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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아문예 권두칼럼>
감응의 시차(視差)와 동일화 양상(樣相)
-권정남 시인의 깊은 사변성과 수묵담채화의 해법
엄창섭(가톨릭관동대학교 명예교수, 본지고문)
1. 창조적 영혼과 시적 감응의 아득함
불확실한 삶의 중량감을 극복하기 위한 특정한 문인의 행보(行步)는 대응의 기법과도 맞물려 있기에 낮은 산자락에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핀 생명의 계절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이 같은 관점에서 며칠 전 「5월의 아동문학」특별기획으로 꾸며진 『月刊文學』VOL. 615를 받아들고 책장을 넘기는 순간 표4의 공익광고지만 「문화체육관과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책과 함께 슬기로운 거리두기”(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잠시 멈췄습니다. ‘책과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으로 코로나19 극복에 동참해 주세요.)라는, 비논리적이나 일상화로 수락해야 할 계도성 문구에 시선이 멈췄고 가슴이 저려왔다. 오랜 날 평자의 일관된 항변이지만 소외된 인간관계성의 회복을 위하여 ‘듣고 말하되 집착하지 말 것’을 반복하여 언급하면서 서로 간 경계의 벽을 헐어가기 위해 타자의 피멍든 손을 잡아주거나 지친 어깨를 토닥여주는 틈새 좁히기의 일상화를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 왔으나, 우리가 직면한 참담한 현상에서 언어적 모순어법은 이율적인 배반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무기력하게 질병인 코로나 19의 총체적 공포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생활 속 거리두기’로 변형된 이율배반적 개념과 부디기며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의 일상에 처해 있다. 오늘 날 지구촌을 파멸의 위기로 휘몰아가는 코로나 19의 가공할 그 위협은, 그간에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던 인간의 아집(我執)이 자연과의 상생과 합치를 거역하고 공동체의 그 청정함 또한 훼손한 결과임을 깊이 자인(自認)하고 묵언의 응시로 뼈아픈 자기성찰과 깊은 통회(痛悔)의 시간을 비장감을 지니고 지켜낼 일이다. 특히 필자가 살아온 낮은 산자락에 지난 3월 16일 영혼의 상징인 흰 눈이 쌓였고, 전 세계가 코로나 19의 공포로 극한의 고통과 직면한 오전 9시, 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을 역임한 문덕수 시인의 영결식은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고인과는 남다른 인연이 닿아 『시문학』추천 당시도 그러했지만 박사학위 논문심사 때는 미세한 문제점도 예외 없이 짚어주었다. 뒷날 지역에 머물고 있는 필자에게 ‘이제는 대관령을 넘어오라.’고 장문의 서신을 보내준 정신적 멘토로, 고인에 관한 애틋한 감회는 지난 3월초 한국문협 22-23대 이사장을 역임한 신세훈 시인이 필자에게 우송하여준 제4 민조시집『大高句麗主義를 위하여』에 수록된「我山 申世薰의 흙과 피/문덕수」,「申世薰 詩人의 ‘생명기호의 통신과 아라리’/엄창섭」이 고인과 함께 한 마지막 평설인 탓이다.
