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도 필요해 가는 가게
다이소
無수저로 45세 창업,
1000원짜리 팔아
3조 매출... "아직도 고객이
두렵다"
1988년, 마흔다섯 살의
박정부는 실직자가 됐다.
아내와 초등생 두 딸을 둔
가장.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후 최연소 생산 관리자로
16년간 몸 바쳐 일했지만,
말로만 듣던 '파업'이 그가
관리하던 현장에서도 터졌다.
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모든
책임의 화살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일곱 살에
북한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그가 지냈던 단 하나의 결심이
위태로워졌다. '가족보다 먼저
죽지 말자. 최소한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진
곁에 있자."
전국 1500여 개 매장에 매일
100만 명이 찾아 '국민
가게'라고 불리는 '다이소'는
34년 전 박정부(78) 회장의
이런 절박함에서 시작됐다.
남들이 퇴직을 고민하는 나이,
새로 시작할 열정이 남아
있을까 자신을 의심했지만,
20대와는 다른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간절함이었다.
사무실도 없이, 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서 밥상을 펴놓고
그는 창업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일본
연수를 기획하는 사업이 첫
시작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
사회를 알아갔다. 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 그러나 비싼
인건비 때문에 제조 공장이
없어, 대부분의 생활 소품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가격이
합리적이면서도 질 좋은 국내
상품을 일본에 팔면 어떨까
싶었다. 3단 이민 가방 2개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6시간씩 기차를 타며 일본
열도를 돌아다녔다. 어느 비
오는 날, 일본 벽지에 있는
거래처와 미팅이 있었다.
10분 늦었더니 상대는 이미
다른 도매상과 상담 중. 비
피할 곳이 없어, 맞은편 처마
밑에 짐 가방을 들고 두
시간을 서 있었다. 그제야
거래처 사장은 그를 만나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수 쳤다. '내
물건은 내가 팔아야겠다.' 그
결심의 열매가 1997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문을 연
다이소 1호 점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채 안 된 지난해,
다이소는 3조 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지난달 16일 출간된 <천 원을
경영하라>는 박 회장의 이런
인생 이야기와 경영 비결을
담은 책이다. 창업 이후 줄곧
시달렸던 질문 "일본 기업
아닌가요?"에 대해서도
답한다. 책은 12월 1주 차
예스 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지난 2일 서울
강남 다이소 본사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
◆아성다이소는 토종 한국
기업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원래 서점가에선 지금
시즌엔 김난도 교수 책
이긴다고 하던데,
감사하다. 사실 책을 쓴 건
2016년이다. 서랍 속에 넣고
간직만 하다, 지난해
11월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주말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읽었다. '아 그때
내가 이렇게 했었지. '나
스스로도 가슴 먹먹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일부 임원들은 책 내는 데
반대했다더라.
"내 노하우가 여기 다 들어
있으니 걱정된 모양이다. 경영
도서 많이 본다고 경영 달인이
되는 게 아니라고, 괜찮다고
했다. 만약 이거 읽고서
우리처럼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원래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올해 초 공동 대표에서
사임했다.
"회사가 성장하니 내가
실무를 다 챙길 수는 없더라.
나는 큰 틀에서 회사의
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하고,
실무는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도록 대표 이사직을
사임했다. 창업자는 정년이
없다. 대표이사에서 물러나도
일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진
않다(웃음)."
박 회장은 여전히 매일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출근한다.
업무 시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늦어도 자정이 되기 전엔
잠든다. 일주일에 3번은
유산소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한다.
그의 집무실엔 그 어디에도
잠자는 공간이 없다. 한 달에
최소 1~2번은 제주에서 강원
고성까지 전국 다이소 매장을
다니며 직원들을 만난다.
―매장에 자주 가시는 이유가
있나.
