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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학 권두칼럼>
영혼의 파동(波動)과 사유(思惟)의 눈금읽기
-조철형 수필집 『숲속의 춤판』과 동일화 양상
엄창섭(김동명학회 회장, 본지 편집고문)
1. 창조적 영혼과 개아적(個我的) 일상
모름지기 “예술은 어렵다. 따라서 문학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라는 파스(Octavio Paz)의 역설과도 같이, 즉물적 대상을 글감의 질료로 삼아 정치(精緻)하게 분석하고 조립하여 점층적 효과를 절충하며 실험과 탐색을 반복하는 특정한 문인의 정신작업은, 또 다른 양식의 결과물로 통일된 체계의 정체성에 의해 우주의 신비를 캐어내는 상이한 양식(樣式)의 현상적 접근이다. 일단 전제할 바라면 수필집의 표지화를 맡아준 강릉사범병설중학교 선배인 전희천 형도 고맙지만, 조철형 수필가와 평자는 단순히 동향이라기보다 학연이 잇닿은 중∙고교 동기로서 ‘영원한 스승’으로 제자를 각별히 아끼고 보살펴준 6년간 국어교사였던 원영동 시인의 제자라는 그 존재감이다.
평설에 앞서 ‘지극선인 모성의 분신’으로 형사(形似)하여 2017년「산림문학상」을 수상한 조철형 수필가는,『고욤나무의 꿈』출간에 이어『숲속의 춤판』(2020)의 자서격인 <서문>에서 “어렸을 적 썼던 반성문이 떠오른다. ‘반성’의 진정한 의미를 새기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뜸이 덜 든 거친 밥상 같아 출간을 망설이지만 어쩌랴. 머뭇거림을 멈추고 다시 새로운 글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는데 어눌함도 덩달아 따라 나선다.”라며 술회하고 있다. 모처럼 문화충돌이 예상되는 암울한 시간대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기억할 때 그 자신의 합리적 당위성은 시적 상상력의 자유로움에서 비롯된 존재감의 확인은 물론하고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시간대에서 코로나 19의 가공할 공포감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는 새삼 암울하고 슬픈 사회적 모순이다.
특히 조선조의 송강 정철이 기행가사「관동팔경」에서 읊어낸 강문교에서 응시했을 <경포팔경>의 ‘초당취연(草堂炊煙 : 초당마을의 일몰(日沒)에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도 정경(靜境)이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열정적으로 가필과 정정을 반복하며 평자가 다소 인상 비평적이나 수필집 평설을 탈고한 직후에도 <반송>, <팔월의 회화나무>를 비롯한 8편의 작품을 수차례에 걸쳐 메일로 보내온 끈질기고 충실한 문인정신이, 그의 작품을 마주한 솔직한 소회(所懷)다. 까닭에 공동의 세계가 무너진 불확실성에서 삶의 교시는 다니엘 고들립이 자폐증을 앓는 외손자『샘에게 보낸 편지』글처럼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펼쳐나가기 위해서는 생명의 씨앗 같은 마침표(.)가 모남이 없는 둥근 씨앗의 형태이듯, 짐짓 언어의 배려와 분별력은 삶의 교시로 충만한 생명감이다. 평소 서예를 즐기며 지조 있는 선비로서의 골격을 갖춘 그 자신이 ‘천년 시향(詩鄕)의 출신’인지라, ‘동심지언 기취여란(同心之言 其臭如蘭)’ 족자를 조카내외에게 결혼선물로 전해주었듯 “내가 써준 족자를 침실에 걸고 매일 마음으로 새긴다하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나라의 문화가 다르지만 슬기와 총명함으로, 한마음이 되어 향기롭게 극복해가는 조카부부는 어쩌면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과 선화공주다.(서동요의 주인공)”에서는 자의식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행위와 맞물려 있다.
