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에서 온 사랑 노래 / 고성만
나는 십대 후반에 시인의 시를 노래로 먼저 배웠다. 영사운드의 <등불>이라는 노래로 “그대 슬픈 밤에는 등불을 켜요/ 고요히 타오르는 장미의 눈물/ 하얀 외로움에 그대 불을 밝히고/ 회상의 먼 바다에 그대 배를 띄워요/ 창가에 홀로앉아 등불을 켜면/ 살며시 피어나는 무지개 추억.” 이 노랫말을 강인한 시인이 지었는데 시인의 초기 시의 정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시인은 그런 원초적 사랑의 형태에 근접한 세계로 회귀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시안』에 발표하는 「입맞춤, 혹은 상처」외 4편이 그것이다.
명왕성의 영어이름은 ‘플루토(Pluto)’이다. 플루토는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형으로 포세이돈, 제우스와 함께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한 후 저승을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그런데 이 명왕성이 태양의 9번째 행성의 자리에서 퇴출되었다. 그 이유는 너무 작을 뿐 아니라, 그 구역을 지배하는 행성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외웠던 '수금지화목토천해명'에서 ‘명’이 빠지게 되어 그야말로 잃어버린 별이 되고 말았다. 별은 그대로 있는데 우리의 인식이 바뀐 것이다.
세월의 흐름은 슬프다. 강인한 시인은 세월의 흐름을 거부한다. “나는 확신한다/ 이 느닷없는 입맞춤이/ 나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너를 가만히 끌어올리고/ 한 개의 작은 달걀을 두 손으로 감싸듯이/ 플루토에서 온 이 얼굴을 바라본다”(「입맞춤, 혹은 상처」) 왜 이렇게 기이한 장면이 연출된 것일까? 가슴 한 구석이 싸하니 아프다. '더운 내 입술은/ 너의 눈 위에 포개졌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음 날/ 새가 날아갔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입맞춤, 혹은 상처」) 그랬다. 화자는 사랑을 원하였지만 손에 넣지 못했다.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입술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더운 내 입술은/ 너의 눈 위에 포개'지는 것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한다. 몸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비극적 사랑이다. 나는 여기서 시인의 마음을 읽는다. 붙잡으면 떠나갈 것 같기에 차라리 먼저 보내버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저 유명한 그림 <입맞춤>을 생각한다. 목덜미 검은 남자가 살짝 눈 감은 여자의 하얀 얼굴을 들고 키스를 하기 직전이다. 장식이 요란한 황금색을 배경으로 몽롱한 꿈을 꾸는 여인을 향한 갈망, 정열적인 감정이 맴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합의된 사랑이며, 오히려 여자가 원하는 사랑이고, 만족하는 사랑이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그림에서 아픔을 읽는 걸까? 여인의 옷자락에 새겨진 빨갛고 파랗고 하얀 장식 때문일까? 정작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시인의 시 행간에서 좀 더 은밀한 사랑을 찾으려는 나의 욕망 때문이다.
담 너머 눈부신 향기가 날아오고
영롱한 구슬소리가
종일토록 늙은 벚나무 꽃잎을 털어
목욕을 마친 그대 속살의 분홍
그대 속살의 향긋한 흰빛을
다 비춰줄 때까지
기다린다
후생의 내가 살아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설고
-「내 손에 남은 봄」부분
봄 나무에 꽃이 피는 광경을 묘사한 시이다. '목욕을 마친 그대'는 사라지고 흔적만 남는다. 그래서 '바라보는 스스로의 옷이 문득 낯'선 것이다. 여전히 전생의 사랑이다. 시인은 저 스무 살의 기억을 더듬어 사랑의 원천을 찾아가고자 하는 목마름을 표현한다. 그 사랑은 죽음을 관통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몹시 아프다. 아픔은 아름답다. 우리말 '예쁘다'의 어원이 '어엿브다'이고 이 말은 옛날에 ‘불쌍하다’의 뜻이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시인은 가만히 중얼거린다. “내 손에 남은 봄이 이제 많지 않다”라고.
《시안》2007 여름호, 프리즘 ― 강인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