그 점에 있어 필자와 사제 간의 소중한 연을 맺고 누구보다 시의 씨앗을 조심스럽게 파종하여 연둣빛 새순을 밀어 올리는 권정남 시인의 경우, 힘겨운 ‘언어적 전회와 시적 교감의 아득함’에 잠식되어 삶의 경이를 성숙시켜나가는 역동성의 파동(波動) 또한 영혼의 울림으로 한층 인상적이다. 까닭에 “땅 끝 마을/아지랑이가 몸 푸는 문장마다/연둣빛 새소리/찻물 끓는 소리 가득하다.(땅 끝에서 온 소식)”라는 남녘의 ‘연둣빛 메시지’에 기인한 해남의 풍경은 맑은 봄빛 그대로라 ‘달빛 창연한 여름밤 비몽사몽 잠에 취해 있다’는 <홀리다>와 정감이 상통되어 “환한 봄날, 꽃방석 위에 똬리 튼/“화사花蛇!”/붉은 혓바닥을 내민 채 꼿꼿이 고개 들고 있다(환한 봄날)”는 못내 미망의 어지럼증에 취(醉)한다. 또 한편 ‘훅! 입김을 불면 다시 불꽃이 타오를 참나무 숯불 같은 여행 중의 그 감흥은, 종종 인간의 삶은 귀항을 서두르는 뱃길로도 견주어지기’에 마침내 침묵을 깨고 ‘언어의 소통과 우주의 신비 캐내기’에 일관성을 지녀온 그 자신의 시집은 삶의 처소에서 접하는 즉물적 현상의 드러남에 생명외경의 엄숙성을 수용한 결과다. 모처럼 다양한 음조와 색채로 시의 지평을 가시적으로 펼쳐 보인 정신작업인 연유로, 생각의 속도를 늦추면 눈앞의 정경이 달라보이듯 그에 관한 특이성은 차별화된다. 까닭에 헤르만 헤세의 <흰 구름>에서 확인되는 일깨움처럼 그의 시편은 충만한 생명감으로 지극히 충동적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진동하는 파 냄새 그 집착이 이리도 섬뜩할 줄’을 잊고 지나칠지라도 가정에 충직하고 자상한 주부이며 또한 어버이의 딸로서 “눈자위가 붉어지도록/나는 그리워하고 있다/결별하지 못한 내 안의 뿌리를(파를 다듬다가)”에서 입증되어지듯 일상의 일탈은 시외버스터미널 앞 횡단보도에서 접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키스’의 주인공들이다/부끄러움을 잊은 정오의 햇살이/하얀 목을 뒤로 젖히며 감미로운 듯/눈을 감고 있다(정오의 입맞춤)”의 보기처럼 <꽃들의 일탈>을 걸쳐 “속초행 버스옆자리/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의 도반을 만났다//미시령 길 정체로 굽이 돌아온 한계령 석벽 앞에서/줄 곧 책을 읽던 그녀가 가슴이 확 트인다며 말을 건넨다(도반을 만나다)”로 의미망의 외연(外延)은 확장된다.
이처럼 차별화된 감성의 시학을 끊임없이 확장하면서 절제된 생명의 기표를 스스럼없이 교신하여 시의식이 보다 극명한 권정남 시인의 시집 『연초록, 물음표』는 아직도 영혼의 파동(波動)으로 선명한 시적 감응은 못내 ‘생명의 교감’을 큰 틀로 지켜내고 있다. 비록 현재성에 비춰 불안한 일상에서도, 시집 『사이프러스나무 아래 서다』를 주의 깊게 읽다보면 “거울 속의 꽃은 피고 짐이 없네. 산언덕에 올랐으면 뗏목이 필요 없거늘 그대는 어찌 사공에게 길을 묻는가?”라는 선적(禪的)인 물음 앞에서 ‘늘 운명처럼 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그 자신이 지구촌을 여행하며 체득한 정감을 형사(形似)한 기행시초의 신선한 충동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맛깔스런 시미(詩味)는 탐닉될 것이다. 차지에 최소한 존재감과 따뜻한 감성을 지닌 정신작업의 종사자라면 ‘풀꽃 같은 식물성언어’를 사용하여 생명의 기표로 수긍할 당위성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 ‘시적 감응과 간극 좁히기’의 외연확장은 물론 ‘자유로운 바람의 영혼과 시적 합리성’에 관한 해법을 지적하였다. 모처럼 상재한 시집은 ‘설렘 뒤의 낯선 환경, 풍물, 관습 등에서 비롯되는 불안·초조·긴장’마저 말끔 정제시켜 진솔한 삶의 편린을 차감(差減)없이 표출하였기에 서정성이 다채로울뿐더러, 풀꽃 향을 토해내며 잔잔한 정감을 일깨워주는 모성의 친근함이 묻어나 시적 치유의 가능성은 응축되어 빛난다.