또 하나 고교 졸업동기로 절친(切親)한 백태윤의 유머감각은 따뜻한 교감의 결과물이기에 “신의 선물로 받은 다이돌핀을 주위 분들에게 나누어주는 백 회장이야말로 진정 젠틀맨 칭호에 덧붙인 다이돌핀 친구다. 친구(다이돌핀(Didorphin) 친구)”로 견줌도 그렇지만 “며칠 전 강릉사랑 문인회원들에게 ‘김동주 어부사시사’를 들으러 가자고 했더니 다들 반겼다. 들뜬 마음으로 고성군 토성면 ‘봉포항’에서 만나 동행하기로 했다. ‘(주)동해에스티에프(Salmon&Trout Fishery)’ 회사 앞에서 우리를 반기는 친구는 나와 대학입학 동기다.(새벽을 여는 친구)”도 동일한 보기다. 또 언젠가 서울역에서 도어스크린 ‘지하철 시’를 무심코 보고 그 감응을 “<아, 고요다. 엄창섭> 눈이 번쩍 띄는 시다. 시를 읽으니 가슴이 짜르르 녹아내린다. 친구를 만나다니! 작자는 중·고교 동창으로 고향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자 유치단으로 케이프타운을 방문하며 애를 썼다. 중학교 같은 반으로 시인 ‘원영동’ 선생님께서 지도하신 문예반출신이다.(시인의 노래를)”를 포함하여 <5-1번 형제>, <외삼촌> 등도 지극한 관심사(關心事)임에 틀림없다.
2. 내면인식의 성숙과 여백의 간극(間隙) 좁히기
특히 장르의 다양성에 따라 글을 쓰는 행위는 극히 개인적 문제지만 주관적 감성과 객관적 이성의 조화에 있어 세대를 아우르는 사유와 뛰어난 안목의 적절함은 그만의 당위성을 지닌다. 간혹 ‘퍼덕이는 날개’는 낡은 기억일지라도 ‘영의 법칙’ 곧 자연계에서 입증되는 빛의 간섭은 삶의 장소성에서 의외로 확인되는 현상적인 보기로 “배달겨레는 한 핏줄 맥동인 백의민족이며, 상용주파수가 같은 60Hz이다. 그럼에도 인공위성이 밤에 한반도를 찍은 사진은 남한은 불야성이나 북한은 그야말로 암흑천지다.(주파수를 맞춘다)” 또한 사실상 단순히 응축된 자기고백이 아닌 시대정신과 화자의 절제된 감정에 기인된 확고한 자의식의 수락이다. 그뿐 아니라 미셀러니(miscellany)적인 정신작업의 생산물이 긴장감 있게 응축되어 타이 틀 속의 표제 수필에 술회되어 그 의미성이 확증된 특이성은 이채롭다. 그 자신은 선한 품성의 소유자이지만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독자’라는 삼각대위(三角代位)는 ‘소외계층의 통섭과 문인의 시대적 소임’은 불가분의 연계성을 지닌다. 그 점에서 짜 맞춤과 그것을 받쳐주는 문맥의 행간에 여백이 주어지기에, ‘모국어의 속살과 항변’이라는 시각에서 단절을 의미하는 닫힘에 견주어 열린 사고는 타자를 위한 관심사의 표출로 주요 테제다. 그 같은 보기가 아래의 <생선요리처럼 수필을>과 <숲속의 춤판>이다.
‘오창익 교수님’의 창작수필 강의를 들을 때가 떠오른다. 주제에 의미를 부여하여 감동이 우러나는 수필이야말로 수필문학이라 하셨는데, 감칠맛 나고 개운하게 내 입을 호강시켜준 생선요리가 또 다른 무언(無言)의 스승이 아닌가. 아내한테 “당신이 생선요리처럼 수필을 쓴다면 훌륭한 수필문학가가 될 겁니다.”라고 하니, 당신이나 수필다운 수필을 쓰라며 웃는다.
-<생선요리처럼 수필을>에서
숲속의 춤판으로 숲에 감사드리시던 아버님의 숲사랑이 K 님 모습에서 피어오른다. 교동도 ‘작은 음악회’ 휘모리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숲속의 춤판을 연상할 수 있으니 벌써 가슴이 달아오른다. 덩 덩 쿵따쿵. 둥 둥 두두두~ 징~.
