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말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웨스턴조선호텔 2층에서 열린 한 조찬모임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창밖의 풍경 때문에 나의 강의는 옆길로 가고 말았다. 동북공정 이야기만큼이나 창밖에 보인 3층 팔각건물과 웨스턴조선호텔 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호텔 홍보사진에도 등장하는 이 건물은 대한제국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환구단에 속한 천신 등의 위패를 모셔둔 황궁우였다. 우리나라 대표 호텔 가운데 하나인 웨스턴조선호텔의 터는 놀랍게도 189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건설한 환구단이 있던 곳이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 제단과 황궁우, 전사청(제기 보관 건물), 어재실(제사를 위해 임금이 머무는 곳), 향대청(제사에 사용할 제물 보관 및 제관이 대기하는 곳), 석고전, 광선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 황궁우 남서쪽에 있는 3개의 돌북은 본래 황궁우 동쪽에 별도의 건물인 석고전 안에 있었고, 석고전으로 들어가는 광선문은 롯데백화점 자리쯤에 있었다.
그런데 1910년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은 강점 5년을 기념하기 위해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서 박람회를 열며, 경복궁을 마구 훼손했다. 일본은 박람회를 준비하며 내빈 숙소 공간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환구단의 원형제단 즉 천단을 허물고 1914년 철도호텔을 지었던 것이다. 철도호텔은 약 6,750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3층, 69객실을 갖춘 건물로, 독일인이 설계한 당시로서는 신식 호텔이었다. 그런데 1914년 사진을 보면, 시청 앞 광장 쪽에서 환구단이 보이지 않도록 건물이 들어서면서 향대청은 사라졌지만, 어재실과 황궁우, 삼문은 남아있었다. 반면 석고전 건물도 사라졌고, 광선문은 일본 동본원사로 옮겨졌으며, 어재실은 아리랑하우스로 개명되어 음식점 및 연회장소로 사용되었고, 정문은 호텔 정문이 되었다.
일본은 경복궁을 파괴할 때에도 근정전은 놔두고, 그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던 것처럼, 환구단의 경우도 황궁우는 남겨두고 가장 핵심인 제단자리를 없애고 그곳에 호텔을 지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조선의 것은 과거의 것, 비문명의 것이고, 일본은 오늘의 것, 문명의 것임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일본이 가져온 문명의 위대함을 한국인에게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인들에게 신성하고 존엄한 성소들을 초라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물을 세움으로써 한국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것이다. 너희들은 국가를 가질 자격도, 하늘에 제사를 지낼 자격조차 없다고 가르친 것이나 다름없다.
환구단은 우리나라가 자주 국가이며, 이 땅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지금은 고쳐졌지만, 10년 전에 내가 본 환구단 안내 글에는 조선이 건국 초기에 중국을 받들어 명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으므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이 없었으며, 오직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만 있었다는 글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성종 2년(983)에 환구단에서 제천의례가 있었다는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 초기까지 존재했었다. 1457년 세조는 환구단에서 제사를 드렸고, 1464년까지 제사를 지냈다. 또 1616년 광해군도 세조의 예에 따라 환구단 제사를 지내려고 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지내지 못한 사례가 있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물론 무천, 영고, 동맹의 제천의례에서 보듯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제후국은 분봉된 땅의 신에게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유교의 예법에 의해 조선은 환구단에서 제사지내지 못하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비로소 자주국이 되어 환구단에서 제천행사를 지낸 것이다. 따라서 환구단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는 일제의 잔재를 씻어버리기 위해 노력했고, 1993년 일제의 잔재 건물인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결정해, 1996년 완전히 철거하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궁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환구단을 그렇지 못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사령부가 철도호텔에 머물렀고, 이승만과 서재필의 집무실도 이 호텔에 있었다. 그러니 환구단을 복원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다가 1967년 6월 한국관광공사와 미국항공사가 조선호텔 건설계약을 체결한 후 신축하여 다음해 현재의 20층 건물로 재개관했다. 개관 시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도 호텔을 찾았다. 하지만 호텔 자리가 어떤 곳인지 대통령도 알지 못했다. 대신 1967년 7월에 황궁우를 중심으로 1505평을 사적으로 지정하는 것에 그쳤다. 게다가 1974년에는 사적지 일부를 롯데그룹에 매각해, 현재는 1070평으로 축소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조선호텔 신축 시에 그때까지 남아있던 환구단 정문과 재실, 전사청 등의 부속건물을 해체하거나, 매각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호텔을 없애고 다시 환구단 제단을 복원한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이다. 만약 1967년에 대통령 옆에서 환구단 복원이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면, 어떠했을까? 역사를 왜곡하거나 파괴하기는 쉽지만, 바로잡기란 무척 어렵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그제(2015.12.17) 문화재청에서 환구단 정문과 환구단 사이에 있는 764.7㎡(약 230평)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환구단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겠다는 발표 때문이다.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I71&newsid=01659686609599504&DCD) 문화재청은 환구단의 역사 문화 환경을 보호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릴 방안으로 마련해 시행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황궁우가 곧 환구단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것 같다. 제단자리에 웨스턴조선호텔이 있는 한 환구단의 진정한 복원은 불가능하다. 호텔과 건물 사이에 가져려 시청 옆을 지나는 일반인들조차 호텔 부속 건물처럼 생각하는 황궁우만으로는 환구단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웨스턴조선호텔 입구 오른쪽에는 “남별궁터 - 조선 후기에 중국 사신이 머물던 곳” 이라는 표석이 있다. 호텔을 찾아오는 중국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조선시대 중국 사신은 조선의 임금을 때로 능멸하던 존재들이었다. 조선의 임금이나 대신들은 중국 사신을 만나러 남별궁으로 찾아가 쩔쩔매기도 했다. 그래서 고종이 환구단을 세울 때 굳이 남별궁터에 지은 것은, 조선의 국가의 위엄과 자존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남별궁터로 소개하는 것은 대한제국시절 환구단을 세운 의미를 우리 스스로가 부정하거나 축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환구단을 원상 복구해서 천제를 지낸다고 해서, 그 행위가 조선시대처럼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대주의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일 가운데 하나가 환구단 복원임에는 분명하다.
사진 1 환구단 실측지도
2.1914년 철도호텔과 황궁우,
3. 1967년 조선호텔 신축장면,
4. 조선호텔과 황궁우.
5. 조선호텔앞 남별궁터 표석.
첫댓글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대한제국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 터에 일제가 1914년 철도호텔을 지은 것은 민족 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이었겠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1967년 조선호텔을 신축한 행위도 일제가 철도호텔을 지은 의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김용만님의 "사대주의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올바른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일 가운데 하나가 환구단 복원임에는 분명하다."는 주장에 적극 공감합니다.
자료 잘 봤습니다...감사합니다...
까페로 스크렙해갑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