2. 투명한 이미지의 형사(形似)와 모순어법
일상적인 개아(個我)에 의해 서정성이 확립된 시편은 생명에의 변주를 통하여 신선한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시적 상상력은 유의미한 정신적 작업으로 해명된다. 특히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행위’로 특정한 시편의 분할과 통합에 접근하여 잠시 영혼의 잠식에 머물러 보는 ‘미끄러짐의 시학’은 어두운 그늘과 칙칙함이 깨끗하게 걸러지고 진묘(珍妙)로 밝혀졌기에 자연의 이법에도 거부감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시적 양상은 미적분 포물선이 교차하는 공집합에서 불안감을 해소하였기에 허망한 삶에서도 당당한 존재감을 수긍한 끝에 진정한 수행자로서 불심이 각별한 권정남 시인의 시적 특이성은 깊은 사변성(思辨性)에 합일된 편이다. ‘천오백 년 능산리 절터를 지키던 금동대향로 백제를 밝히던 장엄한 불꽃’의 표징인 <백제 금동대향로>의 보기나 ‘풀밭에는 별들의 발자국이 수북하다’는 <정림사*지 절터에서>는 무론하고, ‘궁남지* 연못가’의 <연꽃 피고지고>, <토함산에서 원효를 만나다>와 “금이 간 빗살무늬 토기에/종일 제 몸을 때리고 있다.(오산리 선사 유적지*에서-빗살무늬 토기) 등에서 지극히 불교적인 시적 경향은 여실히 확증된다. 이처럼 그만의 시적 동일화는 ‘초연히 떠나거나 밀어내는’ 일체 ‘느림의 시학’으로 ‘바람 앞에서 작은 불을 켜는’ 엄격한 수행인 까닭에, 자유로운 바람의 상징성은 고정되지 않은 무상의 존재로 법구경(法句經)으로 ‘지혜의 말씀’인 「숫타니파타」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을 묵언으로 관망할 정황에 비춰 양양 낙산사를 동일화 양상으로 읊어낸 <누명>에서 그 당위성은 합리적으로 천착(穿鑿)된다.
또 ‘한편의 시는 체험임’을 역설한 마리아 릴케의 시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상에서 직립 보행하는 깊은 사유의 존재인 인간은 영혼의 진동인 시적 상상력을 발동시켜왔다. 여기서 이데아의 본질을 내포한 시어의 한계성을 감지할 때, 지극선(至極善)의 심성을 소유한 그 자신의 정신작업에서 다소 ‘느림의 삶’은 담백한 기포(氣泡)의 언어로 내적 충만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일상의 다정다감함이다. 이처럼 그의 시편에서 ‘오로라로 쏟아지는 영랑 호숫가’의 <달빛에 묶이다> 또한 예외일 수 없으나 ‘보름달 창창하지만 이팝꽃 가득 눈물 담겨있는’ <달빛으로 오시는 이>도 그렇지만 “낙산사 의상기념관 유리곽 속에서도/환하게/사람들 마음을 밝혀 주는//숯이 된 성체聖體 하나(동종銅鐘, 열반에 들다)”의 보기나 ‘물살처럼 밀려드는 외지인들은 전단지 속 청호동만 보고 간다.’는 <청호동이 수상하다>, <건봉사, 명부전>처럼 최소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시간대와 장소성에 관한 지대한 개연성은 더없이 아득하다.
어디까지나 ‘지적 서정성의 의식세계, 시세계 속에 파고드는 현대의 불안의식, 발화하는 감각적 표출’의 다양성은 화자의 시편에 있어 혼돈의 시간대를 걸쳐 내면인식의 깊이와 중량감을 더한 뒤에 목가적 서정성을 눈부시게 응축한다. 그 자신은 따뜻한 감성적 시인인 까닭에 ‘한 떨기 시의 꽃과 한 구루의 사이프러스나무로 현현하는 추이(推移)’는, 그 자신의 대표시격인 <사이프러스나무 아래서다>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해명된다. 푸른 식물성 질료가 적절히 융합처리 된 ‘밧줄에 묶여 있던, 이승의 말言들이 피빛, 장미 넝쿨 되어 눈이 아프도록 매달려 있는 6월, 담장’의 <줄장미>도 그렇지만, 동일화 양상인 <향나무가 서있다>에서 ‘초록 불꽃 속으로 타들어가는 농익은 그리움 이중섭의 눈물’로 이미지가 시적 기교(craft)로 선명하게 처리된 맥락에서 신령한 숲의 정령이 거처하는 “물찻오름 길에서/힐끗, 내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다시 돌아갈 수 없는/먼 소실점, 까마득하다.(사려니 숲길*에서)”도 응당 예외일 수 없다. 한편 ‘대지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나무’의 이행을 걸친 ‘나무의 미학’은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대입시킬뿐더러, 성서를 포함해 고대신화나 전설에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신성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나무의 이원적인 상징구조는 삶을 염원하는 사람살이의 효과적 투영에 견주어진다.
