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말하는가?
학습이란 아이들이 '내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나아가 그 생각을 조리있게 말하고,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듣고, 결과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다름을 이해하여서, 자신의 삶을 선택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결국 '나'란 인간이 사회 공동체에 적응하고, 나아가 자신이 사회 공동체에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 다시 말해 학습을 하는 까닭은 궁극적으로 '나'란 존재가 사회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존재가 '내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도식화하면 내 생각 하기▶ 내 생각 말하기▶ 다른 사람 생각 듣기▶ 자신의 생각과 비교하기▶ 자신의 생각과 절충해서 올바른 생각 도출하기▶ 그리고 실천, 실행하는 삶 살기 이다.
가장 먼저 내가 생각을 하고, 이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현장에서는 이것이 안되고 있다. 근간이 안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저절로 자신의 내부에 연결되어 -자신이- 생각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안된다는 것은 누군가 일부러 끊은 것, 예컨대 일부러 끊지 않으면 안될 수가 없는 일이다. 필자가 파악하건대 외부만 강조하는 과학적인 패러다임에서 내부를 폐쇄하고 외부만 보도록 아이들을 만들고 있다.
현재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고 그렇게 하고 있는 듯하다. 옛날에는 탐구학습이라고 하여 아이들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주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교과목, 모든 학습이 그 학습과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란 자신의 내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를 아이들이 맺지 못한다.
필자의 경험: 필자가 아이들에게 '집중'하게 하고 수업 주제를 말한 후,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하라고 하니, 아이들이 무슨 말씀인지 금시 초문이라는듯 눈이 동그래진다. 놀라서 아이들을 살펴보니 아이들은 거의 로봇수준으로 내부가 연결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필자가 '집중'을 시킨 것은 필자의 얘기를 아이들이 듣지 않는 듯하여 들으라고 집중시킨 것인데, 아이들은 단지 집중만 한 것이다. 내부가 움직이지 않는 집중은 필요가 없다. 올바른 집중이란 들으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오히려 교사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한번도 자신의 내부에 연결되어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은 듯하다. 필자가 여러번 주장했듯이 초등시기는 자신의 내부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의식의 흐름이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학습에 대한 재미, 내지는 희열을 느껴서 스스로 학습을 한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내부가 끊긴 상태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두번째 경험: 초등 6년 음악시간, '영화음악 OST'에 대한 공부이다. 필자는 영화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하며, 영화에 삽입된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듣고 그 느낌을 발표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듣고 느낌을 발표하라고 하니 아이들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고 한다. 필자는 음악을 듣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더 강한 자극에 노출되어 약한 자극에는 반응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한 아이가 캐리비안 해적을 듣고 '긴장'이라고 발표하였다. 또 눈사람(Snow man)의 OST를 듣고는 "음악이 영화에 잘 어울려요" 한다.