"스트레스가 풀리고 충전이
된다. 나는 매장 직원들이 참
고맙다. 전국에 1500여 개
다이소 매장이 있는데 창업자인 내가 가
있을 순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인같이, 자기
일같이 래주시 너무 고마운
것이다. 매장을 방문하면 인사를
한다. 물론 격려금도
있다(웃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업을
시작하셨더라.
"내가 관리하는 현장에서
파업이 터지면서, 일하기가
힘들어졌다. 한마디로
회장에게 찍힌 거였다. 졸업
후 첫 직장으로 나를 성과도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참 견디기
어려웠다.
3년을 고통 속에 있다가
회사를 정리했다. 내 열정이
다 소진된 줄 알았는데,
절박한 상황에 놓이니 다시
살아나더라."
박 회장은 1988년 일본
100엔 숍 등에 저가
생활용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한일맨파워(현
(주)아성 HMP)를 설립한다.
2002년 무역의 날에 1억 불
수출탑을 수상했고, 일본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할
때(2003년)는 그 금액이
2142억 원에 달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당시 대일
무역역조가 극심했는데, 이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라고 했다. 1992년엔
국내에 균일가숍을 개점하기
위해 아성산업(현
(주)아성다이소)을 설립했다.
첫 매장을 열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다.
―어머니가 '아성'이라
지어주셨다고 하더라.
"아시아에서 성공하라'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 어머님은
정신력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삯바느질로
4형제 공부를 다
시키셨으니까. 어머님이
96세에 돌아가셨는데, 지금도
어려울 때면 어머니 생각을
한다. 이 상황에 우리
어머니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하고."
―매장 이름은 왜 '다이소'가
됐나.
"97년 처음 1호점을 낼 땐
'아스코이븐플라자'였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이름이었지만, 발음이 어렵고
생똥 맞다는 의견이 많았다.
2001년 내가 물건을
납품하던 일본
회사(주)대창산업)에서 지분
투자를 받으면서, '다이소'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
대창산업을 일본어로 하면
'다이소산교'고 그들이
일본에서 운영하던 100엔 숍
이름이 '다이소'였다. '필요한
것은 다 있소'란 우리의 핵심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재밌는
이름이면서도, 유치원생도
기억할 만큼 쉬워서 우리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 이직도 일본 기업
아니 나는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아성다이소는 내가
만든 한국 기업이다.
다이소산교는 우리 경영에
참여한 적도 없고, 우리가
로열티를 낸 일도 없다. 여러
번 이름을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다이소'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많아
고민이 크다."
―다이소산교는 왜 지분
투자를 했나.
"하루는 다이소산교 회장이
자신들에게만 독점으로
납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기회이기도 했지만,
위험도 컸다. 그쪽이 거래
관계를 끊으면 끝이니까. 위기
관리 차원에서 '그럼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해달라'라고
했다. 그때 받은 돈이
4억 엔(약
38억 5000만 원)이다. 외국
기업의 주식 투자만우로 그
나라 기업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외국 기업 아닌
곳이 없을 것이다."
―독도사랑 운동본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2013년쯤 이른바 '다케시마
후원기업'에 아성다이소가
포함됐다는 루머가 나와
홍역을 치렀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일이 있고서 독도
후원을 시작했다. 2020년
12월엔 이 노력을 인정받아
'독도 사회공헌특별상'도
받았다. 이 사실 때문에
일본에선 역으로
다이소산교가 독도 지원을
한다는 오해를 사 일본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했다. '우리 오해는
우리가 풀 테니, 너희는
너희가 풀라'고했다. 우리가
정말 일본 기업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나."
◆가격은 싸도, 싸구려를 팔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싼 게
비지떡'이란 인식이 강하다.
"어찌 보면 지난 30년은 이런
통념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는
가격이 싼 상품을 팔지만
사구려를 팔지는 않는다.
소비자는 품질이 나쁘면
1000원도 비싸다고 느낀다.
,·´″"`°³о조용하고 아늑한 =포시즌о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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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글🧬
부자도 필요해 가는 가게 다이소
眞 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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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8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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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이소는 다있소의 준말 이라면서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