모처럼 고뇌 끝에 간행한 시집의 대표시격인 위<사이프러스나무 아래서다>에서 ‘사이프러스나무(Cypress Tree)’는 침엽수로 측백나무고 목류이나 여기서는 시적 상상력이 한층 확장되어 빈센트 반 고흐의 회화와도 연계성이 주어진다. 또 하나 상징적으로 ‘나무(木)’는 자기희생의 비장감이 수용되기에 ‘떨켜’의 진의(眞義)는 잎, 꽃, 과실 등이 각 기관의 기부에 발달된 이층(離層)에서 분리되는 현상임을 주지할 점이나 영성(靈性)으로도 식별할 타당성을 지닌다. 까닭에 “칸테 혼도*는 집시들의 통곡이다/피 빛 칸나 꽃무리들이 불꽃 되어/무대에서 팽이처럼 돌고 있다.(플라멩코 그리고 칸나)”의 보기나 “해바라기들이 들판에 엎질러졌다/지평선 위 해바라기들의 웃음소리에/황량한 들판이 왁자지껄하다(론다 가는 길)”와 같이 ‘금빛지평선, 아득한 론다’로 가는 여로에서 ‘일상을 내려놓고 시도한 일탈’은 사이프러스나무가 즐비한 해발 780고지 론다 산맥*을 넘는 시적 충동에 의해 <철새가 되고 싶다>는 익숙하지 않은 보헤미안 기질의 발현이기에, 그 자신의 심성과 맞닿은 시의 해법은 기호와 개념들이 ‘하늘의 별이나 해변의 모래’로 견주어지는 명확한 의미망의 확장이다.
모름지기 <수국, 피어나다>의 시적 정조(情調)는 “부르카*속에 갇힌 여자의 몸이/물푸레나무처럼 자라고/스무 살 가슴에 피어나던 장미가/제 홀로 피고 지고/봄 햇살이 그녀에게 정중히 손 내밀다가/돌아선 자리에 꽃향기 만발하다(여자가 갇혔다)”의 형상화도 그렇지만 “빛의 속도로 자라는 장대비들/그 곁에서 말갛게 나를 비우며/초록 피를 수혈 받고 있다.(대숲에서 나를 잃어버렸다)”에서 끝내 유추되는 것은, ‘잎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이법’을 거슬리지 않고, 푸른 생명의 언어로 피폐된 영혼을 정화시키는 작업에 몰두한 일상의 개아적 서정성은 다양하고 평이하되 구체적이며 리듬과 자유로운 양식을 갖춘 리얼리즘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미적 주권이 확장된 시편은 생명외경심을 충동적으로 일깨워준 높은 격조의 산물에, 해당한다.
3. 삶의 진의(眞義)와 낯섦은 애내성(欸乃聲)
특히 인간의 내면심리는 자연과 대립하는 창조력을 지닌 동시에 자연을 모방하고 또 순응하는 다양성을 지닌다. 또 한편 <아름다운 미완성>의 시편에서 ‘모로코 수도 라버트 광장 핫산 2세*의 미완성 모스크 탑이 삼백여 개 돌기둥을 거느리며 성채처럼 그 역사적 현장을 휘돌다 끝내 “동구의 봄과 겨울 사이/비명에 간 부다페스트 소녀의 눈동자가/민들레로 피어나 국경선 그 너머/연둣빛 구릉 위로 촘촘히 은하수 되어/흐르고 있었다.(봄, 국경선)”의 보기와 같이 날아오르다 보면 몽환(夢幻)처럼 아득한 캄보디아 씨엠립 타프롬 사원도 “검은 늪 같은 통곡의 방*에/목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쏟아 놓으려고/누군가/덜컹, 돌문을 연다.(통곡의 방)”라는 현상도 그렇지만, 대다수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감은 공간상징이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은 자아의 변주에서 비롯되고 마침내 시인의 내적 충만의 일체화로 결속된다.
