿아 있는 전국 각처의 동상을 세우도록 합시다. 제가 앞으로도 미력하나마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을 약속합니다."
뒤이어 김구가 마이크 앞에 섰다.
"우리가 오랜 일제치하에서 언더우드가 우리를 위해 행한 그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우리들 2천만의 마음속에 은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분입니다."
이승만의 겉치레 인사말에 대해 김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나 하자고 은근히 반박한 셈이었다. 이승만의 얼굴은 금방 붉으락푸르락했고,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산을 보는 사이 분위기가 이상하게 된 것을 눈치챈 언더우드가 답사를 하러 일어났다.
"아버님이 살아생전에 늘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친구와 입으로는 싸워도 발걸음은 맞추어야 한다고요. 그 말씀이 오늘 불현듯 생각납니다."
해방 직후 백남훈이 했던 우려가 최옹의 눈에 선명히 포착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더우드가 한 연설의 의미를 청중은 잘 몰랐겠지만 초대받은 세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소. 정치한다고 들어와 물과 기름처럼 상종하지 않으려는 두 정치지도자 모두에게 한 방 먹인 언더우드의 명연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소이다."
<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인상기>
당시 교류가 있었던 다른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간단한 인상기가 이어졌다.
"여운형(呂運亨)은 공명심이 유달리 많았던 인물로 기억되오. 별명이 은방울이었소. 방울은 구리방울이라야 좋은 소리가 납니다. 조병옥(趙炳玉)은 난봉은 좀 부렸지만 시종일관 깨끗한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소. 신익희(申翼熙)는 정치가다운 결단력은 없었지만 인품이 훌륭하고 천성이 순한 사람이었고. 장면(張勉)은 얌전한 성격상 계성학교 교장 하고 있으면 딱 좋았을 사람이 괜히 정치인이 되어 온갖 고생 다하다 갔지요.
서재필(徐載弼)은 청렴한 사람이었고, 확실한 독립운동가였소. 미국 국적이 어쩌고 하면서 욕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미국 국적을 갖고 있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거고, 목숨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요. 김규식(金奎植)은 날카로운 학자 타입이라 정치가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장덕수(張德秀)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친했었고, 보전에서 나와 같이 재직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미국서 박사를 받을 때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 학창시절부터 연설을 기가 막히게 잘했는데, 학병 권유를 하고 돌아다녔으니……. 송진우(宋鎭禹)도 암살로 죽고 이 양반도 암살되었지."
어쨌거나 김구가 법무부 장관으로 최태영을 내심 꼽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와중에 암살의 순간을 맞는다. 귀국한 지 3년 반 만이었다.
최옹은 6·25 때 한강철교 폭파로 피난을 못 가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고 한다. 인민군이 갖고 온 요인 납치 명단 181호가 의대 학장 이갑수, 182호가 최옹, 183호가 민속학자 손진태(孫晉泰)였다고 한다. 앞뒤 두 사람은 모두 납북되었다. 당시 개업의였던 아들은 부상자 치료를 위해 평양으로 차출될 위기에 처한다.
"나한텐 공화국에 가서 강연을 하라고 합디다. 그래서 아들하고 같이 가겠다고 전출증을 끊어달라고 했지요. 전출증에 평양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내가 청주로 고쳤어요. 리어카에 약을 있는 대로 싣고 아들은 약종상으로, 딸은 옷감장사로 변장해 남으로 가다 제자를 만나 관악산에 들어가 9·28수복 때까지 숨어 지냈습니다."
< 뇌물죄로 구속되다>
한번은 전황을 알아보러 돌아다니다 수원 근처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혀 죽을 상황에 이르렀는데 자신을 알아본 지역 인민위원회 사람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천행(天幸)을 누리기도. 그러나 6·25 때 그를 제일 괴롭힌 것은 자신에 대한 재판이었다.
"이승만이 나를 어떻게든 이용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당최 안 넘어가거든. 장택상(張澤相)이를 보내 대사나 공사로 외국에 나가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유혹한 적도 있었소. 일제시대 때 일본에 맞섰던 사람이 대사로 나가야 그놈들이 얕보지 않을 거라고 회유하기에 돈 없고 군사력 없는 나라의 외교관은 거렁뱅이 신세 아니냐고 응수했소이다. 김구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법무부 장관 시켰을 사람이라고 주변에서들 말하지, 외교관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이승만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나한테 죄를 덮어씌워 형을 살리기로 한 거요."