-<숲속의 춤판>에서
이와 같이 2019년 12월의 <생선요리처럼 수필은> 간결체와 건조체로 쓰였기에 ‘아내의 순박한 손맛도’ 그렇지만 즉물적 질료로 선별된 가족애에 관한 정감은 다정다감하다. 같은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집필된 ‘저녁노을에 낙엽송이 황금색으로 채색하니 한 폭 유채화다.’라는 표제격의 수필로 색조가 한층 빛나는 <숲속의 춤판>에서 ‘숲에 감사드리시던 아버님의 숲 사랑’을 인상 깊게 낡은 기억에서 끄집어낸 ‘작은 음악회, 그 휘모리’ 신나고 흥겨운 한판의 공연보다 하나의 역설(paradox)이랄까? 못내 가슴 찡함은 ‘부친의 한결같은 숲 사랑’보다 끝없는 그리움(情恨)이리라. 이처럼 동일선상에서 즉물적 질료로 수용한 의미의 다양성은 표현의 틀에서 결부시킨 동일화의 양상이다. 예언자의 칼릴 지브란이 “함께 서 있되 너무 가까이는 서있지 마십시오./사원의 기둥들도 떨어져 있고,/참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지적은 이채로운 원경에 해당하는 까닭에 치밀한 심리적 발현에서 단상의 모티프는 그 자신이 얻어낸 정신적 결과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동행이란, ‘함께 걷는 것보다 같은 곳의 응시가 선행될 점’이기에 어디까지나 공허한 사상을 비집고 틈새를 채워가야 한다.
보편적으로 일상 언어는 ‘항상 98%가 뇌의 기억력에 잠재되기’에 다소 의도적일지라도 생명과 인성을 파괴하는 금속성이며 동물적인 언어사용을 절제하고, ‘증오와 저주가 아닌 감사와 축복’의 푸른 식물성 기표를 사용하는 좋은 언어습성은 자못 더 진지하기에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의식의 성숙을 모색하여야 한다. 그 같은 연유로 “지금까지 알려진 건강 상식을 뒤집어, 약 없이 병을 고치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강지침서를 폈다. 저자는 ‘못 고치는 병은 없다. 다만 고치지 못하는 습관일 뿐이다.’라며, 약이 인류를 구할 것이라 믿었지만 도리어 인간을 상품화시켜, 약이 없으면 당장 죽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명의(名醫)의 길)”라는 지적 또한 질병의 불안 심리로부터 고통 받는 누군가를 위해 암울한 시간대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에게 꿈의 날개를 달아주는 그만의 진지한 방책강구는 감동적이다.
특히 에드워드 호퍼(Eward Hopper)의 주장만큼이나 시선이 닿은 모든 대상과 공간이 무미건조한 공간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빌딩 위로 사각형의 햇빛이 쏟아지는 현상을 묵언으로만 관망할 수는 없다. 차지에 “내일이 하늘이 열린 날인데 벗으로부터 광화문 광장집회에 가자는 전갈이 왔다. ‘광화문 연가’를 부르러 간다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닌 알림 글을 써서 전하라는 부탁이다. 여태껏 집회에 나간 적이 없어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광화문 戀歌)”를 통해 그 자신의 긍정적 시각은 2%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생명의 처소로 정화시키듯 인류가 직면한 코로나 19의 사회적 거리두기도 초연하게 일관된 의지로 헤쳐 나가는 ‘극소수의 창조자’로서의 정체성(Identity)은 더없이 역동적이다. 이처럼 자의적 은폐와 소박한 감성의 붓끝이 지나친 의욕으로 인해 문화인식의 결핍에서 오는 ‘언어공해의 심각성을 자아내는 인자가 되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이 주어짐에 그 의미망은 놀랍게도 확장되고 있다.
그 같은 관점에서 감동의 파상으로 형상화된 수필을 ‘영혼의 잠식과 언어기호의 역할’로 감응할 수 있기에 그 의미는 뜻깊다. 한편 독자와 시인이라는 대비로 진동수가 일치되는 파동에서 비롯된 공명의 해법에 견주어, 다소 해학적 품격의 수필로 “매사 안 되는 걸 내 탓으로 돌리니, 마음이란 보고 속에 찰떡궁합이 있지 않는가! 사랑이란 ‘같이 오래 사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인절미를 사들고, 집에 들어선다. “여보. 찰떡 사 왔어요. 찰떡!”(찰떡궁합이 따로 있나)”의 보기나 또는 “김장을 미루다 곰보배추를 만나 겨울나기가 끄떡없다. 배추를 준 시인과 우리 집에 시집와서 행복을 베푼 곰보배추에게 감사드리다 느닷없이 곰보 배추 같은 심성의 며느리를 맞이했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곰보배추 시집가다)”에서 그 의미는 따뜻하게 발현되는 현상이다. 비록 아름다운 서정의 미감으로 장식하기 위해서는, 피멍든 손으로 영혼의 닻줄을 잡아당기는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 따라서 즉물적 현상을 거부하지 않고 존재의 꽃으로 피워내려는, 그 자신의 적확한 기호 캐내기 작업은 번개 같은 영감(靈感)을 적절하게 접목시킨 예술행위와 잇닿아있기에 주지할 바다.