무엇보다 언어적 속성을 통해 사물의 보편성에 열중하는 그 자신은, 비교적 개아적인 정감이 아쉬운 순수서정성에서 현실인식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시편을 즐겨 작동시키는 특이성에 비춰, 세계의 명소를 여행하며 체득한 이국적인 정취도 상이할 것이나 “커피 잔 속에 이과수 폭포가 출렁이고/우르릉 가슴을 건너뛴다./지구의 이쪽과 저쪽이/오색 무지개로 걸쳐지고(이과수 커피*를 마시다)”는 무론하고, <사막 그리고 바람>, <사막, 그리고 별>에서도 이국적인 정감은 묻어나지만, 그 자신의 시적 질료의 다양성은 “이만 년 전 빙하로 응고되었던/안데스 산맥이 바다로 녹아/용해된 진주 빛 사리들 이다.(안데스 소금을 맛보다)”에서 ‘혀끝에 녹아내리는 소금’의 실체도 사리(舍利)로 이해하는 깊은 불성의 발현은 숨죽임으로 응시할밖에 없다.
일단 정직성과 섬세함으로 감동을 안겨주는 비법은, 그 자신이 독자의 관심을 끄는 담백한 시격이며 역동성이다. 짐짓 다양성을 지닌 시편도 그렇지만, “호수 앞에서 가면을 벗고/기쁨과 고뇌로 무늬 진/내 민낯을 환히 들여다보다가/허탈하게 웃고 만다.(가면을 챙기다)”의 보기나 또는 “내 안의 아집 같은 돌덩이를 내려놓고/살랑살랑 발끝으로 물질을 한다.(물위에 누워–배영)”에서 분망한 일상에서의 일탈이랄까? 한 때나마 여유로운 삶에서 오는 평온함을 접할 것이나 즉물적 현상을 응시하는 그만의 시선은 ‘세상일 어지러워 둥근달을 들여다보듯’ “허공을 밀어 올린/연둣빛 고운 탑이다//붉은 가사장삼 속/마음 비우고 집착을 버린/긴 수행(연둣빛, 탑)”에서 확인되듯 ‘텅 빈 공空의 세계’와의 합일이다. 여기서 보다 극명한 것은 ‘연둣빛’ 시어의 특이성은, 자연을 ‘추상화된 상징성의 극대화’로 파악할 때, 새순(筍)은 연둣빛 불꽃처럼 피어오르고 색감으로 연두색을 선명하게 머금고 있어 성장을 뜻하며, ‘평화나 창조, 타인을 배려하는 관대함’의 속성을 지닌다.
또 한편 나무를 연상시키는 ‘창조와 풍요와 조화로움’을 빚는 연금술사와 같은 신비의 색조대비는, 마침내 「연초록 물음표」의 확증인 권정남 시인의 트레이드마크(trademark)로 정체성을 아우른다. 이 같은 삶의 처소에서 하찮은 풀꽃에 관한 관심의 몫은 감동을 회복시키려는 측은지심에 기인하기에 한층 더 눈물겹지만, 2002년 8월 30일 강릉지역을 휘몰아친 태풍 루사와 화자의 처연한 기억의 속내는 나직한 통곡이다. 여기서 “서른 중반의 맑은 청년 하나가/연꽃나라로 날아가지 못하고/언덕 위 오래 묵은 바람의 집에서/학춤을 추고 있다(대관령 풍력계)”를 포함한 “사천 땅 공원묘지 폭설이 쏟아지고/긴 적막이 흰색 차일을 치고 있다(진혼제)”의 보기나 “루사*가/너를 모질게 데리고 가던 그날처럼/천국까지 닿는 네 어머니 기도소리(방문訪問)”에서 아직 그 눈물방울 끝내 또렷해 울컥 억장이 내려앉는 피울음이다.
결론적으로 세월의 격랑에 부대끼며 살아온 그 자신의 경우, 어느 시인보다도 시의 본말이 ‘영성(靈性)에 의한 성(聖)스러움에 기인함’을 깊이 이해하기에 ‘신의 작은 대행자’로서 ‘감사와 축복의 삶’에 동질성을 지닌다. 모쪼록 사제 간의 소중한 인연의 끈이 얽혀 있는 권정남 시인은 당당한 자존감의 실체로서 즉물적 현상이 다소 낯섦의 애내성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도 ‘호흡명상’을 멈추지 않고 수행자의 소임을 감내(堪耐)한 연유다. 아울러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신성하다.”라는 예언자 무하마드의 가르침에 힘입어, 푸른 생명기표를 교신하는 품격과 시대적 소임을 지니되 ‘시의 길을 향한 끝남이 없는 역주(力走)’를 지켜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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