전시의 신문에 '崔泰永 교수 뇌물죄로 구속'이라고 대서특필되고 재판은 대법원까지 가는 등 최옹은 자신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수모를 겪는다.
"40명의 변호사가 변호를 자청했지요. 그들이 다 변호하면 재판만 길어지겠기에 돌려보냈소. 김성수가 보낸 변호사도 돌려보냈고. 이시영 부통령이 감옥으로 날 찾아왔지. 면회하러 온 건 아니고, 간수들을 불러놓고 '감옥에 와 있다고 다 죄인은 아니다. 최태영 선생한테 잘하기 바란다'는 말을 하고 가자 그날로 대접이 싹 달라졌어요."
뇌물죄로 구속까지 되었다면 무슨 일인가 있었을 텐데 계속 자신을 변호하고 있어 사건의 진상을 물어보았다.
"당시 학교 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 유리창이 깨어져도 새로 해 넣을 돈이 없고, 원고지를 찍으려고 해도 돈이 없었소. 그래서 입학시험 동점자 중 탈락 대상 학생에게 기부금을 내게 해 합격시킨 돈으로 교직원 후생사업까지 했는데 돈(보너스)을 받은 학교 청소부가 친일파의 사주로 나를 고발한 것이오. 고발장에 김구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어쩌구 하는 대목이 있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오. 일제 때 총독부의 명령으로 집어넣던 5% 특별입학의 관행을 검사가 미리 알고 물어봅디다. 그건 명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학교를 살리기 위해 한 일이지 나를 위해서 쓴 것은 한푼도 없었으니 떳떳하게 대답했지요."
옥살이는 20일 정도밖에 하지 않았지만 재판 과정은 꽤 길었다. 그 과정에서도 검찰측의 허락으로 강의는 계속했다고 한다.
"부산 피난지에서 대법관 전원일치의 무죄판결로 재판은 끝났소. 형무소장이 사죄의 뜻으로 여러 해 김장을 해 나한테 보내주더군. 고생은 좀 했지만 이승만 정권하에서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거요. 4·19 이후 남부끄러워 어떻게 학교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겠소."
단독정부 수립과 반공포로 석방 등 이승만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 어느 정도 평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다.
"반민특위의 활동을 헌법에 위반된다고 중단시킨, 그런 반역사적인 행위를 한 그를 공과를 따져서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이다."
최옹은 1954년 학·예술원이 개원하면서 회원이 되어 지금까지 회원이고, "늙은이들이 모인 데서도 제일 나이가 많은 늙은이"라고 한다. 그는 청주대·숙명여대·경기대·외국어대·동아대 등을 거치면서 법대나 법과대학원을 창설하고, 학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다. 아울러 한국상사법학회(韓國商事法學會) 회장을 10여 차례 연임하고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법률학자로서의 학문연구는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책으로 총정리하면서 완결시킨다.
< 법학에서 역사학으로>
이 책은 1977년에 낸 원고지 1만4천 장의 방대한 저서로, 숙명여대 제자들이 원교 교정을 보고 그 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만들어준 것. 출간 1주일 만에 학술원 저작상을 수상하고, 훗날 전국대학 교수들의 투표에 의한 역대 최고의 명저로 꼽힌다.
"내 서양법철학 연구는 그것으로 완결되었다고 생각하오. 이 원고를 끝낸 75년부터 우리 고대사 공부를 시작했어요. KBS 이사장을 했던 송지영(宋志英)이 살아생전에 '이병도(李丙燾) 매칠 사람은 선생님뿐입니다' 하고 볼 때마다 간곡히 권유한 것도 힘이 돼서 역사공부를 시작한 겁니다."
손자 재롱이나 보며 여생을 즐길 일흔여섯 살에 시작한 역사 공부, 최옹의 목표는 송지영의 말대로 이병도였다.
"내가 왜 이병도를 꺾을 마음으로 역사 공부를 시작했느냐, 그것은 김구 선생과 장지영 선생한테 배운 우리 역사를 그 사람은 도무지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였소. 법학과 교수로 있으면서도 관심을 갖고 그가 쓴 글들을 봐왔는데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식민사관에 입각해서 쓰고 있더라고."