3. 투시도법의 접근과 사유의 그물망
작금에 정신과의사인 퀴블러 로스(Kübler Ross)가 『죽음과 죽어감』을 통해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의 심경변화를 죽음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과정을 체계적으로 구분지은 점에 비춰, “주옥같은 글이라면 책장에 보관하여 두고두고 탐독할 텐데, 휴지통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면 아찔하다. 독자 서신을 보내신 김종동 선생님께 감사 편지를 보내며, 다음 출간할 수필집을 꼭 부칠 것을 약속했다. 광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자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른다.(독자의 서신)”의 보기에서 그 자신의 겸허하고 엄격한 자기성찰은 독자의 가슴을 저미는 비장감이 묻어있다. 그 점이 치열한 시장논리가 지배적인 냉혹한 상황일지라도 일관성을 지니되 ‘지극선(至極善)과 강직함, 위트와 유머’로 감정을 절제하고 건강한 비평정신의 붓끝을 곧추세워 <개미허리>의 깨우침을 통섭의 관계성과 미래의 비전 제시도 일관성으로 지켜낼 바다.
그 같은 연유로 삶의 현장에서 영혼의 닻줄을 움켜잡는 존재감을 지닌 온전한 주체로서 철저하게 문인의 시대적 소임을 수행할 일이다. 오로지 그 자신이 추구하려는 정신세계의 향방이 ‘생명의 본질, 본원적의 회귀’를 수긍하지만 ‘체취, 느낌, 육성의 특이성’은 내면인식에 수용되어 대상의 추이는 현재적 상황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햇볕에 그을린 친구의 얼굴은 인정 많은 정미소, 양조장 아저씨 모습이다. 연리지 느티나무에게 귀가 인사로 읍(揖)하니 곱게 물든 낙엽이 옷깃에 떨어진다. 가다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석양을 받은 느티나무 그늘이 자꾸 나를 따라온다.(느티나무 그늘)”의 실제처럼 자잘한 정감은 열린 우주로 확장될 것이기에, 감성적 세계를 뛰어넘은 영성적 세계로의 대상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성자’라는 나무(木)의 상징성을 풀어주고 있다. 또 하나 영국의 존 메이스필드가 <그리운 바다>에서 “지루함이 다한 뒤의 조용한 잠과/아름다운 꿈만 있으면 그 뿐이니”라는 결의에 균형 있게 접합되어 생명의 본원인 모성의 상징성을 「개나리 꿈을」에서 아득한 유년의 정신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출렁이는 고향 바다, 짙은 청색 바다를 스치는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관령 옛길’ 정상에서 사임당시비를 대하니 다시 한 번 고향의 숨결을 느낀다. 곧장 경포대 솔밭 추어탕 집에 가서 점심을 들고. 넘실거리는 파도 포말(泡沫)이 이는 십리바위를 바라보며 추억의 길을 걷는다.(포말(泡沫)이 추억을 토한다)”라는 감회는 일상의 일탈로 창조경영 논리에도 충직한 모양새다.
결론적으로 수필문학의 밝은 미래는 절제된 감정에 의한 서정성을 수반한 감동의 회복과 소박한 자연회귀에 맞물려 있어야 하는 연유로 “차라리 대교약졸(大巧若拙 : 위대한 기교는 졸렬함과 같다)을 거울삼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글과 함께 늙어가야겠다.(글과 함께 늙어 가기를)”라는 절박한 기대감은, 일상의 서정성에서 타자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절감하고 창조자로부터 허락받은 삶을 강인한 자긍심으로 올 곧게 지켜내어야 한다. 모쪼록 조철형 수필가의 소중한 삶의 전말(顚末)에 있어 이슬람교의 무함마드가 수나(言行)의 전승인 『하디스』에서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신성하다.”라는 시사적 교시는 그 의미망이 지대하기에 충직한 독자의 기대치에 결코 어긋남 없는 존재감이 빛나는 자존자로서 ‘푸른 생명기표를 통신하는 격조와 가치를 지닌 유의미한 정신작업’의 실천궁행을 다시금 소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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