느낌은 영혼-감각혼-이 반응하고 오성혼이 사고하여 깨어있는 의식에 떠오르는 것을 자신이 잡은 것이다. 영혼이 반응하고 의식에 떠 오르는 순간은 매우 짧은 순간 찰나이고 또 집중하여야 잡을 수 있다. 따라서 '긴장'이라고 발표한 아이는 영혼이 작동하였고, 그 느낌을 감지하였다. 이것이 의식의 흐름이고 학습을 할 수 있는 근간이다. '음악이 영화에 잘 어울려요'한 아이는 내부를 감지하는 정도가 '긴장'보다는 약하지만 영혼의 느낌은 감지한 것이다. 두 아이 모두 의식의 흐름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계속 집중하여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면 학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등 시기 영혼은 감정을 통하여 성장, 발달한다. 감정은 느낌이다. 먼저 감각혼이 느끼고, 오성혼이 생각을 하고, 깨어있는 의식에 떠올라야 우리가 감지할 수 있다. 아무 느낌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작동하지 않았거나, 내부에 집중하지 않아서 깨어있는 의식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혼이 작동하지 않는 것과 깨어있는 의식이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같으므로 두 개의 구별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영혼이 작동하지 않으면 학습은 불가능하다. 감각혼이 움직여야 오성혼이 생각을 하고, 의식혼이 정신-개념을 받아들이거나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학습이다. 어쨌든 학습이란 영혼의 작동이다. 내부에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내부의 움직임을 감지할려면 아이들은 굉장히 자신에 집중해야 한다. 수업 중 아이들이 떠들면 거의 불가능하다. 공교육의 어려움이다. 만약 수업 중에 떠드는 아이들에게 아이가 노출되면 이러한 집중력이 망가진다. 아이가 학교에 가서 오히려 망가지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항상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느낌을 느꼈니"하고 물으니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피아노도 많이 쳤고, 집중을 하는 데에, 그동안 그 반이 떠들어서 아이가 집중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긴장'을 발표한 아이는 평소 수업에 자신의 집중력이 발휘되는 아이로 집중이 무언지 아는 경우이므로 스스로 잘 할 것이다. 또 '음악이 영화에 잘 어울려요'한 아이는 표정이 굉장히 밝고 환한 걸로 봐서 거의 처음으로 내부의 느낌을 감지한 듯 하다. 희열을 느낀 표정이다. 이러한 경험을 초등시기에 해야 시고력 발달단계에서 학습이 자기 주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재미있게 학습을 한다.
아이들은 느끼지 못하였으나, 필자는 칠판에 써주고 느낌을 이해하도록 안내하였다. 결국은 지식교육이 된 것이다.
캐리비안 해적의 OST: 박진감, 긴장, 스릴, 모험 등의 분위기
마당을 나온 암닭 OST: 자유 , 모험, 희망, 꿈
시네마 천국의 토토와 알프레도 OST: 동심의 세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 간절한 그리움, '꼭 돌아오기를 바래', '언제나 기다릴게'
눈사람(Snow man)의 OST: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도, 레, 미, 파, 솔, 라, 시 7개의 음을 가지고 이렇듯이 기쁨과 슬픔, 그리움, 모험 등을 표현한다.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지 않니?"라고 하면서 다음 시간에 우리도 계이름을 가지고 느낌, 작곡을 하고자 하니 생각해서 오라고 차시예고를 하였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바깥만 보게 한 후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든다. 생각이 안나니 '나는 바보인가봐'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움직이지마', '조용히 해'등 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집중을 못하게 막는 행동이다. 자신의 생각은 영혼이 작동해야 나온다. 영혼이 느낌을 느끼고 오성혼이 생각을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교사는 수업 중에 아이들이 내부의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그 방법이 흥미를 주는 것이고, 자신이 알고 싶은 것에 아이들은 흥미를 느끼지만, 공교육에서 다인수의 아이들이 모두 흥미를 느끼도록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이를 슈타이너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각각의 어린이와는 상대적으로 쉽게 할수 있습니다. 그저 그 어린이를 좋아하면 됩니다. 어린이와 행하는 것을 사랑을 다해서 함께 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슴과 머리뿐만 아니라 인간 전체를 사로잡게 됩니다. 반 전체일 경우에는 단지 머리와 가슴으로뿐만 아니라 교사가 스스로 주제에 감동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루돌프 슈타이너 지음, 최혜경 역, 2009, 39).
교사가 그렇게 할 경우 사회적으로도 교사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한다. 교사가 주제에 감동하면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예습이 있다. 예습을 하면 궁금한 것이 생기고, 학교에 가서 해결을 하면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학원에 가서도 공부를 하므로 궁금증도 없다. 점점 지식교육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인수의 아이들 중 학급 당 5명 정도는 부적응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떠드니 교사는 내부에 집중시키지 못하고, 외부에 의식이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영혼이 성장하는 초등시기는 내부에 느낌을 감지할 정도의 집중력을 필요로한다. 그런데 외부에 집중하도록 교육이 이루어지니 아이들의 영혼이 성장,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