최옹의 말에 의하면 이병도가 말년에 쓴 글은 자신과의 오랜 논쟁을 거친 후, 반성의 의미로 쓴 글들이라 한다.
"나를 한동안 인정해주지 않았지. 늙도록 법학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학자라고 나서서는 국내 사학계를 이끌어가는 자기한테 당신 생각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소. 처음 몇 해 동안은 강연할 때 따지러 가면 문간에서 쫓겨났소. 결국에는 토론을 받아주는 관계로 발전했지. 그쪽 집안 사람들, 지금도 나를 아주 미워하오. 아버지 권위를 손상시켰으니 당연한 거지요. 이병도는 서당 공부를 하다가 보전 법과에 들어갔소.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일본에 가 역사공부를 하고 왔으니 우리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겠소? 그가 일제시대 때 죽 몸담고 일한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지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소."
< 李丙燾와의 공저 아닌 공저>
ㅡ이병도의 일제시대 때의 친일행위는 해방 후 국사편찬위원으로 재직하면서, 또 많은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어느 정도 보상한 것이 아닐까요?
"이병도의 학문적 업적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그의 역사관은 해방 이후에도 식민사학의 악폐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로 있더라 이겁니다."
ㅡ식민사학의 악폐라면 어떤 것들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고질적으로 사대주의의 기질을 갖고 있다, 허구한 날 당파 싸움이나 한다는 것에서부터 일선동조론·지리적 결정론·정체성론·타율성론 등 많지요."
그렇지만 1989년에 고려원에서 낸 『한국상고사입문』이란 책은 분명히 이병도와의 공저였다.
"내가 쓴 책인데 이병도가 책 머리말 하단에 사인만 하고 공저로 낸 거요. 그 사인은 내가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따져서 받아낸 항복문서와 같은 의미가 있소. 그가 방향전환 성명을 낼 때 둘이 동석한 자리에서 하기로 약속해놓고는 하루 앞당겨서 내가 없는 자리에서, 사인도 자기 혼자 해버렸소. 그래서 그 책의 내 사인도 사실은 이병도 글씨요."
한 사람이 썼는데 공저로 출판된 이상한 책. 이 책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이 있어야겠다. 원래 『한국상고사입문』은 영문으로 쓰여진 책이다. 재야사학자로서 10년째 한국상고사와 한일 고대사 비교연구에 몰두하던 최태영은 1986년 미국 알래스카대학 한국학연구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곳 대학원 한국학 전공자들이 교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Ancient Korea』란 책을 삼화인쇄소에서 5백 부 한정판으로 낸다. 그것을 번역한 책이 바로 『한국상고사입문』이다.
50년 동안 영법학을 연구해온 영어 실력은 한 권의 역사서를 영문으로 쓰게 했고, 그것의 번역서가 이 책이니 이병도가 공동저자가 아닌 것은 분명해졌다. 1990년에 유풍출판사에서 낸 『한국상고사』는 『한국상고사입문』의 수정·증보판이라 한다. 일본어판도 나와 있다.
친일 행적이야 어쨌든 이병도의 업적과 권위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최옹의 주장에 순순히 승복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자료를 갖다주면 이병도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걸 읽습니다.『환단고기』같은 책이면 거들떠도 안 봤겠지만 대개가 일본에서 나온 자료이고 일본인들이 쓴 글이니까 읽는 겁니다. 그리곤 나랑 토론하자고 졸랐습니다. 3년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했더니 결국 그의 생각이 돌아서더군요."
『한국상고사입문』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최옹의 말을 일단 들어본다.
"외국의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자는 것이 애초의 저술 목적이었소. 국내에서도 천관우·김재원·김원룡 등에 의해 상고사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요. 일본의 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이나 남한경영설이 '설'이 아니라 사실로 기록되는 등 역사 왜곡이 심한데, 외국에서는 그 일본 교과서를 통해 우리 역사를 공부하니 말이 되는 일이오?"
< 일제의 역사 왜곡 작업>
『한국상고사입문』에서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제2편 상고시대는 한민족이 이미 반만년 전에 대륙의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고대국가인 고조선을 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중국의 『사기』『전한서』『후한서』와 『삼국사기』 『규원사화』『제왕운기』『환단고기」등 우리 역사서, 그리고 윤내현·유승국·김성호 등 국내 사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는 것은 단군에 의한 국가건설이 신화가 아니라 사실(史實)이며, 한사군은 평양 주변이 아니라 요하(遼河) 서쪽의 중국 북부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ㅡ선생님의 주장을 학계에서 인정해주고 있습니까.
"누구의 인정을 받으려고 시작한 역사공부가 아닙니다. 비록 역사를 대학에서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명감,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날 이때까지 연구해왔소. 내가 우리 교과서에 단군을 신화적인 인물이 아닌 역사상의 인물로 고쳐 써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더니 국내 사학자들 절대다수가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하였소만 지금은 생각이 많이들 바뀐 것 같소. 고분 출토 등 확실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실증사학의 영향 때문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삼국사기』는 역사고 『삼국유사』는 신화요. 김부식과 일연의 세계관이 달랐는데 역사와 비역사로 나눌 수가 있소?"
일본은 한국 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今西龍)를 중심으로 단군과 고대국가 건설에 관련된 역사서와 민간에 전해지던 단군 관련 비사(秘史)를 수차례에 걸쳐 엄청난 분량을 압수해 불태웠다고 한다. 총독부는 그런 책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한다는 공문을 지방관들한테 여러 차례 보내 모아오게 했고, 향교나 서원을 샅샅이 뒤져 수집한 뒤에 불지를 만큼 역사 왜곡에 집착했다.
김향수가 쓴 『일본은 한국이더라』(문학수첩)란 책에는 일본인 하라타(原全榮)의 조사를 인용, 일제의 역사 왜곡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일제는 <조선사 편찬 요강>에 따라 1926년 12월부터 1938년 3월까지 조선에서 사료 4천9백50책, 문서기록 4천5백13점을 모아 몽땅 태운다. 대마도에 조선과 관련이 있는 사료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고 대경실색, 고문서류 6만 6천4백69매, 고기록류 3천5백76책을 압수해 숨기거나 태웠다고 한다.
살아온 생애와 역사에 관한 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이 났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필자는 96년 5개월의 생애와 20년 동안의 역사연구를 단 며칠간의 방문을 통해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만 뼈저리게 느낀 다섯 번의 방문이었다.
9남매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장남인 자신을 비롯해 셋째 태순(泰淳)과 다섯째 태응(泰應) 외 여동생이 하나. 춘천에 사는 셋째는 노인을 위한 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귀가 멀었고, 다리를 저는 다섯째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바보 용칠이」를 쓴 소설가. 55년을 해로한 부인과는 일흔여섯에 사별했다고 한다.
ㅡ대학입시에 국사가 필수과목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명감을 갖고 한국고대사를 연구해오신 선생님께서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할 말이 많으실 텐데….
< 유언처럼 당부하는 역사공부>
"요새 학생들 국·영·수만 잘하면 대학생이 되지요. 역사를 바로 알아야 정치가 바로 됩니다. 기술만 가르치면 건물을 지어도 삼풍백화점처럼 무너지지요. 역사를 가르쳐야 하오. 일본은 우리 역사연대의 약 반과 우리 옛 강역의 대부분을 잘라버렸소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우리 선조가 거주했던 대부분의 영토를 우리 영토가 아니었던 것처럼 꾸민 것이 만선사관(滿鮮史觀)이지요."
만선사관이란 한반도는 원래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대륙에서 실패한 정치세력이 옮겨 자리잡은 지역으로, 문화도 대륙의 주변문화가 옮겨왔을 뿐이어서 만주지방과 하나로 묶어야만 역사와 문화를 체계화할 수 있다는, 조선침략과 만주침략의 명문을 얻기 위한 논리라고.
"성명과 언어를 말살하고, 우리 민족의 뿌리가 되는 단군까지도 잊어버리게끔 신화 속의 가공인물처럼 조작해왔소. 그러면서도 강제점령 당시 우리 민족을 일깨워준 것처럼 역으로 선전해왔지요. 우리는 왜곡되고 조작되었던 우리 역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뿌리를 찾고, 우리 민족이 정말 우수한 민족이라는 사실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